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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 遠 堂 略 史
발행 - 北 峰 公 宗 中 이영기 고문
○북봉공(北峰公) 휘(諱) 민선(敏善)의 약력(1548-1626)
공께서는 명종(明宗)3년 7월7일 1548년 무신년에 부(父) 통훈대부 덕천군수이시고 증(贈) 병조참판 휘(諱) 석명(碩明)과 모(母) 정부인(貞夫人) 진주 하(河)씨의 셋째 아들로 탄생하였으며, 자는 계진(季進)이요 호는 북봉(北峰)이시다.
시조공 총언(忩言)으로 부터 21세이며 조선조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떨친 평정공 노촌(老村) 휘(諱) 약동(約東)의 현손이시다.
일찍이 학문에 힘쓰시어 예학(禮學)을 전공하고 경전에 통달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양 선생께서 인정하시고 칭탄(稱歎)을 하셨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더불어 교유하셨다.
선조 15년(1582년) 임오(壬午)년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1594년 천제(薦除) 선공감역(繕工監役)
1595년 사복시(司僕寺) 의영고(義盈庫) 주부(主簿)를 거쳐 통훈대부
1596년 비안(比安:현 경북 의성군 비안면)현감
1602년 강음(江陰:현 황해도 금천군)현감
1613년 양천(陽川:현 서울 양천구.강서구 일대)현령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 성균관(成均館) 대성전이 불에 탄 것을 보고 공께서 제일먼저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들을 창도(唱導)하여 상소(上疏)를 올려 중건할 것을 청하여 윤허(允許)를 받았다.
1616년 광해8년 정국(政局)이 혼란함에 벼슬을 버리고 69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이끌고 선산 상구미 성남(별남)으로 낙남 하였다.
1626년 인조4년 5월9일 향수 79세로 하세(下世)하시어 동년 9월4일 광평 언덕 유좌에 장례하였다.
1663년 공의 몰 후 38년 둘째 감사(監司) 상일(尙逸)의 귀로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兵曹參判) 배 정부인에 추증(追贈) 되었다.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행장(묘지문)을 찬술(撰述)하고,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묘갈명을 찬하였으며, 문정공(文正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찬(撰) 하였다.
○北峰公(북봉공) 선산 낙남 유래
벽진이씨 시조(始祖)공 휘(諱) 총언(忩言)으로 부터 17세인 평정공 휘(諱) 약동(約東)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형조좌랑을 역임하고 통훈대부이신 한림공(翰林公) 휘(諱) 소원(紹元) 선조께서 해주정씨 할머니의 친정 곳인 통진 약산을 중심으로 하여 한성부(漢城府)에 정착 4대 100여년을 거주해 오다가, 선조(宣祖) 때 품계는 통훈대부로 비안. 강음. 양천 현령(縣令)을 역임한 입향조 북봉공(北峰公) 휘(諱) 민선(敏善) 할아버지께서 광해군 8년(1616년)인 병진(丙辰)년에 광해군의 실정으로 정국(政局)이 혼란하고 패륜(悖倫)의 조짐을 보이자 벼슬을 버리고 69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가족(家族)을 인솔하여 선산 상구미 성남(별남)으로 낙남(落南) 하여 향리의 존장(尊丈)으로 시골 사람들과 함께 낙동강의 물가를 오고 가면서 지팡이에 기대어 소요(逍遙) 하시다가 생을 마감하셨다.
이어 세 아들은 각각 상질(尙質)은 판관(判官). 상일(尙逸)은 감사(監査). 상달(尙達)은 현령(縣令) 등으로 현달(顯達)하여, 선산 구미 봉곡동(별남)에서 세거(世居) 하게 되었으며, 공(公)은 감사공의 귀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의 증직을 받으셨다.
선산 성남은 현재의 구미시 봉곡동으로 북봉공(北峰公)의 초취 부인 경주 노(盧)씨 할머니의 친정이며, 장인(丈人)인 부호(富豪) 장사랑(將仕郞) 노사성(盧思聖:경주노씨 족보에는 盧師聖)의 고장이다.
노사성은 무남 2녀를 두었는데 차녀는 봉곡(蓬谷)의 밀양 박씨에게 출가 하였고, 외손인 판관공 상질(尙質)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분묘(墳墓) 수호와 제사를 받들어 모시고 있고, 또한 성남에서 멀지 않은 곳 형곡동 사창리에는, 종친인 판서공 이심지(李審之)와 생육신의 한 사람인 경은(耕隱) 맹전(孟專) 부자(父子)의 낙향 세거지 이기도 하며, 인동이 고장인 문강공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과도 교류 지정이 깊어 선산으로 낙남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구미에 세거 한지 오늘날까지 400년이 넘는다.
추원당 재실은 본래 광평동 남쪽에 있었는데 오랜 세월로 허물어져 갑술년(1874년) 9월에 시공 준공하여 고유하고 을해년(1875년) 승오(承午)공,무인년(1878년)에 재기(再基) 공께서 지은 이건기(移建記)가 남아 있다.
현재의 추원당은 4칸 튓마루 집으로 신축년(1901) 2월 당화(堂和) 공께서 지은 상량문이 남아 있고
완공 후 추원당 운(韻)자로 지은 시 7수가 재실 안에 현판 되어있다.
추원당 외삼문은 정축년 1997.9.6.일 상량하여 현재까지 이어 오고 있다.
추원당 주련(柱聯)
성남제월(星南霽月) 성남에 구름 개이니 달이 밝아라.
청백가성(淸白家聲) 청렴하고 결백함은 우리 가문 명성이요.
충효세훈(忠孝世訓) 충직하고 효우함은 세습되는 가훈이라.
광릉화풍(廣陵和風) 광평 언덕 추원당에 봄바람 분다
추원당(追遠堂) 외삼문(1997. 9. 6. 상량)
증(贈) 정부인 경주 노씨지묘 묘갈(墓碣)
경기 김포시 대곶면 약산리에서 1997년 3월 이장(移葬)시 가져온 묘갈로 경술(1670년) 윤2월에 비를 세우고 전 감사(監司) 상일(尙逸)이 기록하고 무오(1678년)에 고쳐 세웠다는 내용이 마모되고 보기 어려워 우측편에 새 모형 비를 세움.
북봉공(北峰公) 민선(敏善) . 정부인 노(盧)씨. 김(金)씨 묘소
북봉공 이민선(李敏善 1548-1626) 향수 79세로, 1616년 서울 노원에서 선산으로 낙남 하여 10년을 소요하다가 돌아가시어 이곳 광평 언덕에 장례하였고,
초취 증(贈) 정부인 경주 노씨 할머니는 장사랑 노사성(盧思聖)의 따님으로 (1550.4.6.-1579.8.20.) 향년 30세로 돌아가시어(육 1남2녀) 경기도 통진군 약산면 증조부 한림공(紹元) 옆 능선에 장례하였다가 약산 일대의 도시개발로 인하여 1997년 3월 이곳으로 이장 하였으며
재취 증(贈) 정부인 강릉김씨 할머니는 장사랑(將仕郎) 김봉(金篈)의 따님으로(1565.5.28.-1639.7.16) 향수 75세로 돌아가시어 이곳에 장례하였고 슬하에 2남 3녀를 길렀다.
북봉공(北峰公) 민선(敏善) 묘갈
이 묘갈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공께서 지은 것으로 뒤편 글씨는 숭정 임오년(1642년) 12월에 감사공 이상일(李尙逸)의 친필로 기록하였고, 전면 글씨는 북봉공의 손자이자 감사공의 장남인 이지(李墀) 단성공의 친필 글씨로 숭정 병자 후 71년 경술(1706)년 9월에 세운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금석문이다.
※ 전면에 성주(星州) 이공 민선(敏善)으로 기록된 것은 벽진의 이름이 성주로 고쳐졌기 때문에 벽진이씨를 조선 중기인 당시에는 성주이씨로 기록한 것임.
(국조 방목 등 여러 문헌에 나타남)
※ 묘갈(墓碣) : 묻힌 사람의 이름 및 행적을 기록하여 묘지 앞에 세우는 둥근비석으로 비에 사각대와 둥근 머리를 씌워서 갈(碣)이라 하였다.
※ 묘비(墓碑) : 묻힌 사람의 이름 및 행적을 기록하여 묘지 앞에 세우는 네모난 비석으로 사각 받침대와 지붕 모양의 갓을 씌워 비(碑)라고 하였다.
※ 묘지명(墓誌銘) :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묻힌 사람의 이름 행적 등을 돌에 새겨 땅에 묻는 것을 말한다.
陽川縣令 李公 墓碣銘
신독재전서 제7권 묘갈명(墓碣銘)
김집(金集:1574(선조 7)∼1656(효종 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湖西亞使李君尙逸。携其家狀。過余請曰。先君歿有年而墓無樹。恐無以發潛德飭稚昧。願得子一言爲不朽圖。余辭非其人而不可得。乃考次其世族官行與夫生卒始終而敍之曰。公諱敏善。字季進。星州人也。其先有曰忩言。佐麗祖。以功拜將軍。子孫仍顯焉。高祖諱約東。有通才著廉名。卒官知中樞。諡平靖。曾祖諱紹元。刑曹佐郞。祖諱有蕃。參奉贈承政院左承旨。考諱碩明。郡守贈兵曹參判。妣晉州河氏。參奉繼雲之女。文孝公演之裔也。以嘉靖戊申十月生公。早業文選。壬午上舍。壬辰新去亂。公首入泮。愍殿宇俱燼。倡多士疏請重建。士論多之。甲午。薦授繕工監役。遷主司僕寺,義盈庫簿。出補北安,江陰,陽川三縣。所在皆擧職。旣歷仕久。年益高。不樂居京師。歲丙辰。盡室而南。寓居善山之田舍。日與鄕人。杖屨逍遙餘十年。丙寅三月。考終于第。年七十有九。用其年九月。葬金烏山麓 酉坐之原。李氏世葬通津。至公始卜于此。公天性慈祥。孝友純至。謙謙自飭。口不道人過。處宗戚鄕黨。皆得歡心。爲官一於廉。三典邑。家無長物。君子以爲能繩祖武焉。初娶盧思聖女。後娶參奉金崶女。有三男五女。男長尙質。蔭仕監牧官。次卽亞使君。文科曾任司憲持平。次尙達。厚陵參奉。女士人朴鼎實,忠義衛柳泰華,參奉李欽臣,司藝崔基銆,學諭李純馣。尙質男垣,墉。皆夭。女二人朴鼎實男守弘文科慶州府尹柳泰華男埱堉埴女三人。其餘內外孫曾。不盡記。銘曰。
彊而仕老而止。祿則旣獲兮。亦旣有齒。于以杖於鄕兮。
終吾身以倘徉。積厚者發必光兮。宜爾振振其彌昌。
我有文兮刻之貞石。烏山洛波兮與共長。
양천현령 이공 묘갈명 (陽川縣令 李公 墓碣銘)
신독재전서 제7권 묘갈명(墓碣銘)
김집(金集:1574(선조 7)∼1656(효종 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호서(湖西)의 아사(亞使) 이군 상일(尙逸)이 가장(家狀)을 들고 나를 찾아와 청하기를, “선군(先君)이 돌아가신 지가 몇 해 되었는데, 묘 앞에 세워 놓은 것이 없어 그분의 숨겨진 덕을 어리석은 자손들이 모를 염려가 있으므로 선생의 말 한마디로 영원히 전할 수 있는 산 증거를 삼을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했지만, 이에 그의 가계와 관직 그리고 생졸(生卒)의 시말(始末)을 추려 이렇게 엮은 것이다.
공은 휘가 민선(敏善)이고, 자가 계진(季進)인데, 벽진인(碧珍人)이다. 선대에 총언(忩言)이라는 분이 있어 고려 태조를 보좌한 나머지 공을 세우고 장군이 되었는데, 그 후부터 자손들이 현달하게 되었다. 고조는 휘가 약동(約東)으로 능통한 재주를 지녔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있었으며, 관직은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가 평정(平靖)이었다. 증조는 휘가 소원(紹元)으로 형조 좌랑을 지냈고, 조부는 휘가 유번(有蕃)으로 참봉을 지냈는데 승정원 좌승지를 추증받았고, 고(考)는 휘가 석명(碩明)인데, 군수를 지내고 병조참판을 추증받았으며, 비(妣)는 진주하씨(晉州河氏)로 참봉 계운(繼雲)의 딸이고 문효공(文孝公) 연(演)의 후예이다.
공은 가정(嘉靖) 무신년(1548) 10월에 태어났고, 일찍부터 학문을 업으로 삼아 임오년(1582)에 상사(上舍)로 뽑혔다. 임진년(1592) 난리가 지나간 후 공은 맨 먼저 성균관에 들어가 전우(殿宇)가 다 불타 버린 것을 보고는 선비들의 앞장에 서서 중건할 것을 상소로 청하였으니, 그러한 일을 선비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갑오년(1594)에 와서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관이 되었다가 사복시와 의영고(義盈庫)의 주부를 역임했고, 외직으로 비안(比安), 강음(江陰), 양천(陽川) 세 고을을 맡아 다스리기도 했는데, 간 곳마다 치적(治積)을 남겼다. 오랜 관직 생활에 나이마저 들어 서울에 있기가 싫어져서 병진년(1616)에 식구들을 데리고 남으로 내려가 선산(善山)의 농가에서 살았는데, 날마다 그 고을 사람들과 어울려 노닐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지내다가 병인년(1626) 3월에 79세로 세상을 마쳤고, 그해 9월에 금오산(金烏山) 기슭에다 유좌(酉坐)로 장례를 모셨다. 이씨의 선영은 통진(通津)에 있었으나, 공의 대에 와서 그곳을 묘소로 정했던 것이다.
공은 천성이 인자한 데다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으며, 겸손하고 또 겸손하여 입으로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일가친척은 물론 고을 사람들 모두에게도 환심을 샀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으로 일관했으므로 고을을 세 군데나 맡아 다스렸어도 집에 이렇다 할 물건 하나 없을 정도였으니, 군자들이 조선(祖先)의 법도를 잘 계승했다고 말하였다.
처음에는 노사성(盧思聖:경주노씨 족보에는 盧師聖)의 딸을 아내로 맞았었고 뒤에는 참봉 김봉(金崶)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모두 3남 5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상질(尙質)은 음사(蔭仕)로 감목관(監牧官)이고, 다음은 바로 상일(尙逸)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으며, 다음 상달(尙達)은 후릉 참봉(厚陵參奉)이다. 딸들은 선비 박정실(朴鼎實), 충의위(忠義衞) 유태화(柳泰華), 참봉 이흠신(李欽臣), 사예(司藝) 최기백(崔基銆), 학유(學諭) 이순암(李純馣)의 아내가 되었다. 상질의 아들은 원(垣)과 용(墉)인데 다 일찍 죽었으며, 딸은 둘이다. 박정실의 아들은 수홍(守弘)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부윤(慶州府尹)이고, 유태화의 아들은 숙(埱),육(堉),식(埴)이고, 딸은 셋이다. 그 나머지 내외 손증(孫曾)들은 다 적지 않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젊어 벼슬하고 / 强而仕
늙어 그만두었으니 / 老而止
녹도 받아보고 / 祿則旣獲兮
수도 누리었네 / 亦旣有齒
그러다가 시골로 내려가 / 于以杖於鄕兮
세상을 마칠 때까지 노닐었다네 / 終吾身以倘徉
쌓임이 많으면 빛을 발하는 법 / 積厚者發必光兮
진진한 자손 더욱 번창한 것 당연하지 / 宜爾振振其彌昌
내 이 글을 빗돌에 새기노니 / 我有文兮刻之貞石
오산 낙파와 함께 영원히 전하리/烏山洛波兮與共長
북봉공(北峰公) 민선(敏善) 신도비(神道碑)
구미시 광평동 산 531-3
이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께서 지은 것으로 숭정4정축(1817년) 4월에 건립되었으며 비신은 높이 180센치 정도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화강암으로 글씨는 문강공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공이 썼고 전자(篆字)는 화천(華泉) 이채(李采: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손자)의 글씨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금석문이다.
※ 신도비(神道碑) : 무덤으로 가는 길을 신도(神道:신령의 길)라 하는데 거기에 세운 비석이다. 무덤의 동남쪽에 세우는 데 조선 때에는 2품관 이상만 세울 수 있었다. 받침석으로 귀부(龜趺), 비신(碑身), 용트림 머리는 이수(螭首) 라고 한다.
陽川縣令贈兵曹參判李公神道碑銘 幷序
陽川縣令贈兵曹參判李公(이민선)神道碑銘 - 송시열(宋時烈)
尤菴 송시열(宋時烈)(1607 : 宣祖40 ~ 1689 : 肅宗15)의 文集이다
余少也。因外舅都事李公。則聞陽川縣令李公行義。外舅嘗曰。余早失怙恃。育於母家。季舅陽川公憐而撫愛特甚。旣養而又敎之。余之長而上舍。皆季舅之賜也。余已知陽川公當於古人中求也。旣而與公胤子監司公遊。見其居喪有禮。在官淸愼。又知公家法非今世所有也。公以天啓六年丙寅五月九日歿。葬于善山治之南面金烏山下酉坐卯向之原。後三十八年。以監司公貴。朝廷贈公兵曹參判。配盧氏,金氏。俱贈貞夫人。先是監司公乞文於旅軒張先生誌公之墓。而愼齋金先生又記其表陰矣。今又以公贈旣隮亞卿。準格當有豐鐫于神道。俾余書其事。謹按故高麗上將軍忩言。太祖朝有大功。啓封於星州。其後遂爲星州人。至平靖公諱約東。以通才淸節。著名本朝。官至知中樞府事。是公高祖。是生諱紹元。登文科。卒官刑曹佐郞。是生承旨諱有蕃。是生郡守諱碩明。娶晉州河繼雲女。公其第三子。諱敏善。字季進。少以文藝爲業。年三十五。捷壬午司馬。文廟遭燼于寇亂。國家未遑重建。寇退。公首先入泮。倡多士疏請之。遂蒙允許。士論多之。薦補繕工監役。陞爲司僕寺主簿。遷義盈庫。出監比安。復令陽川縣。事皆修擧。旣而年齡漸高。益厭紛囂。自京師絜家南下。居于嶺表之善山。日與鄕人杖屨阡陌間。居與旅軒先生廬隔江相望。每佳辰令節。一棹相從。悠然有洛社之致。蓋公屢典縣邑。而家益寒儉。年旣耆艾。而精力堅悍。族姓險易異心。而戚疏皆親愛之。家有賢子。隆以追恩。則人又不侈其榮。而樂道其德曰。是宜其有是也。公可謂賢矣。余少時則可爲淺之爲知也。廬夫人。其考諱思聖。生男尙質。監牧官。女壻士人朴鼎實,柳泰華。金夫人考諱崶。生尙逸。卽監司公。尙達縣令。女壻參奉李欽臣,司藝崔基銆,持平李純馣。尙質男垣,墉。女爲呂漷妻。監司三男。墀縣監。坡郡守。埰都事。二女適郭之翰,金天燮。尙達男㙫縣令。埱,墇。女適吳相圭。朴鼎實男守弘府尹。柳泰華男墣,堉,埴。埴直長。女三人。李欽臣男命耆,命耇。女適李燁。李純馣男云泰,云康。女適參奉申翰宣。垣男志茂,志萬,志苾,志英。女二人。墉男志興。呂有三男。亨徵,明徵,裕徵。墀男志長,志望,志容,志寬。坡男志奭,志尹。埰男志安,志完,志憲。郭有二男。喜遠,喜慶。朴府尹男震煥。而正郞重輝,司諫增輝其出也。內外曾玄孫百九十餘人。外舅德泗其名也。
銘曰。
星李麗初。肇自將軍。厥緖遙遙。平靖紹聞。四世而公。早攻斯文。爰升太學。値寇之焚。公倡多士。克上疏言。於樂泮水。復采其芹。入官試吏。皆著仁恩。旣倦于遊。厭其世紛。乃退而休。洛江之濆。杖屨逍遙。課我耔耘。屋宇窈靚。長我子孫。晩歲淸福。集我蓬門。七十而九。隨化歸根。有子立揚。屢典王藩。略苞山河。玉節朱幡。聖上褒嘉。聿追其原。貤以亞卿。號名斯尊。告慶于廟。篆事于墳。烏山峨峨。其水沄沄。惟此一丘。庶幾永存。
양천현령 증 병조참판 이공 신도비명 병서
陽川縣令贈兵曹參判李公(이민선)神道碑銘 - 송시열(宋時烈)
尤菴 송시열(宋時烈)(1607 : 宣祖40 ~ 1689 : 肅宗15)의 文集이다
내가 소시(少時)에 외구(外舅:장인) 도사(都事) 이공에게 양천현령 이공의 행적과 의(義)로 움을 들었다. 외구(장인)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길러졌는데, 막내 외숙인 양천공(북봉공)이 불쌍히 여겨 어루만져 사랑하심이 특히 남달랐으며, 이미 길러주고 또 가르쳤으니 내가 자라서 진사(進士)가 됨이 모두 막내 외숙의 베풀어 주신 은혜라” 하였다.
이에 나는 양천공은 마땅히 옛 성현(聖賢) 중에서 찾아야 함을 알았다. 그 후 내가 공의 아드님 감사공과 더불어 교유하여, 그 상사를 치름에 예법이 있고, 벼슬살이에 청렴 근신함을 보았고 또한 공의 집의 법도가 오늘날 세상에 있기 어려움을 알았다. 공은 인조(仁祖) 4년(1626년) 5월 9일에 하세(下世)하여 선산군 남쪽 금오산 아래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로부터 38년에 감사공이 귀히 됨에 조정에서 공에게 병조참판을 추증(追贈)하고 배위인 노(盧)씨와 김(金)씨에게도 함께 정부인(貞夫人)을 추증 하였다. 이보다 앞서 감사공이 여헌(旅軒) 장선생의 글로서 공의 묘에 지문을 하고, 신독재(愼獨齋) 김선생이 묘갈문을 지어 기록하였는데, 이제 또 공의 증직(贈職)이 아경(亞卿:참판)에 오름으로써 품격에 맞추어 마땅히 신도에 공덕을 기리는 비(碑)가 있어야 한다하여 나에게 그 글을 쓰게 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옛날 고려의 대장군 총언(忩言)이 태조(太祖) 조에 큰 공이 있어 비로소 성주에 봉하여졌으니, 그 후에 후손이 성주 사람이 되었다. 평정공(平靖公) 휘 약동(約東)에 이르러, 경서(經書)에 통달하고 문무(文武) 재능에다 청렴(淸廉)과 충절(忠節)로 이름이 조야에 나타나고 벼슬이 중추부 지사에 이르렀으니, 바로 공의 고조부이시다. 이분(평정공)이 휘 소원(紹元)을 낳았으니,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을 지냈고, 좌랑이 승지 휘 유번(有蕃)을 낳았으며, 승지께서 군수(증 병조참판) 휘 석명(碩明)을 낳아서 진주 하씨 계운(繼雲)의 따님에게 장가드시니, 공은 그 셋째 아드님으로서 휘는 민선(敏善), 자는 계진이다.
소시에 문예로 학업을 하시고 선조 15년(1582년)에 35세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대성전이 왜란에 불탔으나 나라에서 이를 다시 지을 경황이 없었는데, 공이 맨 먼저 성균관에 들어가서 선비들을 창도하여 상소를 올려 중건 할 것을 청하여 드디어 윤허(允許)하심을 입었으니, 사류의 공론이 이를 찬미(讚美)하였다. 천거로 선공감역에 보직되어 사복시 주부에 오르고, 의영고로 옮겼다가 비안 현감이 되어 나갔으며 다시 양천현령이 되었으니,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연세가 점점 많아지자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여 서울에서 권솔(眷率)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영남의 선산에(지금의 구미시 봉곡 별남) 살면서 날마다 시골 사람과 함께 밭 두덕 길을 작지 집고 거닐었다. 그 사는 곳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선생 집과 낙동강을 간격하여 서로 바라다 보였으니 화창한 날이나 명절에는 한 척의 배를 띄워 서로 좇아 놀아서 유연히 낙사의 운치가 있었다.
공께서는 여러 번 고을 원이 되어 다스렸건만 가세(家勢)는 더욱 빈한(貧寒)하여지고, 나이가 많으심에도 정력은 굳세었는데 족성(族姓) 의 선하고 선하지 못한 이와 마음을 달리하는 당파(黨派) 친소(親疎)간에 모두가 다들 친근하고 사랑하며 존경하였다. 집에는 어진 아들을 두어 귀히 됨으로써 은전(恩典)이 추증(追贈)되었으니, 사람들은 그 영화스러움을 사치하다 여기지 않고 그 덕망을 말하기를 이분에게는 이와 같은 영화가 있음이 당연하다고 즐겼으니 공은 진실로 현인군자이시라, 내가 소시 적에는 공을 깊이 알지 못하였음이로다.
노(盧)씨 부인은 아버지의 이름이 사성(思聖)이며 아들 상질(尙質)은 감목관이고, 사위 박정실(朴鼎實:증 이조참판), 유태화(柳泰華)다. 김(金)씨 부인은 아버지의 이름이 봉(崶)이며 아들 상일(尙逸)이 곧 감사공이고, 상달(尙達)은 현령이며 사위는 참봉 이흠신(李欽臣), 사예 최기백(崔基銆), 지평 이순암(李純馣)이다.
상질(尙質)의 아들은 원(垣)과 용(墉)이고 딸은 여곽의 아내가 되었다. 감사(監司)에는 세 아들이 있으니 지(墀)는 현감, 파(坡)는 군수, 채(埰)는 도사(증 이조참판)이고, 두 딸은 곽지한과 김천섭에게 시집갔다. 상달(尙達)의 아들 집(㙫)은 부사이고 그 다음은 숙(埱)과 장(墇)이고 딸은 오상규에게 시집갔다. 박정실의 아들 수홍(守弘)은 경주부윤이고 유태화의 아들은 엄(埯)과 육(堉). 식(植)이니 식(植)은 직장이고 딸은 셋이 있다. 이흠신의 아들은 명기(命耆). 명구(命耈)이고 딸은 이염에게 시집갔다. 이순암의 아들은 운태(云泰). 운강(云康)이고 딸은 신한선에게 시집갔다.
원(垣)의 아들은 지무. 지명. 지만. 지필. 지영이고 딸은 둘이다. 용(墉)의 아들은 지흥이다. 여곽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형덕. 명덕. 유덕이다.
지(墀)의 아들은 지장. 지망. 지용. 지성. 지해. 지하. 지명. 지만이고 딸은 우재 조지겸(趙持謙) 에 시집갔다.
파(坡)의 아들은 지석. 지윤이고 채(埰)의 아들은 지안. 지완. 지헌이다
곽지한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희원과 희경이고 박부윤(守弘)의 아들은 진환이니 정랑 중휘와 사간 증휘는 그의 소생이다. 내외 증손, 현손이 190여 인이다 나의 외구(外舅)의 이름은 덕사(德泗)이다.
명(銘)하여 말하노니
벽이(碧李)는 고려 초에 장군으로부터 창시 되었으니
그 통서가 아득히 멀고 평정(平靖)이 뒤를 이어 세상에 알려졌네
그 후 4대에 공이 나와 유학(儒學)을 공부하여
태학(太學)에 올랐으나 왜구(倭寇)의 분탕(焚蕩)을 만났으니
공께서 선비를 창도(唱導)하여 중건 소청 하였었네
성균관에서 즐기시고 다시 미나리를 캐시었네
벼슬길에 드시고 고을살이 하면서 인정(仁政)하여 은혜를 베풀었고
관로에 지치고 세분함을 싫어하여
물러나 낙강의 물가에 쉬시며 지팡이에 기대어 소요하면서 농사일을 살피셨네
그윽하고 고요한 집에서 자손을 길러내어
만년에 청복(淸福)이 띠 집을 매웠으며
일흔아홉 나이로 천수(天壽)를 다하셨고
아들이 입신(立身)하여 왕번(王藩:승정원. 사헌부. 사간원)을 역임하고
산하를 누비면서 옥절(玉節)과 주번(朱幡)으로 치적이 크시었네
임금님이 가상히 여겨 포상함이 조상에 미쳐
아경(亞卿:참판)에 추증하는 은전을 입어
북봉(北峰) 만큼 명성이 높아 지셨네
경사(慶事)를 사당(祠堂)에 고하고 분묘에 전사(篆事)하노니
금오산 높고 낙강 물 다함 없듯이 묘비(墓碑) 영원하리라.
북봉공(北峰公) 민선(敏善) 증(贈) 가선대부 병조참판 교지
이 교지는 복봉공 몰(歿)후 38년차인 서기1662년 차남 감사공 상일(尙逸) 공께서 영해 부사에서 경부 부윤(종2품)으로 승차하자 공은 병조참판으로, 경주노씨, 강릉김씨 할머니는 숙인에서 정부인으로 함께 증직된 교지임.
북봉공(北峰公) 민선(敏善) 숭모비(崇慕碑) 구미시 봉곡동(별남)189-5번지
이 숭모비는 북봉공 할아버지의 유덕(遺德)을 숭모(崇慕)하고 추념(追念) 하기 위하여 낙남(落南) 유지(遺址)인 구미시 봉곡동 242-2(성남:별남)에 2008년 4월에 북봉공 종중에서 세웠으며 도시개발로 인하여 2015년 현 위치인 모선재(판관공 재사) 옆으로 이전하였다.
제막식(除幕式) 고유문(告由文)
엎드려 생각하오면 아! 선생께서는 지행(知行)과 덕망이 높아 유림의 종장(宗匠)으로 복봉(北峰)이라 호(號) 하시고 경기도 양주 고을 노해(蘆海)에서 생장하여 여기는 영남 금오(金烏)의 한구석 길지를 택하여 집을 지으시니 마을 이름이 별남이 되었다오. 임진년 왜란(倭亂)으로 병화(兵火)를 입어 대성전(大成殿) 묘당(廟堂)이 불타 버렸기 태묘(太廟)를 중건(重建)코자 임금님께 소청(疏請)하여 큰 공을 세우고 청결(淸潔)한 수행과 후덕(厚德) 쌓으시어 선대 덕업 이으시고 의방(義方)으로 교화(敎化)하니 천추에 전한 명성 한 조각 돌에 세겨 유덕을 숭모하고 추념합니다.
엎드려 바라나니 존령께서는 이 비석에 의빙(依憑)하고 평안하소서.
북봉산 정상의 북봉정(北峰亭) 해발388m 구미시 봉곡동 산1-1
북봉공 이민선(李敏善1548-1326) 선조께서 광해군의 폭정으로 인하여 벼슬을 버리고 1616년 가솔을 이끌고 이곳 북봉산 아래 멱우골(覓牛谷:현 구미시 봉곡동)로 낙남 하여 살면서 산의 이름을 따서 아호(雅號)를 북봉(北峰)이라 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도상에 다봉산(多峰山)으로 표기 되고 있어, 북봉공 중중에서 구미시에 지명을 바꿔 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국가지명위원회의 심의에 따라 2011년8월 북봉산(北峰山)으로 변경하였고 구미시에서 북봉정이란 정자를 지어 등산객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의 다봉산(多峰山)은 해발332m로 북봉산에서 동남쪽700m 지점에 있는 산이다.
모선재(慕先齋) 판관공 상질(尙質) 재실 구미시 봉곡동(별남)189번지
판관공(判官公) 이상질(李尙質) 약력
1569(선조2)∽1634(인조12) 향년66세
벽진이씨 22세이며 북봉공 민선(敏善)의 장남이다.
자는 여빈(汝彬)으로 선조38년(1605) 사마시(司馬試)에 입격 증광무과(增廣武科)에 등제하여 통훈대부 기장(機張)현감을 거쳐 해주(海州)판관을 역임 하였다.
문무를 겸비하였고 의(義)가 아니면 좇지를 아니하고 인(仁)이 아니면 행(行)하지를 아니한 청백 목민관의 치적은 만인(萬人)의 경모(敬慕) 대상이 되어왔다.
광해10년(1618)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幽閉)하려 할 때 정신(廷臣) 이시백. 김식. 조국빈 과 뜻을 같이하여 불의를 극간(極諫) 하였으나 성수(成遂)치 못하자, 즉시 벼슬을 버리고 선산의 성남(星南)으로 낙남 가군(家君)을 모시고 사가(私家)에서 삼락(三樂)의 경지에 전념했다.
감사공(監司公) 상일(尙逸) 신도비(神道碑)
구미시 광평동 산 531-3
이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께서 지은 것으로 비신은 높이 210센치이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화강암으로 글씨는 족후손(族後孫) 문학박사 종은(鍾殷)이 썼고, 1985년도에 감사공 종중에서 비산동 1-1번지 산 입구에 세웠던 것을 땅이 사유화되면서 2015년 이곳으로 이전 건립하였다.
감사공(監司公) 이상일(李尙逸) 약력
1600년(선조 33)∽1674년(현종 15) 향년75세
벽진(碧珍)이씨 22세이며 북봉공 민선(敏善)의 차남이다.
자는 여휴(汝休), 호는 용암(龍巖).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18년(광해군 10) 광해군의 문란한 정사를 피해,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선산으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0년(인조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성균관 박사를 거쳐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었다.
입시(入侍)해 사초(史草)를 지을 때 글을 거침없이 쓰니, 왕이 매우 기뻐해 말 한 필을 상으로 내려준 일이 있었다. 1636년 황해도 도사로 있을 때 청나라의 침입을 맞아 감사를 대신해 산성을 지키고, 적의 포로가 된 주민들이 탈출해 오자 이를 보호하였다. 한편 적병 100여 명을 잡았으나 무공을 조정에서 알지 못했다 한다.
효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장령으로서 김자점(金自點) 일당의 죄를 거론해 김자점을 귀양 시켰다. 이듬해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진주목사로 있을 때 정사를 잘해 다시 소환되어 세자시강원 보덕이 되었다. 그러나 1654년(효종 5) 폐서인(廢庶人)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 강씨(姜氏)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 사형된 감사 김홍욱(金弘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되고 성주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이듬해 다시 안동부사에 기용되고 여러 곳의 부사를 지낸 뒤 참의·승지·판결사를 역임하였다. 1664년(현종 5)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6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그 지방의 학교 시설을 적절히 폐치(廢置), 정리해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이 지방의 민폐에 관한 옛 사실이 현종의 노여움을 사 체포되었으나, 당시 상신(相臣)인 이경석(李景奭)이 왕에게 간청해 용서받고, 제조(諸曹)의 참의·승지에 제수되었다.
1652년 3월 진주 목사로 재임시 김천의 진사 현룡(見龍), 합천의 수재(秀才), 수억(秀檍) 공과 함께 발의하여 우리 문중의 처음 족보인 임진(壬辰) 대동보를 편찬 간행하셨다.
1662년 4월 추원당 계권(契券)을 기록하여, 재실의 이름을 추원당(追遠堂) 이라 짓고 낙성 계획을 세웠으며, 박답(薄畓)을 내어놓아 묘직이를 정하고 제사(祭祀)의 절차와 제수(祭需)의 법식 등을 규정하였다.
1668년 4월 강원 관찰사 재임시 선산의 삼인록(농암 김주(金澍). 단계 하위지(河緯地), 경은 이맹전(李孟專))을 저술하였다.
창평공(昌平公) 상달(尙達) 묘소 구미시 상모동 산57-1번지
창평공(昌平公) 이상달(李尙達) 약력
1606(선조 39)∼1664(현종 5) 향년59세
벽진이씨 22세로 북봉공 민선(敏善)의 3남이다.
자는 여승(汝昇)이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6세에 능히 글을 지었으며, 문사가 풍부하고 필법(筆法)도 또한 신묘하였다.
인조 신사년(1641)에 재행(才行)으로 천거되어 후릉(厚陵) 참봉이 된 후 사섬시 봉사 의금부도사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시고 고창. 청산 현감을 거쳐 통훈대부 창평(昌平) 현령에 이르렀다.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니 임금이 표리일습(表裏一襲 : 속과 겉의 옷감 한 벌)을 하사(下賜) 하였다.
창평(현 담양군 창평면) 현령 부임(赴任) 중 관사에서 득병(得病) 하세(下世)하였으며, 유언으로 관물로 염습(殮襲)하지 말라 하였으며, 유명(遺命)대로 하고 우차(牛車)로 운구하여 선산의 선영에 안장하였다.
한림공(翰林公) 이하 5대까지의 자손록
(18世) 소원(紹元) 좌랑(佐郞) (생 -1504.5.24卒)
자는 인숙(仁叔) 성종 14년 계묘년(1483년)에 생원이 되고, 연산7년 신유(1501년) 이부방(李頫傍) 文科에 丙科 24인으로 등과(登科)하였으며, 한림(翰林)에 임명되어 벼슬이 통훈대부 형조 좌랑에 이르렀다. 기일은 5월24일이다.
배는 해주정씨 무자(1528년) 5월 24일에 졸, 부는 판관 자주(自周) 외조는 부사 이긴(李緊) 양성인(陽城人)이다. 묘는 김포 통진 약산 유좌 유혈 쌍분이며 각각 표석이 있었는데 1999년 10월17일 포천군 화현면 화현리 산38-7에 이장하고 수갈(竪碣)하다.
(19세) 유번(有蕃) 승지(承旨)
무공랑(務功郞) 참봉 중종26년 신묘(1531년) 10월 15일졸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증직되었다.
배는 이씨 경인(1530년) 10월22일 졸 묘는 선고영좌로 한 골짝 넘어 첫 번째 등선 무좌 쌍분이고, 표석이 있으며 글 없는 신주를 만들어서 양묘 사이에 묻었다. 1999년 10월17일 포천군 화현면 화현리 산38-7에 이장하고 수갈(竪碣)하다.
자 : 석명(碩明) 군수역임 증 병조참판 →덕천공
(19세) 유무(有茂) 정랑(正郎)
생원(生員) 무과(武科) 통훈대부 교동현감과 형조정랑을 지냈다.
장남 : 준명(峻明) 예빈사 별좌 역임 → 별좌(別坐)공파
차남 : 언명(彦明) 무과 이산군수 역임 → 무후
3남 : 극명(克明) 충순위(忠順衛)이다 → 무후
4남 : 홍명(弘明) 무과에 급제하여 사도진의 수군 첨절제사로 임진왜란시
이순신 휘하에서 활동함 →사미정(四美亭)공파
5남 : 세랑(세良) 장낙원 직장(直長) 역임 →직장공파 →7대손 화서 이항로
(20세)석명(碩明) 군수 증 병조참판(郡守 贈 兵曹參判)
자는 경현(景顯) 호는 죽천(竹泉) 중종8년 계유(1513년) 3월8일생 병오(1546년) 생원이 되고, 기유(1549년)에 처음 관로에 나가시어 내직으로 전생서 참봉 제용감 영숭전을 거쳐 평시서 및 광흥창봉사로 상서원직장 한성참군 서부주부 통예원인의 사헌부감찰 상서원판관 장예원 사평을 세 번이나 역임 하시고 사의(司議)를 지내셨다.
외직으로 거창현감 금성현령 덕천군수를 역임하시고, 초증(初贈) 승정원 좌승지이고 후증(後贈)은 가선대부 병조참판이시다. 공은 천성이 자량하시고 약령에 양친 상을 당하여 상례를 다하여 여묘 살이 하시었고, 학문만을 즐기시고 외화(外華)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조정에서 청백리를 녹선(錄選) 할 때 전조(銓曹)에서 공을 응선(應選)하니 공께서 이를 사절(辭絶)하고 불응하셨다.
오직 청렴결백으로 공무에 봉임하시고 송무(訟務)에 공평하였으며, 읍민을 관서(寬恕)하고 베푸심을 후의 하셨고 청수(淸水) 같이 염백(廉白)하셨다. 거(居)하여 사시는 집이 세고 석가래가 썩어 무너져서 수리를 청하니 아직 용슬(容膝)의 여지가 있으니 무엇 때문에 수선하고자 하느냐 하셨다.
배는 증 정부인 진주(晋州) 하씨(河氏) 신미(1511년)1월12일생 무자(1588년) 2월21일졸 묘는 좌랑공 영(塋) 한등선 넘어 자자 유혈 쌍분이었으나, 1999년 10월17일 포천군 화현면 화현리 산38-7에 이장하고 수갈(竪碣)하다.
비명은 청음 문정공 김상헌(金相憲)이 지었고, 동양위 신익성(申翊聖) 문충공이 썼다. 부는 참봉 계운(繼雲) 조는 첨지(僉知) 맹윤(孟潤) 증조는 부정 효명 영상 문효공 연(演)의 현손이다.
子에 희선(喜善).수선(守善).민선(敏善).천선(遷善) 4형제를 두시고 따님은 한산인 이도(李濤)에 출가하였다.
(21세)희선(喜善) (1530. 3. 8- 1592.6.3) 찬성공이시다
명종16년(1561)진사가 되시고, 천성이 지효하여 부모상에 여러 날 슬픔으로 몸을 훼상(毁傷) 하시니 수염과 모발이 다 희게 쉬었다. 경행(經行)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 선교랑을 지내시고 금화(金化) 적산(赤山)에서 왜적에게 화(禍)를 당하였으며,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증직 되었다.
(22세)상철(尙哲) 평사공
선조15년 계부(季父) 북봉공과 동방(同榜) 진사가 되고, 선조18년(1585) 식년 명경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안도 병마평사를 지냈다.
(22세)상길(尙吉) 충숙공
시호가 충숙공(忠肅公) 선조12년(1597) 진사가 되고 선조18년(1585) 식년 명경 문과(文科) 갑과에 제2인으로 백씨 평사공과 함께 동방급제 하여 예조참판 대사헌 평안도 관찰사 전주부윤 공조판서를 지내시고, 병자호란 때 강화순절(江華殉節)하시고, 충렬사(忠烈祠)에 배향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左議政)에 증직 되었다 .
(22세)상적(尙迪)
자(字)는 군계(君啓) 1562년생 1592년6월8일 임진왜란시 금화(金化) 적산(赤山)에서 찬성공과 함께 왜적에게 화(禍)를 당하여 졸 하였으며 무후(无后)이다.
(22세)상급(尙伋) 충강공
시호가 충강공(忠剛公) 선조36년(1603)에 진사가 되고 선조39년(1606)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 병자호란(丙子胡亂)시 병조참의로 어가(御駕)를 호종(豪縱)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시종 척화(斥和)를 주장 하였고, 순절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贈職) 되었다.
(21세)수선(守善) - (1537.11.7 - 00.9.12)
따님이 세분이신데 김 기 (金頎) 생원이고
박희현(朴姬賢) 교수
이양문(李揚門) 현감에 각각 출가하였다.
(21세)민선(敏善) - (1548. 7. 7 - 1626. 5. 9) 북봉공이시다.
선조15년(1582) 생원(生員)이 되고 1599년 관학(館學)의 천거로 선공감역에 임명 된 후 3읍의 수령을 지내고 관직이 통훈대부 양천현령에 이르고 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시에 성균관 대성전이 불에 탔는데 왜란 후에 공이 앞장서서 성균관 유생들을 창도(唱導)하여 중건을 소청(疏請)하여 임금의 윤허(允許)를 얻어 시행했다.
따님이 다섯 분으로 증 참판 박정실(朴鼎實). 유태화(柳泰華). 진사 이흠신(李欽臣). 문과 최기백(崔基銆). 문과 이순암(李純馣)에 출가 하였다.
(22세)상질(尙質) 판관공
선조38년(1605) 사마시에 입격하고 증광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기장현감을 지내고 해주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22세)상일(尙逸) 감사공
인조2년(1624) 생원이 되고 인조8년(1630) 식년시 문과급제하여 어사(御使) 옥당(玉堂) 양사의 춘방(春坊) 승지(承旨) 예의부사를 역임하고, 외직으로 진주목사 등 여덟 고을의 수령과 황해. 강원. 경상 관찰사를 역임했다.
(22세)상달(尙達) 창평공
인조19년(1641)에 재행(才行)으로 천거되어 처음 벼슬이 후릉참봉.의금부 도사 등을 역임하고 고창.청산 현감을 거쳐 창평(昌平)현령에 이르렀다.
(21세)천선(遷善) -(1549.생 - 1590.8.23.졸)
1592년 8월 23일 금화에서 왜적(倭賊)에게 화(禍)를 당했다.
(22세) 상식(尙式)은 무후이고
(22세) 상열(尙烈)은 장예원 판결사에 증직 되었다.
(21세)서(婿)는 이도(李濤)이고
外孫에 덕유(德遊) 증 승지
덕렴(德濂) 현감. 직장
덕수(德洙) 교리. 관찰사
덕사(德泗) 도사 이분이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장인이시다.
따님은 한 분으로 김진백(金振伯)에 출가하였다.
평정공 이하 5대손 세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