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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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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특강 스크랩 유마경 상권
보성(甫性) 추천 0 조회 0 11.11.11 19:2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상권

  -일명 불가사의해탈(不可思議解脫)-

  

  요진삼장(姚秦三藏)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1. 불국품(佛國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비야리(毗耶離)의 암라수원(菴羅樹園, mraplivana)에서 대비구(大比丘) 8천 인과 3만 2천 의 보살(菩薩)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은 모두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들로 부처님께서 갖추신 지혜[大智]와, 그것을 얻기 위한 수행[本行]을 모두 성취하였는데, 그것은 여러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진리를 지키는 성곽[護法城]이 되어 항상 가르침[正法]을 받들고, 사자후(師子吼)를 설하여 명성이 시방(十方)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이 청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그들의 벗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며, 불(佛)·법(法)·승(僧) 3보(寶)가 길이 융성하고 끊이지 않도록 하였으며, 마군[魔]과 같은 원수를 항복시켰고, 수많은 외도(外道)를 제압하였다. (몸과 마음) 모든 것이 청정해져서 번뇌[蓋纏]로부터 영원히 벗어나 마음이 항상 편안하게 걸림이 없는[無] 해탈(解脫)의 경지에 머물러 정념(正念)·선정(禪定)·총지(總持)1)·변재(辯才)가 끊이지 않았으며, 보시(布

  

1) 무량무변의 뜻을 지니고 있어서 모든 악한 법을 버리고 한량없이 좋은 법을 가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지혜 또는 삼매(三昧)를 말하기도 하고, 진언(眞言)을 말하기도 한다.


  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와 그 방편의 힘을 부족함 없이 두루 갖추고 있었다.

  무소득(無所得)의 경지 이르러 불기법인(不起法認 : 無生法忍)2)을 이루었고, (그 경지에) 수순(隨順)하며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법륜[不退轉法輪]을 굴렸으며, 법상(法相)을 훌륭히 깨달았으며, 또 중생의 근기[根]를 알아 모든 사람들을 뛰어넘어 무소외(無所畏)를 얻었고, 공덕과 지혜로써 그 마음을 닦았고, 상호(相好)로 그 몸을 장엄하여 그 모습이 세상에서 비할 자가 없었다. 하지만 세간의 온갖 장식으로 몸을 꾸미고 있지는 않았다. 그 명성이 수미산을 뛰어넘고, 그 깊고도 견고한 마음은 금강석과도 같았다. (세상을) 진리의 보배[法寶]로 널리 비춰 주고, 감로(甘露)를 널리 흩뿌려 주니, 이 세상의 갖가지 말과 소리 가운데 미묘하기가 제일이었다.

  연기(緣起)의 이법(理法)3)을 깊이 깨달아서 온갖 사견(邪見)을 끊어 버렸으므로 있다, 없다고 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의 집착[有無二邊]이 뒤에 남는 일은 없었다. 법을 연설할 때에는 사자가 포효하듯이 두려움이 없고, 그 강설하는 가르침[法]은 천둥 벼락치는 것과 같아서 (이 세상의 잣대로는) 헤아릴 수 없어 이미 그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 선장[海導師]4)이 이끌어 온갖 진리의 보배[法寶]를 모으는 것과 같고, 제법(諸法)의 깊고 오묘한 뜻에 통달하고, 중생이 (과보를 받아) 왕래하는 세계

  

2) anutpattikadharma-ksnti의 번역으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여를 깨달아 알고, 거기에 안주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초지나 7·8·9지에서 얻는 깨달음이다. 여기에서 인(忍)은 인가(認可)의 뜻으로 확실히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진실의 이치를 깨달은 마음의 평온이다.

3) 산스크리트 pratitya-samutpda를 옮긴 것인데, 인연하여 일어나는 것, 즉 일어난 상태를 가리킨다. 모든 사물은 온갖 조건[緣]에 의하여 그와 같은 것으로 성립됨[起]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도 있다[此有故彼有]"든가, "이것이 생김으로 해서 저것도 생긴다[此起故彼起]"든가, 또는 "이것이 멸함에 의하여 저것도 멸한다[此滅故彼滅]"는 형식으로 말한다. 이와 같이 조건[緣]에 따라서 변하므로 무상하고, 독립된 존재가 없으므로 공(空)이며, 무(無)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4) "선장의 지시로 바다 속의 보물을 채취하게 하듯이"라는 비유로 '해도사'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집중법보해도사(集衆法寶海導師)"는 "선장이 이끌어 바다 속의 보물을 채취하듯이 온갖 가르침의 보배를 모으게 한다"는 의미로 번역된다.


  [趣]와 그 중생들 마음의 움직임[所行]을 잘 알아 비교할 수 없는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지혜[自在慧]와 10력(力)과 무소외(無所畏), 18불공법[不共法]에 가깝기까지 하였다.

  (중생이 오고 가는) 모든 악한 세계[一切諸惡趣]의 문(門)은 빗장을 걸어 잠그면서도[關閉] 그들은 (地獄·餓鬼·畜生·人間·天上의) 다섯 가지 세계[正道]에 태어나 중생의 몸을 나타내고, 대의왕(大醫王)이 되어 온갖 병[煩惱]을 훌륭히 치료하며, 병에 따라 마땅한 약을 주어 먹게 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모두 성취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의 나라를 깨끗이 장엄하고, 그를 보고 듣는 이 가운데는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아무도 없었으며, 그 모든 행해야 할 일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이 같은 공덕을 모두가 한결같이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등관보살(等觀菩薩)·부등관(不等觀)보살·등부등관(等不等觀)보살·정자재왕(定自在王)보살·법자재왕(法自在王)보살·법상(法相)보살·광상(光相)보살·광엄(光嚴)보살·대엄(大嚴)보살·보적(寶積)보살·변적(辯積)보살·보수(寶手)보살·보인수(寶印手)보살·상거수(常擧手)보살·상하수(常下手)보살·상참(常慘)보살·희근(喜根)보살·희왕(喜王)보살·변음(辯音)보살·허공장(虛空藏)보살·집보거(執寶炬)보살·보용(寶勇)보살·보견(寶見)보살·제망(帝網)보살·명망(明網)보살·무연관(無緣觀)보살·혜적(慧積)보살·보승(寶勝)보살·천왕(天王)보살·괴마(壞魔)보살·전덕(電德)보살·자재왕(自在王)보살·공덕상엄(功德相嚴)보살·사자후(師子吼)보살·뇌음(雷音)보살·산상격음(山相擊音)보살·향상(香象)보살·백향상(白香象)보살·상정진(常精進)보살·불휴식(不休息)보살·묘생(妙生)보살·화엄(華嚴)보살·관세음(觀世音)보살·득대세(得大勢)보살·범망(梵網)보살·보장(寶杖)보살·무승(無勝)보살·엄토(嚴土)보살·금계(金髻)보살·주계(珠髻)보살·미륵(彌勒)보살·문수사리법왕자(文殊師利法王子)보살 등 3만 2천이었다.

  또 대범천(大梵天) 이하 1만의 범천들이 다른 4대주(大洲)로부터 찾아와 부처님께 절하고 가르침을 듣고자 하였다. 또 1만 2천의 제석천(帝釋天)들도 다른 4대주로부터 찾아와 이 모임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 밖에도 뛰어난 위력(威力)을 갖춘 여러 천신·용신(龍神)·야차(夜叉)·건달바(乾闥婆)·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羅迦) 들도 이미 모임에 와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많은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도 함께 모여 앉아 있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공경을 받으며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계셨는데, 그 모습은 마치 수미산이 대해(大海)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았으며, 온갖 보물로 장식된 사자좌(師子座)에 앉아 여러 곳으로부터 찾아온 대중들을 그 위광(威光)으로 남김없이 덮고 있었다.

  그 때 비야리성에 장자의 아들 보적(寶積)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5백 명의 장자의 아들과 함께 저마다 7보(寶)로 꾸민 일산(日傘)을 받쳐 들고, 부처님께서 계신 곳을 찾아와서 부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예배하고 들고 온 일산을 모두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위신력으로 일산들을 합쳐 하나로 만들었고, 그것으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모두 덮었다. 그리하여 이 세계의 드넓은 모습이 그 안에 모두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수미산(須彌山)과 설산(雪山)·목진린타산(目眞隣陀山)·마하목진린타산(摩詞目眞隣陀山)·향산(香山)·보산(寶山)·금산(金山)·흑산(黑山)·철위산(鐵圍山)·대철위산(大鐵圍山)과 대해(大海)와 강물[江河]과 냇물[川流]과 샘물[泉源], 그리고 해와 달과 성신(星辰)·천궁(天宮)·용궁(龍宮), 그 밖의 다른 온갖 신(神)들의 궁전이 모두 그 7보의 일산 안에 나타났다. 또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과 그 부처님들이 법을 설하는 것도 7보의 일산 안에 역시 나타났다.

  그 때 모든 대중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보고는 아직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라 찬탄하였으며, 합장하고 부처님께 예배하였다. 그들은 부처님의 얼굴을 우러러보며 눈을 떼지 못하였다.

  이 때 장자의 아들 보적이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게송(偈頌)을 읊었다.

  

  맑은 눈 길고 넓기가 푸른 연꽃 같고

  마음은 맑아 온갖 선정(禪定) 다 닦으셨고

  오래도록 쌓은 정업(淨業)은 헤아리기 한량이 없어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시니 머리숙입니다.

  

  부처님[大聖]께서 신비한 교화의 힘[神變]을 나타내시니

  시방의 한량없이 많은 나라들을 널리 드러내시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펴시니 

  거기서 남김없이 모두 다 보고 듣사옵니다.

  

  위대한 법왕의 법력 세상[群生]을 뛰어넘어 

  항상 가르침[法財]을 모두에게 베푸시오며

  온갖 법상(法相)을 바르게 판단[善分別]하시니

  진리다운 모습[第一義] 잃지 않으십니다.

  

  이미 제법(諸法)에 자유자재하시니

  그 때문에 이 법왕께 머리 숙여 절하네.

  "제법은 있는 것[有]도 아니고 없는 것[無]도 아니지만

  인연으로 인하여 제법이 생기며,

  나라는 실체도 없고[無我], 지은 것도 없고[無造], 받는 것도 없지만[無受]

  선악의 업은 없어지지 않는다" 설하시네.

  

  처음 보리수(菩提樹) 아래서 마왕을 항복하시고

  불사의 법[甘露]과 열반[滅]을 얻어 깨달음 이루시었으니

  이미 마음엔 분별이 없고 수(受)와 행(行)도 없고

  게다가 모든 외도를 굴복시키셨네.

  

  온 세계[大千]를 향해 세 번 설하신 가르침5)은

  

5) 세존께서 개오(開悟)한 다음 맨 처음 가르침을 설하신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이 때 세존께서는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진리를 설하셨다. 이것을 형식상(形式上) 세 가지로 나누어 세 번 설했다고 한다. 그 첫째는 이것은 고(苦)라고 가르친 것[示轉], 둘째는 고를 알고 그 근원인 번뇌를 끊지 않으면 안 된다고 권한 것[勸轉], 셋째는 나는 이미 고를 알고 번뇌를 이미 끊었다고 증명한 것[證轉]이다. 법륜(法輪)은 가르침을 뜻하며, '륜(輪)'에 대해 '전(轉)'이라고 하는 말을 쓰고 있다.


  본래부터 항상 청정(淸淨)하고

  천인과 사람이 진리[道]를 구하매 이를 증거[證]로 삼으니

  3보(寶) 이로써 세간에 나타내시네.

  

  이 묘법(妙法)으로써 뭇 중생 제도하시니

  한 번 받으면 물러남 없이 항상 열반에 들어

  늙음과 질병과 죽음을 다스리는 대의왕(大醫王)이시여.

  마땅히 법해(法海)의 공덕 무변함에 예배합니다.

  헐뜯거나 칭찬함에 움직이지 않음은 수미산 같고

  선과 악에도 한결같이 자비로우며

  심행(心行)이 평등함은 허공과 같아

  누가 세존의 가르침[人寶]을 듣고 경배하지 않으리.

  

  지금 세존께 이 조그만 일산을 바치오니 

  그 안에 세계와 

  온갖 천신과 용신이 사는 궁전과

  건달바 그리고 야차까지 나타내시네.

  

  세간의 온갖 것 모두 나타내 보이심은

  10력(力)의 자비로 이 신통(神通) 나타내시어

  중생들이 보고는 희유(稀有)한 일이라 부처님 찬탄하니

  이제 나는 삼계의 으뜸이신 분에게 경배합니다.

  

  대성인 법왕이신 부처님은 중생들의 귀의처

  맑은 마음으로 부처님 뵙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네.

  모두가 세존의 앞에 있음을 보는 것

  이는 곧 짝할 이 없는 신통력일세.

  

  부처님은 한 음성[一音]으로 법을 설하시지만 

  중생은 제 허물[類]6)따라 깨달음 얻네.

  모두들 세존의 그 말씀 한가지라 여기니

  이는 곧 짝할 이 없는 신통력일세.

  

  부처님은 한 음성으로 법을 설하시지만

  중생은 저마다의 깨달음을 따라

  모두 받아들이고 행하며 그 이익 얻으니

  이는 곧 짝할 이 없는 신통력일세.

  

  부처님은 한 음성으로 법을 설하시지만

  어떤 이는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기뻐하며

  어떤 이는 싫어서 떠나고 어떤 이는 의혹을 끊으니

  이는 곧 짝할 이 없는 신통력일세.

  

  10력(力)을 대정진하시고

  이미 무소외(無所畏)를 얻으신 분께 경배합니다.

  불공법(不共法)에 머무시는 분,

  일체의 대도사(大導師)에게 경배합니다.

  

6) 본래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전(原典)에 "세존에 의하여 한 말씀이 말해진 것에 불과한 때에도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그 말씀을 자기 지방의 방언으로써 각각 이해할 수가 있으며, 자기가 납득한 의미에 따라서 이해한다"고 한 것이 나집의 번역에 이르러서는 보다 시적(詩的)으로 번역되었다. 즉 '허물[類]'이라고 한 것에는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함에 있어서 언어적인 요건만이 아니라, 그가 지니는 업연(業緣)까지를 뜻으로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나집은 다음 절에서 "저마다의 깨달음을 따라서"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온갖 번뇌의 구속(拘束)을 끊으신 분,

  이미 깨달음의 언덕[彼岸]에 이르신 분께 경배합니다.

  온갖 세간의 중생을 제도하시는 분, 

  생사의 길을 떠나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중생의 오가는 모습을 모두 다 아시고

  훌륭히 제법으로부터 해탈하셨으며

  세간에 물들지 않기를 마치 연꽃같이 하시고

  항상 공적(空寂)을 행하시네.

  온갖 사물의 법상에 통달하며 걸림이 없어

  허공과 같아 의지할 바 없으시니 경배합니다.

  

  그 때 장자의 아들 보적은 이 게송을 모두 읊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우리들 5백 명 장자의 아들은 모두가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불국토의 청정을 듣고자 바라고 있습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여러 보살이 정토(淨土)를 이루기 위한 수행에 대해 설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보적이여. 여러 보살을 위하여 여래에게 정토를 이루기 위한 수행에 대해 물었으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내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이에 보적을 비롯한 500명 장자의 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귀를 기울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보적이여, 중생의 국토가 곧 보살의 불국토이니라. 왜냐 하면, 보살은 교화할 중생을 따라서 불국토를 취하고, 중생이 마음을 조복(調伏)하는 바에 따라 불국토를 취하기 때문이다. 또 모든 중생들이 어떠한 나라에 의하여 부처님의 지혜로 깨달아 들어가야 하는가에 따라 불국토를 취하고, 모든 중생들이 어떠한 나라에 의하여 보살의 선근을 일으켜야 하는가에 따라서 불국토를 취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보살이 정토(淨土)를 취하는 것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이가 터[空地]에 집을 짓고자 하면 뜻대로 아무런 걸림이 없겠지만, 만약 허공에 짓고자 한다면 끝내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을 성취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불국토를 취하고자 원하는 것이니, 불국토를 취하고자 원하는 자는 허공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적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올곧은 마음[直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속이지 않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깊은 마음[深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공덕을 갖춘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보리심(菩提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대승의 가르침[大乘]을 실천하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보시(布施)가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모든 재물을 보시할[捨] 줄 아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지계(持戒)가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10선도(善道)를 행하여 서원을 가득 채운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인욕(忍辱)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32상(相)으로 장엄한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정진(精進)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모든 공덕을 힘써 닦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선정(禪定)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마음을 가다듬어[攝心] 흔들림 없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지혜(智慧)가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정정취[正定]7)의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4무량심(無量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자(慈)·비(悲)·희(喜)·사(捨)를 성취한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4섭법(攝法)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해탈(解脫)의 과보를 얻을 수 있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방편(方便)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일체법(一切法)에 훌륭한 방편으로 걸림이 없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37도품(道品)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조용한 마음의 사색[念處]과 올바른 노력[正勤]과 신통력[神足]과 뛰어난 능력[根], 그 작용[力]과 그리고 깨달음을 돕는 것[覺 : 支]과 바른 길[道]을 아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회향심(廻向心)이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모든 공덕을 다 갖춘 중생이 그 나라에 난다.

  

7) 지혜가 밝으면 사물의 진실한 모습[法相]이 분명하게 파악되어 반드시 성불하기로 결정된 중생이라는 뜻이다.


  8난(難)을 없애도록 가르치는 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3악도(惡道)와 8난이 없느니라. 스스로 계행을 잘 지키고 남의 잘못을 꾸짖지 않는 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계율을 범했다는 소리[名]를 들을 수 없다. 10선(善)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목숨이 요절[中夭]하지 않고, 재물은 풍부하여 행실이 청정하며[梵行], 하는 말이 성실하고 진실하고, 항상 부드러운 말을 쓰며, 권속들은 헤어지는 일이 없고, 다툼을 잘 화해시키며, 말했다 하면 반드시 이익을 주고, 질투하지 않고 성내지 않는 정견(正見)을 갖춘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나느니라. 이와 같이 보적이여, 보살이 그 올곧은 마음[直心]을 따라 곧 바른 행을 일으킬 수 있고, 그 행에 따라서 곧 깊은 마음[深心]을 얻느니라. 그리고 그 깊은 마음[深心]을 따라 뜻도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게[調伏] 된다. 뜻이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게 되면 모든 가르침[說]과 같이 행하게 되고, 가르침과 같이 행하게 되면 회향할 수 있게 되며, 그 회향에 따라 곧 방편을 얻게 되고, 그 방편에 따르면 곧 중생을 성취하게 되며, 중생을 성취함에 따라서 불국토가 깨끗해지고, 불국토가 깨끗해짐에 따라서 설하는 법도 깨끗해지며, 설하는 법이 깨끗해짐에 따라서 지혜도 깨끗해지며, 지혜가 깨끗해짐에 따라서 그 마음이 맑아지고, 그 마음이 맑아짐에 따라서 모든 마음의 공덕이 깨끗해진다. 그러므로 보적아, 만약 보살이 정토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맑게 해야 한다. 그의 마음이 맑음에 따라서 불국토도 곧 맑아지기 때문이다."

  이 때 사리불(舍利弗, riputra)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고서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보살의 마음이 깨끗하면 불국토도 깨끗해진다고 하는데, 우리 세존께서 본래 보살이셨을 때 어떻게 마음[意]이 깨끗하지 않았을까 마는, 지금의 이 (세존의) 불국토의 깨끗하지 않음이 이와 같단 말인가?'

  부처님께서는 그 생각을 알아차리시고 곧 말씀하셨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해와 달이 왜 깨끗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장님은 왜 (그 깨끗함을) 보지 못하는 것인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는 장님의 허물일지라도 해와 달의 허물은 아닙니다."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중생의 죄 때문에 여래의 불국토가 깨끗하게 장엄되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할지언정 여래의 잘못이 아니니, 사리불아, 나의 국토가 깨끗하지만 그대가 보지 못하는 것이니라."

  그 때 나계범왕(螺髻梵王, Brahm Skhin)이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그러한 생각으로 이 부처님의 나라를 깨끗하지 못하다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 하면 제가 보기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불국토가 깨끗하기가 마치 타화자재천궁[自在天宮]과 같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제가 보기에 이 나라[土]는 언덕[丘陵]과 험한 구덩이[坑坎]와 가시밭[荊]과 모래와 자갈, 그리고 흙과 돌과 온갖 산과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계범왕은 말하였다.

  "그대의 마음에는 높고 낮은 차별[高下]이 있어 부처님의 지혜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이 나라를 보고 깨끗하지 않다고 할 뿐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모든 중생을 한결같이 평등하게 여기고, 깊은 마음[深心]도 청정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지혜에 의지하면 능히 부처님의 나라가 깨끗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 발가락으로 땅을 누르셨다. 곧바로 삼천대천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귀한 보배로 장식된 것이고, 마치 보장엄불(寶莊嚴佛)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으로 장엄한 나라[寶莊嚴土] 같았다. 모든 대중들이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본 일이 없다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자기들 모두가 이 세계에서 보련화(寶蓮華)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이 불국토가 깨끗하게 장엄된 것을 보았는가?"

  사리불이 대답했다.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들은 적도 없는 것들이 여기 불국토에 깨끗하게 장엄되어 나타난 것을 모두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불국토는 항상 이같이 깨끗하지만, 이 나라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건지고자 하기 때문에 이러한 온갖 악으로 가득 찬 더러운 땅을 보여 준 것뿐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여러 천신들[諸天]이 보옥(寶玉)으로 된 그릇으로 함께 밥을 먹는다 해도 그들이 지은 복덕(福德)에 따라서 밥의 빛깔[飯色]이 다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리불아, 만약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면 곧 이 불국토가 공덕으로 장엄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나라의 깨끗하게 장엄된 것을 나타낼 때 보적이 이끄는 5백 명 장자의 아들들이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고, 8만 4천의 사람들도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켰다.

  부처님께서 신통력[神足]을 거두어들이시자 지금까지 있던 세계는 원래대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성문승(聲聞乘) 3만 2천 인과 천신들과 인간들까지도 유위법(有爲法)이 무상함을 알았고, 모든 번뇌를 멀리 떨쳐 버리고 법안(法眼)이 청정해짐을 얻었다. 또 8천의 비구들은 온갖 존재에 집착하지 않고[不受諸法] 번뇌가 다하여 마음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2. 방편품(方便品)


  그 때 비야리 대성(大城)에 장자(長者)가 있었는데, 유마힐(維摩詰)8)이라고 불렸다. 그는 오래전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고, 선근(善根) 공덕을 깊이 심어 무생인(無生忍)을 얻었다. 뛰어난 말솜씨는 거침이 없었고, 신통력을 마음껏 부렸으며, 온갖 다라니[總持]9)를 지녔고, 무소외(無所畏)를 


8) 유마힐은 산스크리트 Vimalakirti를 음역한 말이다. Vimala는 "더럽혀지지 않다," "깨끗하다"는 뜻이고, Kirti는 '명성,' '평판'이라는 뜻이다. 지겸과 나집은 유마힐을 가리켜 '장자'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그에 해당하는 부분을 현장이나 티베트에서는 '릿자비의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어 유마힐이 릿자비족(族) 출신임을 가리키고 있다. 장자는 산스크리트 ghapati의 번역으로 부호, 또는 연령이나 덕이 높은 사람을 뜻하지만, 어원을 따지면 부족의 지도자 또는 자산가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나라에 나오는 보적(寶積)이 릿자비족의 출신이며 장자의 아들인 것은 이 경의 뜻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9) 기억술(記憶術)을 말한다. 산스크리트인 dhran(陀羅尼)의 뜻을 옮겨 '총지(總持)' 또는 '능지(能持)'라고 하며, 능히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게 하는 능력이다. 그 방법과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주다라니(呪陀羅尼)인데, 그 주체가 되는 진언(眞言)은 다라니를 대표하게 되었다.


  얻어 악마의 재앙을 물리쳤고, 심원한 법문(法門)에 들어 훌륭하게 반야바라밀[智度]10)을 닦았고, 방편에 통달해 있었다. 큰 서원(誓願)을 성취하였고, 중생들의 마음이 끌려서 바라는 바를 명료하게 알고 있었다. 또한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근기[根]의 예리하고 무딤을 잘 가릴 줄 알았다. 오래도록 불도(佛道)를 닦아서 마음이 이미 맑고 순수하였고[純淑], 대승의 가르침에 마음을 전하고, 해야 할 모든 것을 행하는 데는 잘 생각하고 헤아렸으며, 부처님과 같은 위의(威儀)에 머물러 마음은 바다와 같이 넓었으므로, 모든 부처님들이 칭찬하였고, 부처님의 10대제자와 제석천·범천과 사천왕들의 존경을 받았고, 방편에 통달해 있었다. 큰 서원(誓願)을 성취하였고, 중생들의 마음이 끌려서 바라는 바를 명료하게 알고 있었다. 또한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근기[根]의 예리하고 무딤을 잘 가릴 줄 알았다. 오래도록 불도(佛道)를 닦아서 마음이 이미 맑고 순수하였고[純淑], 대승의 가르침에 마음을 전하고, 해야 할 모든 것을 행하는 데는 잘 생각하고 헤아렸으며, 부처님과 같은 위의(威儀)에 머물러 마음은 바다와 같이 넓었으므로, 모든 부처님들이 칭찬하였고, 부처님의 10대제자와 제석천·범천과 사천왕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사람을 제도하고자 원하는 까닭에 훌륭한 방편으로 비야리성에 살고 있었다.

  그는 한량없이 많은 재산으로 수많은 가난한 사람을 도왔고, 계율을 깨끗하게 지킴으로써11)계를 범하는 많은 사람들[毁禁]12)을 구했으며, 마음을 가누어 인내함[忍調行]으로 해서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혔고, 정진(精進)함으로 해서 게으른 사람들을 이끌었으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정(禪定)을 닦아서 마음이 혼란한 사람들을 이끌었고, 결정적인 지혜로써 무지한 사람들을 제도하였다.

  비록 재가자[白衣]라 하여도 사문(沙門)의 청정한 율행(律行)을 받들어 행하고 있었고, 비록 세속에 살지만 삼계(三界)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처자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항상 범행(梵行)을 닦았고, 권속이 있는 것을 보여주더라도 항상 세상을 멀리 떨어져 있기를 좋아하였다. 보석 등으로 몸을 치장하고는 있었지만 32상과 80종호[相好]로 몸을 꾸미고 있었고, 또 음식을 먹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선(禪)의 기쁨을 맛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만약 노름판에 이르면 그 사람들을 제도하였고, 여러 가지 다른 종교[異敎]의 가르침을 듣는다 해도 올바른 믿음을 깨뜨리지 않았으며, 세간의 전적에 밝다고 하지만 항상 불법을 좋아하였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공양(供養)을 받는 사람으로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정법(正法)을 굳게 지녀 어른은 어른대로 잘 모시고,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잘 포용해서 모든 생활을 잘하며 화목하였다. 비록 세속의 이득을 얻을지라도 그것을 기뻐하지는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사는 거리거리[四衢]를 돌아다니며 중생을 이익되게 하였고, 정치와 법률에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고 보호하였다. 강론(講論)하는 곳에 가면 대승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이끌었고,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을 이끌어 깨우쳤으며, 유곽에 들어가면 욕망의 허물을 가르쳤고, 술집에 가게 되면 정신을 차려 뜻을 바로 세우게 하였다.

  만약 장자들과 함께 있으면 장자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어 그들을 위하여 뛰어난 진리를 설하였고, 거사(居士)들과 함께 있으면 거사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어 그들의 탐욕과 집착을 끊게 하였다. 또 만약 왕족[刹利, katriya]과 함께 있으면 왕족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어 인욕을 가르쳤으며, 바라문과 함께 있으면 바라문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어 그들의 아만(我慢)을 없애게 하였고, 대신(大臣)들과 함께 있으면 대신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어 정법(正法)으로 가르쳐 주었다. 만약 왕자들과 함께 있으면 왕자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어 충효(忠孝)를 가르쳤으며, 내관(內官)들과 함께 있으면 내관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어 궁녀들을 바르게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서민들과 함께 있으면 서민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어 그들에게 복덕의 힘이 일도록 해 주었고, 만약 범천(梵天)과 함께 있으면 범천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어 뛰어난 지혜를 갖도록 일깨워 주었으며, 제석천과 함께 있으면 제석천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어 무상함을 나타내 주었고, 사천왕[護世]과 함께 있으면 사천왕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어 온갖 중생을 지키게 하였다.

  장자 유마힐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방편으로 중생에게 이익되게 하고 있었느니라.

  또 그는 방편으로써 몸에 병이 있음을 나타내었고, 그 병 때문에 국왕·대신·장자·거사·바라문 등과 또 여러 왕자와 함께 그 밖의 관리[官屬] 등 헤아릴 수 없는 수천의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문병하게 되었다.

  유마힐은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몸의 병을 예로 들어가면서 널리 설법을 했다.

  "여러분, 이 몸은 무상한 것이고, 강하지 못한 것이며, 무력하고, 견고하지도 못하며, 재빠르게 썩어 가는 것이므로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괴로움이 되고 근심이 되며, 온갖 병이 모이는 곳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몸은, 지혜가 밝은 사람은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몸은 물방울[聚沫]과 같아서 잡거나 만질 수도 없고, 이 몸은 물거품[泡]과 같아서 오래도록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몸은 불꽃[炎]과 같아서 갈애(渴愛)로부터 생겨난 것이며, 이 몸은 파초(芭蕉)와 같아서 속에 견고한 것이 있지 않습니다. 이 몸은 허깨비[幻]와 같아서 잘못된 생각[顚倒]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이 몸은 꿈과 같아서 허망한 망견(妄見)으로 된 것입니다. 이 몸은 그림자와 같아서 업연(業緣)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며, 이 몸은 메아리와 같아서 온갖 인연을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이 몸은 뜬 구름과 같아서 잠깐 사이에 변하고 사라지며, 이 몸은 번개와 같아서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몸은 주인이 없으니 땅[地]과 같으며, 이 몸은 아(我)가 없으니 불[火]과 같습니다. 이 몸은 영원한 수명[壽]이 없으니 바람[風]과 같으며, 이 몸은 물과 같아서 실체로서의 개아[人]13)가 없습니다. 이 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13) 주(主)·아(我)·수(壽)·인(人)은 실체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 지(地)·수(水)·화(火)·풍(風)의 4대(大)를 배당한 것이다. 고대 인도의 사상계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로서 네 가지를 생각하고, 이것을 4대(大)라고 하였다. 따라서 '지(地)'는 견고함을, '수(水)'는 습기를, '화(火)'는 열기를, '풍(風)'은 움직임을 각각 그 성질로 하고, 거기에는 저마다의 작용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체로서의 '주(主),' 여기에서는 실체로서의 주체[主]를 위시하여 자아[我], 생명으로서의 개체[壽], 실체로서의 개아(個我 : 人) 등 네 가지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이라든가 인격의 주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실체시(實體視)하는 사고방식이므로, 불교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현장의 번역에서는 지(地)·수(水)·화(火)·풍(風)에 공(空 : 虛空)을 더하여 5대(大)라 하고 첨가한 하나는 '살아 있는 것[有情]'이다. 그리고 배당하는 방법도 나집과는 다르다. 티베트 번역은 4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실체시된 것으로 취급된 것은 다섯 가지다. 나집의 번역에 없는 그 하나는 행위의 주체인 '작자(作者)'이다. 따라서 배당을 받지 못한 것이 하나 나오는데, "이 몸은 여러 가지 기연으로 해서 생긴 것이어서 주인공이 없다"고 하는 전문이 붙어 있다.

  실체가 아니라 지·수·화·풍의 4대(大)를 집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몸은 공(空)한 것이니, 자아[我]14)와 자아에 소속되는 것[我所]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무지(無知)한 것이니, 풀과 나무와 기왓장과 조약돌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지음이 없으니[無作] 바람의 힘[風力]으로 (인연을) 따라 굴러갑니다. 이 몸은 깨끗하지 않으니,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몸은 거짓인 것이니, 설사 몸을 씻고 옷을 입으며 밥을 먹는다 해도 반드시 닳아서는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몸은 재앙이니, 백한 가지 병으로15)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몸은 언덕의 메마른 우물[丘井]과 같아서 늙음에 쫓기고 있습니다. 이 몸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 몸은 독사와 같고, 원망스러운 도둑과 같고,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空聚]과 같아서 5음(陰)과 18계(界)와 모든 입처[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16)입니다.

  여러분, 이 몸은 근심스러워하고 꺼려야 할 것이요, 마땅히 부처님의 몸[佛身]을 즐겨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의 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실한 모습 그 자체[法身]이기 때문입니다.

  

14) '아(我)'는 tman으로 자주 독립된 존재이고, 소위 '아소(我所)'는 tmya로 '나에 속한다'를 의미하며, 소위 속성(屬性)을 뜻한다. 형이상학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당연히 이 실체와 속성은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아연기(無我緣起)의 입장에 있어서는 이 구별은 무시된다. 여기서는 특별히 우리의 육체가 그러한 것을 말한 것이다.

15) 신체의 네 가지 요소인 4대(大)에 각각 백 가지 병이 있고, 거기에 원소 자체를 포함해서 '백일병(百一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흔히 사백네 가지 병이 있다고도 한다. 

16) 음(陰), 계(界), 제입(諸入)은 모두가 인식이 성립하는 근거 또는 존재의 범주로서, 즉 5음(陰 : 薀), 12처(處 : 入), 18계(界)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공덕과 지혜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계(戒)·정(定)·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으로부터 생기고, 자(慈)·비(悲)·희(喜)·사(捨)로부터 생기며, 보시(布施)하고 계를 잘 지키며[持戒], 잘 참고[忍辱], 마음을 온화하게 갖고[柔和], 힘써 수행해 정진하고[勤行精進], 선정(禪定)으로 해탈(解脫)하여 삼매(三昧)에 들고, 많은 가르침을 듣고[多聞], 지혜(智慧)를 닦는 등 온갖 바라밀(婆羅蜜)로부터 생깁니다. 또 그것은 뛰어난 방편을 따라서 생기고, 여섯 가지 신통력[六通]으로부터 생기며, 세 가지 초인적인 능력[三明]으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37도품(道品)으로부터 생기며, 지관(止觀)하는 것으로부터 생기고,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18불공법(不共法)으로부터 생깁니다. 선(善)하지 않은 모든 것을 끊고 선한 모든 것을 모으는 것으로부터 생기고, 진실로부터 생기며, 방종하지 않는 것[不放逸]으로부터 생깁니다.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청정한 법으로부터 여래(如來)의 몸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처님의 몸을 얻어 모든 중생의 병을 끊고자 원한다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켜야 됩니다."

  이와 같이 장자 유마힐은 문병 온 모든 이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알맞은 설법을 하여 헤아릴 수 없는 수천의 사람들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3. 제자품(弟子品)

  그 때 장자 유마힐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몸져 누워 있는데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큰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실까?'

  부처님께서는 유마힐의 그러한 마음을 아시고 곧 사리불(舍利弗)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사리불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각해 보니, 저는 예전에 숲 속 나무 밑에서 좌선[宴坐, phatisa layana]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사리불이여, 반드시 이렇게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좌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좌선이란 것은 몸과 마음의 (작용이) 삼계(三界)에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멸정(滅定)을 일으키지 않고서도 온갖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것, 이것이 좌선입니다. 진리의 법[道法]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세속의 일상 생활[凡夫事]을 나타내는 것이 좌선이며, 마음이 안으로 닫혀 있(어서 고요함만을 탐닉하)지 않고 밖을 향하(여 혼란하)지 않는 것이 좌선입니다. 온갖 견해에도 요동하지 않으면서도 37도품(道品)을 닦는 것이 좌선이며, 번뇌를 끊지 않고서도 열반에 드는 것이 좌선입니다. 만약 이같이 앉을 수 있는 자라면 부처님께서는 인가하실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그 때 저는 이러한 말을 듣고서도 말문이 막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목건련(大目犍連, Mahmaudgalyyan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을 하라."

  목련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저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저도 비야리 대성으로 들어가 거리에서 많은 거사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있었는데, 그 때 유마힐이 다시 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대목련이여, 백의거사(白衣居士)를 위해서 설하는 설법은 그대가 설하듯이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여법(如法)17)하게 설해야 합니다. 법에는 중생이 없으니, 중생의 번뇌[垢]를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자아의 존재[有我]가 없으니, 나[我]의 번뇌[垢]를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수명(壽命)이 없으니, 생사를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인(人)이 없으니, 과거의 생과 미래의 생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18)

  

17) 여기서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즉 실상(實相)이라는 뜻이다.

18) "법(法)에는 중생이 없으니 미래의 생(生)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까지는 중생의 공(空)을 설한 것이며, 다음 절(節) "법(法)은 항상 고요하니……" 이하는 법의 공함을 설한 것이다.


  법은 항상 고요하니[寂然], 모든 상(相)19)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며, 법은 상을 떠나 있으니, 인식의 대상[所緣]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은 이름이 없으니, 언어(로 미칠 수 있는 길이) 끊겼기 때문이며, 법은 말[說]이 없는 것이니, 크고 작은 생각[覺觀]20)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법은 모양이 없으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 법은 부질없는 말[虛論]이 없으니,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입니다.

  법에는 내 것[我所]이 없으니, 내 것, 네 것을 다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분별이 없으니, 식별(識別)하는 작용[識]21)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은 비교할 수가 없으니, 상대(相對)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은 근본적인 원인[因]에 속한 것이 아니니, 간접적인 원인[緣]에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존재에 골고루 나타나 있으므로 법성(法性),22)과 같기 때문입니다. 법은 여여(如如)함을 따르니, 다른 것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법은 실제(實際)에 머무르니, 어떠한 환경[邊]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에는 동요함이 없으니, 6경[塵]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법은 오고 감[去來]이 없으니, 시간[常] 속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은 공(空)을 따르고 무상(無相)을 따르고, 작위함이 없어야[無作] 하니, 법은 아름다움과 더러움의 (차별을) 떠났으며, 법은 더하거나 덜함이 없으니, 법은 생멸(生滅)이 없기 때문이며, 법은 돌아가야 할 바도 없으니, 법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心]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며,23)

  

19) 하나의 사물을 특징 짓는 그 사물의 특질, 모습, 모양, 형태 등이다. 이곳에서 주의할 것은 '상(相)'이라고 했으나 티베트 역에서는 '탐욕(貪慾),' 현장은 '탐착(貪着),' 그리고 나집의 다른 책에서는 '상(想)'이라 했다.

20) 각(覺, vitarka)은 치밀하지 못한 생각이며, 관(觀, vicra)은 치밀한 생각, 자세하게 살피는 것이다.

21) 식(識)을 흔히 '알음알이'라고 번역한다. 본래의 뜻은 '꾀바른 수' 또는 '서로 가까이 아는 사람'이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식별(識別)하는 것' 또는 '식별하는 작용'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22) 이 대문에서는 법성(法性), 진여(眞如), 실제(實際) 등이 이야기되고 있으나, 법신(法身)을 비롯한 진여의 이명(異名)이다. 이 대목을 나집은 "법동법성입제법고(法同法性入諸法故)"라고 했다. 의역하면, "법이 사물의 진실한 본성(本性 : 法性)과 같음은 모든 제법(諸法)에 빠짐없이 사무쳤기[入] 때문이다"이다.

23) 사물의 진실한 모습 자체인 법에 있어서는 일상적인 상황은 무의미한 것이며, 그러한 법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통상적인 6정(情)을 초월하여 6정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법에는 높고 낮음이 없으니, 법은 상주(常住)하여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며,24) 법은 일체의 분별하는 관찰(觀察)과 소행에서 떠났습니다. 대목련이여, 법상(法相)은 이와 같은데, 어찌 설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법을 설하는 것은 설함도 없고, 가리킴도 없으며, 그 법을 듣는 것도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마술사[幻士]가 마술로 만든 인형[幻人]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갖고서 법을 설하여야 합니다. 마땅히 중생의 능력[根]에 예리하고 무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만 하며, 중생을 보고 지견(知見)이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어야 하고, 커다란 자비심으로 대승(大乘)을 찬탄하며,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염원하여 3보(寶)가 끊어지지 않도록 한 다음에 설법해야 합니다.'

  대목련이여, 법상(法相)은 이와 같은데, 어찌 설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법을 설하는 것은 설함도 없고, 가리킴도 없으며, 그 법을 듣는 것도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마술사[幻士]가 마술로 만든 인형[幻人]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갖고서 법을 설하여야 합니다. 마땅히 중생의 능력[根]에 예리하고 무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만 하며, 중생을 보고 지견(知見)이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어야 하고, 커다란 자비심으로 대승(大乘)을 찬탄하며,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염원하여 3보(寶)가 끊어지지 않도록 한 다음에 설법해야 합니다.'

  유마힐이 이와 같이 법을 설하였을 때, 8백 명의 거사들이 한결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러한 말재주[辯才]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가섭(大迦葉, Mahkyap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저는 옛날 가난한 마을에서 걸식을 하였는데, 그 때 유마힐이 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대가섭이여, 자비심을 가지면서도 널리 펴지 못하고, 이같이 부잣집을 내버려두고 가난한 사람만 쫓아가 걸식을 하니, 가섭이여, 평등한 법에 머물러 마땅히 차례대로 걸식해야 합니다. 먹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걸식을 해야 하며, (5온에 의해 임시적으로) 뭉쳐진 (육신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 

  

24) 앞에서 "법이 오고 감이 없는 것은 시간 속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고 한 것은 법을 실재론적(實在論的)으로 보는 것을 부정한 것이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상주(常住)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함은 이법(理法) 그 자체의 절대적인 불변성(不變性)을 강조한 것이다.


  위함이니, 마땅히 주먹밥[揣食]을 먹어야 하며, (생사의 과보를) 받지 않기 위한 까닭으로 마땅히 그 음식을 받아야 하며, (이 몸은)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라는 생각으로 마을에 들어가야 합니다.

  형상[色]을 보아도 장님과 같이 보아야 하며, 소리를 들을 때는 메아리를 듣는 것과 같이 하며, 향내음을 맡아도 바람과 같이 맡고, 먹고도 맛을 분별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온갖 감촉을 느낄 때에도 지혜를 증득하듯이 해야 합니다. 또 존재하는 모든 것[諸法]을 환상(幻相)같이 알며, 법에는 자성(自性)과 타성(他性)도 없으므로 그 자체로는 생기지 않으므로 지금도 멸(滅)하는 일이 없습니다.

  가섭이여, 능히 여덟 가지 사도(邪道 : 8正道에 반대되는 것)를 버리지 않고서도 8해탈(解脫)에 들어가고, 사악한 모습을 지닌 채 정법(正法)에 들어가며, 한 끼의 밥으로도 모든 중생에게 베풀며, 모든 부처와 온갖 성현에게 공양한 다음에야 먹을 만합니다. 만약 이와 같이 먹는 사람은 번뇌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번뇌가 없기 때문도 아니며, 또 선정의 삼매에 들어서도 아니고, 선정에서 나와서도 아니며, 이 미혹한 세간에 머물러서도 아니고, 열반(涅槃)에 머물러서도 아닙니다.

  그 보시하는 사람에게는 큰 복도 없고 작은 복도 없으며,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니, 이같이 (손익을 생각하지 않고) 하는 것이야말로 바르게 불도(佛道)에 들어가는 것이며, 성문(聲聞)의 길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섭이여, 이같이 먹는다면 남의 보시를 헛되이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때 저는 이같이 설하는 말을 듣고서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 생각하고는 모든 보살들에 대해서 깊이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으며, 또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재가에 있으면서 변재와 지혜가 이럴 수가 있는데, 그 누가 이를 듣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저는 이 때부터 다시는 성문(聲聞), 벽지불(辟支佛)의 수행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須菩提, Subhti)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그리하여 최후의 단계에 이르면, 

  수보리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저는 옛날 그의 집에 들어가 걸식하였는데, 그 때 유마힐은 저의 발우를 들고 밥을 가득 채워 주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먹는 것에서 평등할 수가 있으면 모든 법(法)에서도 평등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법에서 평등할 수가 있으면 먹는 것에도 평등합니다. 이같이 걸식(乞食)을 하고 다닐 수가 있으면 주어진 것을 먹어도 될 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탐욕[淫]25)과 성냄[怒]과 어리석음[癡]을 끊어 버리지 않고서도 그것들과 함께 하는 것도 아니며, 내 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서도 일상(一相)을 따를 수가 있으며, 어리석음과 탐욕을 없애 버리지 않고서도 지혜와 해탈을 일으킨다면, 5역죄(逆罪)를 범하는 모습으로도 해탈을 얻고, 해탈된 것도 결박된 것도 아니면, 4성제[四諦]를 보는 것도 아니면서도 4성제를 보지 않는 것도 아니라면, 범부(凡夫)도 아니면서도 범부의 법을 떠난 것도 아니라면, 성인도 아니면서 성인(聖人) 아닌 것도 아니라면, 비록 일체법(一切法)을 성취(成就)했으면서도 제법의 상(相)에서 떠났다면 먹어도 될 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부처를 만나지도 못하고 가르침도 못 듣고, 저 육사외도(六師外道)인 부란나가섭(富蘭那迦葉, Prana kyapa)·말가리구사리자(末伽梨拘梨子, Maskarin Golputra)·산자야비라지자(刪闍夜毘羅子, Sa jayin Vairatiputra)·아기다시사흠바라(阿耆多翅舍欽婆羅, Ajita Keakambala)·가라구태가전연(迦羅鳩駄迦旃延, Kakuda Kty- yana)·니건타야제자(尼犍陀若提子, Nirgrantha Jtiputra) 등을 그대의 스승으로 삼아 그를 따라서 출가하고, 그 스승이 떨어지는 곳에 역시 그대가 따라서 떨어진다면 이 밥을 먹어도 될 것입니다.

  수보리여, 그대가 만일 온갖 사견을 받아들여서 피안에 이르지 못하고, 8난

  

25) 탐욕 이하의 성냄, 어리석음은 탐(貪)·진(瞋)·치(痴)의 3독(毒)이라 한다. 나집은 이 '탐'을 '음(淫)'으로 번역하고 있다.


  (難)에 머물면서 장애가 없는 경계를 얻지 못하며, 번뇌와 함께 있으면서 청정한 법을 떠나고, 그대가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으면서도 모든 중생도 역시 그러한 삼매를 얻는다면, 그대에게 보시하는 자에게 그대가 복전(福田)이 되지 않는다면, 그대에게 공양을 올리는 자가 3악도(惡道)에 떨어져 많은 악마와 더불어 손을 잡아 온갖 번뇌[勞]의 벗이 되고, 그대는 온갖 악마와 모든 번뇌[塵勞]와 똑같이 하나가 되고, 모든 중생에게 원한을 품고, 모든 부처를 비방하며 정법[法]을 훼손하고, 승가[衆數]에 동참하지 않고 마침내 깨달음[滅度]을 얻지 않는다면 그 때 밥을 먹어도 좋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때 저는 이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여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라서 곧 발우를 내려놓고 그 집을 나오려 했습니다.

  그러자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수보리여, 두려워하지 말고 발우를 드시오. 그대 생각은 어떠하오? 여래께서 만드신 꼭두각시[化人]가 만약 이러한 일로 나무랐다면 그래도 두려워하겠소?'

  저는 말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일체제법(一切諸法)은 꼭두각시의 모습[幻化相]과 같으니, 그대는 지금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모든 말[言說]도 이 꼭두각시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에 이르러서는 문자(文字)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문자(文字)는 자성(自性, svabhva)을 여의었기 때문(에 실상이 空한 것)이니, 문자(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 곧 해탈입니다. 해탈의 모습이란 것은 곧 제법인 것입니다.'

  유마힐이 이러한 법을 설하고 있을 때, 2백의 천자(天子)들은 진리를 바르게 보는 눈[法眼]이 맑아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루나(富樓那, Pramaitryanputr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가서 유마힐을 문병하도록 하라."

  부루나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커다란 숲 속의 한 나무 아래에서 새로 출가한[新學] 비구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부루나여, 먼저 선정에 들어[入定] 이들의 마음을 살핀 다음에 설법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러운 음식을 보배로운 발우[寶器]에 담지 마십시오. 마땅히 이들 비구들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귀한) 유리(琉璃, vairya)를 (한낱) 수정(水精, kcakamai)과 같게 보지 마십시오. 그대는 중생의 근기[根源]도 알지 못하고, 소승(小乘)의 가르침으로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 자신들은 부스럼이 없는데 상처를 주지 마십시오. 큰 길[大道]을 가려고 하는 이들에게 작은 오솔길을 가르쳐 주지 마십시오. 큰 바닷물을 가져다 소 발자국에 넣으려 하지 마십시오. 햇빛을 저 반딧불과 함께 비교하지 마십시오.

  부루나여, 이들 비구는 대승의 마음을 일으킨 지 오래지만, 도중에 이 발보리심(發菩提心)을 잊은 것인데, 어떻게 소승의 가르침으로써 이를 가르쳐 이끌고자 합니까? 제가 보기에는 소승(小乘)은 지혜가 미천함이 마치 장님과 같아 모든 중생의 근기의 예리하고 우둔한 것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유마힐은, 곧 삼매에 들어 이 비구들이 스스로의 과거[宿命]를 알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전생에) 5백 부처님께서 계신 곳에 온갖 선근(善根, kualamla) 공덕을 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로 회향(廻向)하고, 즉시 곧바로[豁然]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여러 비구들은 유마힐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였습니다. 그 때 유마힐은 그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다시는 물러서지 않도록 설법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생각하기를, '성문은 중생의 근기를 정확히 살피지 않고서 설법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하가전연(摩訶迦旃延, Mahktyyan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가전연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을 위하여 간략히 가르침의 요점을 설하셨을 때, 저는 곧 이어서 그 뜻을 자세하게 설하였습니다. 저는 '무상의 뜻이며, 괴로움의 뜻이며, 공의 뜻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체는 없다[無我]는 뜻이며, 적멸(寂滅)의 뜻26)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가전연이여, 생멸(生滅)하는 마음으로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實相]을 설하여서는 안 됩니다. 가전연, 제법은 끝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무상의 뜻이요, 5온[五受陰]은 공하여 생기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이것이 괴로움의 뜻입니다. 제법이 구경에 가서도 존재[所有]하지 않으니, 이것이 공의 뜻이며, 아(我)와 무아(無我)에 있어서 둘이 아닌[不二] 것, 이것이 무아의 뜻이며, (존재하는) 법(法)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곧 멸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적멸(寂滅)의 뜻입니다.'가전연이여, 생멸(生滅)하는 마음으로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實相]을 설하여서는 안 됩니다. 가전연, 제법은 끝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무상의 뜻이요, 5온[五受陰]은 공하여 생기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이것이 괴로움의 뜻입니다. 제법이 구경에 가서도 존재[所有]하지 않으니, 이것이 공의 뜻이며, 아(我)와 무아(無我)에 있어서 둘이 아닌[不二] 것, 이것이 무아의 뜻이며, (존재하는) 법(法)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곧 멸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적멸(寂滅)의 뜻입니다.'

  이러한 법을 들었을 때, 여러 비구들이 마음속 깊이 해탈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나율(阿那律, Aniruddh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라."

  아나율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제가 어느 곳을 경행(經行)하였는데, 그 때 엄정(嚴淨)이라는 범왕(梵王)이 1만을 헤아리는 범천(梵天)과 함께 밝은 빛을 발하면서 제가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저의 발에 머리를 대고 예배한 다음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나율이여, 그대는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는데 어느 정도까지 볼 수가 있습니까?'

  

26) 이 부분을 티베트 역에서 살펴보면 "제행은 변화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운 것이며, 제법은 공한 것이고, 제법은 무아이며, 열반은 적정하다"는 의미이다. 곧 4법인(法印)보다 하나가 더 있다.


  저는 곧 대답하였습니다. 

  '대범천이여, 저는 이 석가모니부처님의 불국토를 포함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손바닥에 있는 암마륵(菴摩勒, Amra)의 열매를 보듯이 봅니다.'

  그 때 유마힐이 저에게로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나율이여, 천안으로 보는 것은 작용[作相]27)입니까, 무작용[無作相]입니까? 만약 작용일 것 같으면, 그 때 그것은 외도들의 5통(通)28)과 같을 것이고, 만약 무작용이라면, 무위(無爲)29)이니 본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 때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범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말이라 하고 유마힐에게 예배하고는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 때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범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말이라 하고 유마힐에게 예배하고는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참다운 천안을 가지고 있습니까?'

  유마힐은 대답하였습니다.

  '부처님이신 세존만이 참다운 천안을 지니고 계셔서 항상 삼매에 드셔서 모든 부처의 나라를 빠짐없이 2상(相)30)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이 말을 들은 엄정대범왕(嚴淨大梵天)과 그 권속 5백의 범천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유마힐의 발에 예배한 다음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엄정대범왕(嚴淨大梵天)과 그 권속 5백의 범천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유마힐의 발에 예배한 다음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우바리(優波離, Upli)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하라."

  우바리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두 사람의 비구가 계율을 범하고 부끄러움에 못 이겨 감히 부처님께 여쭙지도 못하고 저를 찾아와 말하였습니다.

  

27) abhi-sa sktalakana. 인연으로 해서 만들어진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28) 천안통(天眼通)·천이통(天耳通)·숙명동(宿命通)·타심통(他心通)·신족통(神足通)이다. 여기에 누진통(漏盡通)을 더하면 6통이 된다.

29) 인연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닌 존재라는 뜻이다.

30) 상대적인 차별을 가진 관념이라는 뜻이다.


  '우바리 존자여, 저희들은 계율을 범하였습니다. 진심으로 부끄럽게 생각하여 감히 부처님께 나아가 여쭙지 못하오니, 바라옵건대 부디 저희들의 의심과 뉘우침을 풀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허물을 면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법대로[如法]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바리여, 이 두 사람의 비구에게 죄를 더 무겁게 키우지 마십시오. 곧장 그 죄를 없애서 두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게 하지 마십시오. 왜냐 하면 저 죄라는 본성은 (그들 자신의) 안에 있지 않고, 밖에도 없고, 또 그 중간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과 같이 마음이 더러우므로 중생도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므로 중생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또 이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그러하듯이 죄도 또한 그와 같고, 제법도 그와 같으며,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如如, tathat]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바리여, 마음의 본래 모습[心相]으로 해탈을 얻었을 때, 그 때에도 (그 마음은) 더러움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저는 대답하였습니다.

  '없습니다.'

  그러자 유마힐은 말하였습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의 본래의 모습의 더럽지 않음[無垢]도 이와 같습니다. 우바리여, 망상(妄想)이 더러움[垢]이요, 망상이 없는 것이 깨끗한 것입니다. 그릇된 생각[顚倒]이 더러운 것이지만 그릇된 생각이 없으면 곧 깨끗한 것입니다. 취아(取我)31)가 더러운 것이지만, 취아라 생각하지 않으면 깨끗한 것입니다. 우바리여, 일체법이 생멸(生滅)하며 머무르지 않는 것[不住]이 허깨비[幻]나 번갯불과 같으며, 제법은 서로 기다리는 일이 없어[不相待]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제법은 모두 망견(妄見)이며 꿈과 아지랑이 같고, 물 위에 뜬 달, 거울 속에 비친 모습과 같이 망상으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이와 같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라 이름할 수 있으며


31) tmasamropa로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 같은 도리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잘 깨달은 사람[善解]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의 비구가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높은 지혜를 가진 분이군요. 이는 우바리 존자가 감히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계율을 잘 지킨다 해도 이렇게 설하지는 못합니다.'

  저도 대답하였습니다.

  '여래를 제외하고는 어떤 성문이나 보살도 이 유마힐의 걸림없는 훌륭한 말솜씨[樂說之辯]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그 지혜가 밝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의 비구는 의심과 죄책감에서 벗어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다고 발원(發願)하고, 일체 중생이 모두 이러한 말솜씨를 얻을 수 있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라후라(羅羅, Rhul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라후라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비야리성의 여러 장자의 아들들이 저를 찾아와 머리를 숙여 예배하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라후라여, 당신은 부처님의 아들로서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버리고 깨달음을 위하여 출가하셨으니, 그 출가에는 어떠한 이익이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법하게 출가의 공덕과 이익에 대해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라후라여, 출가의 공덕이나 이익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아무런 이익도 공덕도 없는 것이 출가이기 때문입니다. 유위법(有爲法)이라면 이익이나 공덕이 있다 할 수 있겠지만, 출가는 무위법(無爲法)을 구하는 것으로서 무위법에는 이익이나 공덕이 없습니다. 라후라여, 출가에는 깨달음[彼]도 미혹[此]도 없고 그 중간도 없습니다. 62견(見)32)을 멀리 떠나 열반(涅槃)에 처하는 것이니 지혜로운 이가 누리는 것이며, 성인이 닦는 길인 것입니다.

    

32) 불교 이외에서 설해지고 있는 사상으로는 정통 바라문교의 사상 이외에도 쟈이나교 등 6명의 유명한 사상가도 있다. 이들을 육사외도라고 하는데, 이들 외에도 이러한 사상을 62종(種)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으로는 과거나 미래에 관한 문제, 자아의 불변불멸(不變不滅)에 관한 문제, 사후(死後)의 문제가 있다.


  온갖 마군을 항복시켜 5도(道)33)를 넘어서 5안(眼)을 맑게 하고, 5력(力)을 얻었고, 5근(根)을 바르게 세워 그 어떤 것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온갖 잡다한 악을 떠나고 모든 외도들을 꺾었으며, 가명(假名)34)에 집착하지 않으며, 애욕의 진흙탕을 벗어나 온갖 속박을 벗어났으며,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없고, 집착하는 마음[所受]도 없고, 마음의 혼란이 없고, 안으로 늘 기쁨을 간직하고 중생들의 마음을 지켜 주며, 선정(禪定)을 따르며 온갖 잘못을 다 떠나 버립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참다운 출가인 것입니다. 이 때 유마힐은 장자의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때 유마힐은 장자의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정법(正法)을 받아들여 함께 출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기회를 만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아들들은 말하였습니다.

  '거사(居士)님, 저희들이 듣기에는 부모님의 허락이 없으면 출가할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만…….'

  그러자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대들이 지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곧 출가이며, 구족(具足)35)입니다. 그 때 서른두 명의 장자의 아들들은 한결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서른두 명의 장자의 아들들은 한결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 nand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을 하도록 하라."

  

33) 지옥·아귀·축생·인간·천상의 윤회하는 세계를 말한다.

34) 가설(假說)·가(假)·시설(施說)이라고도 한다. 사물을 승의제(勝義諦)의 입장에서 보면 공(空)이지만, 세속제(世俗諦)의 입장에서 보면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가유(假有)이다. 이처럼 방편으로 이름 붙여진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35) 교단이 정하는 완전한 계율을 받은 것이다.


  아난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세존께서 몸이 조금 불편하시던 때에 저는 우유를 잡수시면 좋으리라 생각하고, 발우를 들고 큰 바라문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는데, 그곳에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난이여, 무슨 일로 이런 이른 아침에 발우를 들고 여기에서 있습니까?'

  저는 대답하였습니다.

  '세존께서 몸이 좀 불편하셔서 우유를 잡수시면 좋을 것 같아서 이곳에 왔습니다.'

  유마힐은 말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아난이여.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래의 몸은 금강석과 같은 몸으로,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을 빠짐없이 몸에 지니고 계시는데, 어떤 병이 있겠으며, 어떤 괴로움이 있겠습니까? 잠자코 돌아가십시오. 아난이여, 부처님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그같이 설익은 말[麤言]을 누구에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뛰어난 위엄과 덕을 갖춘 제천(諸天)과 다른 곳의 불국토에서 온 보살들도 이런 말을 듣지 않도록 하십시오. 아난이여, 전륜성왕은 약간의 복덕으로도 병에 걸리지 않는데, 하물며 어떻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덕을 모두 모아 몸에 지니시고, 모든 것을 이기신 분[勝者]인 부처님께서 어찌 병을 앓겠습니까? 아난이여, 우리들이 이 같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시오. 만약 외도인 바라문[梵志]이 이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떻게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병도 고칠 수 없는 주제에 남의 병을 고칠 수 있다니.)

  그대는 빨리 돌아가서 남이 듣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난이여, 모든 여래의 몸은 진리 그 자체[法身]이지, 미혹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몸이 아니며,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世尊]으로서 삼계에서 벗어나셨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부처님의 몸에는 번뇌가 없고[無漏], 어떠한 번뇌도 이미 사라져 없으며, 부처님의 몸은 무위(無爲)이니 세상의 온갖 도리[諸數]에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몸에 어떻게 병이나 고뇌가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그 때 참으로 부끄러움과 죄송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을 가까이 모셨으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어떻게 잘못 알아듣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공중에서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아난이여, 거사의 말과 같다. 다만 부처님은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나타내셨기에 실제로 이 가르침을 드러내심으로써 중생을 해탈하게 하기 위해서 행하고 계실 뿐이다. 아난이여,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유를 가지고 돌아가라.'

  세존이시여, 유마힐의 지혜와 변재(辯才)는 이같이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5백의 제자들은 각각 부처님께 그들이 전에 경험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유마힐이 했던 말을 칭찬하여 모두 말하였다.

  "저희들은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4. 보살품(菩薩品)


  그 때에 부처님께서 미륵보살(彌勒菩薩)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을 하도록 하라."

  미륵보살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제가 도솔천왕(兜率天王)과 그 권속들을 위하여 불퇴전지(不退轉地)의 수행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그 때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미륵이여, 세존께서는 그대에게 수기(授記)를 주시기를 이제 한 생(生)만 더 태어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는데, 어느 생(生)에서 수기를 받으렵니까? 과거의 생입니까, 미래의 생입니까, 현재의 생입니까? 만약 과거의 생이라고 한다면, 그 과거의 생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만약 미래의 생이라고 한다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만약 현재의 생이라고 하여도 그 현재의 생은 (끊임없이 流動하고 있어서) 한 군데 머무르는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비구여,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나고 늙으며 죽어가고 있지36)않습니까? 만약 무생(無生)37)의 경지에서 수기를 받은 것이라면, 정위(正位)38)이므로, 이 정위에서는 수기를 받는 일도 없을 것이며,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미륵이여, 어느 생에서 수기를 받으려 합니까? 여여(如如)한 경지가 생기는 것으로부터 수기를 받으렵니까, 아니면 여여한 경지가 멸(滅)하는 것으로부터 수기를 받으려 합니까? 만약 여여한 경지가 생기는 것으로써 수기가 이루어진다면 여여는 거기에는 생기는 일이 없으며, 만약 여여한 경지가 멸하는 것으로써 수기가 이루어진다 해도 여여에는 멸(滅)이 없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여여하고,39)일체법이 여여하며, 모든 성인과 현자도 여여하니, 그대 미륵까지도 여여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 미륵이 수기를 얻었다고 하면, 일체 중생도 예언을 얻은 것이 됩니다. 왜냐 하면 여여에 있어서는 두 가지 다른 것이 아니기[不二不異] 때문입니다. 만약 그대 미륵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면, 일체 중생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일체 중생 그대로가 깨달음의 실상[菩提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대 미륵이 깨달음의 경계[滅度, parinirvna]에 이른다고 한다면, 일체 중생도 깨달음의 경계에 이를 것입니다. 왜냐 하면 제불(諸佛)께서 일체 중생이 필경 깨달음[寂滅]을 얻고, 그대로 열반의 모습이며, 다시는 멸하는 일이 없다40)고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륵이여, 이러한 (나는 장차 깨달음을 얻으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것을 설하여 천상(天上)의 신들을 유혹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다는 것도 없고, 또한 그러한 마음이 후퇴한다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미륵이여, 이 모든 천상의 신들로 하여금 보리(菩提, bodhi)를 분별하는 생각[見]을 버리게 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보리라는 것은 몸[身]으로 얻을 수도 없는 것이며, 마음으로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멸(寂滅)이야말로 보리이니, 모든 모습[相]을 멸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관하지 않는 것이41) 보리이니, 온갖 대상과의 관계[緣]를 떠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보리이니,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憶念]이 없기 때문입니다. 끊어 없애는 것[斷]이 보리이니, 모든 그릇된 견해[邪見]를 끊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떠나는 것[離]이 보리이니, 모든 망상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장애(障碍)가 보리이니, 모든 잘못된 바람[願]을 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들지 않는 것[不入]이 보리이니, 탐착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르는 것[順]이 보리이니, 여여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머무는 것[住]이 보리이니, 법성(法性)42)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르는 것[至]도 보리이니, 실제(實際)43)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이 아닌 것[不二]이 보리이니, 마음과 대상[法]으로부터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등함[等]이 보리이니, 허공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위(無爲)44)가 보리이니, 생(生)하고 머무르며, 멸(滅)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知]이 보리이니, 중생의 심행(心行)을 명확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만나지 않음[不會]이 보리이니, 마음과 그 행을 알게 하는 대상[諸入]이 만나 결합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합하지 않음[不合]이 보리이니, 번뇌의 습기(習氣)45)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자리함이 없는 것[無處]

  

41) 승조(僧肇)는 『주유마경(注維摩經)』에서 "관(觀)은 연(緣)으로부터 생(生)하고 연(緣)을 떠나면 즉 관(觀)이 없다"고 주석(註釋)하고 있다. 따라서 승조는 다음의 '불행(不行)'에 대해서 "행(行)은 염(念)으로부터 생(生)하고 염(念)이 없기 때문에 행(行)이 없다," '장(障)'에 대해서는 "진도(眞道)에는 욕(欲)의 온갖 원(願)을 막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불입(不入)'에 대해서는 "입(入)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불이(不二)'에 대해서는 "마음[意]과 그것의 대상[法] 둘이 있다. 그러나 보리에는 마음마저 없다. 어찌 법(法) 따위가 있겠는가," '불회(不會)'에 대해서는 "제입(諸入)이란 것은 내외(內外)의 6입(入 : 6根·6境)이다. 내외(內外)가 함께 공하므로 제입이 만나지 않는다. 제입이 만나지 않음은 보리이다. 즉 보리의 근(根)이다"고 주역(註譯)하고 있다.

42)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본성(本性)이다.

43)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극한(極限) 또는 변제(邊際)이다.

44)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절대한 경지이다.

45) 번뇌로 인하여 몸에 배었던 습성의 나머지이다.


  보리이니, 형색(形色)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명(假名)이 보리이니, 이름과 문자[名字]가 공(空)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깨비[幻]와 같은 것이 보리이니, 취(取)하고 버리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혼란이 없는 것[無亂]이 보리이니, 항상 스스로 고요하기 때문입니다. 미혹을 떠난 경계[善寂]가 보리이니, 그 성품이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취하지 않음[無取]이 보리이니, 마음이 대상에 의하여 움직임[攀緣]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다르지 않음[無異]이 보리이니, 모든 존재[法]는 동등(同等)하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길이 없음[無比]이 보리이니, 비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묘함이 보리이니, 제법(諸法)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46)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같이 설법하였을 때, 2백의 천상의 신들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같이 설법하였을 때, 2백의 천상의 신들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동자(童子)인 광엄(光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하도록 하라."

  광엄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제가 비야리 대성을 나가려 하였을 때에 유마힐이 마침 성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물었습니다.

  '거사님, 어디서 오십니까?'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도량(道場)에서 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도량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46) 여기서 이 이야기의 내용은 끝났다(나집·지겸의 번역도 같다). 그러나 현장과 티베트 역에는 다음 절의 한 구절이 더 있어서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첨가한다. "깨달음은 허공과 같은 성질이며, 모든 곳에 빈틈없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몸으로나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신체는 풀이나 나무, 석벽(石壁), 길,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마음은 비물질적인 것, 들에 나지 않는 것,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 표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답하였습니다.

  '올곧은 마음[直心]이 도량이니,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올곧은 마음으로 행하는 것[發行]이 도량이니, 만사를 판별[辦]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마음[深心]이 도량이니, 공덕을 증대시키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提心]이 도량이니, 잘못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시(布施)가 도량이니, 보답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계(持戒)가 도량이니, 바람[願]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욕(忍辱)이 도량이니, 모든 중생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진(精進)이 도량이니, 게을러 물러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정(禪定)이 도량이니, 마음이 조화롭고 부드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지혜(智慧)가 도량이니, 눈앞에 있는 제법을 환히 보기 때문입니다. 자(慈)가 도량이니,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비(悲)가 도량이니, (중생을 구제하는데) 피곤함과 괴로움을 잘 참아 내기 때문입니다. 희(喜)가 도량이니,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사(捨)가 도량이니, 사랑과 미움을 끊어 버리고 평등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신통(神通)이 도량이니, 6신통[通]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해탈(解脫)이 도량이니, 8배사(背捨 : 8解脫)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편이 도량이니,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입니다. 4섭(攝)이 도량이니, 중생을 아우르기[攝]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듣는 것[多聞]이 도량이니, 들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伏心]이 도량이니, 제법을 바르게 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37도품이 도량이니, 유위법(有爲法)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4제[諦]가 도량이니, 세간을 속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기(緣起)가 도량이니, 무명(無明)에서 늙음과 죽음까지, 그 모두가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갖 번뇌가 도량이니, (무명번뇌의 본바탕이 불성임을) 여실하게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도량이니, 중생이 무아(無我)임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일체법이 도량이니, 제법의 실성이 공함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항마(降魔)가 도량이니, (악마로 인하여 마음이) 움직이고 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삼계가 도량이니, (마음이 업에 얽매이지 않아)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자후가 도량이니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10력(力), 4무소외(無所畏), 18불공법(不共法)이 도량이니, 모든 잘못이 없기 때문입니다. 3명(明)이 도량이니, 천안통(天眼通)·숙명통(宿命通)·누진통(漏盡通)으로 3세의 이치에 통달해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생각[一念]으로 일체법을 아는 것이 도량이니,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온갖 바라밀에 따라서 중생을 교화하고 모든 일을 하면 일거수일투족[擧足下足], (그 모든 말과 행동이) 모두가 도량으로부터 나와서 불법에 머물게 되는 것으로 알아야만 합니다.'

  이같이 설할 때 5백 명의 천인들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세보살(持世菩薩, Jagati dhar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을 하도록 하라."

  지세보살도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저는 조용한 방에 있었는데, 그 때 마왕 파순[魔波旬]47)이 1만 2천의 천녀를 거느리고 마치 제석천과 같이 꾸며서 북을 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제가 있는 곳으로 와서는, 제 발에 머리를 숙여 예배하고 두 손을 합장하고 나서 한쪽에 늘어섰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이들을 제석천이라고 생각하고 말했습니

  '잘 오시었소, 교시가(憍尸迦, Kauika)48)여. 그대에게 비록 복덕이 마땅히 갖추어져 있다 해도 스스로 방자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5욕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이로써 공덕의 근본[善本]을 구하며, 신체와 목숨과 재물49) 이 세 가지를 견고하게 간직할 수 있는 수행[堅法]을 닦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제 말에 그가 곧 말하였습니다.

  '보살[正士]이여, 이 1만 2천의 천녀를 받아 주셔서 씻고 닦는 일을 시켜 주

  

47) Mrah Ppyn의 음사(音寫)가 잘못되어 파순(波旬)으로 되었다. 악애(惡愛), 살인자(殺人者), 악자(惡者)라고 번역한다. 불제자(佛弟子)를 괴롭히는 마왕으로 욕계(欲界)의 제6천(第六天)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왕이기도 하다.

48) 제석천의 성(姓)이다.

49) 여기서 말하는 신체와 목숨과 재물의 세 가지를 수행을 통하여 끝이 없는 영원한 것으로 이루는 것을 삼견법(三堅法)이라고 한다.


  십시오.'

  저는 교시가에게 말했습니다.

  '교시가여, 이는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라 제게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제자[釋子]인 사문으로 이는 저에게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제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때에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이는 제석천이 아닙니다. 마군이 와서 당신을 희롱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곧 마왕 파순을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이 천녀들을 나에게 주시오. 나와 같은 사람이나 받을 만하오.'

  마왕은 두려움으로 떨면서, '유마힐이 나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곧 모습을 감추어 달아나려 했지만, 도무지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신력(神力)을 다해 보았지만, 달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곧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파순(波旬)아, 천녀들을 그에게 주어야만 도망갈 수가 있느니라.' 

  마왕은 두려운 나머지 용서를 빌며 천녀들을 주었습니다.

  그 때 유마힐은 천녀들에게 말했습니다. 

  '마왕은 그대들을 나에게 주었으니, 이제는 그대들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야만 하오.' 

  곧 그들 각자에게 마땅한 가르침을 설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道意]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또 말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이미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므로 각자가 즐길 만한 법락(法樂)이 있을 것이니, 다시는 (天上의) 5욕락(欲樂)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리라.'

  천녀들은 물었습니다. 

  '무엇을 가리켜 법락(法樂)이라고 합니까?'

  유마힐이 답하였습니다.

  '항상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즐기고, 그 가르침을 듣고자 원함을 즐기며, 스님[衆]들을 공양함을 즐기고, 5욕을 떠남을 즐기며, 5온[陰]을 관하기를 원수나 도둑과 같다고 즐기고, 4대(大)를 관하기를 독사와 같다고 즐기며, 마음[內入]을 관하기를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마을과 같다고 즐기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道意]을 지키겠다고 즐기며, 중생들에게 이익을 베풀기를 즐기고, 스승을 존경하며 공양하는 것을 즐기며, 널리 보시를 행하기를 즐기고, 굳게 계를 지키기를 즐기며, 인욕하고 부드럽게 조화하기를 즐기고, 부지런히 선근을 쌓고, 모으기를 즐기며, 선정에 들어 흐트러지지 않기를 즐기고, 번뇌를 떠나 지혜를 밝게 하기를 즐기며,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提心]을 넓히는 것을 즐기고, 수많은 마군을 항복시키기를 즐기며, 온갖 번뇌를 끊기를 즐기고, 불국토를 깨끗하게 하기를 즐기며, 상호(相好)를 성취하기 위하여 많은 공덕을 닦기를 즐기고, 도량을 장엄하기를 즐기며, 대승(大乘)의 심원한 가르침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기를 즐기고,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의 3해탈문(解脫門)50)을 즐기며, 때가 아닌 때[非時]51)를 즐기지 않는다.

  동학(同學)을 가까이 사귀는 것을 즐기며, 동학이 아닌 사람들 속에 있어도 분노와 미움을 갖지 않음을 즐기며, 악지식(惡知識)도 거느려서 지킴을 즐기며,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사귀는 것을 즐기며, 마음으로 깨끗함을 기뻐함을 즐기며, 깨달음을 위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행을 닦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이 진리[法]를 익히는 즐거움인 법락(法樂)이라고 하는 것이다.' 

  동학(同學)을 가까이 사귀는 것을 즐기며, 동학이 아닌 사람들 속에 있어도 분노와 미움을 갖지 않음을 즐기며, 악지식(惡知識)도 거느려서 지킴을 즐기며,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사귀는 것을 즐기며, 마음으로 깨끗함을 기뻐함을 즐기며, 깨달음을 위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행을 닦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이 진리[法]를 익히는 즐거움인 법락(法樂)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때 마왕이 천녀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대들과 함께 하늘의 궁전[天宮]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천녀들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이미 우리들을 거사(居士)님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법락(法樂)을 알고서 대단히 즐기고 있습니다. 다시는 5욕락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악마가 말했습니다. 

  '거사님, 이 여인들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모든 소유(所有)를 남에게 보시하는 자가 보살인 것입니다.' 

  

50) 또는 3해탈(解脫)·3삼매(三昧)라고 한다. 티베트 역에는 이 3해탈을 설하고, "열반의 관상(觀想)을 즐긴다"는 한 구절이 더 있다.

51) 또는 때가 아닌 때의 식사이다. 비시(非時)는 보통 식사 시간을 지난 정오 이후, 또는 정오 이후의 식사를 말한다.


  유마힐은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버렸느니라. 그대가 곧 데리고 가거라. 그대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여라.'

  그 때에 천녀들이 유마힐에게 물었습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마왕의 궁전에 머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유마힐이 말했습니다.

  '자매들이여, 꺼지지 않는 등불[無盡燈]이라고 하는 법문이 있으니, 그대들은 이 법문을 배워야만 하오.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한 등불로 백천(百千)의 등불에 불을 밝혀 어둠이 모두 밝아지고 그 밝음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오. 자매들이여, 이같이 한 사람의 보살이 백천의 중생의 마음을 열고 이끌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도록 하고, 그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모든 선법(善法)이 자꾸만 늘어나게 하는 것을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고 하는 것이오. 그대들이 비록 마왕의 궁전에 있다 하더라도 이 꺼지지 않는 등불로써 무수한 천자의 천녀들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한다면, 이야말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 또 모든 중생들에게 큰 이익을 베풀어 주는 것이 될 것이오.'

  그 때 천녀들은 유마힐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 다음 마왕을 따라 마궁으로 돌아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유마힐은 이 같은 자유자재한 신통력과 지혜와 변재(辯才)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장자의 아들 선덕(善德, Sudatt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선덕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저는 아버지의 집에서 성대한 보시 모임[大施會]을 열고, 모든 사문과 바라문, 그리고 수많은 외도와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 의지할 데 없는 사람[孤獨], 거지들에게 공양하였습니다. 마지막 7일째 되는날, 그 때 마침, 유마힐이 찾아와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장자의 아들이여, 성대한 보시의 모임이라는 것은 그대가 하고 있는 것처럼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오. 마땅히 법을 설해 주는 모임[法施]을 해야지, 어찌하여 이같이 재물을 베푸는 모임을 열고 있는 것이오?'

  저는 말했습니다.

  '거사님, 어떻게 하는 것을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 합니까?'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는 것은, 앞뒤의 차이가 없이 일시에 일체 중생을 공양하는 것이니, 이것이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는 것이오. 무슨 말인가 하면, (중생에게) 깨달음[菩提]으로써 대자심(大慈心, mah-maitri)을 일으키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비심(大悲心, mah-karua)을 일으키며, 정법(正法, Saddharma)을 지니려는 대희심(大喜心, mah-mudit)을 일으키고, 지혜를 간직하려는 대사심(大捨心, mah-pek)을 행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그것은 인색함과 욕심을 거두어들임으로써 보시바라밀[檀波羅蜜, dna-pramit)을 일으키고, 계율을 범한 자를 교화하는 것으로써 지계바라밀[尸波羅蜜, la-pramit]을 일으키며, 무아(無我)의 진리[法]를 알게 함으로써 인욕바라밀[提波羅蜜, ksnti-pramit]을 일으키고, 몸과 마음의 겉모양[相]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정진바라밀[毘梨耶波羅蜜, vrya-pramit]을 일으키며, 보리의 경계[相]로써 선정바라밀[禪波羅蜜, dhyna-pramit]을 일으키고,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는 지혜[一切智]로써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a-pramit)을 일으키는 것이오.

  또 중생을 교화하면서 공(空, snyat)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유위법(有爲法, sa skta)을 버리지 않고서도 무상(無相, animitta)의 실상을 바르게 알며, 이승에 생을 받는 모습을 나타내더라도 무작(無作, apranihita)이라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오. 정법을 잘 지키고 간직하면서 방편의 힘을 발휘하고, 중생을 제도하면서 4섭법(攝法, sa graha-vastu)을 행하며,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교만한 마음을 없애고, 몸[身]과 생명[命]과 재산[財]에 있어서 (法身과 慧命과 法財의) 3견법(堅法)을 얻도록 노력하며, 6념(念)하면서 올바른 사념[正思念, samyaksmti]을 잊지 않고, 6화경(和敬)을 행하면서 순박하고 올곧은 마음[質直心]을 가지며, 착한 일을 바르게 행하기를 노력하여 청정한 생활[淨命]을 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기쁜 마음으로 성인과 어진 이를 가까이하며, 악인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다스리도록 하고, 출가하는 마음으로 깊은 마음[深心]을 늘 간직하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기 위하여 보다 많이 듣고자 하고, 다툼이 없는 회합을 위하여 고요하고 한적한 수도장을 마련하며,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좌선[宴坐]을 행하고, 중생을 번뇌의 속박[縛]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수행의 단계[修行地, yogcra bhmi]대로 올라가는 것이지요. 

  상호를 다 갖추고 불국토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복덕을 짓는 업을 행하고, 일체 중생의 마음속 생각을 알고, 각자에게 마땅한 가르침[法]을 설하여 지혜의 업[智業]52)을 일으키며, 일체법을 취하거나[取] 버리지[捨] 않고서 일상문(一相門, ekanaya)에 들어가기 위해 지혜의 업[慧業]을 일으키고, 일체의 번뇌, 일체의 장애, 일체의 불선(不善)도 모두 끊어 버리고, 일체의 바른 일[善業]을 모두 행하며, 일체의 지혜와 일체의 공덕을 얻음으로써 불도(佛道)에 도움이 되는 일체의 보조적인 수행법을 빠짐없이 행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고 하오. 만약 보살이 이 같은 법을 설해 주는 모임에 머무른다면 그는 대시주(大施主)가 되고, 일체 세간의 복전(福田)이 될 것이오.'

  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러한 가르침을 설했을 때, 바라문들 중의 2백 명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 때 저는 마음이 깨끗해지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라 감탄하고 그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 다음 곧 몸에 두르고 있던 몇 십만[百千]이나 되는 값비싼 영락(瓔珞)을 풀어서 바쳤으나 받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거사님, 원하오니 아무쪼록 받으시어 당신의 뜻대로 주고 싶은 이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유마힐은 곧 영락을 받아 들고 반으로 나눈 뒤 그 모임에 온 사람 중에 가장 

  

52) 지(智)는 jna의 역어(譯語), 혜(慧)는 prajna의 역어. 일반적으로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으나 따로 떼어서 말하면, 혜는 사물·도리(道理) 등을 알고 추리·판단하는 정신작용이며, 지는 그러한 사물·도리에 대하여 시비를 결정하고 단정하는 것으로서 번뇌를 끊는다고 하는 따위는 이 지의 작용이 중심이다. 또 여기에서 밖을 향하여 설해지고 있다.


  비천한 거지에게 절반을 주고, 나머지 반은 저 광명국토(光明國土)의 난승여래(難勝如來, Duprasaha-Tathgata)에게 바쳤습니다. 그 모임의 모든 대중[會衆]은 난승여래를 우러러보았으며, 또 그 부처님께 바친 영락이 부처님 주위에서 네 개의 보배로운 대좌와 기둥이 되어 4면을 거룩하게 장식했는데도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유마힐은 신통한 변화[神變]를 나타내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약 보시를 하는 사람이 평등한 마음으로 가장 비천한 거지에게 보시하면서 여래복전(如來福田)에 대하듯이 분별함이 없이 평등하게 대비심을 드리우고 과보를 바라지 않고서 보시한다면, 이를 빠짐없이 법을 설해 준다[具足法施]고 부르오.'

  비야리성에서 가장 비천한 거지도 이 신력을 보고, 그 설법을 듣고 (다른 사람들과)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보살들도 저마다 부처님께 그들의 지난 경험[本緣]을 이야기하며 유마힐이 말한 것을 칭찬하면서 모두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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