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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검교인 독립운동의 선봉장 권 준
2010년 9월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권준 선생은 1919년 만주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과 함께 의열단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의열투쟁을 지원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전방위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였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이후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으로 중국 내의 교민사회 보호를 위해 많은 활동을 펼쳤다. |
광복회 활동 후 망명하여 의열단 결성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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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접목을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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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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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 복무와 임정활동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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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중국군 복귀 후 그의 항일운동 행적을 밝히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군대라는 조직이 갖는 폐쇄성과 한인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절대보안이 요구되었던 현실, 더욱이 일제정보기관의 감시 압박을 극력 피하고자 하였던 중국정부의 입장 때문에 현역 중국군 장교로서 한인독립운동진영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란 극히 위험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1933년 초이래 그의 독립운동 행적은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향후 적극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과제이지만, 1937년 말 작성된 일제자료는 일제기관이 그의 신상과 활동을 꾸준히 감시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하며 이는 역설적으로 선생이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부단히 한인독립운동진영과의 연계와 참여를 시도하였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944년 일제의 패망에 대한 전망이 어느 정도 가능한 시점에서, 선생은 임시정부 활동에 합류하여 내무부 차장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일제말기 임정활동에 합류한 사례에 대해서는 김홍일, 박기성, 박시창, 채원개, 최용덕 등의 경우와 더불어, 추후 검토해 보아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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