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이씨(載寧李氏)의 득성유래(得姓由來) 재령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분파된 성씨이다. 비조(鼻祖) 표암공 이알평(李謁平)께서 진한(辰韓)의 표암(瓢巖)아래로 내려오셔서 신라개국(新羅開國) 좌명공신(佐命功臣)이자 급량부대인(及梁部大人)으로서 이(李)씨를 사성(賜姓)받아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가 되시고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휘 居明)의 6세손인 휘(諱) 우칭(禹偁)께서 고려조(高麗朝)에 보조공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황해도 재령을 녹읍(祿邑)으로 받고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짐에 따라 자손들이 재령(載寧)으로 분관하였다. 재령은 일명 안능(安陵) 또는 한홀(漢忽)·안반(安盤)·식성(息城)으로 부른다. 특히 안능은 재령과 함께 오늘날까지 많이 병용하고 있다. 무릇 2천여 년을 거쳐 오는 동안에 월성(月城)이씨에서 차성(車城), 합천(陜川), 우계(羽溪), 평창(平昌), 아산(牙山), 재령(載寧), 진주(晋州), 원주(原州)등 많은 지종으로 분적(分籍)되었다.(분적도 참조) 월성은 경주(慶州) 또는 계림(鷄林)이라고도 한다. 재령이씨는 득성한 이래 일천년 동안 위대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고려조의 사적은 문헌이 부족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족보(族譜)·가승(家乘) 등에 의하면, 재령군 이후 대대로 명관이 연이어지고 학자와 절신이 배출한 그야말로 혁혁한 가문이라 하겠다. 이를테면 공부상서공(휘 元英), 상장군공(공민왕의 부마로 휘 小鳳), 중랑장공(휘 日祥)·사재령공(휘 日善) 형제분이 사환(仕宦)으로 혹은 청덕으로 드높였으며, 계은(휘 申)·모은(휘 午) 형제분은 학덕과 지절이 당시에 드날렸을뿐더러 려조(麗朝)에 충절을 다하셨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명신, 청환(淸宦)과 충신 의사(義士) 그리고 특히 문인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려조에 충절을 지키신 계은 모은 형제분의 영향으로 세조말-성종초에 와서야 출세의 문로인 과거에 응시하였고, 그 뒤 숙종 20년(1694) 소위 갑술정변으로 노론이 득세한 뒤에는 노당(老黨)의 전횡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하더라도 본관이 재령이면 취소해 버렸다 한다. 그래서 조선조에 문과에 급세하신 분이 15인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과 생원 진사시에 입격하신 분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를 통하지 않고 음직(陰職) 또는 학행으로 천거되어 현달하기도 하고 또는 산림(山林)에서 학문 덕행만 닦고 저서(著書)에 전념한 학자는 실로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자료 : 문화재전문위원 정섭(廷燮) 종친-- 載寧李氏宗報 2호 참조> 분관시조인 휘 우칭(禹偁)은 사간공(휘 周復)의 아들이며 일설에는 휘가 우(偊)라고도 하는데 문하시랑(門下侍郞) 칭(偁)의 아우라 한다. 경술보(1850년)의 범례에 일리가 있다고는 하나 명백한 근거가 없고 경외의 모든 족보에는 우칭으로 행용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따룬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우칭은 禹儞으로도 표기한다. 묘소는 황해도 재령군 서산(鋤山) 경향(庚向 : 서향)에 위치해 있으며 재령군재사(載寧君齋舍)가 있다고 하나 이북으로 현재 확인할 길이 없다. 따라서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에 사우(祠宇)인 경덕사를 지어 매년 5월 5일에 제향(祭享)하고 있다. 시조로부터 공민왕의 부마로 알려진 상장군 까지의 약 400년의 상계는 확실치 않다. 청도의 식성군가보(息城君家譜)에 기록되기를 상장군(휘 小鳳)의 형에 안능군에 봉해진 휘 대봉(大鳳)이 있다는 설이 있으나 후사가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원래 두아들은 종강(宗綱)과 사강(嗣綱)이고 종강은 영산으로 봉군되었고 아들이 일명(日明)이며 사강은 정승 유경(柳璥)의 사위가 된다고 한다. (병신보 범례) 그러나 현재 재령이씨족보의 대부분은 상장군 휘 소봉(小鳳)만 기록하고 있으며 공민왕의 따님을 맞아 두 아드님을 낳으시니 장(長)은 휘 일상(日祥)이요 차(次)는 휘 일선(日善)이시며 이 두분의 후손이 현재 재령이씨의 전부가 된다. 중시조에 해당되는 상장군은 시조(휘 禹偁)의 15세이라는 설이 있으나 고증이 안되고 있지만 경주이씨의 세계도와 비교하면 계대가 거의 일치한다. 표암공(瓢巖公, 휘 謁平)으로부터 원대손으로 기록된 소판공(蘇判公, 휘 居明)까지의 약 구백-천년의 실전(失傳)기록이 일부 경주이씨를 비롯한 합천이씨의 족보에 상세히 적혀있으나 믿을수 없는 내용이다. 이런 실전세계(世系)는 많은 의문점이 있으며 대부분의 기록이 과연 신라시대의 내용과 일치하는지 문헌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주이씨와 우리 재령이씨 파보는 소판공을 원대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시조 표암공의 손자로 기록한 부분에서 삼국사기의 내용을 기대로 도용한 느낌이 든다. 즉 삼국사기 혁거세왕 32년 봄 2월에 호공(瓠公)이 마한왕을 만난 내용이 그대로 표공(瓢公)으로 둔갑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 말미에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즉 “호공(瓠公)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倭人)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이라고 불렀다.”고 김부식은 기록한 것이다. 또 시조의 18세 기록은 삼국시대에 과연 이분의 문집과 족보를 간행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러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 결론적으로 실전세계는 아직 족보에 올려서는 안되는 부분이고 시조로부터 몇세손이란 말은 있을 수 없고 중시조로부터 몇세(대)손이라 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