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황성신문과 황성기독교청년회
황성신문은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이하 청년회)에서 실시하는 강연회 소식을 거의 매주 보도하였다.
청년회는 1903년 10월 28일 수요일 저녁 8시 서울 유니온 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서울 YMCA(민경배). [서울 YMCA운동 100년사](1903-2003). 서울. 2004. P78 재인용)
1908년 청년회의 조직이- 회장 부회장 이하 8부로 편성되었는데,
그 중 종교부(宗敎部)의 사업개요를 보면,
매주 복음회(福音會)와 시내 각교당 연합회를 개최할 것이며,
별도로 3백명을 수용할 강의실을 설치하여 종교사무, 사경회 등 목적으로 사용할 것이다(앞의 책. P124 재인용)라 하였다.
또 청년회 대강당에서 매주 복음회를 실시함에 있어서 연사를 초빙하였는데
당시 국내에서 내노라는 유명인사들이었다.
곧, 지명도가 높은 이들이었으며 종교계 역시 대단한 실력자들이었다.
황성신문사장(류근), 프레스사장, 국민신보사장(한석진), 시크린톤 연세의사,
전덕기(구한말 상동교회의 전도사와 목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로 신민회와 상동청년회의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
최병헌(1893년 세례를 받은 후 전도사로 성서번역과 독립협회 등에 참여하고〈독립신문〉·〈황성신문〉등의 지면을 통해서
개화사상·정치개혁사상 등을 발표. 1902년 목사가 된 후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의 담임목사),
김규식(1904~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 YMCA 학생부 간사 및 교사, 경신학교 교사 및 교감,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냈다.
한편 종교활동에도 힘써 1910년에는 새문안교회 장로 ) 등등의 연사들.
그리하여 수준 높은 강의와 연설 그리고 설교를 듣기 위해 매주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그러므로 유명인들을 연사로 청하여 운영하던 복음회나 사경회는 매주 성황을 이루었고
이를 지속하고자 청년회 종교부는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러한 청년회에서 성결교회 전도사들을 연사로 청하여 강연과 사경회를 하였는데 그 소식을 황성신문이 보도하였다.
①정빈(청년회가 주최하는 사경회 연사) 황성신문 1908.2.7
일본에서 귀국한 1907년 5월에서 1908년 2월까지, 약 10개월 정도 활동하던 정빈에게
청년회로부터 사경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청년회관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그때 황성신문은 정빈을 동아복음전도관 주무라고 소개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아래와 같이 기사화하였다.
하지만 이 대한매일신보는 약 1년 후 비난의 첫 포성을 울렸다.
1. 황성신문
1) 제목: (종로)청년회 연설 2) 일시: 1908.2.7.오후7시
3) 장소: 청년회관 4) 내용: 사경회(진리 연구)
5) 강사: 정빈(동아복음전도관 주무 東亞福音傳道館 主務)
皇城新聞 1908.2.7
2. 대한매일신보
1) 제목: 청년 강설(講說) 2) 일시: 1908.2.7. 오후7시
3) 장소: 청년회관 4) 내용: 사경회(진리를 연구)
5) 강사: 정빈
大韓每日申報 1908.2.7.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가
당일 오후에 청년회에서 개회될 사경회 소식을 알릴 때
제목 외에는 어떠한 주제와 내용으로 사경회를 인도하였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청년회 내부 자료를 통해서도
그 강연 사실을 찾을 수 없기에 정빈이 어느 정도의 복음에 대한 깊이를 논하였는지 알 수 없음이 안타까움이다.
현 서울YMCA 병설 사단법인 월남시민문화연구소에서 보관중인 YMCA사회교육 연혁이라는 문건에 보면,
1909년 2월 2일 청회연설 7시에 사경회를 개최
진리를 연구하기 위해 동아 복음 전도관에 주무하고 있는 향빈씨가 강연을 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전되어져 있다.
동 연구소가 보관 중인
YMCA 사회교육 연혁이라는 타자로 정리되어져 있는 문건으로 ‘정빈’을 ‘향빈’으로 오타한 것으로 사료된다.
(자료관련 문건 원본을 복사하여 소장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