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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makorea 원문보기 글쓴이: Grappler Grizzley
80년대를 고찰 최고의 주짓수 파이터를 뽑는다
홀스의 사망, 바톤의 터치
80년대. 체육관들이 전성기를 맞이하는, 마이크 타이슨, 스필버그의 E.T가 군림하던
시기...
마찬가지로 주짓수 세계에서는 홀스가 아닌, 그리고 보통내기가 아닌 다른 인물이 브라질리언 매트를 통해 산란을 시작하여 스타로써 군림하기 시작한다.
지난 10년 비범한 천재 홀스그레이시의 포용력있는 마인드와 육체적인 준비, 그리고 기술에 의해 지배되었던 그 시기보다 훨씬 그러한....
엘리오에 의해 길러지고 훈육되어진 카를로스의 아들만큼이나 존경할만한 떠오르는 블랙벨트의 사나이가 있었을까?
그 당시의 시기에 목격자로써 형성된, 그리고 엄격하게 선출된 우리의 심판관들은 아무거리낌 없이 "예"라고 대답할수 있다.
또한 80년대를 생각하자면, 직접선거제를 위한 투쟁의 시기였으며 민주정치제가 열리는...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시기였다.
명백한 유의 예를 추구하는 주짓수 역사의 장은
70년대로부터 80년대로 넘어가는데...
당시 토너먼트는 한 해에 1회 내지 2회의 경기만이 열리는...
여전히 희소한 그것이였다.
그러나 1982년이 연말에 다다를 쯤, 청천벽력같은 일이 발생했다.
카이트 비행을 하던 신화적 존재, 어떠한 적조차 그에게 불가능하리라 보였던 홀스에게 불안정한 기류가 발생해 홀스는 죽고만다.
이러한 운명은 결국 바톤을 만들어 낸다. 가족들에게 남겨지지 않았던 바톤...
손이 교차되며 바톤은 홀스가 트레이닝에서 종종 꺾었었던
그의 동생에게로 전해진다.
심사관들의 회상
당시의 목격자인 블랙벨트 리들리 버지오가 회상한다
"힉슨이 어렸을때 그의 아버지 엘리오는 종종 바다에 가야했어요. 연습을 위해 바다에 남겨진 그를 건저내기 위해서였죠."
홀스가 운명을 한 이후에, 엘리오는 힉슨을 끝이없는 파도속에 남겼다.
그에맞게, 대부분의 심사관은 주짓수에 있어
홀스 시대의 끝은 80년대의 시작이라고 동의했다.
그들 모두가 동의한것은 아니듯이, 리들리가 말을한다
"힉슨 또한 다재다능했죠, 하지만 홀스는 정말 놀랄만한 인물이였습니다. 그는 제게 있어서 가장 훌룡한 영감을 주는 인물이였습니다. 80년대...그리고 영원히..."
오스발도 알베스의 가장 훌룡한 문하생이였던 서지오 펜하가 말을 이었다.
(물론 레드-블랙벨트의 마스터 알베스와 유도를 수련했던 홀스 그자신을 제외하고 말이다)
"힉슨과 저는 홀스의 레벨에 다다르려면 50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그정도의 시간도 충분하지도 않지만...."
현재는 비행기 파일럿이자 UFC HW파이터 미어의 코치인, 서지오가 그 당시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메인 케릭터중에 한명이였다.
1981년 11월 29일, 카리오카의 AABB체육관에서 열린 주짓수 챔피언쉽에서 말이다. 서지오 그의 상대는?? 바로 힉슨이였다.
오스발도 알베스가 단언한다.
"제가 봐왔던 경기중에 최고의 동작이였습니다."
혹슨의 아들이 태어난 이유로 밤잠을 못잔채로 나온 74KG의 힉슨 그레이시는
84KG에 다다르는 펜하의 가드패씽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는것처럼 보였다.
힉슨의 문하생들과 서포터들의 불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더 커져만 갔고,
아울러 12:0이라는 냉혹한 점수도 힉슨에게 남겨졌다
힉슨이 펜하의 아래로 부터, 펜하의 소매를 당겨 테이크 다운을 얻고, 그의 탑으로 떨어지며 마운트를 타고 동시에 펜하의 목에 서브미팅을 한다.(비공식 자료에 의하면, 그의 경기중 90%이상의 피니쉬로 사용했다 한다.)
80년의 시작에 있어서 그의 싸움의 시작은 주짓수는 미스테리한 어떤것조차 없다는 사실만을 보여주었다. 만약 당신이 어떤 특정 포지션에 이르게 된다면, 그때는 싸움을 끝내는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러한 역전이란것이 쉬웠다.
현재는 라스베가스에 살고 있는 펜하가 말을 이었다
"제가 퍼플로부터 블랙에 다다르기까지 4년간을 트레이닝을 했었죠.
그리고 20년을 수련해온 힉슨과 싸우기를 결정했죠...
하지만 저는 자만심따윈 없었고, 터프했었습니다. 하루에 7시간을 수련했죠.
당시는 우리가 어떠한 종류의 보상따윈 바라지도 않는 단지 주짓수를 사랑하는
시기였기도 합니다.
예를들면, 90달러를 받는 UFC파이터에게 있어 하루에 5시간을 훈련하는것은 쉽습
니다. 우리세대는 모두가 항복을 받아내는 주짓수로 싸웠습니다.
우린 때때론 지기도 하지만, 매우 공격적으로 싸웠었죠.
오늘날은 그런것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미소한 어드벤티지가 결정적이거든요.
아마도 얼굴에 생긴 조그만 표피 상처로 당신이 이길수도 있을껄요."
마켓팅의 시대
그러나 빠름을 지향하는 싸움들은, 그당시의 경기 리듬에 조화되지 못했다.
2가지의 정점이라 칭할수 있는, 한해에 한개의 토너먼트가 있었지만 미디어로 부터 주목할만한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현재 니트로이의 주짓수 리그의 회장을 맡고 있는 실비오 페레이라에 의하면, 전문화된 주짓수는 단지 컴페니 컵이 부상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1983에 모지미림에서 첫 리그를 설립했었죠. 그것은 첫 컴페니 컵을 전문화시키기 위한 방문들을 잘 치뤄서 마침내 설립되었습니다."
리그의 첫등장은 84년의 말이였습니다.
회사의 소유주인 마우로 토브먼은 더이상 존재치 않는 마케팅 천재중의 한명이였습니다.
"그는 특히 컵의 총서를 지원하는 O 글로보라는 신문에 자신의 기사란을 가지고 있
었습니다. 그 컵은 블랙벨트인 부차우가 자신의 사진을 티셔츠에 사용했다는 이유
로 회사를 고소하면서 끝났습니다. 마우로는 당황했고 양팀의 싸움과 이벤트에 종
지부를 찍었죠."
페레이라는 당시 첫 리그 컵에 경쟁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분투에 대해 부연설명을 계속한다.
"당시에 선수들의 레코드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강한팀은 칼슨의 팀이였죠.
칼슨은 챔피언쉽 당일에 도착해서는 팀원들 벨트에 맞는 싸울 상대를 골랐어요
1985년에 군사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우리는 처음으로 조직화된 토너먼트를 가졌죠.
선수들은 각자 벨트에 대해서 등록해야한다라는 걸 힉슨이 말했었죠."
한편으론 성공을 하기 위한 시작을 잡았으나, 다른편으론 지난 10년간 변한게 없었다.
당시에 블랙벨트 대회는 거의 없었다.이유는 무었일까??
실비오 에게 있어서 단지 한가지 책임이 있었다. "두려움"
"당시 선수를 승단시키는 일에는 어떠한 두려움같은게 있었습니다. 왜냐면, 뛰어난
아카데미 밖 교외에서 어떠한 사나이가 블렉벨트를 얻었다면, 승단을 하자마자 그
의 마스터에게 도전을 할수도 있으니까요"
브라질리언을 이끄는 3명의 리더중 한명인 루이즈 비비오 두아르테는 좀 더 복잡한 이유가 있다고 말을한다.
"블랙벨트는 코스에 있어서 마지막에 해당하죠.화이트로 3년을 보낸 사나이는, 블루
벨트로 3년을, 퍼플벨트로 2년을, 그리고 브라운벨트로 1년을 보냅니다. 그들이 마
침내 블랙벨트를 얻었다면 그들 대부분은 이미 30세가 되었을겁니다.
그리곤 그들은 경기를 중단하고 일을 시작했죠. 만약 오늘날과 같이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기회가 있었다면, 당시 그들의 인생은 바뀌었을거고 많은 훌룡한 선수들
이 있었겠죠.
난 당시대를 불행한 사람들이 말하곤 했던 축구선수 펠레와 가린차의 전성기와 비
교를 합니다. 운동가라고 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요즘엔 모든것이 힘과 체력
으로 결정됩니다.80년대의 매혹은 필요없이 말이죠.참 로맨틱한 시간들 이었습니
다"
축구팬인 비비오는 영원불멸한 펠레의 넘버10을 강조하며, 그의 드림팀을 뽑는것에 대해 회피를 하진않는다.
"1984년이래로 블랙벨트인 호일러 입니다. 그는 현재까지도 싸우고 있죠.
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그리고, 힉슨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힉슨을 평가조차
할수 없을겁니다. 제가 작성한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는 이유입니다."
비비오는 "카시오 카르도스, 클로비스, 데 라 리바, 무릴루 부스타만테, 히간마차 도"를 명단에 적으며 말을했다. 마지막 3인은 80년대 후반에 활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명단에 혹시라도 잘못 올려진 이름이 없는지 물었을때 비비오는 대답했다.
"항상 강했던 로자도 역시 있지만, 그렇게 훌룡한 테크니션은 아닙니다. 둥가와 같은 부류죠"
오스발도 알베스는 비비오가 호일러를 최고로 뽑은것에 동의를 하며 말한다
"힉슨은 도복을 착용하고서 상대를 으깨버렸지만, 호일러는 59KG으로 정교한 테크
닉을 보여주면서 블랙벨트를 얻었죠. 실상을 위해 싸울수 있는 용기 또한 가지고 있
습니다. 앞으로도 몇년간 MMA를 포함해서 보여줄꺼라구요."
그렇지만, 다른 심사관들은 모두 힉슨을 뽑았다
사촌인 헨조가 덧붙여 말한다.
"힉슨이 월등하며 최고에 가깝습니다.
80년대의 시작은 곧 힉슨의 시작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당시 기억에 남을만한 경기들중에는 주짓수 왕자를 폐위시키려고 했던,
크고 무거운 파이터들도 있었다.
하지만 현명치 못한것일가, 마케팅에 있어서그리 쉬운일이 아니였다.
헨조가 회상한다.
"그들은 우리의 적들을 만들기 시작했죠. 마르코 아우렐리오라는 유도 올림픽 선수
를 얻었습니다. 제가 당신께 말하건데, 여지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준비가 철저히 잘
된 선수는 보지를 못했어요. 그사람만큼 굉장한 폭발력과 저항력을 가진 사람을
요...그는 가드에서 적을 들어버려 내동댕이쳤죠.
세르지오 말리뷰와 다른 선수들을 이겨버리고, 힉슨에게 도전하기 위해 계속해서
이겨나갔죠"
헨조가 또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건 또 흥미롭기 까지 했어요, 힉슨은 그를 가드로 끌어드렸고, 스윕을 한후 그를
짖눌러 버렸습니다. 그리고 초크와 함께 피를 나게 할정도로 그 사나이를 괴롭혔죠.
힉슨이 그자를 이겼을때, 그 유도 선수는 일어나지도 못했고, 출혈이 심했어요"
리들리 역시 그 학살에 대해 기억하는바가 있다
"난 당시 그경기에 레프리 였습니다.당시 상처는 컷팅같았지만, 골절같은건 정확히
없었습니다. 힉슨의 짖누름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그 선수의 광대뼈가 부러져 버린
거였죠.그건 보기 드문일이였죠.
사람들은 "그레이시들의 초크는 상처를 주지 않는다. 다만 당신을 잠들게 만들뿐이다.-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헬리오 비지오의 아들 리들리는 힉슨의 조용했던 시간들을 기억한다
"힉슨이 이미 참가했던 챔피언쉽에서 였습니다. 아마도 끝나고 서핑을할 생각이였나
봐요. 제자이자 친구인 마르셀로 베링이 제게 말하길 힉슨이 테이블로 가서는 연이
어서하는 3경기를 요청했다는 겁니다. 그는 그들 모두를 이겨버리더군요. 마지막에
는 조모레이라 원숭이놈을 항복시켜버렸어요"
힉슨이 좋은 포지션을 얻었을때 관중들은 초단위의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카운트다운은 결코 길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그라운드 게임에 있어서 수많은 스타들이 있었다. 단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건 힉슨만이 아니였다
아무레이 비테티가 말한다
"또 하나의 정말로 훌룡한 경기는 카시오 카르도소와 마르셀로 베링의 경기였습니다. 주짓수에서는 초창기 슈퍼파잇중에 하나였죠."
"처음에는 정말 터프했죠...하지만 카징요가 어드벤티지를 얻고 경기를 콘트롤해서
이겼습니다"
칼슨계의 최고의 블랙벨트이자 마스터인 80년대 탑10파이터들을 뽑은 로자가
말한다
-힉슨, 서지오 펜하, 카시오 카르도소, 히간 마차도,마우리카오,마르셀로 베링, 홀스, 부초우, 파스콜, 페이소팅요,-
비비오는 한편으로 베링과 카시오의 화려한 경기를 회상한다
"브라운벨트때 그들의 첫 싸움은 훌룡했습니다.마르셀링요는 승자였고, 제 기억에 남겨져 있습니다. 왜냐면 카시오가 처음으로 졌던 경기였으니까요"
호일러 그레이시는 단지 80년대 중반에 블랙벨트로 승단한 또다른 우수한 스타였다.
"그 마그링요(바싹 마른사람을 뜻함-호일러를 말함)는 자신보다 큰 상대와 싸우는것
에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높이평가되는 카징요를 이겼고 많은 상대들에게 항복을
받아냈죠."
주짓수 백과사전이라 할수있는 오스발도 알베스가 말한다
"플루미넨스의 체육관에서 열린 컴페니 컵에서 호일러는 자신보다 무거운 3명의
상대를 당일에 모두 제압했죠. 파스콜, 칼슨의 제자인 페이소팅요와 마르시오 도스
산토스"
비비오에게 있어서 80년대 가장 감명깊었던 경기는 1985년의 경기라한다
"당시 저는 주짓수에 새로입문했었고 호일러와 마리오 쿠페르티노의 경기가 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마리오는 평화롭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칼슨 아카데미
에서 수련하는 사나이였습니다. 그 경기에서 정말 많은 동작이 나왔죠. 쿠페르티노
는 처음을 잘 이끌었지만, 호일러는 서서히 그를 제압해나가고 마침내 포인트로
이겼습니다. 그 둘은 매우 유연한 동작들을 보여줬고, 스타디움은 정적이 흘렀습니
다. 동시에 펼쳐졌던 다른 모든경기들은 방해를 받았죠. 마지막엔 관중들은 기립박
수를 일체로 치더군요."
브라질리언 탑팀의 블랙벨트 비비오가 말했다
그러나 평화라는 것은 항상 극도로 화려한것이 아니다.
1989년 마라카나징요에서 열린, Sport Storage라는 토너먼트에서 시작은 썩 좋지
않았다.
회장 실비오 페레이라는 회상한다
"그 체육관은 너무나도 거대했죠. 체육관이 거의 비어있었어요. 이전경기에서 호일
러는 데 라 리바에게 졌고, 결과가 맘에 안들었기때문에 그의 아버지와 싸웠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오는 우리와 함께 당황해했고, 그날에 엘리오는 익명인처럼 벤치에
남아, 공고되어지는것과 그곳에 서있는것을 말하지말라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을 위해, 승리자들을 위해 경기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호일러는 자신과 데 라 리바가 피더 웨잇트급에서 곧바로 싸우길 요청했죠
그건 호일러가 이겨서 그의 아버지가 호일러의 만회를 위해 떨어졌던 때입니다.
그들과 모두를 위해서 였죠."
비비오가 말을 이었다
" 끝이 좋으면 다좋을까요?? 모두에게 그런것은 아니였습니다
그 피더 웨이트의 결승에서, 클로비스는 호일러와 대면을 하게 되는데 논란이 많았
던 경기였습니다
클로비스는 호일러의 팔을 펼쳐뜨렸지만, 조수는 양깃발을 들었고 레프리에게 판
정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레프리는 그였습니다... 실비오 베링...
베링은 호일러에게 승을 선고하고,칼슨은 판정에 격노를 했습니다.
한편 클로비스는 실망했고, 주짓수를 포기해버립니다. 그리고 소방관이 되었죠"
80년대의 말, 힉슨은 자신의 적이 부족함에 풀이죽어 현재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로 이사를간다. 켈리포니아에서 주짓수 경기들은 1993년 국가연합이 생기며 크나큰 인기를 얻어간다.
과거의 블루, 퍼플, 브라운 벨트의 선수들은 그들 자신의 궤도를 멈추지 않았으며, 블렉벨트로써 비춰지고 있다.
심사관의 투표 :
칼슨 그레이시 -힉슨
오스발도 로자-힉슨
아무레이 비테티 -힉슨
오스발도 알베스-호일러
서지오 펜하 - 홀스
루이즈 비비오 다루테 - 호일러
리들리 버지오-홀스
마우리카오 가메즈-힉슨
실비오 페레이라 -힉슨
헨조 - 힉슨
득표결과
1위 : 힉슨 6표
2위 : 호일러 2표
3위 : 홀스 2표
힉슨의 1986년도 주짓츠 경기 -copa de lighting bolt-
마차도와 더불어 난그레이시이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국제 주짓츠대회를 개최하는 조 모레이라와 호일러의 대결입니다.(좌)
우측은 프로암에서 노기경기
헨조의 경기...
80년대 힉슨이 압도적인 득표수를 못얻은것은...
심사자가 말하듯이, 호일러도 힉슨만큼이나 뛰어났다는 면이 있었고
70년대 최강으로 뽑혔던, 홀스의 포스도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재밌는 심사자의 말은, 호일러의 왕성한 활동을 말했는데요
90년대 최고의 주짓떼로 1위로 뽑힌 호일러, 문디알을 96년부터 계속 우승해대며
동시에 아부다비도 3년 연속 우승을 하게 됩니다. 더불어 MMA에서도 활동을 하죠.
어찌보면, 그레이시인 중에 가장 왕성했던 그레이시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탭을친 그레이시 일지도 모르겠군요
에디브라보와의 경기는 스코어상 호일러가 에디에게 단1점도 안내주다가 불과 1~2년 전까지만해도
여러가지 가드중에 최고로 센세이션했던 러버에 걸려 넘어졌지만...
GI와 NO-GI, 그리고 MMA에서 주짓수 이 3가지 사이의 갭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인것 같습니다
힉슨의 컬럼들은 여러가지가 많은데, 한번쯤은 인터넷에 올라온것 같은 내용이라 패쓰하겠습니다.
(삼보대회에서 론트립에게 패했던 내용, 그와 붙었던 몇명의 사나이들이 작성한 이야기,
레이줄루와의 일화, 레이줄루와 해변에서 싸운걸 봤다는 브라질리언들의 이야기 )
90년대 편은 주짓수가 본격적으로 수많은 대회가 개최되면서 워낙 강자들이 많아
밑에 순위만 적고, 심사자들이 적은 코멘트는 생략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힉슨과 호일러는 약간 대조적인 면이 많군요. 공식대회에 그리고 3분할 되는 주짓수, GI-NO-GI, MMA를 두루 통렵하는 호일러와...다소뜸하게 약간은 베일이 가려진 주짓수의 레전드 힉슨
여하튼, 80년대의 스포트 라이트는 6표로 힉슨이 받게 되고, 90년대는 호일러가 화려하게 장식해
갑니다. 그리고 현재는 투표상 마르셀링요가 1위...그외 호저-자카레-싼데 등의 23~26들의 라이벌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