절명시 / 황현(1855-1910)
난리를 겪다 보니 백발의 나이가 되었구나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추네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임금 별자리 옮겨지니
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햇살도 더디구나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올을 모두 적시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일찍이 나라를 지탱하는데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끝맺음이 겨우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요
당시의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사은회가 광양 봉강면 석사리 부근에서 있었다. 사은회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매천 황현 선생의 생가와 묘소가 있어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출발해 생가와 역사공원을 돌아볼 수 있었다. 몇 차례 방문한 일이 있지만 ‘난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살아왔는가!’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기 위한 방문이었다. 덕담 한 마디 청하기에 “살아 있는 글 한 줄 쓰고 죽자”고 했지만 결국 자문자답이란 생각이 든다.
새해 벽두부터 「절명시」를 읽는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정국이 황현 선생의 순절한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무당정치가 결국은 패망의 원인이었으니 말이다. 무당을 궁궐로 불러들여 푸닥거리하고, 무당에게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내릴 뿐만 아니라, 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둔 저축미를 1년 만에 거덜 내고, 국사를 유린한 명성황후를 가리켜 “죽을 때 죽을 자리만 잘 만난 요망한 인간”이라고 한탄했던 것이다.
무속이라는 민간신앙의 뿌리를 단박에 도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당정치로 정권을 바꾸는 행위가 있었다 해도 국가의 이념이 될 수는 없었다. 명성황후와 같은 제1, 제2의 요망한 인간들이 척결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넘어지고 말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구안록』에서 “믿어서 더욱더 진리가 밝아지는 것을 신앙이라 하고, 더욱더 어두워지는 것을 미신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조화를 깨뜨리는 것이기에 환희가 없는 것이라 일갈하였다.
조화는 무엇인가! 하늘과 땅, 인간과 인간의 옮음의 태도이며 삶이 조화다. ‘이치를 따지지 않고 믿기 때문에 고등어 대가리마저도 숭배 받는다.’는 일본 속담처럼 이 나라에 가장 이치가 분명해야 할 곳에 미신의 그림자가 드리웠다는 것에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
시인의 「절명시」 4수에는 “촛불”(민족과 목숨)의 위태로움이 있고, “종이 올을 모두 적시”는 캄캄한 세상의 흐느낌이 있으며, “글 아는 사람 노릇” 못함의 안타까움과 “공”도 없고 “충”도 아닌 “인”에 닿았지만 부끄러움에 울며 마지막 잔을 마시고 쓰러진 땅, 구례의 한이 서려있다. 선생의 한을 한 자 한 자 짚으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남명 조식 선생이 그랬듯 과거시험 비리에 넌덜머리가 난 시인이 낙향하여 후학에 전념하였던 남도, 그 한 자리에 매화는 다시 꽃망울을 맺고 있다.
송나라 “윤곡(尹穀)”은 몽고군이 침입하여 담성이 포위되자 처자와 작별하고 자결했던 것처럼 순절하는 것이 한스러운 시인, 간신배 6적(六賊)을 참살해야 한다고 간청하다 오히려 참형당한 “진동(陳東)처럼” 행동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토로한 시인, 선생의 마지막 글을 기억하자.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너희들은 과히 슬퍼하지 마라.”는 유서를 말이다.
머지않아 꽃의 눈은 떠서 민족의 향기가 다시 살아나리라. 군자의 향기를 기억하며 이제 우리는 서로가 속이지도, 속지도 말고(약 1:16) 사는 거짓 없는 세상을 위하여 힘찬 한해를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