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일(渡日)의 경위(經緯)
1919년 한국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 등암동에 농가에 종사하는 일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림 학교(중학교)를 졸업해 산사태나 수해를 막는 일을 하는 산림조합에 취직했다. 그러나 월급이 적고 지나치게 한가한 시골에서는 성장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낮선 세계에
나가 더 공부하거나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싶으셨다고 한다.
자신들과 같은 사람은 전쟁과 같은 혼란한 격변기가 하나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시고 상하이나 일본 등지를 고려하다가, 그 당시 盧溝橋事件(1937년 7월7일 중국 루거우차오에서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양국 군대의 충돌사건 )으로 인해 보다 안전한 일본을 선택했다.
상하이에 간 친구는 그 후 연락이 끊어지게 되기도 하여서, 자신은 장남이기 때문에 목숨을 잃으면 자손을 이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고 반드시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가 효를 다하고 싶었다.
◆ 도일후(渡日後)
1939년 19세때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처음은 도쿄에서 취직하려고 직업소개소
에서 1주 정도 일을 찾았지만 열악한 조건으로 포기했다.
그때는 하루종일 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지나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서 누군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찾을만큼 외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친척과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가 있는 쿄토로 가기로 했다. 당시 교토 기모노 생산의 중심이였던 西陣(니시진)에서 일자리를 찾으려고 했는데 "공원모집. 단,반도인 거절"이라고 하는 구인광고가 있는 직물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마침 友禪染(유젠염 비단 등에 화려한 채색으로 여러 가지의 무늬를 선명하게 염색하는 일)의 경영을 하고 있는 세 살 많은 친척으로부터 메리야스 공장의 일을 소개받았다.
그 후 공장을 옮기면서 직물을 짜는 공원으로서 일을 하면서도 야간 학교에도 계속 다녔다. 주위 사람들은 번 돈을 먹고 마시는 데에만 사용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쓰지 않고 저축을 하면서 학업에 힘을 쏟았다. 일본에서는 출신이나 가문에 상관없이 성공한 사람을 누구라도 존경해 주는 풍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용이의 할머니 즉 부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자신의부친과 함께 홋카이도에서도 일을
하셨다고 함)
◆ 기술학교의 입학
일본제국은 대동아전쟁이 치열하여 지면서, 천황에 대한 내적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하는 이유로 군인이 되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도 징병을 요구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고인에게 일을 소개해준 친척조차도 1942년에 징병되어 사이판에서 전사하였다. 머지않아 자신도 징병되지 않을까 생각해 이를 피하기 위하여 기술자양성학교의 학생모집 신문광고를 보고나서 바로 응모 하러 갔다.
그 학교에 입학하면 징병이나 징용은 면제될 수 있었으므로 시험장에는 2,0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고, 합격자는 300명으로서 그 중 한국인은 자신을 포함하여 3명에
불과하였다.
고인은 기술학교를 졸업해 의무적로서 종전될 때까지 교토 정공주식회사라고 하는 해군 기지창에 기술 지도원으로서 일했다. 그 때 "여기서는 조선이름 말고 일본이름을
사용하라"고 상사의 요청을 받아 "藤本秀夫(후지모토 히데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지모도“의 ‘후지’는 고향의 마을에는 등나무가 많은데서 따온 것으로서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
◆ 서진직(西陣織) 경영자로의 변신
전쟁의 막바지에 이른 1940년경부터 西陣織의 고급직물 가게들은 사치산업이라는 지탄을 받으며 차례로 폐업으로 몰렸다.
당시 西陣織에서 직물 가게를 경영하려면 직기 한대 한대에 대해 경찰의 허가가 있어야
했고, 영업권 또한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 시기에 많은 일본인이 손을 놓았으므로 경영권을 인수하는데 다소 쉽기는 햇으나 ‘니시진직’ 사업은 내리막길이어서 모두가 반대했지만 일본인이 버리는 시기가 아니면 외국인인 한국사람에게는 기회가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인에 비하여 가격을 치루면서도 1943년도에 경영권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때 설립한 회사가 자신의 성을 따서 후지모토 機業店이라 이름지었고, 경영자이면서도 공장의 반장(지도원)의 일을 계속하면서 일본인 여성을 고용하여 군사용 방한 모포의 생산을 시작했다.
고인의 운영하던 회사에서 생산한 제품은 1958년 銀座(긴자)마츠자카야(백화점 이름)에 출품하여 최우수 기모노에 당선할 정도로 우수하여 일본국왕의 성혼시에 300벌을 납품
하였고, 당시 유행하던 ‘미치코님을 닮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 기모노는 품절 상태를 이루기도 하였다.
◆ 전쟁이 끝난후
전쟁후 GHQ(연합국총사령부 [聯合國總司令部, General Headquarters of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GHQ)]는 조국에 돌아가고 싶은 조선사람을 모집
했다. 이때 많은 조선사람이 한국으로 돌아갔고 고인도 한국에서는 귀한 직조기 설비를
가지고 귀국할 수 있었으나 차차 정세를 보고 돌아가려고 지켜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재일동포1세는 일본에서 성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전후에는 공급이 부족하여서 제품을 생산하는대로 판매되던 호황기를 누렸고, 당시
니시진에는 한국출신 경영자가 많았기 때문에 1946년에 한국인들로 구성된 서진직물
공업조합(西陣織物工業組合)을설립했다. 이 때문에 심지어 톳토리현의 산속에서 숯구이를 하고 있던 사람이나 홋카이도의 탄광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 등 전국의 재일동포가 ‘서진(西陣)에 가면 돈을 벌 수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기 때문에 조합원이 대폭 늘어나 그 다음 해에는 제2조합이 생길 정도였다.
그 조합을 기반으로 1953년 일본내 첫 한국계 금융기관인 상공신용조합을 설립해 한국인 경영자에게 자금 조달의 편리를 도모할 수 있게 되는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 서진직(西陣織)의 쇠퇴(衰退)
니시진직이 좋았던 것은 베트남전쟁까지였다. 경영자로서 많은 벽을 넘어왔지만 기모노의 수요가 침체해 장사가 되지 않게 되었다. 1964년에는 회사이름을 ‘후지모도’에서 ‘마루고’(동그라미丸 형상 안에 고인의 고유의 姓인 吳의 일본식 발음) 직물정리공장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단순 기모노 생산만 하던 것을 부가가치가 높은 기모노의 최종 공정에 해당하는 마무리 가공으로 전향했다.
한편, 고인은 직물산업이 경기를 심하게 타는 산업이라 것을 감지하고 위험을 분산하기 위하여 새로운 사업을 추가하게 된다. 일본 최대의 대기업인 미쓰비시 회사의 하청 전기부품 공장을 시작했다.
◆ 장남(長男)의 전업(轉業)과 급서(急逝) 이후(以後)
장남에게 상당부분의 경영을 맡긴 ‘마르고 직물 정비공장’은 약20년 계속 되었지만
경기변동에 따라 그 경영도 부진하게 되자 실질 경영권을 행사하던 장남은 ‘파칭고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니시진직의 경영이 잘 되지 않았던 재일교포의 상당수가 파칭코점이나
불고기 식당으로 전업하는 것이 일반적인었지만 고인은 처음에 전업을 크게 반대
하였음에도 장남은 고인이 쌓아놓은 자산을 이용해 1983년 ‘주식회사 마르고’라는 이름의 파칭코점 열게 된다.
그후 파칭코점은 성황을 이루어 고인의 노년은 나름의 안위를 누릴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장남이 췌장암으로 급서하게 됨에 따라 고인은 1994년도부터 2007년도 별세할 때까지 대표이사직을 다시 지키는 노력을 하였다.
고인을 지켜본 본인의 생각은 일본에서의 성공은 ‘운이 좋았다’는 것 보다는 고인의 노력이 남달랐기 때문으로 알고 있다. 쿄도의 자택에서 돌아가시는 마지막까지 자녀와 손주들의 행복을 기원해 주셨다.
[이상은 고인이 78세(1997년)때에 장손인 명용이 대학생때 학교 리포트 과제를 위하여 모두5회에 걸친 인터뷰를 실시하여 간결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고인의 손녀 吳明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