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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전병술(건국대학교 학술연구교수)
1. 유교는 종교인가?
유․불․도 각각에 學자를 부쳐 쓰기도 하고 家자를 부쳐 쓰기도 하고 敎자를 부쳐 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학은 학술 이론을 중심으로 보고, 가란 집단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자를 부치면 미묘한 차이가 난다. 도교 하면 신선술, 방중술 등 양생이 떠오르고, 불교 하면 깨달음과 해탈이라는 전통적 의미의 종교가 떠오른다. 그러나 유교라고 하면 막연한 느낌이 든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유교문화 혹은 유교문화권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문화를 학문, 종교, 예술, 도덕 등 인간의 정신적 활동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생활양식의 총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불교문화 하면 종교적 형태와 예술적 가치가 어우러진 삶의 양식이 떠오르는 반면 유교문화 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계없이 정치, 경제 및 사회적 구조가 먼저 떠오른다. 예를 들어 당대 신유학자 뚜웨이밍杜維明은 근대 이후 서구 문명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적인 측면만을 향하여 달려왔고, 이러한 결과로 가치관의 상실,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 등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보고 유교의 인문정신을 되살려 후기 산업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교문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가족중심주의에서 출발하는 유교문화는 비민주적인 제도와 연고주의, 정실자본주의 등 경제 정의에 실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렇게 유교문화라는 단어 안에서도 종교적 의미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종교는 영어 ‘religion'의 번역어다. ‘religion’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원적인 의미로서 ‘이 세상의 창조자이면서 세상을 다스린다고 여겨지는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믿음이나 숭배’ 와 ‘그러한 믿음 및 숭배의식에 의거하여 세워진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시스템’이라고 정의한다. ‘religion'이 동양으로 넘어와 일본에서 종교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이 종교라는 단어는 중국 불교용어에서 나온 것이다. 천태종 창시자인 지의智顗 대사(538~597)는 『법화현의』에서 “스승님이 5宗敎를 여셨다”라고 하였고 화엄종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법장法藏 대사(643~712)는 『화엄5교장』에서 “대연법사 등이 일시에 공덕을 발휘하여 4宗敎를 세웠다”라 하였으며 선종의 『백장청규』에도 “힘껏 宗敎를 받들라”라고 하였다.
원래 불교에서 말하는 종교는 영어 ‘religion'의 뜻과 관계가 없을뿐더러 전문적인 학문영역의 하나도 아니고 위진남북조시대 중국불교계에서 불기 시작한 교상판석敎相判釋 운동에서 유래했다. 이 시기까지 500 여년간 인도 불교가 중국으로 유입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두서없이 유입됨에 따라 불교의 근본적인 의미조차 파악하기 쉽지 않았고 이에 따라 다시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 대사들이 부처가 일생동안 행한 설법에 대해 형식, 방법, 순서, 내용, 의의 등을 분별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부처의 참뜻을 명확하게 이해하려고 시도한 것이 교상판석으로 ’교판‘, 혹은 ’판교‘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화엄종에서는 ‘5교10종’을 말하는데 이론구조의 틀에서 宗의 의의는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심법心法 혹은 종지를 일컬으며, 정각이후 49년 간 남긴 가르침의 참된 의미를 일컫는다. 그리고 교는 중생들의 근기의 차이에 따라 실시한 교재나 교법, 교학 등을 일컫는다.
이와 같이 불교 논전중에서의 종교는 실질적으로 宗과 敎의 합성어로서 각각의 뜻이 따로 있다.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다.
1. 宗은 종지宗旨를 일컫고 敎는 교화敎化를 일컫는다.
2. 宗은 자각自覺을 의미하고 敎는 覺他, 즉 가르침을 의미한다.
즉 불교적 의미에서의 종교란 근본적인 교리와 교화,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의미하는데 유교에서는 내성외왕 혹은 수기치인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동서양 교류가 시작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종교 수 만큼이나 다양하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보편적인 종교를 정의하면 교리, 신앙 대상으로서의 절대자, 의식, 공적 인정들을 필수 요소로 소유한다. 마테오 리치 등 일련의 선교사들은 유교, 특히 성리학에는 절대자로서의 인격적 신과 그에 의한 세계창조가 없음을 비판하였다. 물론 불교에서도 절대자와 창조개념은 없지만 교단조직이나 신앙숭배, 자비와 박애, 구세관념 등에서 공통점을 나타내고 따라서 공적인정을 받는 보편적 종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교의 종교성 여부를 논할 때에도 전통적 종교의 기준에 유교가 부합되는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교사상에서 종교적 특성들을 찾아 해석하는 작업이 주류를 이루었고 대체적으로 은주 이래 내려오는 祭天의식이나 조상신에 대한 제의에서 찾아왔다.
진시황이 통일왕국을 건설하기 전까지 중국은 하나라, 은나라(BC 1600~BC 1050), 주나라(BC 1050~BC 770), 춘추시대(BC 770~BC 403), 전국시대(BC 403~BC 221)를 거치게 된다. 공자 이전의 중국 상고시대에는 상제上帝, 천명天命 등의 종교적 관념의 경우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초월적 종교 신앙이 존재했다. 제 혹은 상제는 은나라의 최고신이었고, 주나라에 이르러 은나라 사람들이 믿었던 상제는 점차 天개념으로 바뀌어 갔다. 제와 천 모두 모두 은주 사람들에게는 지고무상의 절대적인 힘을 지닌 신이었으며, 의지적이고 인격적 존재로 이 세상의 길흉화복을 주재하는 주재자로서의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은나라의 도읍지인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제’는 막강한 권위를 지닌 인격신으로서 바람․구름․우뢰․비, 농경과 수확, 도시건설, 전쟁, 인간의 길흉화복, 군왕의 길흉화복 등을 관장하였다.
주나라로 들어오면 天은 帝 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주재자로서의 인격신의 형태인 초월적 신격神格이었다. 따라서 하늘에 대한 제례의식은 국가적인 대사였고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국가를 다스리는 최고통치자가 하늘의 아들 자격으로 제사를 관장하는 절대적 권위의 상징이었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제사로 이어졌다. 제사는 죽은 자에 대한 산자의 행위이고 죽음은 태어남을 전제로 한다. 사람의 탄생에는 부모를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 부모의 부모로서 조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을 전제하면서 유교에서는 인간 탄생의 근본을 논함에 있어서는 그 원초적 요인으로서의 천지․음양․오행, 그리고 귀신․혼백을 말한다. 『주역』에서 “시초를 미루어가 종말을 돌아보니 사생의 설을 알게 되며, 정기는 사물이 되고 혼령이 떠다녀 변화되니 귀신의 실상을 알게 된다.”라고 하였고 『예기』에서는 “사람은 천지의 덕분이요 음양의 만남이며 귀신의 모임이며 오행의 빼어난 기운이다.” 라고 하였고 『춘추좌전』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니 백이 되고 이미 백을 낳음에 양을 일컬어 혼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즉 인간 존재는 몸과 정신의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의 주재자는 ‘백’이요, 정신의 주재자는 ‘혼’이며 이 혼백이 함께 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결국 함께 하였던 그 ‘혼’과 ‘백’의 흩어짐으로 설명된다. 『예기』에서 “혼기魂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形魄은 땅으로 돌아간다.”라고 하였다.
혼․백은 인간이 살아 있을 때는 공존하면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지만 죽으면 분열하여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지하로 간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는 땅에 버려져 백골로 변한다. 맹자는 이 시신의 처리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한다. 맹자가 땅에 버려진 인간의 시신이 개나 들짐승들이 뜯어먹는 모습을 참고 견딜 수 없어서 매장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죽은 자의 시신처리, 즉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교의 상․장례의식은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상․장례의 중시는 부모를 여윈 슬픔에 기초를 둔다. 순자는 3년상의 합리성에 대해 “무릇 천지 사이에 혈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생물은 반드시 지각을 가지고 있으며, 지각을 가지고 있는 생물은 반드시 자기와 같은 무리를 사랑한다. 새나 짐승도 자기 무리와 떨어져서 한 달 이상을 지내면 반드시 되돌아와 무리를 찾아가며, 자기 고향을 지나칠 때면 반드시 주위를 돌아다니며 울부짖고 몇 번을 오가며 배회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자리를 떠난다. 어린 제비 새끼마저도 한참을 재잘거리다가 날아간다. 사람은 혈기를 가진 생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지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모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죽더라고 끝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상사는 부모 잃은 슬픔에서 나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도리이다. 일찍이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3년상의 번거로움과 사회, 경제적 이유를 들어 1년상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하자 공자는 없는 자리에서 제자를 꾸짖는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3년까지는 부모 없이는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어 살아남지 못했을 텐데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그 정도 기간을 섬기는 것이 인간의 도리 아니겠냐고 하였다. 즉 인간의 정감의 자연스런 발로에서 나오는 것이 상례라는 설명이다.
공자는『논어』에서 죽음이나 상례에 대해 서른여덟 번이나 언급하였는데 , 죽음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세속 윤리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에서 출발하여 장례 예절의 여러 규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공자는 “상을 치를 때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장례의 본질이 그 절차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공자는 자신의 능력에 알맞게 상사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너무 사치스러운 장례를 추구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당시 제후들의 사치스런 장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표현하곤 하였다.
유교에서는 제사에 대해서도 매우 중시하고 있다. 『예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군자는 궁궐을 지을 때 종묘를 먼저 짓고 다음에 외양간을 지으며, 마지막에 기거할 방을 짓는다. 집안에서 쓰는 용품도 제기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제사상에 쓸 술그릇을 만들며 밥그릇은 그 뒤에 만든다.……군자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제기에 죽을 담아 먹지 않고, 추위도 제사 때 입는 옷은 입지 않으며, 궁궐을 지을 때 무덤가에 심은 나무는 베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공경으로 봉양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 사람의 도리로서 ‘군자는 일생동안 상사를 가지고 있다.' 는 말처럼 고대 중국에서는 제사활동이 생활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제사의 핵심은 정성스런 마음이다. 순자는 “신을 제사지낼 때에는 마치 신이 옆에 있는 것 같이 해야 한다.……제사라는 것은 사모하는 감정을 뜻하는 것이며, 정성과 믿음과 사랑과 공경의 감정을 다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제사가 강제적인 규범이 아닌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어린 감정의 표현이며 돌아가신 조상과 다시 만날 것을 갈망하는 염원의 발로이다. 이렇게 조상과의 끊임없는 관계맺음을 통해 후대로까지 연결된다.
자손들이 함께 모여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데 조상은 과거이고 자손들은 미래다. 현재 살아계신 부모는 미래의 조상이고 자식은 장래의 자손이다. 따라서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은 조상 숭배 제도 안에서 매우 신성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선조 제사를 지낼 것, 현실 속의 가정에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할 것, 자손이 이어질 것, 이 세 가지를 아울러 ‘효’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불효는 대를 끊는 것이다.’ 라는 맹자의 말처럼 후손이 없으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세대의 생명이 끊어지게 되며, 조상이 남겨 놓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여겼다. 이렇게 죽음을 통하여 효를 바라보게 되면 효가 단순한 도덕적 의미가 아닌 ‘종교적인 효’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즉 생명의 연속이라는 이라는 관점에서 제사를 바라보면 조상에 대한 제사는 조상을 확인하는 것이고, 이 점에서 조상에 대한 경배는 생명 가치의 궁극적 원천으로서 일상생활에 신성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조상이 없었다면 현재의 자신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상이 있다는 의식은 조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연속되어 왔음을 확신하게 한다. 조상이 자신의 생명의 본원임을 자각하는 것은 생존의 궁극적인 관심을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기』에서 “군자가 옛날을 돌이켜 보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잊지 않음으로써 공경하는 마음에 이르고 감사의 정을 표현하는 것이며 조상을 섬기는데 힘을 다함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하고 효성을 다하려는 것이다.”하였다. 나아가 나 자신은 사라진다 할지라도 자손을 통해 생명을 지속해 나아갈 것이다. 즉 내가 죽더라도 혼자 고독하게 무섭고 낮선 죽음의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과 함께 할 수 있고 나아가 내 자식이 생명을 이어갈 것이고 제사를 통해 그들과 함께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죽음은 그리 두려울 것 없다는 위안을 얻게 된다. 다만 현실생활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다. 이 점에서 유교는 삶에서 죽음을 보게 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 유가는 끊임없는 대물림의 과정으로 생명의 영속성을 이해한다. 즉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뚱이를 죽을 때까지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을 효도의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긴다. 『예기』에서는 “부모가 온전하게 낳아준 몸뚱이를 죽을 때까지 온전하게 간직하여야 효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고 『효경』에서는 “몸뚱이․머리털․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함부로 훼손하지 않음이 효의 시작이다.”라고 하였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는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내 발을 벌려 보아라! 내 손을 벌려 보아라! 시경에서 이르기를 조심 또 조심하여 깊은 물을 건드는 듯 하고 살얼음을 밟는 듯 하라 하였으니 이제 그 멍에를 벗어 던질 수 있겠구나.”라고 하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였다. 우리의 몸뚱이는 현실에서 삶을 영위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유교에서는 죽음과 만나 “어떤 몸가짐으로 살아야 하며 무엇을 이루어야 참된 삶이며 죽어서도 떳떳할 수 있는가?”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온다. 그리고 유교에서 인간에게서 생명의 초월은 공을 세우고立功, 덕을 세우고立德, 말을 세우는立言 불멸의 신념을 통하여 이룰 수 있다고 단언한다.
2. 공자와 죽음
어느 날 자로가 귀신 섬기는 법을 묻자 공자는 “사람도 잘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고 하였고, 다시 감히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라고 하자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문답은 공자의 관심이 귀신보다 사람에게 있고 죽음보다 삶에 있음을 잘 알려주는 문장이다.
죽음에 대한 제자의 물음에 답한 공자의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라는 말이 공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이라는 전제하에 이후 유교는 죽음을 회피하고 삶에만 집착하게 되었다라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이 점 때문에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다. 즉 죽음에 대한 해석과 초월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정의에 동의한다면 유교는 종교로 성립될 수 없다. 공자는 왜 그런 답을 했을까? 명대 심학자 왕양명王陽明(1472~1528)의 제자인 왕간王艮(1483~1540)은「추선설鰍鱔說」에서 다음과 같은 우화를 적고 있다.
한 도인이 한가로이 시장을 거닐다가 시장에 늘어놓은 어떤 광주리 안에 두렁허리(鱔魚)가 가득 들어 서로 뒤엉켜 숨쉬기도 곤란하여 마치 죽은 듯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미꾸라지 한 마리가 한 가운데서 뛰어 올라 상하좌우로 쉼 없이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두렁허리들은 그 덕에 몸을 뒤척이고 기가 통하여 생기를 되찾았다. 두렁허리가 몸을 뒤척이고 기가 통하고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미꾸라지의 공로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또한 미꾸라지의 즐거움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렁허리를 불쌍히 여겨서 한 짓도 아니고 대가를 바라고 한 짓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본성을 좇았을 뿐이다.……잠시 후 갑자기 천둥번개에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미꾸라지가 그 기세를 타고 하늘로 솟아 오른 다음 대해에 몸을 던져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유 자재로운 게 더할 수 없는 즐거운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독 안의 두렁허리들을 쳐다보더니 구해 줄 요량으로 스스로 용으로 변해 다시 천둥번개에 비를 쏟아 내리니 독안에 가득 차더라. 이에 서로 뒤엉켜 꼼짝 못하고 있던 두렁허리들 모두 생기를 되찾더니 정신을 가다듬고는 모두 함께 장강대해로 돌아가더라.
욕망 가운데 살려고 하는 욕망보다 큰 것이 없고 두려움 가운데 죽음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이다. 부처도 자기 자신의 생로병사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하여 깨달음을 얻지 않았던가. 소크라테스나 예수도 삶의 현장에서 죽음이나 고난에 직면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불멸의 길을 찾으려했다. 왜 부처이고 왜 예수인가? 그것은 자신만의 깨달음과 초월에 그치지 않고 중생에게로 다가가서 함께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려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류의 4대 성인으로 소크라테스와 예수와 부처와 공자를 꼽는다. 소크라테스는 부당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법정에서 이렇게 최후의 변론을 하였다. “죽음이란 다음 둘 중의 하나입니다. 즉 아무것도 아닌 없는 것이어서 죽어 있는 사람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도 아무런 감각도 갖고 있지 않거나, 혹은 전해 내려오는 말과 같이 영혼이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바꾸어 옮겨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아무런 감각도 없어서, 죽어 있는 상태가 마치 꿈 한 번 꾸지 않는 깊은 수면 상태와 같은 것이라면 죽음은 우리에게 썩 좋은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생각하건대 만약 어떤 사람이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이 잠들었던 밤을 찾아내어, 그 밤과 그 자신의 일생 중의 다른 모든 낮과 밤들을 비교하여 깊이 숙고한 다음, 평생의 몇 낮 몇 밤을 그 한 밤보다 더 쾌적하고 즐겁게 지냈는지를 말해야 한다면, 보통 사람뿐만 아니라 왕조차도 그런 밤을 겨우 손꼽을 정도밖에는 찾아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과연 그런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의 시간 전체는 하룻밤보다도 더 길지 않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죽음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서 사는 것이라면,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배심원 여러분,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이러한 낙관적인 태도는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희망을 갖고 그것을 맞이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혼불멸에 대한 그의 믿음은 제자인 플라톤이 죽음은 육체의 무덤으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반겨야 할 사태라고 했듯 이후 서양인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끌었다.
부처도 끊임없는 윤회라는 고통의 사슬을 버리고 해탈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고, 예수도 인간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천국으로 인도할 것을 약속하고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것은 누군가 시켜서 한 일고 아니고 남에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여 함도 아니다. 낮은 곳에 임하여 자연스레 솟아나는 영혼의 소리를 좇았을 뿐이다. 왜 공자만 죽음에 대해 답을 내놓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왜 공자인가? 공자인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의문들은 공자 당시의 시대를 읽으면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다.
주나라 멸망 이후 진시황이 통일하기까지의 춘추전국 시대는 극도의 혼란기였다. 주나라 말기로 오면서 제사는 이미 애도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형식화되고 권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여 제후들이 서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게 된다. 이것은 자신이 천자임을 천명하는 상징적 의사표현이다. 백성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천재지변과 전쟁 등 숱한 변란의 고통 속에서 천에 대한 신앙도 점점 옅어져 가게 된다. 하늘은 왜 홍수와 가뭄을 번갈아 주며 인간을 괴롭히는가? 하늘의 명을 받았다는 최고 통치자가 나를 괴롭히니 어찌 하늘을 믿고 살 수 있겠는가? 전쟁을 통한 살육은 ‘닭과 개의 씨가 마르고 촌락은 폐허가 되어 행인조차 없으며’, ‘백골이 황야에 널리고 천리 안에는 닭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처참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나아가 성이 포위되었을 때 자식을 서로 바꾸어 잡아먹는 참상과 야만적인 행위가 『춘추』에 기록되어 있다. 권력 때문에 아비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아비를 버리며 형제간에 칼을 들이대는 비극이 이어지고 눈만 돌리면 시체가 널려 있는 그야말로 죽음의 시대였다. 집단적인 죽음이 반복되는 이런 현실에서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해 무슨 의미를 부여해야 하며, 그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어디로 보내야하겠는가? 죽음을 해석한다고 한들 매일 반복되는 현실의 참상이 사라지겠는가? 백성들은 그저 하늘을 원망하며 운명을 한탄하며 죽어갈 뿐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살아야 했던 공자에게서 울려 나온 영혼의 소리는 인륜을 헤쳐서는 안 될 이유를 설명하여 인간의 본모습을 되찾으라는 것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라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공자의 이른 바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라는 명제는 우선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죽음에 대한 극복의 노력도 삶에 대한 성찰도 짐승들은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이점에서 공자는 가정 먼저 사람이 사람인 까닭에 대해 물었고 그 결과 인의仁義라는 도덕적 마음을 찾게 된다. 짐승도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잠을 잔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의 생존본능이다. 그리고 짐승들은 그러한 생존본능의 욕구가 충족되면 만족한다. 그렇다면 인간도 의식주만 해결되면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공자는 인간은 짐승들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짐승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까닭에 대해 짐승과 달리 인간에게는 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자각할 수 있는가? 위에서도 언급했듯 공자의 제자인 재아가 당시의 상례인 3년 상이 너무 길다고 1년으로 줄이면 안 되겠느냐고 묻자 공자가 그러면 네 마음이 편안하겠냐고 묻자 재아는 편안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공자는 떠난 제자를 두고 “재아는 仁하지 않구나. 자식은 태어난 지 3년이 된 뒤라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난다.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적인 상례다. 재아도 자기 부모로부터 3년 동안 사랑을 받지 않았던가!”라며 나무란다. 우리는 태어난 후 최소한 3년간은 부모의 품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부모 사후 3년간 기리는 것은 도덕적 정감의 발로라는 것이 공자는 설명이다. 인간은 마음의 불안에서 자신이 도덕적 주체임을 자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즉 도덕적 판단이 요구되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내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은 내 스스로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점을 자각하기 때문이고 편안하다는 점은 내 마음이 정정당당하여 한 점 부끄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불안여부에서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고유한 마음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이 부모와 자식, 형제들 사이에서이다. 그래서 공자는 ‘효와 제가 인의 근본이다’라고 했다.
또 공자는 “仁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행하려 하면 인은 실현된다.”라고 하였다. 이 점은 인간을 능동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주체적으로 도덕적인 행동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공자 이후 유학 사상은 인간을 인지 체계보다는 감정과 도덕의 체계에 초점을 맞추어 파악하고 있는데 맹자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다.
맹자는 측은지심으로 인간의 본성이 선함과 인간이 도덕적 주체임을 규정한다. 맹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이 상해를 당하면 그대로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이 상해를 당하면 그대로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본다면, 누구나 즉각적으로 놀라 두렵고 불쌍한 마음이 나타나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는 이 기회에 아이의 부모와 사귀려 하기 때문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서 하기 때문도 아니고, 오명을 뒤집어 쓸 것을 염려해서도 아니다. 이로부터 보건대, 불쌍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측은지심을 비롯한 수오․사양․시비 등 사단지심으로부터 인의예지의 도덕적 법칙이 나온다고 맹자는 역설한다. 측은지심은 마음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나오는 누르려 해도 눌러지지 않는 참된 도덕적 정감이다. 이렇게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도덕적인 힘은 때론 죽음보다 강하다.
공자는 “아침에 온 세상에 도가 실현되었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고 “뜻있는 선비와 사람다운 사람은 살기 위해 사람다움을 헤치지 아니하며 내 몸을 죽여서라도 사람다움을 완성한다.” 라고 하였다. 즉 죽음이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다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며 나아가 더 적극적으로는 사람다움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 택하는 길이기도 하다. 맹자의 다음의 말은 사람다움의 가치가 죽음보다 소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유교의 핵심적인 문장이다.
사는 것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의로움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함께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할 것이다. 사는 것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고자 하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구차하게 삶을 구걸하지 않는다. 죽음 또한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기보다 싫은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환난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자연스런 현상이며 죽음을 자각할 수 있는 인간에게서는 더욱 큰 것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유교에서는 먹고 마시고 입는 자연적인 생명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더욱 근본적으로 여긴다. 이 점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개체의 죽음이 아니라 사회에서 참된 가치가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가치관과 생명이 충돌할 때 주저 없이 자신의 몸을 바칠 수 있고, 이러한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유는 이후 성리학으로 면면히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적으로 민족이 존망의 위기에 닥쳤을 때 목숨을 걸고 나선 의혈지사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예로 조선 중기 성리학자 중봉重峯 조헌趙憲은 임진년 8월 7백 의사와 더불어 금산전투에서 부자 모두 순절하였다. 상황이 급박한 가운데서도 조헌은 “오늘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사생과 진퇴를 義자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즉 삶과 죽음의 기준을 ‘의’에 둔 것이다. 조선 말 의병장 최익현도 의병을 일으키면서 “진실로 내가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노니 죽음은 보되 삶은 보지 않았다.”고 하였고, 나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바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은 사람다움을 구하여 사람다움을 얻었기 때문이니, 비록 오늘 목이 잘리고 심장이 터져도 진실로 마땅히 웃음을 머금은 채 땅 속에 묻힐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가치실현을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들에게 무덤은 음습한 죽음의 집이 아닌 편안한 안식처가 된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삶이 무엇인지 알면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라는 말이 된다. 우리는 낮이 가면 밤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낮에는 열심히 노력하고 밤이 되면 잠을 잔다. 누구나 밤이면 두 다리 쭉 뻗고 편안한 숙면을 취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낮에 잘못된 행동을 했다면 잠자리에 들어서는 후회와 불안에 뒤척이며 잠을 설치며 혹은 밤이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내가 낮에 정정당당하게 지냈다면 밤에도 편히 잠들 수 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생을 사람답게 살았다고 여겨지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유학자들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명나라 심학자 왕용계王龍溪(1498~1583)가 “주역에 이르길 시초를 미루어가 종말을 돌아보니 사생의 설을 알게 된다고 하였는데, 삶과 죽음의 이치는 낮과 밤의 이치와 같다. 낮이 알면 밤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공자의 말을 설명하였다.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라는 공자의 말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현실생활 속에서의 가치관을 넘어서 죽음은 삶의 자연스런 연속이라는 근본적인 신념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공자와 맹자는 사회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원리인 인의를 내세워 일생을 제자들을 가르치고 군왕들에게 설교를 하였지만 현실적으로는 결국 이상에 그쳤고 진시황은 형벌주의에 근거한 법가사상으로 무장하여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이후 한나라로 이어지면서 유교는 삼강오륜을 근간으로 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정착하게 되었다. 한나라 때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염병의 창궐 등 재난에 부딪힌 백성들에게 유교는 아무런 위안도 될 수 없었고 결국 도교와 불교가 극한 상황에서 죽음에 직면하여 고통 받는 백성들을 감싸 안으면서 종교로서의 유교의 역할은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종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하여 천국의 생활을 설계하는 우매한 염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깊이 들어가서 바라보면,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현실 속에 담겨 있는 내재적 가치다. 어떻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인가, 어떻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개인의 삶이나 죽음이 한 집단이나 사회의 안정, 정의 및 조화를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하는 점에 대한 대답이 종교의 본질적인 의미다.” 라는 보커(J. Bowker)의 말에 동의한다면 유교는 여전히 종교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볼 수 있다.
3. 송명 유학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맹자 이후 천 여 년을 잠자던 유교는 당나라 말기부터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다. 불교문화가 지배했던 당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불교도 본래의 모습을 잃고 세속적인 변질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북쪽에서의 다른 민족들의 침입으로 중국은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이러한 내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민족의식의 고취가 요구되었고 지성계에서도 새로운 사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불교와 도교에 관심을 기울였던 지식인들이 유교로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선진시대 유학의 재해석과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새롭게 정립한 학설이 성리학이다. 죽음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는 공자와 맹자의 관점을 이어받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게 된다.
그 가운데 장재는 생명의 현상을 기로 설명한다. 장재(1020~1077)는 기의 움직임이란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취산작용이며, 그 취산작용을 통해 태허로부터 만물이 생성되어 나오고 다시 소멸되어 태허로 돌아가는 순환과정으로 이해하였으며 그 과정 전체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장재는 “모이는 것도 내 몸뚱이요 흩어지는 것 또한 내 몸뚱이니 죽어도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는 함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토론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이 같은 이해는 도가의 장자의 이해와 궤를 같이 한다.
모든 존재물들의 생존과 멸망은 자연의 필연적인 변화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삶과 죽음의 본질을 간파하고 초월하려 한다면 반드시 자기중심적인 좁은 관점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의 관점에서 각 개체의 생명과 죽음의 진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장자의 관찰에 의하면,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천지에 가득 널려있는 기가 모이거나 흩어진 결과로써, 자연의 끊임없는 변화의 현상 중의 하나이며 모든 사물이 순환하며 유전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게 되고,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태어남이 있게 되므로 둘을 따로 띄어 놓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자는 “삶은 죽음의 계승이고 죽음은 삶의 시작이다. 그 중의 규칙을 알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사람의 태어남은 기의 모임이다. 기의 모임이 태어남이고 기의 흩어짐이 죽음이다. 죽음과 삶은 본래 순환하는 것이니 내가 또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만물은 본래 하나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신기하다 하고 싫어하는 바를 썩었다 한다. 그러나 썩은 것이 신기한 것으로 바뀔 수 있고 신기한 것도 바뀌어 썩은 것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온 천하가 단지 일기一氣의 유통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삶에 집착하는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태어남은 신기한 것이고 죽어서는 썩으니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신기함과 썩는다는 것은 상대적이고 생과 사가 기의 흐름중의 한 사건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죽음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 변화무상하고 끊임없이 순환하는 삶과 죽음의 현상을 설명하는 장자의 방식은 중국 특유의 음양기화 우주론을 잘 반영하고 있다.
장자의 처가 죽었을 때 장자의 친구 혜시가 문상하러 왔다가 장자가 슬피 울지 않고 오히려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며 너무 심한 짓 아니냐고 나무라자 장자는 “그렇지 않다네. 아내가 막 죽었을 때 내 어찌 슬프지 않았겠나? 그러나 내 아내가 애당초 본래 생명이 없었고, 나아가 형체도 숨결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네. 그러다 어렴풋한 가운데 뒤섞여 있다가 변해서 숨결이 있게 되고, 숨결이 변화하여 형체가 있게 되고 형체가 변화하여 생명이 있게 되었다. 지금 생명이 다시 변화하여 죽음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마치 춘하추동 사시의 운행과 다를 바 없다. 아내는 지금 천지의 거대한 방에서 편하게 잠들어 있는 것인데도 옆에서 울고 앉아 있다면 내 스스로 생명의 변화에 통달하지 못한 것 같아서 울음을 거둔 것이라네.”라고 대답하였다.
사람의 형체는 자연의 변화라는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우연하게 생겨나고, 죽으면 변하여 다시 다른 형체로 태어난다. 보통 사람들은 지금의 형체에 집착하여 지금의 형체가 영원히 자신의 것이라고 여길 뿐 자신의 진상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삶과 죽음․꿈과 현실 등은 모두가 필연적인 자연의 변화 추세이다. 이러한 자연의 변화 추세에 맞추어, 자신이 죽어서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장자가 이 세상과 이별하려 함에 제자들이 후장을 주장하자 장자는 “나는 하늘과 땅으로써 속관과 덧 관을 삼고, 해와 달로써 한 쌍의 구슬을 삼으며, 별들로써 장식의 옥으로 삼고, 만물로써 재물을 삼고 있으니 나의 장례 도구 중에 무엇이 부족하냐? 무엇을 더 보태려 하느냐?”라고 하였고 제자들은 “독수리떼가 선생님을 쪼아 먹을까 염려해서 그렇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장자는 “땅위에 두면 독수리떼가 쪼아 먹고 땅속에 묻으면 개미떼가 뜯어먹을 것이다. 한쪽 것을 빼앗아 다른 쪽에 준다면 공평하지 못한 처사이다.” 라고 하였다. 장자는 “태어남을 즐거워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미워할 줄도 모르며 ……홀연히 이 세상에 왔다가 홀연히 사라질 뿐” 이라고 최고 경지의 인간인 진인을 묘사하고 있는데, 참된 인간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초월하여 생사의 대립을 타파한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면 세속적인 이해득실에 의하여 동요되지 않고 삶을 좋은 것으로 여기듯 죽음도 좋은 것으로 여길 것이고 생사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처음과 끝을 나눔이 없는 자를 친구로 삼게 된다.
장자의 이러한 사유 패턴이 죽음 앞에 선 실존 주체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신적인 초월을 의미한다면 유학자인 장재는 “살아서는 일에 따르고 죽어서는 편안하다”고 하였듯 주어진 사명의 실천을 전제로 하고 있다.
유학은 명나라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우선 학술적인 면에서 볼 때, 송대 성리학은 한 편으로는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면서도 불교와 도교의 사유형태를 수용하면서 선진유가사상을 철학적 이론체계로 재무장한 사유체계이다. 그러나 명대에 이르면 이단론에 변화를 일으키며 유․불․도 삼교합일을 주장하게 된다. 정치사회적으로 송대가 관료사회의 전형이었다면 명대에는 지식인들이 극도의 핍박 속에서 지내던 시기였다.
명 태조 주원장은 등극 이후 전시대와 다른 획기적인 정책을 펼치는데 하나는 왕실의 힘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봉건제의 공고화이고 다른 하나는 재상제도를 폐지하고 6부를 직접 관장하는 전제정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재상의 폐지는 결과적으로 환관에게로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동창東廠설치(1420), 서창西廠설치(1477), 내창內廠설치(1508)로 이어지는 환관들의 득세는 이후 명대 전체를 암울하게 하였고 나아가 왕조 멸망의 계기가 된다. 환관들의 전횡에 대한 지식인들의 저항의 대가는 피로 되돌아오곤 하였다. 사대부들은 이러한 권력 구조 아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환관의 시녀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행동을 결정해야만 했다. 죽음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가치관의 몰락일 것이다. 평생 죽음보다 소중하다고 여겨온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을 실현할 장을 잃어버린 당시 지식인들 가운데 어떤 부류는 권력에 빌붙어 생명을 연명하기도 하고, 혹은 자포자기 상태로 주지육림에 빠져 발광하여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 혹자는 산림에 은거하여 도교적 양생술을 통해 분노를 삭이기도 하였으며 끝까지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항거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명대 심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연 왕양명이 살던 시기는 환관의 발호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35세 때 당시 실권자인 환관 유근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12월 궁정에서 곤장 40대의 가혹한 형벌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중국 서쪽 끝에 있는 귀주성 용장의 역사의 직무를 맡는 변변찮은 관리로 좌천된다. 이듬해인 36세 때 병든 몸을 이끌고 용장을 향해 출발해서 유근이 보낸 자객을 피하고 병마와 더위에 시달리며 천신만고 끝에 37세 되던 봄, 마침내 용장에 도착해서 유배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양명은 용장에서도 유근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스스로 성공과 실패, 영욕은 모두 벗어 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오직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돌 관을 만들고 ‘오직 명을 기다릴 뿐이다.’라는 맹세와 함께 밤낮으로 정좌하던 가운데 ‘성인이 이런 상황에 처했으면 어찌 처신했을까?’라고 자문하다가 어느 날 한 밤중에 홀연히 깨닫고 마침내 양명은 ‘성인의 도리는 나의 본성만으로 충분하며, 이전에 외부 사물에서 이치를 구했던 것은 잘못임을 비로소 알았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외향성에서의 내향성으로의 완전한 방향전환을 뜻하며 자신이 도덕적 주체임을 자각함을 통하여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왕양명은 불교적 깨달음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고 도교 수련도 하여 상당한 경지에 올랐었다고 스스로 말했었다. 따라서 자신의 해탈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불교나 도교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양명의 관심은 자아해탈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유학자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태도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여전히 타인과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삶을 바쳐 일생을 실천하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왕양명은 57세 때 도적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말라리아 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임종 때 제자들이 유언을 묻자 평온한 태도로 “내 마음이 광명한데 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명나라의 학자인 이탁오(1527~1602)는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사대사生死大事의 해결에 있다고 하며 멀리했던 죽음을 다시 불러낸다. 젊었을 적 성질이 불같았던 그에게 어느 날 한 도학자가 “죽음이 두려운가?”라고 물었고 그는 “죽는다는 것이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에 도학자는 “죽음이 두렵다면 어찌하여 도학을 배우려 하지 않는가! 도학을 배우면 생사의 고통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탁오는 “그렇습니까?”라는 대답과 함께 학문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와 같이 학문에 입문한 직접적인 동기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후일 그는 다음과 같이 죽음을 말한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으니 낮이 가면 밤이 오는 이치와 같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흘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치와 같다. 누군들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언젠가는 죽어야만 한다. 흘러가는 것을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못 가게 막을 수가 없구나. 이렇게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이 삶이라면, 삶에 미련을 두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가는 것을 슬퍼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러므로 내가 죽음을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슬퍼할 것은 오히려 삶이다. 가는 것을 슬퍼하지 말라, 원컨대 삶을 슬퍼하라
삭발한 채 승복을 입고 유학자의 신분으로 살다가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기인인 이탁오는 유학의 본령이 체인지학體認之學이라는 점을 몸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이단의 자신의 믿음과 같고 다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성聖과 속俗의 차이에 기인한다. 성학에는 도덕적 가르침과 실천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죽음으로부터의 초월도 포함된다. 이점에서 불교도 도교도 이단이 아닌 성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명대 양명학자 가운데 양명학 내부에서조차 광선이나 이단으로 격렬하게 공격받은 사람이 이탁오다. 말년에 그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도 불교에 다가간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라고 고백한다. 일상생활의 궁극적 물음은 바로 죽음 아닌가! 이탁오는 말한다. “무릇 학문함의 목적은 모두가 자신의 삶과 죽음의 근거를 규명하고 자신의 性命의 종극을 탐구하는 데에 있다.” 자신의 생명을 기탁할 수 있다면 유가면 어떻고, 불가면 어떻고, 또 도가면 어떻단 말인가? 모두가 개인의 선택이고 개인의 결단이다. 결국 나만이 각 개개인의 삶과 죽음을 아우를 수 있다고 여기는 교조가 바로 이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치를 자각하여 깨달음을 얻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유학자들이 현실생활에서의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동안 백성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부귀공명이라는 속된 생활을 좇아 서로 다투며 살아왔다.
유학에서는 참된 학문은 즐거움에 있다고 했다. 공자는 “예악禮樂을 지키는 것을 즐거워하고, 도를 닦는 것을 즐거워하며, 어진 벗들을 사귀는 것을 즐거워한다.” 하고 하였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에 도취되어 오랫동안 고기 맛을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인격적 이상에 대한 추구는 인생의 충만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음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한다. 제자인 안회도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의연히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이러한 안회에 대해 공자는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끼니를 때우며, 누추하고 비좁은 거리에서 사는 것을 다른 사람이라면 견디기 힘들텐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안회의 “조밥 한 그릇에 물 한 바가지 마시고 팔베개 하고 잠들면 또한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라는 안회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자는 제자들 가운데 최고의 찬사를 보냈으며, 안회를 먼저 저 세상에 보내고는 하늘을 원망하며 통곡하였다. 왕양명은 “즐거움이 마음의 본체이다. 희로애락애오욕의 칠정에 속하는 감각적 즐거움과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칠정의 하나인 즐거움을 벗어나지는 않는다.”라고 하며 즐거움도 인의라는 도덕적 마음과 같은 가치로 평가하였다.
유학에서는 삶을 즐기라고 하고 있다. 배움의 본령도 즐거움에 있다고 하였다. 왕간은 「락학가樂學歌」를 지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사람의 마음은 저절로 즐거운데 사욕 때문에 속박된다. 사욕이 싹트기 시작하면 양지가 바로 자각할 수 있다. 자각하기만 하면 그 사욕을 없애니, 마음이 이전의 즐거움에 의거한다. 즐거움이란 이러한 배움의 즐거움이고 배움이란 이러한 즐거움의 배움이다. 즐거움이 아니면 배움이 아니고, 배움이 아니면 즐거움이 아니다. 즐거워야 배우고 배워야 즐겁다. 즐거움이 배움이고 배움이 즐거움이다. 오호! 천하의 어떤 즐거움이 이 배움에 비길 것이며, 천하의 어떤 배움이 이 즐거움에 비길 것인가?
자신의 도덕 주체의 자각을 통한 만물과 일체라는 깨달음은 어떤 것도 비길 수 없는 즐거움을 수반한다. 자신의 선천적인 도덕주체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여 사회적 실천의 주체로 심화되고 결국은 타자의 아픔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바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저절로 우러나오는 기쁨을 향유하게 된다.
그러나 삶에서 가장 큰 가치는 즐거움에 있고 그 즐거움은 자신의 참된 가치를 찾아 실천하는 데에서 저절로 우러나온다고 유학자들이 외칠 때 백성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향락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중국인의 내면에는 “죽은 정승보다 살아 있는 거지가 낫다”라는 격언이, 한국인의 내면에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격언이 깊이 자리 잡고 죽음에 대해 의도적으로 회피해온 것이 현실 삶이었다. 현대 학자인 하현명何顯明은 중국인의 죽음에 직면해 취하는 생존 방식을 세 가지로 든다. “첫째는 죽음을 생명이 발전하는 자연스러운 종착점으로 여기고 전력을 다해 인생의 사회적 가치를 창조한다. 둘째는 죽음의 종말이라는 비관적인 체험 속에서 향락주의로 도피하는 것으로, 이는 세속에서 향락을 찾음으로써 죽음을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심령의 공허함을 숨기는 것이다. 셋째는 유한한 인생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세속의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광적인 충동에 몰입하여 무조건 불로장생을 추구함으로써 죽음이 인생에 대해 내린 유한성의 규정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세 번째 태도가 가장 광범위하고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고 단언한다.
4. 대만에서의 생사학
전통적으로 우리 농경사회에서는 자신이 평생을 거처하던 방에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함으로서 생을 마감하였고, 장례 의식은 마을의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많은 학자들이 경제활동이 직간접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와 삶의 의미에 대해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아리에스가『죽음 앞의 인간』에서 20세기에 들어와 상징적 의미로 죽음이 ‘허무에 매몰되었다’고 파악했듯 현대 의료 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죽음을 많이 늦추었으나 그에 따른 고통 또한 증가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계로 가득 찬 중환자실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따라서 죽음은 더욱더 우리의 일상생활로부터 멀어지고 터부시되고 말았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계속해서 피하려고만 하거나 죽음을 적으로만 간주한다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이 한층 고양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대만에서의 죽음학은 1993년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대학 종교학과의 대만학자 푸웨이쉰傅偉勳교수가 자신의 10여 년 간의 죽음관련 교육내용을 바탕으로 『사망의 존엄과 죽음의 존엄-임종정신의학에서 현대생사학까지』를 출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작자 자신이 직접 암과 투쟁하면서 쓴 이 책은 예상을 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학계의 연구방향을 바꾸며 출판계에 새로운 기획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설을 세우는데 있어서 서양의 학설 가운에 프랑클(V. E. Frankl 1905~1997)의 ‘Logotherapy' 이론에서 영향을 받는다. ‘Logotherapy’는 정신의학에서 ‘실존분석적 정신요법’으로 부른다. 로고테라피는 과거보다는 미래에 주안점을 둔다. 다시 말해서 환자가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프랑클은 인간 존재를 본질적으로 역사적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의 삶이 역정을 위대한 창조적 업적으로 여겼다. 그는 유태인으로서 4년간의 강제수용소에서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삶에 대한 의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수용소 수인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현상학적 관찰의 결과를 기술하면서 우리를 생각에 잠기게 하는 어떤 사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것은 삶과 죽음을 오가는 극한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참된 요소는 체력의 강약이 아니라 정신적 역량의 충족 여부라는 사실이다. 그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가 정신적인 피폐의 결과 죽음의 신의 도전을 견딜만한 힘을 잃어버린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평소 신체가 매우 허약한 수인이 고도의 정신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죽음과 용감하게 맞서 살아남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지금까지의 심리주의는 심리적 행동과정의 정신적 내용의 가치를 깎아 내리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 경향으로 인해 심리주의는 늘 정신적인 것의 가면을 벗으려 하며, 무리하게 폭로하려 하며, 항상 본질적이 아닌 신경증적인, 또는 문화병리학적인 동기를 찾아 헤맨다고 비판했다. 프랑클에게 있어서 실존주체의 자유의지는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의지이다. 그것은 세속적인 측면과 정신적 혹은 종교적 측면 두 가지를 함축한다. 그는 삶의 의미의 구체적 내용으로 창조적 가치(creative value)와 체험적 가치(experiential value) 및 태도에 관한 가치(attitudinal value)등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 가책, 나아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의의를 스스로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심리치료의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프랑클은 인생이 일종의 임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반 현실적인 의의를 초월하는 궁극적인 의의 위에서 자신의 임무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의의 치료학 전문가가 어떤 특정 종교나 이론을 이용하여 궁극적인 의의의 구체적인 뜻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오직 실존 분석을 통해 환자로 하여금 생명을 경시할 수 없는 까닭은 자신에게 궁극적인 의의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각인시켜야 한다. 궁극적 의의의 구체적 내용은 환자 자신의 실존적 체험에 맡길 뿐이다. 이 점에서 푸교수는 유학의 본령인 체인지학과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삶 전 과정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나눈다. (1) 신체활동, (2)심리활동, (3)정치사회, (4)역사문화, (5)지성탐구, (6)심미적 경험, (7)인륜도덕, (8)실존주체, (9)궁극적 관심, (10)궁극적 진실. 그리고 그는 생사학은 이와 같은 생명의 10대 측면과 가치관을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마지막 세 영역의 실존주체, 궁극적 관심, 궁극적 진실에 대한 탐구를 철학과 종교의 영역에 두고 죽음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대만에 죽음학을 들여오면서 ‘Thanatology’를 생사학生死學으로 번역하고 ‘Death Education’ 에서 ‘Life and Death Education’으로 변환하여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우선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의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금기가 기독교문화권에 비해 더욱 강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의도가 있다.
죽음학은 학제간 연구를 지향하는 학문으로 연구대상은 ‘죽음의 정의’(의학 및 생물학에서 주로 다루고 부분적으로 사회학과 법률과도 관련된다.)․죽음 전의 현상(심리학 및 의료학과 관련된다)․근사체험(심리학 및 신학과 관련된다)․죽음의 존엄과 의식(사회학 및 종교학과 관련된다)․죽음 관리와 경제(경제학 및 경영학과 관련된다)․자살과 삶의 가치(심리학, 교육학 및 사회학과 관련된다) 등이다.
이와 같이 서구 죽음학은 죽음에 대한 인식, 정의 및 죽음과 관련되는 여러 현상에 대한 파악을 주요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생명에 대해 직접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원래 삶과 죽음의 하나(一體兩面)로 보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삶과 죽음을 함께 아우르는 생사 문제로 확충해서 파악해야 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만약 죽음을 생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지 않고 단지 죽음 현상에서만 연구한다면 죽음의 본질은 영원히 죽음 자신이 지닌 무화無化의 힘 속에 매몰되어 감추어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죽음의 현상’에 관해 독립적으로 연구 할 수도 있지만 생명 전체를 통해 ‘죽음의 본질’을 연구해야만 한다. 죽음의 현상은 본질의 드러남이고 이 본질은 다름 아닌 생명 자체다. 다시 말해 죽음의 본질은 삶의 완성(to live)이고 삶의 현상은 죽음의 실현(to die)이다. 죽음에 대한 물음은 결국 삶에 대한 물음과 연결된다. 삶의 의미는 태어나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로부터 명확히 드러난다. 반대로 삶에 대한 태도가 죽음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다. 삶과 죽음은 일체다. ‘죽음의 현상’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죽음학과 죽음교육의 목표였다. 죽음의 본질에 관한 진일보한 연구는 생명 자체이고 따라서 현대 죽음학의 새로운 방향이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연구가 본디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던가? 생명에 대한 사랑이 바로 종교의 본질이다. 종교적 정감의 온사랑(the whole love of religious feeling)의 실천은 멈출 수 없다. 따라서 현대 죽음학의 가장 중심이 되는 테마는 삶과 죽음을 꿰뚫는 궁극적인 생명에 대한 큰사랑의 종교적 정감 및 궁극적 관심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죽음학’이라는 단어에서 ‘생사학’이라는 단어로의 전향이 필요하다고 여겨 ‘Thanatology’를 생사학(Studies of Life-and-Death)이라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동북아 사상의 근간인 유학은 몸소 체득함(體認之學)에 있다. 푸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책에서 서구 죽음학 연구에서 진일보하여 동양의 심성체인 중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지혜를 배합하여 ‘현대 생사학’을 건립하고, “삶과 죽음은 나누어지지 않는다(一體兩面)”는 기본적인 관점에 의거하여 죽음의 문제를 삶과 죽음을 함께 아우르는 생사문제로 확충하였다. 즉 죽음의 존엄과 생명의 존엄을 나눌 수 없는 밀접한 관계로 보고, 현대인의 죽음에 대한 정신적 초탈 및 삶과 죽음의 궁극적인 의의에 대하여 성찰하고 있다. 이 점에서 원래 구상하였던 제목인 『죽음의 존엄-현대인의 죽음의 문제 및 정신적 초탈』에서 『사망의 존엄과 죽음의 존엄-임종정신의학에서 현대생사학까지』로 바꾸어 출판하게 된 이유다. 이후 지금까지 『죽음의 철학』『생사학』『생사학 개론』『이론생사학』『종교철학과 생사학』『생사교육과 카운슬링』등의 수십 종의 전문서적들이 단독 혹은 공동연구로 출간되었다.
최근에는 ‘Thanatology’에 생명의 특질을 부여하고, 현대 생명윤리학 관점을 부가하여 생명의, 생물의, 혹은 유기체의 등을 함의하는 전치사 Bio를 넣어 ‘Biothanatology’로 ‘생사학’을 나타내기도 한다.
푸웨이쉰 교수의 책은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반향이 각 학교의 생사학 과목 개설로 이어졌다. 출판 이듬해인 1994년 국립 대만대학 심리학과에서 2인 팀티칭의 교양과정에 제한인원 100명으로 개설한 ‘생사학의 탐구’과목에 수백 명이 신청하여 결국 180명으로 제한하여 강의를 하였다. 1995년 타이페이 간호대학(台北護理學院)에서 전공필수과목으로 ‘죽음학’을 개설하였다. 개설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생사학 연구와 운용현황에 대하여 의학, 사회학, 종교 및 윤리적 관점에서 죽음의 과정과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및 죽음 관련 의식 및 사회적 조직의 영향에 대한 이해를 도모함에 있다. 그 결과 학생들로 하여금 올바른 생사관을 건립하여 죽음교육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1997년 대만에서는 최초로 남화(南華)대학에서 ‘생사학 연구소’(대학원 과정)를 개설하였고 2001학년도부터는 학부 과정에 생사학과를 개설하게 된다. 1998년, 타이페이 간호대학에서 ‘삶과 죽음 연구센터’(生與死研究中心)를 개설하고 이어서 ‘생사교육과 카운슬링 연구소’를 개설하게 된다. 이후 2,000여명의 사망자를 낸 1999년 9․21지진참사 이후 각 대학 및 중고등학교에서 생사학 관련과목을 개설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전국 대학 가운데 1/3 이상이 교양과목으로 생사학 관련 과목을 개설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상화된 학교폭력, 늘어나는 청소년 자살 등이 사회문제로 제기되어 중등학교에서도 생명교육을 실시하여 학생들이 올바른 가치관 및 인생관을 세우고, 자신의 생명의 고귀함을 체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2000년 7월 교육부에서 정식으로 ‘교육부 생명교육추진 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청회를 거쳐 2001년을 ‘생명교육의 해’로 선포하게 된다. 수년간의 연구 끝에 마침내 작년부터 초등학교부터 중등학교까지 생명교육은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교과목 내용은 다음과 같이 ‘생명교육개론’, ‘철학과 인생’, ‘종교와 인생’, ‘삶과 죽음’, ‘도덕적 사고와 결단’, ‘섹스와 결혼윤리’, ‘생명과 과학윤리’, ‘전인격과 영성발전’등 8대 영역으로 나누었다.
2. 대학에서의 생사학
―남화대학 ‘생사학 연구소’ 설립취지 및 발전방향
1) 국가의 총체적인 경제발전과 문화건설에 발맞추어 인본주의 가치를 추구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 및 존엄한 죽음을 제고한다.
2) 현대 생사학 이론구축에 최선을 다하여 생사학 관련 과제의 학술이론연구, 공공정책연구 및 행정법규 규정에 필요한 인재를 배양한다.
3) 전면적인 생사교육의 보편화를 추진하고 현 교육체제에서 미비한 부분을 보충하여 생사학 관련 학문적 연구를 진행한다.
4) 토착적인 요양 및 호스피스 이론을 건립하고 각 의료기관의 임상연구와 결합하여 무의미한 육체적 치료(Cure) 중심의 전통적 의료관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Care) 중심의 신시대적 의료관으로 전환한다.
5) 생사학의 현대적 이론 구성을 통하여 생사 관련 서비스업의 현대화, 전문화, 제도화, 자격증 제도 등을 촉진하여 전 국민의 생사문화의 수준을 제고한다.
교과 과정은 크게 3가지로 나눈다.
1) 생명이론, 생사교육 및 생사의례문화 연구.
2) 생사, 의료, 요양, 사회복지정책에 관한 정책 및 법규연구.
3) 생사 관련 서비스 사업의 기획, 경영 및 관리.
본 학과는 인류의 생로병사 및 그것들과 관련된 과제에 대한 토론을 지향점으로 삼아 수업과 연구에 중점을 두며 이를 위하여 구체적 교과과정에 있어서 크게 4가지로 분류한다,
1) 기초(방법론)교과과정 : 질적 연구방법, 양적 연구방법, 생사학 기본문제 토론, 종교학 기본문제 토론, 철학 기본문제 토론……등.
2) 이론 교과과정 : 사회생사학, 심리생사학, 생명윤리학, 자살학, 노년학, 의료사회학, 장례학, 심층심리학, 초심리학, 임종정신의학, 윤회이론연구……등.
3) 응용지도교과과정 : 생사교육, 호스피스, 카운슬링, 양생법, 장례관리, 심리상담 및 치료, 현대풍수연구……등.
4) 전제연구교과과정 : 사망철학 전제연구, 죽음과 문학 전제연구, 죽음과 예술 전제연구, 죽음과 음악 전제연구, 의의치료전제연구, 종교생사학 전제연구, 생명의례전제연구, 생사신화상징연구, 의료공공정책연구, 생사법규연구, 자격증제도연구, 생명보험과 생사신탁연구……등
―타이페이 간호대학 ‘생사교육과 카운슬링 연구소’의 교육목표
1) 생사교육과 카운슬링 실무인재 육성한다.
2) 생사교육과 카운슬링 실무 응용연구에 종사한다.
3) 생사교육과 카운슬링 종사자들에게 재교육과 정보를 제공한다.
4) 일반 국민들에게 생사관련 의제들을 제공한다.
5) 국내 생사교육과 카운슬링 수준을 국제적 표준으로 제고한다.
전망
1) 전문화 : 생사교육과 카운슬링의 실질적인 실무 및 연구를 제고한다.
2) 조직화 : 전문적인 단체를 조직하고 정보를 제공한다.
3) 토착화 : 토착 문화에 적합한 생사교육과 카운슬링 도구 및 매체를 연구 개발하고 전산망을 구축한다.
4) 국제화 : 국민들의 생사교육과 카운슬링 수준을 제고하여 국제적인 명성과 지위를 건립한다.
이와 같이 살펴볼 남화대학 생사학과는 생사학 전반에 걸쳐 이론 및 실무를 모두 아우르는 폭 넓은 교과 과정을 개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타이페이 간호대학은 초중등에서 대학, 나아가 평생교육에 이르기까지 생사관련 교육과 카운슬링에 집중함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학교 밖 학교 개념으로 ‘세계종교박물관’을 통하여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실제 방문과 시청각 효과를 통하여 죽음 관련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세계종교박물관은 10년의 기획과 건축을 거쳐 2001년 타이페이 교외에 2300여평의 면적으로 건축되었다. 내부에는 세계 10대 종교의 희귀한 문물 및 예술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2002년부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생명의 건축사’라는 생명교육교안을 작성하여 참관 및 유관활동을 통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새로운 각도에서 생명의 단계 및 역정(Rites of Passage)에 대하여 살펴보고, 올바른 삶의 방향을 찾고 스스로 생명의 의의와 가치를 체득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즉 학생들로 하여금 영적, 종교적 각도에서 생명의 의의와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협조하여 바르고 적극적인 인생관을 세울 수 있도록 인도하는데 목적을 둔다. 탄생, 성장기, 장년기, 노년기, 죽음 및 사후세계 등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참관과 지도 및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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