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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붕래 선생님 글방 펌]
염제 신농(炎帝神農) 김붕래 1. 신농상초(神農嘗草) 지루한 구석기 시대가 끝날 때쯤 혜성 같이 신농씨가 나타나 수렵시대를 마감하고 농경사회의 막을 엽니다.
파종을 해서 싹을 키우는 농사 기술의 확보는 20세기에 원자탄을 발견한 것보다 몇 십 배 더 획기적인 신기술의 발명입니다. 신농씨는 나무를 구부려 보습과 쟁기['뇌사'(耒耜)]를 만들었고
소에게 멍에를 씌워 밭 가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이름 그대로 농업의 신인데 그의 머리에 난 뿔은 농경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는 소의 상징입니다. 그는 인신우두(人身牛頭)의 형상을 했는데 제가 다녀온 <염제고리> 신농 광장에 꾸며진 조각품에도 농경시대를 연 임금답게 왼 손에는 벼 이삭을 들고 머리에는 뿔이 나 있습니다. 그는 의약의 신이기도 합니다. 두 개의 커다란 자루를 가지고 다니며 한쪽에는 식용 가능한 풀을, 다른 쪽에는 약용으로 쓰일 약초를 담아, 신농상백초(神農嘗百草)라는 말 그대로 매일 100가지 잎새를 씹어 약효를 시험하다가 72가지 독에 중독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자편(赭鞭)이라는 회초리로 약초를 때려 그 효능을 시험했다는 이야기가 <회남자(淮南子)>에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신농의 약초는 <신농본초경><황제내경> 같은 의학 고서의 명약으로 활용되고 편작(扁鵲)이나 화타(華陀) 같은 명의를 탄생시키기도 합니다.
또 그는 차의 신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독초에 중독되어 신음하다가 우연히 차나무 잎을 씹어 목숨을 구한 데서 차를 개발하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의 차는 당나라 시인 육유(陸游)의 <다경(茶經)>이라는 책을 탄생시킵니다. 일설에는 달마대사가 '9년 면벽(面壁)'을 하면서 잠을 쫓기 위해 눈썹을 뽑아 던졌는데 거기서 싹이 난 것이 차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달마는 6세기 남북조 시대의 인물로 신농의 연대와 비교가 안 됩니다. 달마 이전에도 차 이야기는 많이 나옵니다. 소설 <삼국지>는 유비가 어머니께 드릴 차를 구하러 강가에 나왔다가 황건적과 조우하는 장면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차는 한(漢)나라 시절에도 일반화되고 있었습니다. 달마의 신비함이 차의 묘한 맛과 결부된 하나의 미담일 것입니다.
술 천 잔을 마셔도 친해지기는 쉽지 않지만, 차 한 잔으로 능히 사람을 감동시킨다(美酒千杯難成知己, 淸茶一盞也能醉人) - 술은 백마 탄 기사이고 차는 숨어 사는 은자와 같다. 좋은 술은 친구를 위해 있고 향기로운 차는 덕이 있는 사람을 위해 있다 - 이렇게 술과 차를 비교하며 차를 한 수 위로 치고 있는 차 문화 깊숙이 신농씨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임어당은 차를 혼자 마시면 속세를 떠난 기분이고, 둘이 마시면 한가하고 서넛이 마시면 유쾌하나 대여섯이 마시면 저속하다고 그의 명저 <생활의 발견>에 적기도 했는데 이만큼 큼 중국 사람들에게는 일상이 된 차 문화의 조상이 신농씨입니다.
명대(明代) 대학사(大學士) 장치(張治)는 <염릉(炎陵)>이라 제한 시(詩)에서 "형산(衡山) 남쪽 산맥은 푸른 봉오리를 굽이굽이 돌고 상강은 천리를 흘러 냇가에 이르렀네. / 어두운 궁궐 산목(山木)을 가리고 솔솔 부는 가을바람 들밭에 부는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온 천하가 임금의 법칙에 따르고 오랜 세월 쌀밥을 먹게 해 백성의 날들을 열었도다. 덩굴 잘라내고 말에서 내려 남아있는 비석을 읽어보니 멀고 어렴풋한 장강(長江)과 한수(漢水)가 차가운 연기에 잠기네." 라고 호남성 염제능을 지나며 신농을 예찬합니다.
"대사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편지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차만 보내면 됩니다. 바로 보내지 않으면 마조의 할(馬祖喝)과 덕산스님의 몽둥이(德山捧)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던히도 차에 매료되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유배지 제주도에서 초의선사(草衣禪師)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2. 염제 신농 전설 같은 이야기겠으나 약 5000여 년 전 신농씨는 섬서성 보계시(寶鷄市) 기산현(岐山縣) 강수(姜水 = 岐水)에서 태어났는데 그 강의 이름을 쫓아 성이 강(姜)씨가 되었습니다. 이 보계란 곳은 <삼국지>에서는 ‘진창(陳創)’이란 지명으로 나오는데,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가 탄생한 곳이고, 공명이 죽은 오장원(五丈原)에서도 가깝습니다.
신농의 부친은 소전(少典)이고 모친은 유교씨(有蟜氏)의 딸 '여등(女登)'인데 용의 정기를 받고 신농을 잉태했다고 합니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말을 하고 5일째 되는 날은 걷고 7일이 되자 치아가 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신농씨의 성 <강씨>는 후일 중화 성씨의 기원이 됩니다. 신농 이전 복희의 '풍씨'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단절(?)되고 강씨가 번성합니다. 제가 다녀온 산서성 진성시(晉城市)의 '염제고리'에 있는 '신농 기념관'에는 주 나라의 개국공신이자 제나라를 봉지로 받은 강태공(姜尙)이 신농씨의 54대 자손으로 기록되어 있고, 춘추오패의 으뜸인 제 환공은 강태공의 12세손으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강태공 이후 이 '姜'씨는 丁, 丘, 高, 盧 崔, 許 씨등 93개의 성으로 분화됩니다. 우리나라의 <진주 강씨>도 강태공이 선대 조상이라고 종친회에서는 성묘도 다녀간답니다. 강태공의 의관총이 있는 산동성 ‘치박(淄博)시’ ‘임치(臨淄)’에는 ‘세계 강씨 종친회’라는 어마어마한 간판이 걸려 있기도 했습니다.
신농씨 다음의 임금인 황제 헌원의 성 '희(熙)'씨 역시 그리 번창한 편은 못됩니다. 사기에는 황제의 아들은 25명이고 그 중 성씨를 세운 자가 14명이라 했지만 강씨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주나라의 조상인 후직(后稷)의 부계는 황제의 혈연(姬씨)이고, 모계는 신농씨의 후손입니다 - 후직의 모친 강원(姜原)은 제곡의 정실부인으로 염제의 후손, 강씨입니다. 이렇게 제1세력과의 결혼 동맹을 하며 신농의 계보는 꾸준히 이어집니다. '姜'씨나 '姬'씨가 다 '女'자가 있는 것을 보아 당시는 아직 모계사회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하남성 정주(鄭州) '황하유람구'에는 산 같이 거대한 두상(頭狀)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염제 신농과 황제 헌원의 모습입니다. 그 두상의 높이만 106m, 자유의 여신상보다도 더 큽니다. 중국인의 시작은 '염제 신농'과 '황제 헌원'이라는 깃발을 크게 내 건 셈입니다. <사기>의 <오제본기>에는 이 신농씨와 황제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옵니다.
기록에 의하면 신농씨는 쇠약해가는 기성 정권이었고, 황제는 막강한 신흥 실력자입니다. 여기에 구리 머리에 철의 이마를 가졌다는 전쟁의 신 ‘치우(蚩尤)’까지 등장합니다. 이들이 서로 크게 싸우던 장소가 하북성 장가구시 탁록(涿鹿)현입니다. 1990년대 들어 탁록현에는 정주의 '염황두상(炎黃頭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 들어섭니다. 염제, 황제와 함께 치우도 그들의 조상으로 모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사당 명칭이 '귀근당(歸根堂)'이니 그들이 돌아갈 뿌리 중 가장 연장의 할아버지가 '염제 신농'인 셈입니다.
신농의 유적지 중 중요한 곳은 네 곳으로 압축되는데 장소는 다르나 그에 대한 설명은 비슷합니다 첫 번째 유적지는 제가 다녀온 곳으로 아래에서 이야기 할 산서성 <염제고리>입니다. 두번째는 그의 무덤이 있는 <영능현>입니다. 그는 140년을 제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는데 호남성 주주시(株州市) 차능현에서 단장초(斷腸草)의 약효를 실험하다가 중독되어 묻힌 곳이 염릉현(炎陵縣)입니다. 차의 선조답게 그의 무덤 명도 차릉(茶陵)입니다. 세 번째는 앞에서 그의 출생지로 소개한 섬서성 보계시 강수입니다. 네 번째는 호북성 수주(隨州)시 여산(勵山)진인데 이곳에도 <염제신농열산명승구(炎帝神農烈山名勝區)>라하여 신농씨가 태어난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열산>은 이곳 <수주>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신농씨를 <남방상제南方上帝>로 모시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의 능이 이곳 남방인 호남성에 있는데 기인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섬서성 북쪽 황릉현에 묻힌 황제가 북방상제가 되었어야 하는데 북방상제는 <제곡 고신>이니 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신농씨는 산을 태워 짐승을 몰아내고 농지를 개척했다고 해서 '열산'(烈山)씨라고도 하고, 태양의 신으로 모셔지기 때문에 염제(炎帝)라고 불려집니다. 오행에서 불은 남쪽입니다. 그래서 남방상제라 불려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기禮記>에는 입하(立夏)일이 되면 임금은 남쪽 언덕에 올라 염제와 축융(祝融)에게 제사지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불의 신 축융은 염제 신농의 으뜸가는 신하입니다. 축융이나 물의 신 공공(共工)은 그의 자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3. 염제고리 제가 찾아간 곳은 산서성 진성(晉城) 고평시(高平市) 신농현에 있는 양두산(洋頭山) 양지바른 마을이었습니다. 이곳도 신농씨의 도읍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사당의 규모나 전시물이 예사롭지 않게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진성시 가까이 하남성 초작시(焦作市)에는 '신농산'이 있습니다. 이 곳에는 산 이름 그대로 신농씨의 상징물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이 일대가 다 신농씨의 영역인 까닭이겠습니다. 가까운 산서성의 성도(城都) 태원시 근처에는 그가 약초를 굽던 '솥'이 있고, 그가 관리했다는 '신농원 약초산(成陽山)'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농씨의 영역은 이곳 산서성인 것 같습니다. <삼황본기> 같은 데서는 하남성 회양이나, 산동성 곡부가 그의 도읍지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옛날에 '진(陳)'이라 불리던 현재의 회양에는 9개의 우물이 있는데 그가 태어날 때 9개의 구멍에서 동시에 샘이 솟아올라 '신농의 우물'이 되었다고 <사기색은(史記索隱)>은 소개합니다. 이 책에 의하면 이 강씨 성의 신농 왕조는 8대 530년을 누리다가 황제 헌원과 교체됩니다.
차 이야기 못 지 않게 <신농의 딸> 이야기가 장강 삼협을 지나는 길손의 귀를 즐겁게 합니다. 신농씨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셋이 있었는데 특히 그 막내딸 요희의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인구에 회자됩니다. 그녀는 이성의 사랑을 받는 기쁨도 모른 채 처녀의 몸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요절한 요희의 운명을 가련하게 여긴 옥황상제는 그녀를 장강 삼협이 있는 무산(巫山)으로 보내 구름과 비(雲雨)를 다스리는 신을 삼았습니다.
무산무협을 떠돌던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납니다. 춘추 전국시대 초나라의 '회왕(懷王)'이 고당의 대(臺)에서 쉴 때 그녀는 임금의 꿈에 나타나 황홀한 하룻밤을 보냅니다. 감동한 임금은 다시 만날 것을 간청하나 그녀는 '저는 무산의 신녀이온바 아침이면 구름이 되고, 저녁이면 비가 되어 항상 폐하 곁에 있겠나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그 이후 남녀가 나누는 육체의 즐거움을 '운우의 정'이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의 전말은 초나라의 궁정시인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에 전해지는데, 혹은 신농의 딸이 아니라 서왕모(西王母)의 딸이라고도 합니다,
신농 사당이 있는 산서성 진성시는 하남성 낙양(洛陽)에서 버스로 5시간 거리입니다. 낙양에서 진성(晉城)으로 직접 가는 도로는 태항(太行)산맥이 가로막고 있어서 아흔아홉 구비 아슬아슬한 곡예 운전에 숨을 몰아쉬게 하는데 이것도 지나고 나면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이 태항산맥을 경계로 산서성과 하북성이 나뉘고, 그 서쪽, 동쪽이라 해서 산서성, 산동성이란 이름이 생겼습니다.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에서 진성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면 오대산의 문수보살의 성지 현통사(顯通寺) 구경을 하며 남행하여 '신농사당'을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산서성 버스 번호판은 기(冀)자로 시작합니다. 기주의 옛 땅, 즉 춘추시대 진(晉)나라 땅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중국은 이곳 산서성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듯 요, 순임금의 자취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천년 고도 하남성 낙양에서 황하를 건너면 지척에 나타나는 산서성 남부 운성(運城)시에는 순임금과 관우사당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해(死海)같이 넓은 염호가 있는데 산등성이 높은 곳에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를 들고 지키고 서 있습니다. 운성시 북쪽은 임분입니다. 임분(臨汾)시에는 요임금 사당이 있고, 그의 유적이 발견된 도사촌(陶寺村)도 있습니다. 그 북쪽에는 평요고성(平遙古城)과 면산(綿山)에 개자추(介子推) 사당도 있습니다. 세상은 넓고 역사는 유구한데 길 떠난 나그네의 하루는 너무 짧기만 했습니다.
4. 선농단(先農壇) 서울동대문 밖 제기동의 선농단(先農壇)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국경은 존재해도 문명은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희랍신화와 로마신화의 접근성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조선 역대 제왕은 선농단에 와서 제사 지내고 풍년을 빌었는데 이 때 모시는 주신이 신농이고 차석에 모신 신이 후직(后稷)입니다. 후직은 순임금 때 농수산부장관격의 벼슬 명칭이고 원래의 이름은 기(棄)입니다. 왕이 친경했던 논을 적전(籍田)이라 하고 여기서 수확된 곡식으로 제를 올렸습니다.
이날 점심은 소를 잡아 국을 끓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설렁탕의 전신입니다. 지금도 이 전통을 이어 동대문구에서는 곡우가 지난 매월 4월 30일 옛날의 선농제를 재연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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