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스에세이-2022 신년호 명수필 산책(8)-박재식
제대로 수필 맛을 보게 하는 작품
- 박재식의 대장닭 -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생각지도 않은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특히 안타까운 것 중 하나가 세상을 떠나시는 분들을 제대로 환송도 못 한다는 안타까움이다. 2021년만 해도 여러 어르신 문인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중에 수필가 박재식 선생도 계셨다. 지난 2021년 8월 2일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안타까움이 컸다. 박재식(1828.10.9.-2021.8.2) 선생은 경찰 고위직인 서울시경국장으로 퇴임 하셨다. 하지만 평소에 선생을 뵈면 경찰이라는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면 그냥 너그럽고 멋진 선비셨다.
나는 선생의 작품 중 <대장닭>과 <새벽종소리>를 좋아한다. 1999년‘선우명수필 11’로 나온 선집 《짝사랑》을 보내주셨는데 그 안엔 내가 좋아하는 선생의 수필이 거의 다 들어있었다. 사인해서 보내주신 책을 펼치니 1부는 새벽 종소리, 2부는 조계사 앞뜰, 3부는 대장닭으로 나뉘어 총 27편이 실려 있었다.
선생은 192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그곳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1943년 도일(渡日), 동경에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한데 해방으로 귀국 부산 경남상고에 편입을 했다. 그때 문예부를 맡아 운영했고《문예신문》에는 콩트와 시를 발표하곤 했는데 폐결핵으로 고향 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진주에서도 동인지《문학청년》에 시와 소설을 발표했다. 다음 해 상경 홍익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서울 문리대에서도 청강을 했는데 6.25로 학업이 중단되자 경찰전문학교에 입교했다. 그로서 경찰의 길을 걷게 되는데 1982년 서울시경국장까지 공직생활을 했다. 하지만 경찰 근무 중에도 문학의 길은 놓치지 않았고 특히 1951년 제주 부임지에서 만난 소설가 계용묵 선생과 경찰전문학교 때 만났던 물방울 화가 김창열과는 더불어 동인지《흑산호》에도 참여했다.
계용묵 선생 주선으로 1954년 수필 <나의 잊을 수 없는 소녀>가 《새가정》에 실린 것을 시작으로 1970년부터 부산일보에 칼럼을 연재했다. 하지만 정식 문단 등단은 1974년《월간문학》에 <아아 청자>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선생은 김태길 차주환 교수 등과 한국수필문학진흥회에 참여하며 86년부터 98년까지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선생은 1982년 첫 수필집《바람이 머물고 간 자리》(신진출판사), 88년《열려있는 창》(대림기획), 97년《대장닭》(신아출판사), 99년 선우명수필선《짝사랑》(선우미디어), 2007년 현대수필가100인선 4《세월의 바람속에》(좋은수필사) 등을 냈지만 2011년에 펴낸 박재식의《좋은수필 감상》(수필과비평사)이야말로 1970년대 이후의 대표적 한국수필에 해설을 곁들여 다룬 명저로 꼽히고 있다.
나는 선생과 도서출판 대림기획에서 인연을 맺었다. 89년말 kbs방송수필집《아침무지개가 말을 할때》를 대림기획에서 내게 되었는데 그때《열려있는 창》을 그곳에서 내신 선생을 처음 뵈었다. 그러다가 허세욱 교수님 추천으로 수필문우회에 들어갔더니 선생이 거기 계셔서 반겨주셨다.
내가 <대장닭>을 좋아하는 것은 해학(諧謔)이 넘치는 선생의 작품들 중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보다 더 질서적이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때가 지난 것을 알면 그마저도 수용할 줄 아는 자연의 섭리 같은 닭의 태도에서 인간이 오히려 배워야 할 것 같아서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닭보다도 못한 것이 아닐까 싶어 자괴스럽기까지 하다. <대장닭>은 1992년 작이니 수필문우회원이면서 계간《수필공원》(지금의 에세이문학) 편집위원을 하실 때다. 어쩌면 박재식 수필이 가장 무르익었을 전성기 때의 작품인 것이다. 그즈음 쓴 5년여의 수필들이 모아진 게 97년 출간된《대장닭》(신아출판사)이다. 그런데 30여 년 전에 쓰여진 수필인데도 이 한 편으로 지금 우리 시대를 논할 수도 있으니 서글프면서도 신기하다. 93세를 일기로 2021년 8월 2일 새벽 우리 곁을 떠나신 박재식 선생님은 조용히 한국수필을 위해 큰 수고를 하셨고 그 공이 크신 분이다. 선생의 수필 <대장닭>을 읽으며 선생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새삼 사람은 가도 작품은 남는다는 말이 새롭게 가슴으로 스며든다.
대장닭
박재식
‘장닭’은 수탉의 잘못된 일컬음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러나 내가 자란 고장에서는 수탉은 모름지기 장닭으로 통한다. 다만 수탉은 암수를 가릴 때 이례적으로 쓰일 따름이다.
집에서 닭을 키워 보면 닭의 수컷을 일컬어 장닭이라고 한 선지자의 적실한 언어 감각에 탄복할밖에 없다. 장닭의 '장'은 한자의 '將', '丈' 혹은 '壯'에 연원을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암탉의 무리를 이끌고 다니는 늠름한 모습이 장군다우니 '將닭'이요, 그 자태가 암탉에 비해 출중하게 의젓하며 장부다우니 '丈닭'이요, 권속을 거느리는 풍도가 미물같지 않게 장하고 갸륵한 바가 있으니 '壯닭'으로 명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짐작해 보는 것이다.
우리 집의 대장닭은 휘하에 수탉 두 마리와 암탉 열 마리를 거느리고 있다. 훤칠한 목줄기에 떡 벌어진 가슴팍과 태깔이 번지르르한 붉은 깃털에 검은 색 멋진 꼬리를 지닌, 내가 보기에도 반할 만큼 탐스럽게 잘 생긴 수탉이다. 숫제 '미스터 수탉 선발대회' 같은 것이 있다면 출품해 봄직도 한 그야말로 닭의 남성미를 깔축없이 갖춘 훌륭한 수탉인 것이다.
그 잘 생긴 허우대로 뭇닭을 거느리며 뜨락과 텃밭을 무소부지(無所不至)로 활보하는 모습은 가히 사위를 제압하고 남음이 있을 만큼 위풍이 당당하다. 그의 걸음걸이를 관찰하면 장부다운 풍모가 한층 돋보인다. 간대로 서두르는 법 없이 한 자국 한 자국을 점잖게 옮겨 놓는 발걸음이 지체 높은 옛 선비의 그것을 방불케 하고, 유난히 큰 볏을 연신 너풀거리며 기웃기웃 좌우를 경계하면서 걷는 품은 그 옛날 투구와 패도를 장착한 장군이 군졸을 이끌고 앞장서 가는 위용을 닮았다.
그러나 그가 대장닭의 이름에 손색없는 구실을 하는 소이가 결코 그 빼어난 허울이나 위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권솔을 보살피는 매너와 책임의식이 참으로 장자답다.
모이를 뿌리면 결코 먼저 덤비는 법이 없다. 뭇닭이 몰려들어 정신없이 쪼아먹는 동안을 그는 우뚝 고개를 쳐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 태세를 한층 가다듬는 것이다. 향응 중에 외적의 기습을 받고 망한 우리네 인간사의 숱한 패장들에 비하면 얼마나 슬기롭고 믿음직한 수장인지 모른다.
암탉을 거느리는 매너 또한 우리 인간의 남정네들이 배울 바가 많다. 항상 넓은 가슴과 푸근한 깃으로 감싸듯하며 거느리는 것이다. 알자리를 마련해 놓으면 점검이라도 하듯 으레 제가 먼저 들어가 앉아보고 나온 다음에야 암탉을 들여보낸다. 그러고는 알을 낳는 동안 줄곧 둥지 곁을 지키며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한번은 개집에 매어 놓은 사나운 진돗개의 목줄이 풀려 뜨락에서 평화롭게 노닐던 닭들을 개가 습격하는 바람에 큰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평소 같으면 대장닭의 통제 아래 무리를 지어 개집 근처, 그러니까 개의 목줄이 미치는 거리의 한계선 밖 언저리를 알찐거리며 약을 올리곤 하던 터수이지만, 일단 그 안전판이 무너진 마당에서는 걷잡을 새가 없다. 처음 맞닥뜨린 암탉 한 마리가 비명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로 쓰러지고, 남은 닭들은 혼비백산 사분오열로 분주하는 난장판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판국에서도 대장닭은 그 자리를 맴돌며 뭇닭들의 피난을 재촉하듯 꼬꼬댁 소리를 부산하게 내지르다가, 위기일발 피격 직전에 이르러서야 요란한 날갯짓과 함께 멀리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런 대장닭은 그만큼 권속을 다스리는 카리스마 또한 대단하다. 그가 모이를 줍기 위해 모이판에 다가서면 정신없이 모이를 쪼던 뭇닭들은 일제히 식사를 중지하고 몇 걸음 물러나서 자리를 양보하게 마련이다. 그러고서 얼마동안 기다렸다가 대장닭의 식음이 삼매경에 들 즈음해서야 비로소 조심스레 다가와 회식에 동참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부주의하게도 이 예도를 망각하고 버릇없이 곁에 와서 함부로 부리를 놀리다가는 그것이 비록 애첩격인 암탉이라 하더라도 치도곤을 맞고 쫓겨나는 것이다.
총중에서 무엇보다도 불쌍한 존재는 두 마리의 수탉이다. 그들은 언제나 대장닭의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겉돌아야 한다. 한데 어울려서 모이를 줍거나 뜨락을 거닐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느닷없이 대장닭에게 뒤통수를 쪼여 비명을 지르기가 일쑤이다. 한 번은 그중 한 놈이 대장닭 옆에서 목줄띠를 뻗고 기지개를 켜다가 호되게 얻어맞고 나동그라지기도 했다. 쪽을 못 쓴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두고 생겼거니 싶은 광경이기도 하다. 그러니 수컷 구실을 한답시고 암탉을 넘보기란 더더욱 어림없는 노릇이다. 마치 환관이 임금 앞에서 궁녀를 넘보는 일만큼이나 안 될 궁리인 것이다. 어쩌다가 한 놈이 그것을 시도하다가 울타리 끝 구석배기까지 쫓겨 달아난 일이 있다. 궁중의 법도였다면 능지처참을 당하고도 남을 죄과이지만, 그만한 정도의 혼띔으로 끝내는 것이 고작이니 자못 우리네 인군(人君)의 도량보다 크고 넓다 하겠다.
하기야 대장닭 그도 한때는 그런 수모와 핍박 속에서 성장한 쓰라린 과거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우리 집 울타리 안에서의 계보로 따져 그는 3대째의 대장닭이다. 그는 할아버지 닭의 권좌를 찬탈하여 대장닭이 된 애비 닭의 시하에서 한동안 죽어지내다가, 어느 날 처절한 결투 끝에 애비 닭을 물리치고 마침내 오늘의 대권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는 친조모이자 바로 어미가 되는 씨암탉까지를 자신의 처첩으로 차지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혈통 속에는 외디푸스적인 숙명의 피가 면면하게 흐르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권력 그것의 생태가 숙명적으로 외디푸스의 혈통을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숙명의 피는 의당 그가 미구에 맞이할 운명, 즉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절대권력의 비참한 종말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상불 그 운명의 조짐이 그들의 내부에서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요 며칠 새에 부쩍 체구가 우람스러워진 수탉 한 마리의 거동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여느 때 같으면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어야 할 대장닭의 경고성 도발에도 꿈쩍 않고 버텼다. 눈만 한 번 껌벅하고서 콧방귀라도 뀌는 눈치였다. 그것은 마치 머리 큰 자식이 부모의 말을 대수롭잖게 받아넘기는 그런 시건방진 태도 같기도 했다. 힘으로는 당할 수 없는 후레아들의 빗나간 대거리에는 별수 없이 이쪽에서 강경 자세를 걷어들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던 놈이 이제는 대장닭이 보는 앞에서 암탉들을 마구 덮치기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대장닭의 거동을 살펴보면 짐짓 외면이라도 하듯 먼 산만 멀뚱히 바라볼 뿐인 것이다. 그 기죽은 듯한 자태가 웬일인지 처연해 보인다. 그제사 눈에 띈 것이지만, 그의 삽상한 검은 꼬리에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흰 깃털 한오리가 도드라져 보였다. 마치 초로의 귀밑머리에 내비친 흰 머리카락과도 같〮〮이···.(1992.)
최원현 http://cafe.daum.net/Essaykorea
『한국수필』로 수필, 『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작가회장·강남문인협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상록수문예대상·신곡문학상대상∙조연현문학상∙펜문학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그냥》등 17권,《좋은 수필 쓰기와 바르게 읽기》《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이 있으며,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수필 작품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