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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열 의사 기념관 개관연혁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오천리 98번지)
◦2002년 8월 16일~11월 14일: 박열의사 기념사업 기본 설계
(사단법인 국민 문화 연구소)
◦2003년 7월 2일~11월 4일 : 박열의사 기념관 건축 실시설계
(토담건축 설계사무소)
◦ 2003년 8월 18일 : 부지매입 완료 - 총 14필지 4,373평
◦ 2003년 8월 19일~12월17일 : 박열의사 기념관 전시실시설계
(한국전시협동조합 - 예문관)
◦ 2003년 10월 15일 : 기념공원 조성지구 개발허가(문경시)
◦ 2003년 12월 5일 : 가네코후미코 묘소 이전 조성
(문경읍 팔영리 산58-1)에서 묘소 이장
◦ 2003년 12월 15일 : 박열의사 기념관 건축허가(문경시)
∙부지허가 면적 - 14,455㎡(4,373평)
∙건축 연면적 - 1,602.94㎡(484.89평)
◦ 2004년 8월 26일 : 박열의사 기념공원 조성공사 입찰
∙건축, 토목, 조경, 설비 - 동일건설(주)
∙전기공사 - 문경경전사
∙통신공사 - 대흥종건(주)
∙소방공사 - (자)서울전기
∙건축, 전기감리- 토담건축, (주)동영엔지니어링
◦ 2004년 9월 3일 : 박열의사 기념공원 조성공사 계약
◦ 2004년10월 16일 : 박열의사 기념공원 조성공사 기공식거행
∙공사기간 : 2004. 9. 9 ~ 2008. 9. 8(48개월)
◦ 2009년 12월 10일 : 기념관 전시시설 공사 입찰 계약
∙공사기간 : 2009.12 ~ 2012.2공사감리 : 주) 예문관
◦ 2010년 4월 11일 : 기념관 전시자료수집 및 업무협의차
박휘규 국장 외 일본 현지방문.
◦ 2012년 10월 9일 기념관 준공 및 개관식
∙국가보훈처1,797,000,000원
∙특별교부세 300,000,000원
∙경상북도1,150,000,000원
∙문경시2,400,000,000원
∙박열의사기념사업회 49,790,000원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70,000,000원
∙일본 관련기관 및 성금 7,265,505원
박열 의사 생애와 발자취(年譜)
□ 출생과 성장
• 1902년 3월12일(음2월3일) 문경군 호서남면 모전리 (현 문경시 모전동 311번지)출생
父 박지수(朴之洙)와 母 정선동(鄭仙洞)의 1女3男 중 막내로 출생.
※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98번지(샘골)로 이주하여 성장
• 1906년(5세) 부친사망 큰형 정식 호주상속
• 1908년(7세)~1910년(9세)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치감강목, 통감6권 수학
• 1909년(8세)유명(幼名) 혁식(赫植), 민적법시행 준식(準植)으로 개명(改名), 一名 열(烈)
• 1911년(10세)~1915년(14세) 함창공립보통학교(4년제)
• 1916년(15세) 3월24일 함창공립보통학교 3회 졸업
4월 8일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관비생(경북도지사추천) 입학
• 1919년(18세) 경성고보 3년 재학 중 3.1독립만세운동 참여. 동맹휴학 중 중퇴
• 1919년 10월 동경으로 건너감
• 1920년~1921년 큰형 정식과 두식 등 가족들: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870번지로 이사
• 1936년에 형의 가족들이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은리 847번지로 이주
□ 일본 동경 유학과 항일독립운동
• 1919년(18세) 10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감.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다님
• 1920년(19세)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사카이 도시히코
(堺利彦),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와 교유(交遊)
-11월 재동경 조선인 학생 15~16명 의거단(義擧團)결성(의거단(義擧團) →철권단(鐵擧團)→ 혈권단(血拳團), 박살단(撲殺團), 혈거단(血擧團 : 1921년 11월)으로 명칭을 바꾸어 계속 활동
- 김약수, 원종린, 정태성 등과 고학생동우회 결성(회원50여명)
• 1921년(20세) 1월 박열, 정태성, 김천해, 최갑춘, 이기동, 유진걸, 박일병, 김약수 등
재일조선인고학생동우회 확대 개편
-4월 박열, 경성에서 이강하등과 함께 조선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 흑로회(黑勞會) 조직
-11월29일 동경기독교청년회관 흑도회(黑濤會) 창립대회 개최: 박열, 정태신, 김약수, 조 봉암, 원종린, 김판국, 정태성, 서상일, 황석우등 조선인무정부주의자, 사회주 의자 동경 흑도회(黑濤會) 창립
※박열:일본외항선원 스기모토(杉本貞一)에게 외국 폭탄입수의뢰
• 1922년(21세) 1월 박열, 정태성, 김약수등과 함께 재일조선인 고학생동우회에서
“전국노동자 제군에 격함" 발표. 동우회가 고학생 및 노동자 구제기관임을 버리고 계급투쟁의 직접적 행동기관임을 선언
-2월4일 박열, 원종린등 11명 연명 『조선일보』에「동우회 선언」 발표
-2월 상해임시정부 일원인 최혁진, 경성의 파괴계획 연락. 박열과 에도가와(江戶川)
공원에서 밀회(密會)
-2월 박열: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만남. 동경에서 가네코가 청년조선 잡지 교정중
정우영(鄭隅影)을 통하여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감동받음.
5월부터 동거를 시작.
-5월1일 흑도회(黑濤會) 동경 노동절 참가
-7월10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흑도회(黑濤會) 기관지 『黑濤』창간
-7월 니이카다(新潟)현 탄광 조선인 노동자 100여명 살해사건 ―박열주도 흑도회
진상규명, 항의투쟁, 규탄연설회 개최
-8월 시노가와(中津川)댐공사 조선인학살사건 현장조사. 조사위원 박열, 김약수, 라경석, 백무『黑濤』 2호간행
-9월7일 동경기독교청년회관 조선인노동자학살문제연설회 개최
-9월 경성, 니이카다(新潟)현 조선인학살사건 조사회 초청:경성 경운동천도교회당 연설:
조선 무산자 동맹위원 김한 면담
-10월~11월 동경 오오시마(大島)제강소 쟁의 박열 지원
-11월 재경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흑우회(黑友會) 조직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후도이 센징(太の鮮人)』창간
·박열, 경성의 의열단원인 김한에게 폭탄 입수 의뢰
·동경 조선 노동자 동맹회 발족
-12月末 『후도이 센징(太の鮮人)』 제2호 발간
• 1923년(22세) 1월12일 김한, 의열단원 김상옥사건 관계 혐의 체포:
박열 폭탄 입수계획 좌절. 박열, 서울도착 김한과 면담
-3월15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現社會(太 鮮人 改題) 제3호 발행
-4월중순 불령사(不逞社) 설립
-박열외 5명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를 神田宝亭에서 구타. 박열, 간다(神田)경찰서에 검거 되어 이찌가야(市ヶ谷)형무소에 투옥 간수와 대난투극을 벌임
-4월26일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김중한 경성 → 동경체류(박열방문)
-5월 후세 다츠시(布施辰治), 박열 관련 조선인 불법감금규탄연설회 동경 간다(神田)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
-5월20일 박열, 김중한 폭탄입수계획 상해 연락 의뢰
-6월30일 현사회(現社會) 제4호 간행
-8월3일 흑우회(黑友會) 주최 「조선문제연설회」 간다(神田) 기독청년회관 개최
□ 관동대지진과 박열의 법정투쟁
• 1923년(22세) 9월 1일 관동대지진 발생 조선인에게 누명을 씌워 6,000여명 학살
- 9월 3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보호검속
- 9월 4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경찰범처벌령 구류연장
-10월20일 동경지방재판소 검사국 치안경찰법위반용의 기소
·被起訴者 :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외 14명
-10월22일 동경지방재판소 예심판사, 불령사(不逞社) 전원에 대하여 예심
-10월24일 대역죄혐의로 구속기소 재판회부(1925년6월6일까지 17회의 동경 지방재판소 예심받음)
• 논문4편 저술 『일본 권력자계급에 전한다』 1924.2
『나의 선언』 1924.12.3『無爲徒食論』 1924.12.29『음모론』 1925.3
• 1925년(24세) 7월17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대역죄” 폭발물취제규칙 위반 용의 기소
-대심원 제2특별형사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에 대하여 형법 제73조 대역죄
적용 공판개시 결정
• 1926년(25세) 2월26일 대심원 대역사건 제1회 공판 (박열―조선예복, 金子文子―한복)
-2월27일 제2회공판
-2월28일 제3회공판
-3월 1일 제4회공판
-3월23일 우시꼬매(牛込)구역소(區役所)에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혼인계 제출
-3월25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사형선고
-4월 5일 무기 감형
-4월 6일 박열, 이치가야(市谷)형무소→지바(千葉) 형무소 이감(移監)
• 1936년 7월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코스게(小菅)형무소 이감(移監)
• 1943년(42세) 8월 코스게(小菅)형무소에서 아끼다(秋田)형무소 이감(移監)
□ 일본의 패망과 출감
• 1945년(44세) 8월15일 정오 일본천황, 포츠담선언(무조건 항복) 수락. 한국광복
-10월15일 동경 히비야(日比谷)공회당 재일조선인연맹 결성대회 박열석방청원」데모
• 1945년(44세) 10월27일 아키다(秋田)형무소 오오다테(大舘)지소에서 석방(22년 3개월)
-朝鮮人連盟秋田縣本部 주최 大舘驛前廣場에서 박열출옥환영회 개최
-11월16일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결성
-12월 8일 동경 히비야(日比谷)음악당에서 “박열환영회” 개최
• 1946년(45세) 1월20일 신조선건설동맹 결성 (위원장 박열, 부위원장 이강훈 원심창)
-2월19일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주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열사 추도회 개최
- 3월25일 박열후원회 일본총본부주최 “박열선생부인 故금자문자 여사추도회”
동경 神田一橋 공립강당 개최
- 2월~6월 백범 김구선생의 부탁을 받아 3의사(윤봉길,이봉창,백정기) 유해봉환
추진위원장으로 세분 열사의 유해를 발굴 본국으로 보냄
• 1946년10월 3일 재일조선거류민단 창단(단장 박열. 부단장 이강훈, 사무총장 원심창)
-1대(46.10.3~47.5.23)
-2대(47.5.24~47.10.1)
-3대(47.10.1~48.2.20)
-4대(48.2.20~48.10.4)
-5대(48.10.4~49.4.1)
·12월10일, 1947년4월8일 일본 동경을 거쳐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승만 박사와 동경 제국호텔에서 2차례 회담
• 1947년(46세) 2월15일 동경 청년회관에서 장의숙(張義淑)과 결혼
-장의숙 : 황해도 진남포면 출생. 서울여상졸업. 동경청산사범대학 속성과 졸업.
일본국제신문기자-광음사(光音社)에 근무하면서 '붉은 서울의 3개월'기고
- 6월30일 박열,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발표
-10월 1일 박열, 민단정기대회에서 이승만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적극 지지
• 1948년(47세) 2월10일 박열, 재일조선인거류민단 단장직 사임 발표
-4월 박열, 사설기관「박열장학회」「박열문화연구소」설치
-7월1일 이승만 초대대통령으로 부터「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명 받음
-8월10일 『신조선혁명론』저술 출판
-8월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및 광복축전에 박열외 13명 참석
-10월8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개칭(改稱)
• 1949년(48세) 4월1일 민단 제6회 대회에서 단장 사임
-5월4일 영구귀국 서울도착. 재단법인 박열장학회 설립
-8월5일 대구방문(2박3일)
-8월7일 문경방문(2박3일)
• 1950년(49세)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勃發)
6월28일 서울 모처에서 피랍(被拉), 납북
• 1974년(73세) 1월17일 북한에서 사망―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장 (향년 73세)
-2월8일 서울 명동YWCA강당에서 곽상훈 추도위원장 외 1,000명 참석한 가운데
박열의사 추도식 거행
• 1976년 2월 12일 부인 장의숙여사 사망(58세). 경기도 파주시 금촌공원묘지.
아들 영일, 딸 경희
• 1989년 3월 1일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제85호) 추서
• 1991년 11월 21일 박열 등 15명 납북독립유공민족지도자추모제 거행(국립묘지 현충관)
• 1993년 6월 1일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지정(12-181호)
• 2001년 10월 10일 법인설립 허가(국가보훈처 2001-34호)
• 2001년 10월 30일 사단법인 박열의사 기념사업회 설립
• 2003년 12월 부인 가네코후미코 여사의 묘소를 팔령리에서 박열의사 기념공원으로 이장
• 2004년 6월 28일 박열의사 생가 문화재 지정(경북지방문화재 148호)
• 2012년 10월 9일 박열의사기념공원 및 기념관 개관
□ 출생과 성장
• 1903년 1월 25 요코하마시에서 아버지 사에키 분이지(佐伯文一)와
어머니 가네코 기쿠노(金子きくの) 사이에서 출생.
• 1910년 가을, 어머니와 함께 야마나시현 기타쓰루군 단바야마촌 고소데(山梨県 北都留郡 丹波山村 小袖)로 이주, 고바야시(小林)의 친척 고바야시 미키의 집 헛간에 기거
• 1911년 봄 야마나시현 히가시야마나시군 스와촌 소마구치(山梨県 東山梨郡 諏訪村 杣口) 에 있는 어머니의 친정 집으로 오다.
□ 조선생활 체험
• 1912년 10월 14일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入籍)하고 아버지 누이 가메가 시집간
이와시타가(岩下家)에 맡겨져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로 가서 살게 되다.
- 12월 11일 부강공립심상소학교 4학년에 입학.
• 1917년 3월 24일 부강공립고등소학교 졸업.
• 1919년 3월 1일 3.1운동, 조선인들의 만세운동에 감동을 받다.
□ 야마나시 외가로 돌아오다
• 1919년 4월 12일 부강을 떠나 야마나시에 있는 외가로 가다.
• 1920년 4월 동경으로 상경, 정칙영어학교에 다님
신문배달, 가루비누장사, 가정부, 인쇄소공원 등에서 일하면서 학교를 다님.
• 1921년 여름 원종린,정우영, 김약수, 정태성과 교류.
• 11월 고지마치구 유라쿠쵸에 있는 이와사키오뎅집에서 일하다.
□ 박열과 만나다.
• 1922년 1월 세이소쿠영어학교에서 니야마 하쓰요와 알게 되다.
- 2월 박열과 만나다
- 4월 박열과 도쿄부 에바라군 세타가야쵸 데이지리에서 신발가게를 운영하는 아이카와 신사쿠의 집에 셋방을 얻어 동거.
• 7월 10일 박열과 흑도회 기관지 <흑도> 창간.
• 8월 10일 <흑도> 제 2호 간행.
• 박열, 가네코 후미코, <太い鮮人> 창간.
• 12월 말 <太い鮮人> 제2호 간행.
• 1923년 3월 15일 박열과 <현사회>(<太い鮮人> 개제) 제3호 간행.
- 3월 박열과 도쿄부 도요타마군 요요하타쵸 요요기 도미카야의 셋집으로 이사.
• 4월 박열과 불령사 설립.
• 6월 30일 <현사회> 제4호 간행.
• 8월 11일 불령사 제6차 정례회의, 박열의 집에서 개최.
□ 관동대진재와 구금
• 9월 1일 관동대진재 발생.
• 9월 3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보호검속’.
• 9월 4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경찰범처별령’에 따라 구류가 연장.
•10월20일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불령사 동인 16명을
치안 경찰법위반 혐의로 기소.
• 1924년 1월 25일 가네코 후미코, 황족과 정치실권자에게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자신과 박열이 논의한 후, 김중한에게 상하이에서 폭탄을 입수해 달라는 의뢰를 한 적 이 있다고 예심신문에서 증언.
• 2월 15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 김중한, 폭발물단속벌칙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
• 1925년 5월4일 다테마쓰 예심판사 전향을 요구, 후미코 전향을 거부.
-여름 : 가네코 후미코, 자서전 집필 시작.
• 7월 17일 검사국장, 형법 제73조 및 폭발물단속벌칙 위반 혐의로 기소.
• 12월 4일 <조선일보> 특파원, 이치가야형무소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면회.
• 1926년 2월 15일 <도쿄아사히신문>
가네코 후미코가 자서전을 1,000매 이상 썼다고 보도.
• 2월 26일 대심원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제1회 공판.
• 3월 23일 도쿄시 우시고메구청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결혼신고서 제출.
• 3월 25일 대심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사형 판결.
사형선고 후 가네코후미코 만세를 부름.
• 4월 5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감형장을 찢어버림.
• 4월 8일 가네코 후미코,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우쓰노미야형무소 도치기지소로 옮김.
□ 옥중사망
• 7월 23일 우쓰노미야형무소 도치기지소에서 목매달아 죽다.
• 7월 31일 후세 다쓰시 등, 도치기현 시모쓰가군 이에나가촌 갓센바에 있는
형무소 공동묘지에서 후미코의 유해 발굴.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 도쿄 조시가 야에 있는 후세 다쓰시의 집에 도착.
• 8월 1일 동지들이 경관의 감시를 피해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을 후세 다츠지의 집에서
가지고 나가는 사건이 발생.
• 8월 14일 박열의 형 박정식, 장남 박형래를 데리고 후미코의 유골을 가져가기 위해
경상북도 상주를 출발, 8월 16일 도쿄에 도착.
• 8월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을 이케부쿠로경찰서에서 상주경찰서로 보내기로 결정
• 11월 5일 후미코의 유골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팔령리에 안장.
• 1931년 7월10일 슌쥬샤에서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간행.
• 1946년 3월 25일 박열후원회 일본총본부 주최로
‘박열선생 부인 고 가네코 후미코 여사 추도식’ 거행
• 1973년 7월 23일 문경 팔령 가네코 후미코 묘소에서 묘비제막식 거행.
• 1976년 3월 20일 야마나시현에 있는 가네코家에서‘금자문자비(金子文子碑)제막식 거행
• 2003년12월 경북 문경군 팔령리 소재 묘소를 박열의사 기념공원으로 이전
첫댓글 박열(일명 준식, 혁)의사는 함양박씨로 2파 30세 예천 금당실의 정랑공파의 후손으로 삼란지가(三難之家)의 막내(5째) 할아버지 종린( 從鱗)의 후예이시다. 우리 집안으로 식(植)과 영(榮)자와 같은 항렬이며, 해방후 초대 재경종친회장을 하시다, 6.25때 북한군에 강제 납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