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탁월한 돈과 군사력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교황으로 평가한 알렉산더 6세의 딸인 루크레치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1480~1519)는 문학사에서 악녀의 표본처럼 등장하기도 하지만 문학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연인으로 부각된다.
빅토르 위고는 “이곳이야말로 타기해야 할 집안, 음란의 집, 배반의 집, 모살의 집, 간통의 집, 불륜의 집, 열거할 수 없는 모든 죄악의 집, 루크레치아 보르지아”(희곡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라고 평했다. 그런가 하면 당대 이탈리아의 일급 문학인에다 추기경이었던 피에트로 벰보는 그를 연인으로 삼았으며, 시인 아리오스토는 길게 늘어뜨린 그의 매력적인 머리를 찬양하기에 급급했고, 독일의 문인 페르디난트 그레고로비치는 그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다만 운명에 번롱당한 가여운 여인이라고 옹호했다. 오귀스탕 카바네스는 <역사의 지옥>에서 그가 다만 아버지와 오빠의 정치적인 희생물일 뿐 그 자신은 너무나 순진해 자신의 행위가 죄악인 줄도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페인 출신으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명문벌족이었던 보르지아 집안은 두 교황을 배출한 데다 그 중 하나는 마키아벨리의 지적처럼 교황권을 강화시킨 업적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르네상스 당시의 교황청은 오늘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자유주의적 분위기로 예술인을 비롯한 여러 유형의 여인들이 드나들며 각종 연회를 가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루크레치아의 아버지 알렉산더 6세는 성직의 매매관직과 권모술수, 독살 등등에서 역사상 선두를 다툴 정도의 악명을 지닌 인물인데 그 보조자 역할을 한 것이 작은 아들(그의 오빠) 체자레였다.
루크레치아가 첫 결혼을 한 것은 14세 때였는데 남편은 성불능이었다고도 한다. 그는 남편의 하인과 놀아나던 중 오빠 체자레에게서 남편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지만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 도망치게 했다. 로마의 밤거리를 누비며 남자사냥을 했다거나, 아버지와 두 오빠가 함께 그를 사랑한다는 등의 수군거림은 첫 남편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런 소문이 더욱 거세진 것은 큰 오빠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임을 당한 뒤부터였다.
두 번째 남편은 나폴리 왕가에서 구했는데 미남에다 매력적인 상대여서 루크레치아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했었다고 전한다. 그런 탓이었는지 이 남자는 바티칸궁의 계단에서 테러를 당한 뒤 루크레치아의 극진한 간호를 받던 중 죽고 말았다. 이 사건 역시 그 배후는 오리무중이다. <보르지아 집안의 독약>이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이 집안의 독살은 알려져 있었는데, 대개는 반지의 보석에다 가루약을 넣어두었다가 상대방이 방심할 때 음료수에 뿌리는 수법을 썼다고 전한다.
이제 세 번째 결혼을 할 차례다. 그는 페라라 공국의 공비로 간택돼 대환영 속에 로마를 떠났다. 통상 2주일 걸리던 거리를 4주나 소비해 시댁으로 갔는데, 그 원인이 재미있다. 뭇 남성을 자로잡았던 그의 긴 머리 때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 머리를 찬찬히 감고 빗지 않으면 두통으로 견딜 수 없어서 그를 위해 자주 지체했다는 것이다. 페라라에서의 그는 행복했던 것 같다. 예술인들을 초치해 연회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시를 쓰기도 했지만 시인과 연애도 했다. 이런 만년의 선량했던 그를 가리켜 카바네스는 문학의 위력이 그를 악녀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따지고 보면 로마가 지녔던 환경이 그를 악녀로 만들었지만, 페라라의 분위기가 그를 다시금 르네상스의 후원자로 변모시켰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