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회 전라북도 서도대전에서 대상은 한문 행서부문의 이창자 씨가 차지했다 .
우수상은 이홍지, 정봉임 씨가 선정되었으며, 특선상 및 삼체상에 23명, 특선 72명, 입선 167명이 선정됐다.
심사위원은 이창자(李昌子)씨 작 ‘자맥춘풍(紫陌春風)’에 대해 강한 북위의 서체를 근저로 한 매우 강직힌
행서 필법으로 쓴 글씨로 비백과 강약의 조화가 뚜렷하며, 작품 전체에 흐르는 거칠고 경쾌한 리듬이 압도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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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都(서도) - 鄭知常(정지상) -
紫陌春風細雨過(자맥춘풍세우과) : 화사한 봄바람에 보슬비 내려
輕塵不動柳絲斜(경진부동류사사) : 거리엔 먼지 자고 버들가지 늘어졌네
綠窓朱戶笙歌咽(녹창주호생가인) : 사방에서 노래 소리 들려오니
盡是梨園弟子家(진시이원제자가) : 이 모두 가객들이 사는 집인가
⋇ 陌(거리 맥, 밭둑길맥)
⋇ 笙(생황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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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한 거리 봄바람에 보슬비 지나간 뒤 : 紫陌春風細雨過
가벼운 티끌조차 일지 않고 버들개지만 휘늘어졌다 : 輕塵不動柳絲斜
푸른 창 붉은 문에 흐느끼는 노랫가락 : 綠窓朱戶笙歌咽
이 모두 다 이원(梨園)의 제자 집이라네 : 盡是梨園弟子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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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知常(? ? 1135)
본관 西京. 호 南湖. 초명 之元. 서경 출생.
고려 예종과 인종 때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예종9년(1114)에 문과에 급제하여 인종5년(1127)에 左正言이 되어
拓俊京이 대궐을 범한 죄를 들어 탄핵하고 유배케 했다.
2년 후 左司諫으로 정치개혁을 논하는 소를 올렸다.
妙淸과 白壽翰의 陰陽秘術을 깊게 믿어
그들과 함께 三聖이라는 칭호를 받고,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고 금나라를 정벌하여 황제로 칭하자는 서경천도 운동을 주도했다.
인종8년(1130)에 知制誥로 왕명을 받아 郭輿를 추모하는 ‘東山齋記’를 지었고, 민간 신앙과 불교, 도교의 신을 합쳐 민족수호의 정신적 상징을 만들자는 ‘八聖堂祭文’을 지었다.
그 후 起居郞이 되었으나
인종13년(1135)에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개경에 머물다가 백수한 등과 함께 김부식에게 참살 당하였다.
시와 그림에 재주가 뛰어나 고려 12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易學과 佛典 및 노장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림· 글씨에도 능했으며 저서로는 《鄭司諫集》이 있다.
이 시는 평양의 봄 경치와 그 뒤에 숨겨진 삶의 형편을 은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첫 구와 둘째 구는 봄비 내린 평양 거리를 담담하게 묘사한 것이다.
첫 구에서 시상을 일으키고
둘째 구에서 그것을 이어받는 절구의 전형적인 수법을 사용하였다.
셋째 구에서 시상을 전환하여 놀라운 문제를 제기하는데,
화려한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악기소리가 슬프게 흐느낀다는 것이다. 고려 전기는 개성을 중심으로 한 문신 귀족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러므로 평양을 서경이라고 했지만 옛 고구려의 도읍으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고, 설령 화려한 집이 있다고 해도 그런 집들은 대개 노랫가락이나 풍악을 연습하여 개성의 지배세력에게 풍류를 제공하는데 이바지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지막 구는 이런 저택들이 모두 梨園弟子의 집이라고 하여,
당나라 玄宗이 속악을 익히게 한 梨園에 속한 사람들과 같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만이 번창하고 있다고 하여 평양의 쇠락한 형편을 드러내었다.
개성 세력이 지배하는 당시의 서경 사정에 대한 문제제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