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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셈의장막재건자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과 동일한
한민족 고유의 삼위일체 하느님 사상
우리 조상들이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과 동일한 하느님을 섬겼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고대 한국인은 나라 전체의 행사로서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성대하게 치렀는데, 그 제천의식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천(天)’ 혹은 ‘하느님’은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과 동일한 유일신 하느님이셨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숭배했던 하느님은 삼일신(三一神), 즉 ‘삼위일체 하느님’이셨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태백일사」 신시본기(神市本紀)에서 발췌한 글로서, 우리 겨레가 제천의식에서 숭배했던 하느님은 단지 ‘한 분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한 분의 하느님’이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0월의 제천(祭天)은 마침내 천하 만세의 풍습이 되었다. 이는 곧 신(神)의 나라 특유의 성대한 행사로서 외국에서는 이와 견줄만한 것이 없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의 명성을 누르고도 남는다. 옛날의 삼신산이라 함은 곧 태백산으로서, 역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저 그 옛날 신시(神市)의 인문교화(人文敎化는 근세에 이르러 건재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오히려 후세에 전해진 바가 있는 듯 거국적으로 남녀가 역시 모두 말없는 가운데 받들고 있는 바로서,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三神)이 주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10세 미만일 때에는 목숨의 안전과 위험, 우환, 잘 나고 못남 따위를 모두 삼신(三神)께 의탁한다. 저 삼신(三神)은 곧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天一神)이시다….”
“저 삼신(三神)은 곧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天一神)이시다”는 문구를 주목하라. 만물을 창조하신 천일신(天一神), 즉 한알님(하느님)을 ‘삼신(三神)’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일신(一神) 곧 한 분이시지만, 그 분은 삼신(三神) 즉 “삼위일체이신 한 분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아래는 한국인의 선조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을 섬겼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삼한시대의 향가이다.
정성으로 천단(天壇)을 쌓고 삼신(三神)을 축수(祝壽)하세.
황운(皇運)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민을 돌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
이 향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고대 한국인은 단지 막연한 하늘을 숭배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 향가의 가사를 보면 분명히 천단을 쌓아 제사를 드린 대상을 ‘삼신(三神)’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고대 한국인이 숭배했던 하느님은 ‘삼신’, 즉 ‘삼위일체 하느님’이셨다는 사실이다. 위 향가에 언급된 ‘삼신’이란 ‘삼일신(三一神)’, 곧 ‘삼위일체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선조들은 “하느님은 하나이지만 셋으로 존재한다”고 믿었고 ‘삼신이신 하느님’(三一神)을 숭배하였다.
실로 이러한 신의 관념은 고대 세계에서 지구상의 어느 민족에게도 발견되지 않는 한국인의 독창적 사상이었다. 하느님의 존재 양식을 표현하더라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지나(china), 북방 퉁구스, 남방 퉁구스, 시베리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오직 코리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심지어 팔레스틴의 유대민족조차도 삼위일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참으로 우리 조상들이 지니고 있었던 삼위일체 하느님 사상은 아주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를 더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 ‘삼신’, 즉 ‘삼일신’이라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성부·성자·성령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민족이 선택받은 백성 곧 욕단 계열의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것 외에는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이 놀라운 신지식(神知識)의 기원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고대 한국인이 섬겼던 하느님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셨으며, 더욱이 그 ‘삼위’라는 것도 성경에 계시된 성부·성자·성령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문헌을 통해 확인해 보자. 그 문헌상의 증거도 역시 ‘삼일신고’가 실려 있는 「태백일사」라는 책에서 발견된다. 태백일사는 앞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고기(古記)’를 참고하여 저술하였기 때문에 고기류(古記類)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고기는 고려 이전에 쓰인 사서(史書)로서 단군 조선이나 고구려·발해 그리고 삼국시대의 왕계에 관한 이야기나 종교행사에 대한 설화들을 담고 있다. 고려·조선 시대에는 고려 이전에 쓰인 이와 같은 사서들을 ‘고기’라고 불렀다).
그런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보면 「표훈천사」(表訓天詞)라는 고기(古記)에서 인용한 글이 실려 있다. 이 「표훈천사」는 고기류 중에서도 단군 조선 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바로 거기에서 수록한 글에 한국인의 선조들이 섬긴 하느님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며, 그 ‘삼위’라는 것도 성경에 계시된 성부·성자·성령 하느님과 동일한 하느님이심을 알 수 있는 보석같이 귀중한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지금은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이들 고기류(古記類)의 행방에 대하여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고려 왕실의 서운관(書雲觀)에는 고려 이전에 쓰인 사서(史書)인 고기(古記)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 고기류 중에는 단군 조선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기록들도 비장되어 있었다. 이들 고기 가운데 일부가 왕조가 바뀌는 혼란기인 여말선초(麗末鮮初)에 민간에 유출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세조가 재위 3년인 1,457년 전국의 팔도관찰사에 명하여 민간에 유포된 이들 고기류를 압수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 고기류 중에는 중원과 북방을 지배했던 고대 한국의 찬란했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서들이 많이 있었는데, 사대모화(事大慕華)를 왕조의 기초로 하고 있는 조선 왕실에서 볼 때 이들 고기류는 불온문서로서 수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도 동국통감 편찬과 관련하여 고려 이전에 쓰인 사서들을 수집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근 20종의 고기를 수집하여 궁중에 보관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세조가 압수령을 내린 고기류에는 단군 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기록된 책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서목(書目)이 「세조실록」 3년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① 고조선 비기(古朝鮮 秘記) ② 대변설(大辨說) ③ 조대기(朝代記) ④ 지공기(誌公記) ⑤ 표훈천사(表訓天詞) ⑥ 삼성밀기(三聖密記) ⑦ 안함로·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 三聖記) ⑧ 도정기(道정記) ⑨ 동천록(動天錄) ⑩ 도천록(道天錄) ⑪ 지화록(地華錄)
이상 11종이다. 이 책들이 어느 정도로 거두어들여졌는지는 모르나 이들 책 중 민가에 사장(私藏)되던 다수의 책들이 수거되어 왕실도서관에 보관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수거령에 불응하여 계속 민가에서 사장한 책도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왕실에 보관되어온 이들 고기류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 취조국에 압류되어 극비리에 소각되었거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민간에 비장되어 오던 ‘고기’들도 그때 대부분 압수 수거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을 강탈하자마자 한국 상고사를 말살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사서(史書) 약탈에 착수하였고 수많은 책들을 수거했는데, 이때 총 51종 20만 권의 책들이 이 땅에서 사라졌다. 이와 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인해 상술했던 11종의 고기는 물론 여타 고기류 사서 대다수를 지금은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 초기까지는 다른 여러 고기들과 더불어 상술한 11종의 책들이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 3년(1457)의 고기류 수거령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술한 11종의 책 이름까지도 적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표훈천사」(表訓天詞)라는 책도 세조가 수압령을 내린 11종의 책 이름에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표훈천사」도 지금은 사라졌지만 최소한 조선 초기 까지는 존재했던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표훈천사」의 글 일부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태백일사」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태백일사」는 조선 중종 15년(1520) 때 왕실의 찬수관으로 일하던 이맥(李陌)에 의해 저술된 책이다. 따라서 그는 왕실의 비서(秘書)들을 쉽게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 사장(私藏)되던 고기류도 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그는 단군 조선 때부터 전승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고기류의 하나였던 「표훈천사」도 읽을 수 있었고, 「태백일사」를 쓰면서 이 「표훈천사」에서도 일부 중요한 글을 발췌 수록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표훈천사」에서 인용한 글에 고대 한국인이 섬긴 하느님이 ‘삼신 하느님’ 곧 삼위일체 하느님이셨으며, 그 ‘삼위’도 성경에 계시된 성부·성자·성령 하느님과 기능과 속성까지 일치하는 하느님이심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서술되어 있다. 이제 그 「표훈천사」의 글을 살펴보자.
“표훈천사(表訓天詞)에서 말한다.
대시(大始)에 위·아래·사방은
일찍이 아직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 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
상계(上界)로부터 또 삼신(三神)이 계셨으니
곧 한 분의 상제(上帝)시라.
주체(主體)는 곧 일신(一神)이요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며,
쓰임은 곧 삼신이시라.
삼신은 만물을 끌어내시고 전 세계를 통치하실
가늠할 수 없는 크나 큰 지혜와 능력을 가지셨더라.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최상의 꼭대기의 하늘에 앉아 계시니
계신 곳은 천만억토(千萬億土)요
항상 크게 광명을 발하시고
크게 신묘함을 나타내시며
크게 길한 상서(祥瑞)를 내리시더라.
숨을 불어 만유(萬有)를 만드시고
열을 뿜어내어 만물의 종자를 키우시며
신묘하게 행하시어 세상일을 다스리시니라
··· 중략 ···
생각컨데 저 삼신(三神)을
천일(天一)이라 하고
지일(地一)이라 하고
태일(太一)이라 한다.
‘천일’은 조화(造化)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敎化)를 주관하고
‘태일’은 치화(治化)를 주관하느니라.”
表訓天詞云大始上下四方曾未見暗黑古往今來只一光明矣自上界却有三神卽一上帝主體則爲一神非各有神也作用則三神也三神有引出萬物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不見其形體而坐於最上上之天所居千萬億上恒時大放光明大發神妙大降吉祥呵氣於包萬有射熱以滋物種行神以理世務…중략…稽夫三神曰天一日地一日太一天一主造化地一主敎化太一主治化
이 글은 구약성경 창세기 1장을 연상시킨다. 특히 “대시(大始)에 위·아래·사방은 일찍이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 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는 구절은 창세기 1:1~2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느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1~2)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이 글의 핵심 내용은 태초에 흑암 중에서 빛을 내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느님은 ‘단일신’이 아닌 ‘삼일신(三一神)’, 곧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본문은 창조주 하느님은 한 분(一神)이시나, 삼신(三神)이 계신다고 아주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삼신(三神)이 계셨으니 곧 한 분의 상제(上帝)시라. 주체는 곧 일신(一神)이요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며 쓰임은 곧 삼신(三神)이시라.”
창조주 하느님은 한 분(一神)이시지만 ‘삼신(三神’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 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주체는 일신(一神)이며 작용은 삼신(三神)이라고 한다. 이는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 양식이 “삼위일체 되시는 한 하느님”이시자, “하나 되시는 삼위일체‘라는 뜻이다. 한국인 고유의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느님 사상은 저 유명한 아다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Creed)의 삼위일체론과 어휘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되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One God in Trinity)을 경배하며, 하나 되시는 삼위일체(Trinity in Unity)를 경배한다. 삼위의 위격 간에는 혼란이 없으며 신적 존재는 나뉘지 않는다. 즉 성부의 한 인격, 성자의 또 한 인격, 성령의 또 다른 한 인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Godhead)은 모두 하나이니 그들의 영광은 동등하며 그들의 위엄도 공히 영원하다. 성부께서 그러하듯 성자가 그러하며 성령께서도 그러하다.
…성부가 하느님이고 성자가 하느님이며 성령이 하느님이시지만 세 하느님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하느님이 존재하신다. 역시, 성부가 주이시고 성자가 주이시며 성령이 주이시지만 세 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주가 존재하신다. 우리가 기독교 진리에 의해, 각 인격이 따로따로 하느님이자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반면 우리는 보편적 신앙에 의해, 세 하느님, 세 주님이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세 성부가 아닌 한 성부, 세 성자가 아닌 한 성자, 세 성령이 아닌 한 성령이 존재하신다. 그리고 삼위일체 안에는 전이나 후가 없으며 더 큼이나 더 작음이 없다. 세 인격은 모두 각자와 공히 영원하며 공히 동등하다. 그러므로 이미 말하였듯이 모든 일에서 일체이신 삼위일체, 삼위일체이신 일체께 예배하여야 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아다나시우스 신조의 내용이 「표훈천사」에 기록된 삼위일체 하느님(三一神) 사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 참으로 태초에 흑암 중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삼신 하느님, 즉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이셨다. 그러나 노아의 후손 중 이 진리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셈의 가계 욕단의 후손인 알이랑 민족 한국인뿐이었다. 유대인들도 알지 못했고 그리스도인들조차 이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한 것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지 수 세기가 지난 후였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삼위일체설을 부정한 아리우스파와 삼위일체설을 주장한 아다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학 논쟁이 아다나시우스파가 정통으로 인정되면서 비로소 기독교 신론(神論)에서 삼위일체의 교의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성경의 첫 장도 기록되지 않았던 아득한 옛날에 이미 태초에 만유를 지으신 하느님이 삼신 하느님, 즉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할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이 A.D. 300년경에 와서야 겨우 감을 잡았던 3위1체론이 한국인에게는 아득한 옛적부터 있었던 것이다.
조재국(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는 『한국교회의 전통문화 수용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삼신이 하나의 체(體)가 되고 그 기능에서 셋으로 나뉘어지는 점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유사하다.”
창조주 하느님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오래 전 성막 지성소 안에 안치되어 있던 ‘법궤’를 통해 계시 되었던 진리이다.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명하신 식양대로 성막을 만들고 그 곳에서 하느님을 섬겼다.
성막은 세 구역으로 구분되는데 뜰과 성소와 지성소이다.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이 구별하였고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항상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지만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홀로 1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었다. 피 없이는 속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히 9:22; 레 17:11).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라고도 하고 증거궤 혹은 법궤라고도 하는 4면을 금으로 싼 하느님의 궤가 안치되어 있었는데(출 26:33; 히 9:3), 하느님은 항상 그 위에 임재해 계셨다(출 25:22). 그런데 법궤 안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나타내 주신 특별한 증거물 세 가지가 들어 있었다(히 9:4).
하나는 시내산에서 하느님이 친히 써주신 언약의 돌판(출 25:16)과 또 하나는 광야에서 애굽의 양식이 떨어졌을 때 하늘에서 아침마다 내리신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였고, 그 다음은 열두 지파 중에서 제사장으로 택함을 받은 표적물인 아론의 싹난 지팡이다(민 17:10).
지성소 법궤 앞에서 하느님께 부복한 대제사장
“말씀은 곧 하느님이라”(요 1:1)고 하였으니 말씀을 기록한 돌판은 하느님을 상징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요 6:51)고 하셨으니 만나는 성자를 상징하며,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고 하셨으니 다시 살아난 싹 난 지팡이는 성령을 상징한 것이다(롬 8:11).
하나의 법궤 안에 이 세 가지 성물이 담겨 있었고, 하느님은 그 위에 임재해 계셨다. 그리하여 법궤는 성부·성자·성령을 증표로 한 성삼위일체의 뜻을 내포했다. 즉 법궤는 하느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계시로서,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심을 증거한 것이다. 성막 지성소 내 법궤 위에 임재 해 계셨던 하느님은 ‘단일신’이 아니라 ‘유일신’, 즉 ‘삼위일체 하느님’이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에 가서 제사를 드리며 섬긴 하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심을 알지 못한다. 이 또한 놀라운 사실이다. 특별 계시인 성경을 수천 년 전부터 갖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리고 하느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한 유대인들이 아직까지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삼신 하느님, 즉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성경의 첫 장도 기록되기 전인 아득한 옛날부터 흑암 중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삼신 하느님’, 즉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라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표훈천사」에 기록된 글이 이 놀라운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표훈천사(表訓天詞)가 말하는 삼신(三神)의 이름 및 사역이 성경이 말하는 삼위 하느님의 이름 및 사역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표훈천사」는 삼신(三神)의 이름도 밝히고 있는데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이라고 했다.
“…저 삼신을 천일(天一)이라 하고 지일(地一)이라 하고 태일(太一)이라 한다.”
그리고 각 삼신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천일’(天一)은 조화를, ‘지일’(地一)은 교화를, ‘태일’(太一)은 치화를 주관한다는 것이다. 곧 ‘천일’은 조화주(造化主)요, ‘지일’은 교화주(敎化主)요, ‘태일’은 치화주(治化主)이시다.
“천일은 조화(造化)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敎化)를 주관하고 태일은 치화(治化)를 주관하느니라.”
여기 「표훈천사」가 교훈하고 있는 삼신의 이름 및 각 신의 주관 사역은, 성경이 말하는 삼위 하느님의 이름 및 그 삼위 하느님의 각 사역과 놀랍게도 정확히 일치한다.
먼저 삼신의 이름인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천일, 지일, 태일에서 ‘일(一)’이란 하느님을 뜻한다. ‘일’은 홍수 이전 사람들의 하느님의 명칭인 ‘알’에서 ‘엘(EL)’, ‘얼’과 함께 가지 쳐 나온 말로서 하느님을 뜻하는 ‘알’과 동의어이다. 왜냐하면 하느님(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은 한 알, 즉 ‘하나’(一)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절대자 유일신을 아득한 옛날부터 ‘알’, 즉 ‘한알님’이라 하였다. 이를 동이문자로 ‘일(一)’로 표기했다. 절대자 ‘알’(한알님)은 오직 한 분 즉, ‘하나’(一)이기 때문이다. ‘일(一)’은 유일신 ‘알’(한알님)에 대한 약식 기호로서 고대 동이족의 문어(文語)이다.
그래서 천일(天一)은 ‘하늘 하느님’이요, 지일(地一)은 ‘땅 하느님’이시다. 태일(太一)은 ‘사람 하느님’을 뜻한다. 태(太)는 사람(人) 대신에 쓰인 글자이다. ‘설문’에 의하면 ‘대자상인형(大字象人形)’, 즉 대(大)자는 사람 형상을 본뜬 글자라고 했다. 두 팔을 펴고 두 다리를 펼치면 ‘대(大)’자가 된다. ‘태(太)’자는 사람의 생식기까지 표시하였으니 더욱 사람 형상을 닮은 글자라 할 것이다. 그래서 태일(太一)은 ‘사람 하느님’이시다.
고대 한국인은 이렇게 ‘하늘 하느님(천일)’, ‘땅 하느님(지일)’, ‘사람 하느님(태일)’이신 ‘삼신’ 하느님을 섬겼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민족 고유의 사상인 ‘천지인 일체’ 사상이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 ‘하늘 하느님(천일)’은 ‘조화(造化)’를 주관하시는 신이라고 했다. ‘땅 하느님(지일)’은 ‘교화(敎化)’를 주관하시는 신이라고 했다. ‘사람 하느님(태일)’은 ‘치화(治化)’를 주관하시는 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하늘 하느님(천일)’은 성경에 의하면 기능상 ‘성부 하느님’과 일치한다! 그는 ‘하늘’에 계시며, 만물의 근원이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조화주(造化主)이신 것이다.
‘땅 하느님(지일)’은 성경에 의하면 기능상 ‘성령 하느님’과 일치한다! 성령 하느님은 ‘땅’에서 역사하고 계시며, 그는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또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요 14:26 ; 16:13). 그는 교화주(敎化主)이신 것이다.
‘사람 하느님(태일)’은 성경에 의하면 기능상 ‘성자 예수님’과 일치한다. 성자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자 ‘참 사람’이시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열방을 ‘다스리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빌 2:5~11; 계 19:16). 그는 참으로 치화주(治化主)이신 것이다.
즉, 천일(하늘 하느님)인 ‘조화신’은 ‘성부 하느님’과 일치하고, 지일(땅 하느님)인 ‘교화신’은 ‘성령 하느님’과 일치하며, 태일(사람 하느님)인 ‘치화신’은 ‘성자’ 예수님과 일치하는 것이다! 천일(天一)은 ‘성부’요, 지일(地一)은 ‘성령’이요, 태일(太一)은 ‘성자’를 뜻했던 것이다! 모두 정확히 일치한다. 이렇게 한국인은 아득한 옛날부터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과 동일한 ‘유일신’ 하느님을 알았고, 그 삼일신(三一神)을 숭배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찬송가인 우리 겨레의 민요 ‘아리랑’의 가사 첫 소절은 ‘알’(하느님)이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되고 있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이는 우리 겨레가 섬긴 한알님(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이 삼신(三神) 하느님이셨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숫자 3이 오랜 옛적부터 성수(聖數)로 취급되어 왔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숫자 3은 한국인에게 길수(吉數)·신성수(神聖數)라 하여 언제나 최상의 수로 여겨져 왔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에서 격언·속담·관용어 등으로 가장 많이 친근하게 사용되고 있는 숫자가 3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
· 3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 중매는 잘 하면 술 석 잔, 못하면 뺨 세 대.
· 삼 세 번.
· 삼척동자.
· 겉보리 석 되만 있으면 처가살이는 않는다.
· 코가 석 자.
· 장님을 셋 보면 그 날 재수가 좋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선조는 좋은 일, 궂은일에도 3이라는 수를 널리 사용하여 좋은 일은 더욱 좋게, 궂은일은 원만히 풀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는 그들의 마음을 담았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인은 아득한 옛날부터 3이라는 숫자를 최상의 수, 수중의 수로 여겼다. 이처럼 특별히 3이라는 수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수 개념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그것은 우리 겨레가 ‘삼신 한알님’을 숭배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3이라는 수를 오랜 옛적부터 성수(聖數)로 인식하게 했던 것이다.
심지어 한국인은 박자도 3박음을 좋아하여 우리나라의 민요는 3박자(3분박)로 되어 있다. 세계에서 3박음을 주로 사용하는 나라는 매우 드물다. 이렇게 3분박을 선호하는 우리 민족의 독특한 음악적 기질과 성향은 어디로부터 연유한 것인가? 이 또한 우리 겨레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숭배한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는데 근본 이유가 있다. 우리 민족이 제천의식을 거행하며 숭배한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삼위’로 존재하는 신이므로 한국인은 3박음으로 노래하고 3분박으로 하느님을 찬양했던 것이다.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인 ‘알이랑’이 그것을 입증해준다(알이랑도 3분박이다).
이처럼 특별히 3이라는 수를 좋아하는 우리 겨레의 수 개념은 민족 고유의 종교에서 기인한 것이다. 우리 겨레는 제천민족으로서 ‘삼신 한알님’을 숭배하는 민족이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3이라는 수를 오랜 옛적부터 성수(聖數)로 인식하게 했던 것이다.
실로 ‘셋’은 우리 의식 구조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 지나(支那)인은 우리와 사고방식(思考方式)이 다르다. 지나인의 사유 방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원론(二元論)인 음양론(陰陽論), 또는 오행사상(五行思想)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의 기초는 이원론도, 오행사상도 아니다. 우리 민족은 원래 삼원론적인 사고를 했다.
단군신화는 하늘, 땅, 인간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환인, 환웅, 단군 3단계로 전개된다.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 환인은 그에게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었고, 환웅은 3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지상에 내려왔으며, 그는 풍백(風伯), 운사(雲師), 우사(雨師) 셋을 거느리고 인간사를 돌보았다(성경에서 바람․구름․비는 모두 성령을 상징한다). 그리고 곰이 사람으로 되는데 삼․칠일이 걸렸다고 했다. 모두 3이라는 숫자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옛날부터 3이라는 숫자를 성스럽고 신비스럽게 생각했는가? 그것은 우리 겨레가 고대로부터 ‘삼위일체 하느님’을 섬기는 천손민족이기 때문이다.
다신 숭배의 고대 세계에서 한국인은 독특하게 한 분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숭배했다. 더욱이 그 하느님의 존재 양식을 성부·성자·성령으로 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알고 섬겼다. 참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사실이다.
물론 고대 한국인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처럼 ‘천일(天一이 ‘성부 하느님’이시고, ‘지일(地一)’이 ‘성령 하느님’이시고, ‘태일(太一)’이 ‘성자 하느님(예수님)’이라고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국인은 ‘천일’(하늘 하느님), ‘지일’(땅 하느님), ‘태일’(사람 하느님)이라는 삼신(三神)의 이름으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성부·성자·성령이신 삼위 하느님을 이미 숭배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열방 어느 백성 가운데 이러한 민족이 또 있었는가?
한국인의 선조들이 다신 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겼다는 것은 당연히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과 동일한 신지식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동일한 하느님을 섬겼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사실이다. 하느님의 존재 양식을 “한 분이시나 삼위로 계신다‘고 이해했던 백성은 열방 어느 민족에게도 없었다. 심지어 유대인조차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개념은 없었으며, 지금도 그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실로 한국인의 유일신 신앙은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의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조상이 섬기던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증거 하는가? 한국인은 욕단 계열의 천손민족(天孫民族), 즉 또하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한국인이 아득한 옛적부터 민족 내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이 놀라운 신지식의 기원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 한국인이 에벨로부터 셈계의 일신 신앙을 계승한 선택받은 백성, 욕단의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홍수 후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와서 동방의 아사달에 배달나라(밝달나라)를 세운 욕단(밝달임금)은 그가 세운 신시(神市․City of God), 곧 조선의 백성들에게 유일신 하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 때부터 섬겨온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를 외래 종교로 단정하고, 들어온 지 1700년도 안 되는 불교는 전통 종교라고 내세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이 ‘삼신일체’라는 대종교의 주장은 대단한 난센스다. 기록에 의하면 단군 자신이 삼신의 하나가 아니라, 단군이 삼신을 향하여 천제(天祭)를 드렸다. 강화도 마리산은 단군이 삼신일체의 하나로서 사람들로부터 제사를 받았던 장소가 아니라 단군이 제주(祭主)가 되어 삼위일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던 장소이다.
아마도 「표훈천사」에는 흑암 중에서 빛을 내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타락 및 낙원에서의 추방, 그리고 홍수 심판까지의 사건들, 즉 구약성경 창세기 1~10장까지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책은 애석하게도 오늘날 찾을 수 없고, 다만 「태백일사」라는 책에 「표훈천사」에서 수록한 ‘삼위일체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표훈천사」를 비롯한 기타 단군 조선 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이른바 고기류(古記類) 사서(史書)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고대 한국인이 섬긴 ‘창조주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역사의 질곡 속에서 귀중한 고기류 사서들은 모두 소실되었다. 다만 여기에서 참고하고 있는 바처럼 그 ‘고기’를 기초로 저술된 「태백일사」같은 사서들을 통해 ‘고기’에 기록되었던 단편들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와 같은 책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한국인의 선조들이 섬긴 하느님이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과 동일하신 ‘삼위일체 창조주 하느님’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처음부터 ‘삼위일체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던 천손민족이었다. 그것은 한국인의 직계 조상은 에벨로부터 셈계의 일신 신앙을 계승한 하느님의 사람 욕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셈족의 진정한 장자였다. 바로 그가 홍수 후 알이랑 고개를 넘어 극동 아시아로 천동해서 백두산에 올라 유일신 하느님께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고조선을 건국한 밝달임금, 곧 단군이셨다. 그래서 동방의 한국인은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민인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분명히 서양에서 발전한 종교이지만,
그 실질인 복음을 서양문화적 형식과 동일시 할 수 없음에도 이를 절대화함으로서
선교가 일종의 문화제국주의로 전락해 버린 것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토착신학적인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문화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독교가 전해지기 이전의 한국문화를 온통 악마적인 것으로
또는 이교도적인 것으로 심판해버린 것은 확실히 자학행위요,
서구 역사주의 신학에 세뇌된 자들의 오만한 태도이다.
그러기에 한국문화가 지니고 있는 일반 계시적 의미와
존재론적 자연 신학의 가치를 인정하고
계시의 빛 가운데 이를 뚜렷이 밝혀 주어야 할 과제가 성립된다.
우리의 회개운동의 하나는 한국문화를 온통 악마적인 것으로
또는 이교도적인 것으로 매몰차게 심판하였던 지난날의 왜곡된 회개의 잘못을 바로 잡는
토착화 신학 지향적인 회개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배타성에 대한 성찰이 요청된다.
한국교회가 가져온 기독교 복음이 서구적 포장지에 싸인 채 들어와서
우리 문화까지를 서구화 시켜버린 현상을 치유해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전통문화를 죄다 악마적인 것으로 정죄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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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교(景敎)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경교는 주후 635년 당나라에 알로펜(阿羅本: Alopen)을 단장으로 한 21명의 경교 목사들이 파사, 즉 페르시아로부터 입국하므로 전파되었고 781년에 가장 흥왕하였다. 수년 전 본서의 내용으로 예수원에서 말씀을 전할 때 표훈천사에 있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한 기록은 혹시 이 경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닐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당시 지나에서 유행하던 경교의 기독교 용어 가운데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이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경교에서는 성부를 황부(皇父), 성령을 경풍(景風) 또는 정풍(淨風) 그리고 현풍(玄風)이라고 했고, 성자를 황자(皇子)라고 했다. 삼위(三位)는 삼신(三身)이라고 했다. 만일 경교의 영향을 받았다면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이라는 용어로 삼위 하느님을 표현했을 리가 만무하다.
* 세조 3년(1457년) 5월 26일 세 번째 기사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 · 왕거인(王居人) · 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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