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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작품 ]
노랑이와 할매/김진선
첨부사진1
화창한 오후입니다. 햇살이 온 세상을 비춰줍니다. 그러나 이 곳은 온통 깜깜합니다. 갑자기 세차게 밀려오는 헹군 물 때문에 한바탕 구정물 파도가 일렁입니다. 여기는 햇살의 손길이 닿지 않는 수챗구멍입니다. 샴푸 헹군 물도 이윽고 구정물과 섞이게 됩니다. 헹군 물 속에 무언가가 섞여서 흘려 내려옵니다.
"에잇, 퉤퉤. 대체 여기가 어디람?"
툴툴대는 소리가 수챗구멍 안을 웅웅 울립니다.
"뭐야? 냄새 나고 더러운 여긴 대체 어디지? 으앙, 난 몰라."
울음소리에 가늘고 구불거리는 그림자가 움직입니다.
"넌 누구냐?"
두려움을 느낀 노랑이는 최대한 굵은 목소리로 물어봅니다.
"난 흰머리카락이야. 그러는 넌 누구냐? 보아하니 너도 머리카락은 머리카락 같은데…"
"휴…살았다. 만나서 반가…갑지는 않지만 뭐. 난 검은머리카락. 아니 지금은 노랑머리카락이야."
"노랑머리카락?"
"응 그냥 노랑이라고 불러. 그런데 여긴 어디니?"
"예끼! 이놈. 어른도 몰라보고 어디서 반말이냐? 이 배은망덕한 놈.넌, 위 아래도 없어?"
깜짝 놀란 노랑이는 하마터면 구정물을 마실 뻔 했습니다.
"아니 무슨 머리카락 처지에 위아래를 따져? 몇 살인데 그래요? 쳇"
순간 노랑이는 아차! 싶습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거든요. 검은머리카락에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흰머리카락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아무리 머리카락이라도 그렇지. 앞으론 존댓말 써!"
노랑이는 마지못해 콧소리로 '네'라고 대답합니다.
"그나저나 넌 여기에 어떻게 왔냐? 검은머리카락이라면 아직 한창 때인데……그런데 온 몸이 노란색으로 뒤덮여있는데 안 답답하냐? 온통 노란색이라 흰머리카락인지 검은머리카락인지 헷갈렸잖아."
"말도 마세요. 저의 주인은요 1년 365일 머리카락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아요. 염색했다 탈색했다 심심하면 뽀글뽀글 파마. 걸핏하면 쫙쫙 생머리로 펴고. 그 바람에 저와 제 친구들은 지쳤다고요. 드라이하다가 반은 끊겼는데 오늘 머리 감다 완전히 끊겨져 나왔어요."
노랑이는 숨도 안 쉬고 순식간에 그 동안의 일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보면 오랜 시간이 지난 일 같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의 일인데도 말이죠.
"변덕스러운 여자 주인이었던 모양이지?"
"아뇨 남자였어요."
"요즘은 남자가 뽀글뽀글 파마도 하나?"
노랑이는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요즘 유행을 모르시는구나. 요즘 남자들 아줌마처럼 뽀글뽀글 파마가 유행이에요. 한번은 길을 가는데 어떤 여학생이 잘못해서 제 주인 팔을 치고 갔는데, 뒷모습만 보고는 아줌마 죄송하다고 그러더라고요."
흰머리카락도 이제야 같이 웃기 시작합니다. 노랑이의 깜깜했던 주위가 차차 밝아집니다.
"유별난 주인을 만났나 봐. 노랑이 너는 젊은 나이에 안됐다. 아직 세상 구경도 덜 했을 텐데 말이야."
흰머리카락은 아련한 추억에 잠깁니다. 그러고 보면 세월이란 게 눈 깜짝할 사이입니다.
"흰머리카락님은 이곳에 어떻게 오셨어요?"
"흰머리카락님은 무슨. 그냥 내 주인은 할머니였으니까 그냥 할매라고 불러. 나야 뭐 할매가 늙으니까 덩달아 나도 늙고. 팔 다리가 힘을 못 쓰더니 점점 머리카락까지 영 힘이 없어지는 거야. 그렇게 위태롭게 보내다가 할매가 죽기 이틀 전에 며느리보고 머리를 감겨 달라고 하더라고. 그때 힘 좋은 며느리 손에 머리카락들끼리 엉키다가 쏙 빠져버리게 됐지."
노랑이는 할매가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역시 어른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것 같습니다. 할매가 다시 말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내 주인 할매는 행상을 했어. 농사를 지어서 이것저것 시장에 내다 팔았지. 그 때 나는 세상 구경을 참 많이 했지."
"저도 세상 구경 조금 해 봤어요. 주인이 이 곳 저 곳 돌아다니길 좋아해서."
노랑이가 할매 이야기 중에 끼어들었습니다.
"넌 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그리고 남의 이야기 할 때 끝까지 들어주다가 끝나면 이야기 해야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죄송해요. 저의 주인이 남이 말할 때 끼어들기 선수라서 어느새 저도 보고 배웠나 봐요."
노랑이는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습니다.
"앞으론 조심하도록 해. 그런데 어디까지 했지? 까먹었네."
"시장에서 세상 구경 많이 했다고요."
"아…시장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봤어. 시장은 사람과 물건이 한 자리에 모이는 곳이야. 언제나 왁자지껄하지. 세상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 그 중에서도 몸이 불편한 사람과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아."
노랑이는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매의 이야기는 실타래처럼 계속 풀어져 나왔습니다.
"하루는 찰랑찰랑 탐스러운 머리결을 가진 아가씨가 완두콩을 사러 왔었지. 내 생전에 그렇게 아름다운 머리결을 본 건 처음이었어. 머리결에 가려서 휠체어를 타고 안타고는 아무 상관없었어. 할매가 가는 귀가 먹어서 한 되 주랴? 두 되 주랴? 귀찮게 거듭 물어봐도 계속 웃으면서 두 되라고 대답했어."
노랑이는 자기 주인이 몹시 부끄러워졌습니다. 노랑이 주인은 말끝마다 '짜증나' 를 달고 살거든요. 할매는 잠시 쉬었다가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난 그 아가씨에게서 빛을 보았어. 웃을 때마다 빛은 더 강렬해졌어. 아가씨를 보고 있노라니 나에게도 웃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어."
노랑이의 마음이 뜨겁게 차오릅니다.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매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그 날 오후엔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당겨 정수리에 올려 묶은 아줌마가 팥을 사러 왔어. 오자마자 팥이 색깔이 왜 이렇게 흐리멍텅하냐는 둥 벌레 먹은 팥 투성이라고 투덜대다가 실수로 찬 발길질에 팥이랑 완두콩이 죄다 엎어진 거야. 호랑이 할매의 불 같은 성격이 아줌마의 머리카락을 한 웅큼 뽑아놨지. 그래서 잘난 척하던 아줌마의 정수리 올림머리가 다 풀어졌지. 사실 그래도 싸긴 쌌어. 십 분째 이러쿵저러쿵 불평만 늘어봐서 오는 손님도 몇 명 쫓아버렸거든."
노랑이는 정수리 올림머리 아줌마를 생각해 봅니다. 머리결 아가씨 곁에는 휠체어 친구가 있어서 든든하지만 정수리 올림머리 아줌마 곁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는 아줌마가 정수리에는 머리를 안 묶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묶을 때마다 머리카락들의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거든요.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할매의 실감나는 이야기로 아줌마의 머리모양이 머릿속에 그려지고도 남았습니다. 노랑이가 낯을 가리는 탓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할매가 처음에는 떨떠름했지만 이제는 이렇게 만난 것이 노랑이 인생의 영광이라고 까지 생각됩니다. 비록 수챗구멍에 만난 사이지만요. 만남에 있어서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노랑이는 그 동안 주인 머릿결 속에서 또래 친구 머리카락들하고만 지내니까 버릇도 없고 화나면 짜증내는 게 당연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그 즉시 짜증으로 풀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갑자기 헹군 물이 또 흘러 내려옵니다.
"자, 이제 또 헤어질 시간이구나."
할매는 미리 알았다는 듯이 이야기 합니다.
"할매, 그럼 우린 또 언제 만나나요?"
할매는 씨익 웃어 보입니다.
"눈으로 나를 기억하지 말고 마음으로 날 기억하렴. 그럼 바로 나를 만날 거야."
해가 노을 속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김을 맸던 김씨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아저씨의 남방에 살랑 바람이 간지럼을 피워줍니다. 하루 종일 일한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입니다. 집 근처에서 동네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자네 오늘도 욕봤구먼. 아이고 팔 다리 어깨가 아파서 이제 김도 못 매겠어.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늙을수록 몸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여. 그런디 자네 무슨 좋을 일 있남? 왜 이리 싱글벙글이여?"
여전히 미소가 입에 걸린 아저씨는
"늘 좋은 일 뿐이죠. 우선 제가 이렇게 살아 숨 쉴 수 있는 게 감사하고 건강 주셔서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잖아요. 힘들면 잠시 쉴 수도 있고 목마르면 물도 마실 수 있고 배고프면 실컷 밥도 먹고. 이렇게 집에 들어가는 길에 반가운 어르신도 뵐 수 있고 집에 가면 저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고. 늘 기쁘게 사니 좋은 마음만 생겨서요."
어르신은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맞아! 그래서 자네는 몸이 튼튼하고 신수가 훤했구먼!"
김씨 아저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운지 인사만 꾸벅 하고 집으로 향합니다.
"어험, 아빠 왔다. 귀여운 내 강아지들 잘 있었나?"
귀여운 두 남매는 아빠의 넓은 어깨로 달려와 와락 껴안습니다. 김씨 아저씨의 미소가 얼굴에서부터 온몸 구석구석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빠가 땀나서 무척 더우니까 등목 좀 해야겠다. 우리 강아지들이 아빠 등에 물 한 바가지씩만 뿌려줘."
아이들이 뿌려주는 시원한 물로 등목하는 김씨 아저씨는 콧노래를 부릅니다. 한참 흥얼거리던 아저씨가 갑자기 소리칩니다.
"어랏, 머리카락이 또 빠졌네. 이젠 숱도 얼마 없는데 이런. 허허허."
김씨 아저씨 머리카락이 헹군 물을 따라 수챗구멍으로 흘러갑니다. (끝)
[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작품 ]
다령이가 말한 하늘/김용준
이사하던 날 엄마는 제게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전 괜찮았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어디든 익숙해집니다. 엄마는 저를 안고 미안하다 말할 때가 많았습니다. 처녀보살인 엄마가 나를 낳아서 내가 대신 벌을 받는 거라며. 전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을 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갖지 않았던 것이 없다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가끔 하늘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을 때가 있을 뿐입니다. 끝없는 하늘, 끝이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제가 열두 살이 된 지금, 엄마가 저를 안아 줄 때 전에 없던 뱃살이 저를 밀어내지만, 엄마는 여전히 처녀보살이라고 불립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점을 잘 안 봐. 단골들도 싼 부적만 찾고.”
이사 온 집은 경사진 곳에 있었습니다. 좁은 대문으로 들어간 다음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집 위쪽으로는 골목이 있는데 골목을 따라 담이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담은 제 지팡이를 펴서 두드려야 끝이 만져질 정도로 높았습니다. 담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주일에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방 창으로 찬송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전에는 아줌마와 아저씨, 한낮에는 형과 누나, 그리고 저녁에는 아이들 목소리로 바뀌었지만,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같았습니다. 엄마는 점집 옆에 교회가 있다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놈의 부동산 여편네! 담 너머에 청소년 쉼터 짓는 거라더니. 교회 옆에 점집 차린 년은 나밖에 없을 거다.”
2년 전부터 공터였던 곳에 지은 교회가 이제야 완성된 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사한 뒤에야 십자가가 올려졌다며 엄마는 넋두리했습니다.
엄마는 안방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습니다. 특히 주말에 손님이 많았습니다. 엄마가 일할 때면 전 되도록 방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방에 혼자 있는데 교회에서 찬송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남자아이들이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성가대가 연습하나? 자세히 들어보니 여자아이 목소리가 하나 섞여 있었습니다. 희미하게 들리던 그 목소리는 어느새 제 귓속에서 다른 목소리를 주변으로 밀어내고 한가운데를 차지했습니다. 피아노 높은음 건반을 누를 때 나는 것처럼 맑고 깨끗한 소리였습니다. 휴대전화에 저장해서 계속 듣고 싶었습니다.
전 조용히 밖으로 나갔습니다. 새로 이사 온 동네라 아주 천천히 걸어야 했지만, 멀리 가지 않을 거니 괜찮았습니다. 지팡이로 담과 땅을 번갈아 짚으며 걸었습니다. 마침내 담이 끝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풀냄새가 나고 바닥이 조금씩 꺼졌습니다. 잔디를 밟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었습니다.
“얘! 너 어디 가니?”
어떤 아저씨 목소리였습니다. 전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습니다.
“저, 저도 성가대에 들어가려고요.”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저를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비닐 봉투 스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팔을 대주는 게 편하니?”
“아, 네.”
부드럽게 물어본 아저씨는 이 교회 목사님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절 처음 봤다고 해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찬송가 부르는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계단을 오르고 방향을 바꿀 때마다 생김새며 모양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어느덧 찬송가 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 앞에 이르렀습니다.
‘똑똑똑’
목사님은 한 차례 문을 두드리고 바로 열었습니다.
“와, 아이스크림!”
노래가 그치고 우르르 발소리가 났습니다. 비닐 봉투를 뒤적이며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안쪽으로 저를 데려가 자리에 앉혀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새로 온 친구가 자기 소개 할 거라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6학년 현광채입니다. 반갑습니다.”
“광채야, 혹시 아는 찬송가 있으면 한 곡 불러줄래?”
초콜릿, 딸기, 수박, 여러 가지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전 주말마다 교회에서 들려왔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가 노래하는데 갑자기 따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여자아이 목소리였습니다. 전 귀가 예민한데 그 아이는 음정이 낮아지거나 높아지는 일 없이 정확하게 음을 맞췄습니다. 우리는 노래 한 곡을 끝냈습니다.
“우와!”
아이들이 큰소리로 손뼉을 쳤습니다.
“광채야 대단하다!”
목사님이 칭찬하고, 아이들이 환호했지만, 전 그 여자아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성가대가 다시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남자아이들 목소리만 들렸습니다. 전 제가 모르는 사이 여자아이가 집으로 갔나 생각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제 바로 뒤에서 그 아이가 노래했습니다. 제가 가장 뒷자리에 앉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가까이서 들으니 그 아이 목소리는 더 맑고 시원했습니다. 사이다를 마셨을 때 혀에서 목구멍으로 퍼지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입안에서 오렌지 알갱이가 터질 때 콧속을 가득 채우는 향기와도 같았습니다. 같이 노래하는 동안 마음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찬송가 연습이 끝났습니다.
“다음 주에도 늦지 말고.”
목사님이 말을 마치자 아이들이 일어나 나가는 소리가 났습니다. 몇몇 아이는 남아 떠들었습니다. 목사님이 저를 향해 걸어오는지 구두 발걸음 소리가 났습니다.
“광채야 너 혹시 MP3 있니? 내일 예배 때 가져오면 외울 노래 넣어줄게.”
“제목 알려주시면 인터넷으로 찾아서 들을게요.”
“집에는 어떻게 가니?”
“교회 담 너머라 금방 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목사님은 노래 제목 몇 곡을 알려준 다음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갔습니다. 남아 있던 아이들 몇이 제 곁으로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정말 궁금한 건 제가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따위일 텐데, 학교는 어디 다니는지, 교회 다닌 적은 있는지, 그런 것들만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자세하게 대답해주었고, 이내 저에게 흥미를 잃은 아이들은 인사하고 연습실을 나갔습니다. 전 옆에 있던 아이가 일어설 때 용기 내어 물었습니다.
“여자애는 갔니?”
“여자애? 성가대에 여자 없어. 내가 우리 반 여자애한테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남자애들만 있어서 싫다더라. 너 안 가?”
전 조금만 앉아 있다가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는 문 쪽으로 걸어가다 서서 저를 향해 말했습니다.
“이쪽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가면 돼. 계단 조심하고.”
“그래. 고마워.”
전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립니다. 모두 간 걸까요?
“얘!”
곁에서 누가 저를 불렀습니다.
“난 다령이야. 너 노래 정말 잘하더라.”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전 놀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다영?”
“리엉.”
“아, 령. 다령이구나.”
다령이라고 하니 여자아이가 맞을 겁니다. 가끔 남자아이 중에 목소리가 여자처럼 나는 애들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말하는 걸 좀 들어야 여자인지 남자인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다령이는 노래할 때와 말할 때 목소리가 같았습니다. 입안에 젤리를 넣고 우물거릴 때처럼 다령이 목소리는 제 귀를 울렸습니다.
“난 이 동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어.”
“난 여기서 태어났어. 한 번도 떠난 적 없지.”
저와 다령이는 한동안 이야기했습니다. 다령이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떨렸습니다. 손끝을 심장에 대고 만지는 것처럼 두근거림이 느껴졌습니다. 떨림이 등을 타고 목 위로 올라와 얼굴이 후끈합니다. 불안할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지만, 지금은 좋은 느낌이 마음에 가득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품속에서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다령아 내일 예배 때 보자.”
전 한쪽 손을 들었다 내렸습니다. 다령이는 아쉬워했습니다.
“너 가야 해?”
“응. 엄마가 찾나 봐.”
“그래. 내일 예배 때 와.”
전 일어서서 지팡이를 폈습니다.
교회를 나와 천천히 집으로 향했습니다. 대문 근처에 이르자 제 지팡이 소리를 들었는지 엄마가 나왔습니다.
“광채야, 문자만 남기고 어딜 갔다 와?”
“손님은 다 갔어요? 요 옆에 교회 잠깐.”
“처녀보살 아들이 교회는 왜?”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엄마는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저를 살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엄마는 너의 종교를 존중한다. 앞으로는 갈 땐 엄마한테 말하고.”
엄마는 제 손을 잡아 자기 팔 위에 얹었습니다. 저는 엄마와 함께 조심조심 계단을 밟고 내려갔습니다.
다음 날 일요일 예배에 갔습니다. 전날 밤에 엄마가 인터넷으로 음악을 받아주어서 찬송가도 외웠습니다. 엄마는 처녀보살이 찬송가 다운받고 있다며 투덜대긴 했습니다. 들어간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서 예배 때 성가대 자리에 앉아 찬송가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전 성가대 근처에 앉아 다령이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배 뒤 성가대 연습도 마쳤습니다. 전 연습실에 남아서 다령이와 이야기했습니다. 다령이가 저에게 가장 보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전 하늘이라고 말했습니다. 속으론 너. 네 얼굴.
“하늘? 그냥 휑해. 넓기만 하고.”
다령이는 하늘에 별거 없다고 했습니다. 끝없는 공간에 가끔 솜사탕 같은 구름이 떠다닐 뿐이라고 했습니다. 밤에는 시커먼 하늘에 별이 반짝이는데 하늘 위에 사는 천사들이 구멍 뚫고 내려다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천사들이 왜?”
“나를 데려가려고.”
그리고 낮에 보이는 하늘은 파란색, 다령이는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전 어떤 파란색이냐고 물었습니다. 다령이는 교회 종소리가 멀리 퍼져나가는 느낌 같다고 했습니다.
“바다도 파란색이지 않아?”
다령이는 바다가 내는 파란색은 레몬을 씹었을 때 신맛, 그 신맛이 지나간 다음 입속에 남는 시원함 같다고 했습니다. 다령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손으로 만져야 알 수 있던 세상이 가슴 속에 들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전 다령이 얼굴을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령이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주말을 기다리는 게 저의 일상이 됐습니다. 교회에 가지 않을 때도 다령이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다령이는 휴대전화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교회에 가려는데 엄마가 다가와 제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 얼굴이 왜 이리 수척하지?”
그날도 성가대 연습이 끝나고 전 다령이와 연습실에 남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가수, 다령이가 좋아하는 노래. 제가 재미없는 이야기를 해도 다령이는 소리 내어 웃어주었습니다. 다령이와 같이 있으면 시간이 빨리 흘렀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났는지 몰랐습니다. 누군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광채야, 어머님 오셨다.”
목사님 목소리였습니다.
“광채야!”
당황한 엄마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는 제 쪽으로 와 다짜고짜 저를 일으켰습니다.
“어, 엄마.”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평소 제게 팔을 내주던 때와 달리, 엄마는 제 팔을 잡아 저를 끌고 나갔습니다. 제가 교회에 너무 빠진 것 같아서 엄마 기분이 상한 걸까요?
평소 저를 들이지 않던 안방으로 엄마는 저를 데려갔습니다. 향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엄마는 누구와 함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전 다령이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엄마가 제 손을 꼭 잡았습니다.
“광채야, 지금부터 엄마가 하는 말 잘 들어. 너한테…….”
엄마는 저에게 귀신이 붙었다고 했습니다. 얼굴이 허물어지고 팔과 다리가 없는. 엄마는 저에게 다시는 교회에 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제가 죽을 거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전 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주말이 아닌데 교회에서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령이가 혼자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안방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습니다. 전 조용히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 마당에 들어섰을 때 목사님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전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혹시 전에 여기서 죽은 사람 있어요?”
목사님은 교회가 세워지기 전 그곳에 있던 청소년 쉼터에 큰불이 났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여자아이 하나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전 찬송가 연습을 하러 왔다고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성가대 연습실로 들어가자 다령이가 노래를 멈췄습니다.
“왜 이제 왔어?”
전 다령이 옆으로 가 앉았습니다. 다령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제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쁘든, 못생겼든, 팔이 없든, 다리가 없든, 다령이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습니다. 다령이와 함께 있는 게 행복했습니다. 다령이도 그렇게 느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아이와 친구가 된다는 건 정말……. 그때 연습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광채야!”
제가 혼자 말하는 모습을 보고 목사님이 엄마를 불렀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엄마는 교회에서 굿을 해야겠다고 소리쳤습니다. 저에게 교회에 살던 귀신이 들러붙었다며 목사님을 탓했습니다. 목사님은 교회에서 굿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엄마를 이상한 사람 취급 했을지도 모르지만, 목사님은 부드럽게 엄마를 이해시켰습니다.
엄마는 제 어깨를 감싸고 저를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교회에서 다령이가 부르는 찬송가 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엄마는 손님들에게 사과하며 다음에 와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교회 담 골목 아래로 몇 차례 무언가를 날랐습니다. 알고 보니 담 아래 굿판을 차린 거였습니다. 엄마는 저를 담 옆에 무릎 꿇리고 굿을 시작했습니다.
“천지신명께서 오신다. 워허이, 잡귀야 물렀거라!”
엄마가 굿을 시작함과 동시에 교회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던 다령이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그럴수록 주위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집 앞까지 와서 들리던 노랫소리가 갑자기 멈췄습니다.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제 바로 앞에서 다령이 목소리가 났습니다.
“왜 나를 보내려는 거야?”
엄마가 한 시간 동안 굿을 하면서 뜨거운 느낌이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교회가 쉬는 월요일이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일요일에 교회 옆에서 굿을 했다면 교회 신도들과 큰 싸움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목사님이 와서 말리려고 했지만, 엄마는 굿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불길이 사라졌는데도 왜 떠나질 않는 거냐?”
다령이는 우는 목소리로 저에게 말했습니다.
“광채야. 너도 내가 갔으면 좋겠어?”
엄마가 굿하는 통에 거의 쓰러졌던 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습니다. 저는 다령이가 떠나는 게 싫었습니다. 그 목소리 그대로 제 곁에 남아주길 바랐습니다.
“가지 마.”
제 말을 들은 엄마가 소리쳤습니다.
“광채야, 정신 차려! 귀신은 스스로 거부해야 쫓아낼 수 있어!”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전 다령이를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지 마. 난 네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잠시 적막이 흘렀습니다. 조금 뒤 차분해진 다령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고마워.”
무언가 제 얼굴을 건드렸습니다. 다령이 손길. 차가운 느낌이 났지만, 부드러웠습니다. 순간 제 몸을 감싸고 있던 무거운 느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머리가 상쾌해졌지만, 가슴 속 깊은 곳은 슬펐습니다.
“성불하는구나!”
엄마가 소리쳤습니다. 엄마가 가라고 할 땐 그토록 안 갔던 다령이가, 왜 가지 말라는 제 말을 듣고 가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제 얼굴 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세상이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찼습니다. 머리부터 코끝까지 온통 찌릿했습니다. 제 앞에 무언가 있었습니다. 전 그게 사람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서 얼굴을 찾았습니다. 다령이는 무섭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허물어진 것도 몸이 불편한 것도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프진 않았니. 제 눈가를 시리게 하는 새하얀 것이 다령이를 온통 휘감았습니다. 다령이는 천천히 떠올라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향해 갔습니다. 어느덧 다령이는 먼 하늘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다령이가 떠난 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기억납니다
하늘은 다령이가 말했던 것처럼 넓고 파란빛이었습니다. <끝>
[ 2018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품 ]
형은 고슴도치/임성규
"찍찍아! 한 번만 더 엄마한테 내 이야기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아침부터 형이 큰소리를 질렀다. 형은 내가 고자질쟁이라며 찍찍이라고 불렀다.
"또 무슨 말 엿들었어?"
난 화가 나서 혀를 날름 내밀며 "메롱"하고 도망쳤다. 형은 엄마에게 야단을 들으면 뭐든지 내 고자질 때문이라고 했다.
형과 난 정말 친하게 지냈었다. 형이 아주 좋아하는 신비한 숲속 게임을 같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형은 뭐든지 나를 이겨버렸다. 공부도 잘하고 게임도 잘하고 심지어는 친구도 많았다. 엄마 아빠도 형만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형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엄마에게 다 일러바쳤다. 이번에 내가 형이 허락도 받지 않고 게임방에 간 것을 일러버린 바람에 형이 좋아하는 게임을 못 하게 되었다. 새해가 되면 엄마가 사주기로 한 신비한 숲 전용 게임기 '초록이'도 없던 일이 돼버렸다.
신비한 숲 게임은 동물이 되어 들어가서 동물 체험도 해보고, 세상에서 사라져 가는 동물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다. 형은 게임 속에서 고슴도치가 되어 돌아다녔다. 그중에는 사라져버린 동물들도 많았다. 나는 그 동물들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배웠다.
"그건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이야."
사람들이 자기 집 장식을 위해서 코뿔소를 잡아 뿔만 빼가기도 한다는 말에 놀랐다. 난 형이 가진 황금 구슬을 달라고 했는데 주지 않자 화가 났다. 형과 절대로 게임 안 한다고 했다. 신비한 숲 게임을 하는 친구 중에 황금 구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들 황금 구슬을 갖기를 바랐다. 그러나 많은 시간 동안 동물들을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황금구슬은 만나는 동물에게 힘을 주고 다친 곳이 있으면 치료도 해준단다. 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마법구슬이라고 했다.
며칠 전, 형이 저녁 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 엄마는 걱정을 많이 했다. 난 아침에 형이 친구하고 통화하며, 신비한 숲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형이 게임방에 간다고 하던데…. 신비의 숲 게임에 푹 빠져 있을 거야."
난 형이 게임방 간 것처럼 말했다. 형이 들어오자 엄마가 왜 늦었느냐고 물었다. 친구 집에 모여서 공부했다고 했다. 엄마가 누구 집이냐고 다그쳤다.
"엄마는 말해도 몰라요."
형이 얼버무리자 엄마는 얼굴이 붉어졌다.
"말해줘도 모른다고…. 거짓말 까지 하다니 넌 일주일간 게임 금지야."
형은 얼굴을 찌푸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요즈음 형의 행동이 수상했다. 분명히 뭔가 숨기는 게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면 깜짝 놀랐다. 형이 숨기는 걸 찾아내기로 맘먹었다. 형이 뭘 하는지 몰래 지켜봤다.
형은 학교에 갈 때도 다니던 큰길로 가지 않고 아파트 뒤에 있는 숲길로 다녔다. 그 길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흙길이었다. 학교로 가는 길과 숲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데, 그 곳에 오래된 정자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도둑질하는 애들이 훔친 물건을 나눠 갖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른들 몰래 이상한 짓을 하는 애들도 있다고 했다.
철이가 붕어빵을 파는 동네 할머니가 그랬다며 그 길로는 다니지 말라고 했다.
"나쁜 기운이 도는 길이래. 귀신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했어."
나는 '나쁜 기운과 귀신!'이란 친구 철이의 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형의 하는 짓이 의심스럽기도 했다.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형은 거기서 뭘 하는 걸까?'
야단맞을 짓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철이가 이틀 전에는 몸에 덤불을 잔뜩 묻히고 숲에서 나오는 형을 본 적 있다고 했다. 난 형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다.
'꼭 알아내고 말 거야.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이 분명해!'
엄마가 부엌에서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으악! 이게 뭐야! 가시 뭉치가 있어."
고슴도치 한 마리가 부엌 싱크대 위에서 검은 눈을 반짝거리며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신비한 숲 게임 속에서 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 고슴도치와 너무나 닮아있었다. 잿빛 털과 그 사이에 하얀 얼룩이 있는 것을 보니, 신비한 숲의 고슴도치었다. 게임에서 본 고슴도치를 가까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놀라워서 가슴이 통게통게 했다.
"엄마, 고슴도치야."
"고슴도치?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왔을까?"
엄마랑 내가 고슴도치를 보며 놀라고 있을 때였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슴도치를 잡아서 종이상자에 집어넣었다. 쿡쿡 찌를 텐데 가시가 아프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유진이는 고슴도치를 잘 다루네."
집에 들어온 아빠는 다른 집에서 키우던 고슴도치가 도망쳐 우리 집에 왔을 거라고 했다.
"두 달 정도밖에 안 된 어린 고슴도치에요."
형이 잘난 척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말하려고 했다.
"애완동물 키우고 싶다고 했지?"
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엄마는 우리가 고슴도치를 키워보라고 했다.
"고슴도치를 제가 혼자 키우면 안 돼요?"
내 말에 형은 금방 나를 밀치며 말했다.
"제가 키울게요. 유민이는 어려서 뭘 몰라요."
나는 기분 나빴다.
"형이랑 두 살 차이 밖에 안 나거든."
내가 소리치자 형이 날 쳐다보며 말했다.
"찍찍아! 이 고슴도치는 플라티나이고 암컷이야. 쥐가 키우기엔 너무 어렵지."
"흥! 대단한 고슴도치 박사님 나오셨네."
고슴도치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고슴도치와 먼저 친해지는 사람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고슴도치하고 친해지려면 너희 가시를 내려놔야 해."
"우리가 가시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정말 가시가 없을까? 엄마 눈에는 너희들의 가시가 다 보여."
엄마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형 마음속에는 가시가 잔뜩 들어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고슴도치에게 새집을 사줘야겠어요. 먹이도 구해야 하구요"
난 형을 꼭 이겨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형을 이길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고슴도치를 키워본 철이가 고슴도치와 친해지는 것은 쉽다고 했다. 사람의 냄새에 익숙할 수 있도록 조금씩 가까이 가라고 했다.
사람의 냄새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틀이나 신은 냄새 나는 내 양말 두 짝을 고슴도치 집에 넣어주었다. 형이 날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형은 고슴도치를 도로시라고 불렀다. 그 뒤로 고슴도치는 도로시가 되어버렸다. 난 뭔가 큰 것을 뺏긴 느낌이 들었다.
형은 도로시가 손을 물어도 참고, 벌레를 주었다. 내가 손을 내밀면 가시를 세우고 경계 했다. 만지려다가 가시에 몇 번 찔렸다. 난 그만 고슴도치 주둥이를 툭 치고 말았다. 그 뒤로 도로시는 내가 먹이를 가지고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찍찍아. 도로시가 네 말을 알아듣겠니? 좋아하는 먹이를 찾아서 줘봐. 네 맘대로 주지 말고."
형이 날 보며 놀렸다. 고슴도치는 형에게 가시를 세우지 않았다. 심지어 형이 손을 내밀면 손을 핥기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번 게임도 형이 이길 것 같았다.
휴일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영화 보러 간다고 형이랑 놀라고 하면서 나갔다. 어떻게 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형은 친구랑 만나기로 했다며 나가 버렸다. 나만 덜렁 혼자 남았다.
'도로시랑 나만 둘이 남았네?'
날 싫어하는 도로시를 혼내주기로 했다.
"공원 숲에 보내 줄 테니 거기서 살아! 좀 춥긴 할 거야."
나는 도로시의 집을 들고 일어서려고 했다. 순간 도로시 집을 바닥에 툭 떨어뜨려 버렸다. 그때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로시 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유민아! 내 말을 들어봐."
너무 놀란 나머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형! 숨어서 장난치는 거지? 내가 속을 줄 알아."
"나 도로시야. 너에게 급히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도로시라고. 고슴도치가 어떻게 말을 해?"
"난 신비한 숲에서 온 고슴도치야."
"신비한 숲? 게임 말하는 거야?"
"형이 말 안했구나. 이건 비밀인데 신비한 숲은 정말 있어. 게임은 신비한 숲을 보고 만든 것이야.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동물을 기억해달라고 만들었어. 네 형은 그곳 소년 지킴이 단원이야."
신비한 숲이 진짜 있는 곳이란다. 형이 지킴이라니 난 도로시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신비한 숲 입구 지키는 일을 하지 않았어. 동물 친구들에게 가시만 세우며 잘난 체했어. 그곳 동물 친구들이 날 싫어했지. 그래서 이곳으로 나와 버린 거야."
도로시는 숲에서 나올 때 크게 다쳤는데, 형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구슬을 도로시 입에 넣어 주었다고 했다.
"지금 형이 위험해. 신비한 숲 입구가 나 때문에 망가졌어. 형이 그곳에서 길을 잃은 동물을 보내주다가 입구에 빠져버렸나 봐. 지금 가지 않으면 형은 영영 돌아올 수 없어."
그때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봐!"
까마귀 한 마리가 창문을 계속해서 날개로 두드리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도로시를 이동 상자에 넣어 숲으로 달려갔다. 도로시가 알려준 곳에 검은색 바위가 있었다. 그 밑에는 고슴도치 한 마리가 눌러져 있었다.
"얼른 고슴도치 입에 황금구슬을 넣어줘!"
나는 도로시가 준 황금구슬을 고슴도치 입에 넣어주었다. 잠시 후 고슴도치가 기지개를 켰다. 그때였다. 고슴도치의 몸이 점점 부풀었다. 팔다리가 변하고 얼굴이 달라지더니 형이었다. 난 놀라서 까무러질 뻔 했다.
"유민아. 내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어?"
형은 내가 도와주러 왔다는 걸 알고 기뻐했다. 형이 신비한 숲속 입구를 막으려고 하다가 그만 미끄러졌다고 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이번에는 너랑 저 녀석이 날 구해줬구나!"
난 형이 자랑스러웠다. 신비한 숲 지킴이라니……. 형처럼 숲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자 내게 책을 줬다. 거기에는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동물들과 사라져가는 동물들 이야기가 가득 했다.
"이걸 다 공부하고 나서 생각해보자. 이 일은 몹시 어렵고 위험한 일이거든."
난 형이 고슴도치가 돼버린 일을 비밀로 할 거라고 했다.
"엄마에게 안 이를게."
"일러도 소용없어. 누가 네 말을 믿겠니?"
"투루투루투루! 소리치는 형 소리가 신비한 숲 입구를 울렸다. 문이 스르르 닫혔다.
형이랑 도로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도로시는 내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않았다. 형은 자꾸 도로시에게 말하는 날 보고 말했다. 도로시는 자기 구슬을 내게 줘버려서 이제 사람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도로시는 털을 내려놓고 가만히 있었다. 손을 넣어보니 도로시 몸이 매끈했다. 손가락을 물지도 않았다.
집에 온 엄마가 나랑 잘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우리 유민이가 도로시 주인이네."
"아니야. 형이랑 같이 도로시 친구가 되기로 했어."
엄마가 내게 선물상자를 주었다. 거기에는 초록이가 들어 있었다.
"이젠 어디가도 신비한 숲 게임을 할 수 있겠네요. 엄마 이건 형에게 주세요."
엄마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말했다.
"네 형이 널 주라고 하던데."
난 도로시를 쳐다봤다. 도로시의 눈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다음 날 아침 도로시의 집이 텅 비어 있었다. 내가 형을 부르자 형이 마지못해 일어났다. 형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로시가 인사도 못하고 간다고 미안하다고 전해달란다."
난 도로시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형은 숲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숲이 새벽에 내린 첫 눈에 젖어 있었다. (*)
[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품 ]
고통버스/신수나
“잘 갔다 와.”
엄마가 버스에 내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앞사람을 따라 단말기에 버스카드를 댔다. ‘삑’ 하는 소리가 높고 짧게 났다. 엄마처럼 단호하고 냉정하다.
엄마가 버스에 날 태우는 순간, 할머니를 보러 갈 꿈은 날아갔다. 우리 집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 있다. 그런데도 엄마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유명종합학원에 날 등록시켰다. 매일 엄마가 차로 학원에 데려다준다. 날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시내에서 볼일을 본다. 학원만 갔다 오면 하루해가 꼴깍 넘어간다. 하지만 견딜만하다. 엄마는 시내에 가면 피자나 햄버거 같은 거로 날 달래주니까.
엄마랑 막 집을 나서는데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외할머니가 사라졌다는 거다. 학원엔 다 갔다. 할머니를 찾으러 가는 게 먼저다. 내 입은 표정관리 중인데 주먹이 ‘앗싸’를 외쳤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버스 정류장으로 끌었다.
“나, 버스 한 번도 안 타봤는데?”
이럴 때 자신감을 보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눈과 입꼬리를 최대한 늘어뜨리고 촉촉한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본다. 그런데 괜한 연극이 아니다. 혼자 버스 타는 건 정말, 자신 없다.
“이번 기회에 한 번 타 봐. 4학년이면 혼자 버스 정도 탈 수 있을 나이야.”
엄마는 단칼에 잘랐다. 초등 4학년이면 어쩌고 하는 학습지광고는 들어봤어도, 4학년이면 혼자 버스 탈 나이라는 말은 또 처음이다.
엄마는 재빨리 버스 앱을 내 핸드폰에 깔았다. 버스 정류장 옆 편의점에서 교통카드도 한 장 샀다. 난 맨밥을 삼키는 것처럼 엄마의 설명을 꾸역꾸역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엄마, 나도 할머니 찾으러 갈래. 지금 학원이 문제야?”
난 팔을 크게 내저으며 정류장을 나오려 했다. 엄마가 내 팔을 낚아챘다.
“넌 학원가는 게 도와주는 거야. 괜히 거치적거리기만 하지. 엄만 경찰서로, 길거리로, 찾아봐야 할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이러다 나까지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나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엄마를 올려다봤다.
“네가 어린애야? 스스로 할 때도 됐잖아. 4학년이나 된 녀석이. 집 주소도 알겠다. 엄마 아빠 전화번호도 다 아는 데 뭐가 문제니?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
역시나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닌 ‘4학년’이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4학년이면 스스로 알아서 할 나이? 그럼 학원을 가고 안 가고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한창 생각 중인데, 엄마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정신 차리고 학원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엄마는 열심히 할머니 찾을 테니.”
이럴 때면 할머니가 정말 그립다. 물론 아프기 전의 할머니 말이다. 엄마가 공부 타령을 하면, 할머니는 “애들은 노는 게 공부”라며 호통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호통은커녕 “할머니!”하고 불러도 못 알아본다. 더 이상 날 ‘통통이’라고도 부르지도 않는다. 내가 어릴 때 하도 통통 뛰어다닌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었다. 애가 도대체 가만있지를 않는다고 엄마는 불만이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린애가 가만있으면 어디 아픈 거라며, 그게 다 건강한 증거라며 또 호통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할머니는 나를 ‘통통이’라고 불렀다. 그땐 그게 그렇게 듣기 싫었는데, 지금 할머니가 날 통통아, 라고 한번 불러만 준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그나저나 할머닌 도대체 어딜 가신 걸까.
버스는 내 속도 모르고 신나게 달렸다. 한참 달리던 버스가 멈춘 곳은 재래시장이었다. 버스 문이 열리자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할머니들이 우르르 올라탔다. 무슨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떠들썩했다. 할머니들은 크고 작은 보따리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언젠가 할머니 손에 끌려 시장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속에 우리 할머니도 있다면, 나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느닷없는 호통 소리가 들렸다.
“다 산 노인네처럼 어린 게 왜 그렇게 축 처져 있어. 통통아! 기운 차려! ”
나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거짓말처럼 진짜 우리 할머니가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 다가갈 틈도 없이 할머니는 어느새 내 앞으로 와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할머니가 날 알아보고, 통통이라고 불렀다.
“진짜 우리 할머니 맞아요?”
“할미면 그냥 할미지, 진짜 할미, 가짜 할미가 있더냐?”
그런데 할머니 얼굴을 보니 어딘가 달라 보인다. 생기 있다고나 할까? 참, 이럴 때가 아니다.
“할머니 여기 계시면 어떡해요? 다들 할머니 찾고 난리 났어요, 얼른 엄마한테 전화해야지,”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핸드폰을 든 내 손을 잡았다.
“걱정 마라. 할미 잘 있는 거, 다들 알고 있어”
“정말요?”
“근데 너 어디 가기에 그렇게 힘이 하나도 없냐?”
“학원요.”
“전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더니. 안 되겠다. 할머니랑 같이 가야겠다.”
“어디요?”
“놀 거리, 볼거리, 먹을거리 많은데.”
“아, 놀이동산요?”
“놀이동산보다 더 좋은데.”
그때 버스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까 지나왔던 재래시장 이름이 또 나오는 게 아닌가?
‘아까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할머니가 또 호통쳤다.
“어린 게 뭔 생각이 그리 많어. 어서 내려!”
버스에서 할머니는 냉큼 뛰어내렸다. 기억이 돌아오니 할머니의 건강도 돌아왔나 보다. 할머니는 약을 사야 한다며 시장 입구에 있는 약국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약국 안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로 가득했다. 모두 시외버스터미널처럼 여러 줄로 늘어선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약을 사기보다는 약국 앞 정류장에 서는 버스를 기다리는 거라며, 할머니는 눈을 찡긋했다. 약국에서 따듯한 차랑 음료수를 공짜로 먹을 수 있었다. 노인들로 와글와글한 약국 안은 마치 초등학교 교실 같았다.
할머니는 물약을 하나 사서 마셨다, 그리고는 약국 안을 한 바퀴 돌며 오래전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노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물약이 젊어지는 샘물이라도 되는 걸까. 약국 문을 밀고 나가는 할머니의 새우등이 쫙 펴졌다. 팔을 앞뒤로 활달하게 흔들며 할머니는 성큼성큼 앞서갔다.
널찍하고 잘 정돈된 마트와는 달리 시장은 복작복작했다. 작은 가게들이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늘어서 있었다. 가게 안은 물론 거리로도 과일이며, 채소가 쏟아질 것처럼 진열돼 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은 골목과 골목으로 거미줄처럼 이어졌다. 할머니를 따라 골목을 걷다 보면 그곳이 그곳 같아 보였다. 무슨 미로 속처럼. 파는 물건만 달랐다. 생선만 파는 거리가 쭉 나오다가, 방향을 틀면 또 옷만 파는 가게가 쭉 늘어서 있는 식이었다. 난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잡았다. 할머니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옷을 고르라고 하셨다. 난 엄마라면 촌스럽다고 절대 안 사주는 히어로 캐릭터 티셔츠를 골라 들었다. 할머니가 내 양어깨를 툭툭 쳤다. “오, 정말 멋진데!.”
어느새 난 히어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유명 브랜드라며 엄마가 억지로 입힌 범생이 재킷은 온데간데없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싶었는데, 발에는 바퀴 달린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엄마에게 졸랐지만, 위험하다며 사주지 않던 신발이었다. 난 회전목마를 탈 때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데 달라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시장 골목을 돌아 나올 때마다 할머니도 달라졌다. 허리가 펴져서 그런지 키도 커지고 점점 더 젊어졌다. 나중에는 하는 행동도 달라졌다.
“통통아, 저것 봐라. 네가 좋아하는 뻥튀기구나.”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가 좋아하는 건데요.”
할머니는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두 손으로 뻥튀기를 와작와작 입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말릴 틈도 없었다. 엿이나 강정 같은 것에 거리낌 없이 손을 뻗쳤다. 과일가게에서도 사과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먹었다. 그러면서 내 입에도 막 넣어줬다. 내가 돈이 없다고 하자 할머니는 냅다 줄행랑을 쳤다. 할머니가 뛰니 나도 덩달아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왠지 할머니는 술래잡기라도 하듯 신난 표정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가게 주인들은 못 본 건지 못 본 척하는 건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할머니가 그릇이며, 냄비며 온갖 물건을 파는 잡화점 골목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할머니가 길은 잃은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할머니를 큰 소리로 부르려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할머니가 카트를 밀고 나타났다. 내가 다가갈 틈도 없이 할머니는 카트를 씽씽 몰며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는 보이는 대로 물건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난 할머니 이상한 병에 걸린 건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이라도 엄마한테 전화해야 하지 않을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근데 이상한 건 가게 주인들 태도였다. 할머니의 가트가 다닐 수 있도록 오히려 양쪽으로 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러더니 나중엔 카트를 향해 마구 물건을 던져 주는 게 아닌가. 카트가 무슨 골대라도 되는 것처럼. 고등어가 날아가고 배추가 공중을 떠다녔다. 신기한 건 그 많은 물건을 담아도 카트는 채워지지 않았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나도 보이는 대로 카트를 향해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호박을 통째로 집어넣고, 완구점에선 로봇이며 인형을 집어 마구 던져 넣었다. 더 넣을만한 물건이 없었는지, 할머니는 훌쩍 카트에 올라탔다. 카트는 모터가 달린 것처럼 저절로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만큼 젊어진 할머니가 날 훌쩍 들어 올려 가트에 태웠다. 가트는 시장 골목을 몇 바퀴나 뺑뺑이 치기 시작했다. 어떤 놀이기구보다 빠르고 신났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시장 끝에 있는 골목을 향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주변은 틀림없는 시장이었는데 점점 단단한 흰색 벽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밝은 빛이 번쩍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천정에 주렁주렁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다. 무슨 열매인가 했는데, 손잡이였다. 그러고 보니 창문 아래 의자들이 일렬로 놓여있고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버스 안이었다. 할머니도 가트도 흔적 없이 사라진 뒤였다. 나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숨을 헐떡였다.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너 어디야?”
“엄마, 나랑 할머니랑……”
“할머닌 벌써 집에 오셔서 주무시고 계셔. 어디를 다녀오셨는지, 엄청 피곤하신가 보다. 근데 넌 도대체 어디야? 학원도 안 왔다고 하고.”
그때였다. 우리 동네 버스정류장을 알리는 버스 안내방송이 들렸다. 전화기 너머로도 그 소리가 들렸는지, 엄마가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시계를 보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내가 버스에서 잠이 들어 꿈이라도 꾼 걸까? 근데 어떻게 도로 집 앞이야?”
버스정류장에 날 내려놓은 버스는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호통 소리 같은 경적을 울리며. <끝>
[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품 ]
남자를 위한 우주비행 프로젝트/유소영
“나는 네가 상상도 못할 것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 참가했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봤어.”
넓은 스튜디오를 가득 채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지금 이 순간, 나를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대사예요. 리들리 스콧 감독, 해리슨 포드 주연.”
침착해 머큐리. 할 수 있어. 네가 어떤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프레디가 처음으로 보여준 영화였어요.”
원형 스튜디오의 중앙을 가득 채운 대형 홀로그램 화면에 프레디의 사진이 떴다. 누가 로봇 아니랄까봐, 저 로봇미소는 어째 변하질 않냐. 입꼬리만 올라간 프레디 특유의 어색한 미소는 그가 최근 돌보기 시작한 7살짜리 브라이언의 환한 웃음과 대비되어 떨떠름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 돌보기는 이제 지긋지긋해. 웃기지 않아? 그게 내가 제작된 유일한 이유인데. 하지만 그 생각만 하면 유동액이 역류할 것 같아.’
그런데 너는 아직도 그러고 있구나. 어쩌면 영원히 그래야겠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D구역 아동보호시설 아이들은 대부분 생일을 자기가 정해요. 언제인지 모르니까. 저는 프레디와 처음 만난 날이 생일이죠. 7살 생일날 밤, 프로틴 바를 하나 먹고 자려고 누워 있는데 갑자기 프레디가 그러더라구요. 우리, 나가자.”
그때 꽉 잡혔던 손목의 감각을 아직도 기억한다. 정신없이 이끌려 따라간 곳은 기숙사 옥상이었다. 프레디는 옥상 한쪽 벽에 기대 앉았다. 나도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우리 둘뿐이었다. 여기 춥고 무서워, 나는 중얼거리며 프레디 옆에 몸을 바짝 붙였다. 프레디는 대답 없이 팔에 붙은 버튼을 만지작거렸다. 별안간 깜깜하던 밤하늘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눈앞을 가득 채운 별들은 금방이라도 내게 쏟아질 듯 가까웠다. 우와! 나도 모르게 입술 새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일곱 살짜리가 볼 건 아닌데, 그래도 볼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분명 반칙이었다. 이미 영화의 첫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이상, 내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순진했던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나는 네가 상상도 못할 것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 참가했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봤어.”
프레디는 영화를 보는 내내, 거의 모든 대사를 목소리까지 바꿔 가며 따라했다. 좀 조용히 하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그 모든 기억이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던 프레디의 옆얼굴. 영화 속 안드로이드 로봇의 마지막 대사를 따라하면서, 프레디는 분명 울고 있었다. 내가 로봇의 눈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꼬맹아, 재미있었어?”
영화가 끝나자 프레디는 언제 울었냐는 듯 예의 그 쾌활하고 능글맞은 목소리로 돌아왔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미있었다, 정말로.
“너 정말 별난 애다. 보통 5분 내로 지루해하던데. 끝까지 다 본 애는 네가 처음이야.”
“나, 저기 갈래.”
아, 정말이지 일곱 살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때의 나는 방금 전까지 눈앞에 펼쳐졌던 별세계에 진짜 갈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프레디가 피식 웃었다.
“나도 가고 싶어. 우주로 갈 수만 있다면 없는 영혼이라도 팔겠다.”
“그럼, 가자.”
나는 프레디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래, 가자.”
“언제? 언제 가?”
“음….”
잠깐 말이 없던 프레디는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툭툭, 가리켜 보였다.
“여기 저장돼 있는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정말?”
“그럼.”
프레디는 우주에 가려면 알아야 할 게 많으니까, 영화를 많이 봐 둬야 해. 라고 덧붙였다. 아아, 그렇구나. 일곱 살의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우주를 꿈꿨던 건 그때부터였어요.”
대형 홀로그램 화면을 가득 채운 내 얼굴이 보였다. 프레디가 영화를 보여 줄 때마다 얼빠진 표정이라고 놀렸던, 꿈꾸는 듯한 눈동자였다.
“하지만 제 인생은 시작부터 지지리도 운이 없었죠. 하필 D구역에서, 자연출산으로 태어났어요. 그래도 여자로 태어날 가능성이 50%는 있었는데, 보시다시피 그마저도 저버렸죠. 그것도 모자라 세상에 나오자마자 길가에 버려져서 아동보호시설에 맡겨졌어요.
저도 알아요. 우주는 여자, 그것도 최고로 우수한 유전자들만 배양한 인공자궁에서 태어나는 A구역 여자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이라는 거. 하지만 기적처럼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저는 166만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어요. 이번 한 번만, 제 인생에도 행운이 찾아와 주길 바라면 안 될까요?”
다음 순간, 고막을 찢을 것 같은 함성이 장내를 울렸다. 홀로그램 화면을 가득 채운 내 이름 아래 숫자가 미친 듯이 올라가고 있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투표했다고? 나는 멍하니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 어마어마한 숫자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구 연방 시민 여러분,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석 달간 이어져 온 프로젝트가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제, 최후의 한 명을 밝힐 차례입니다. 지구연방 항공우주국 QUEEN에서 주최한 <남자를 위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최종 탑승자는,”
사회자가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자, 일제히 야유가 쏟아졌다. 그녀는 스튜디오를 훑으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제발. 제발. 제발! 1초가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 사회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행운의 주인공은 바로 D구역이 낳은 기적의 소년, 머큐리 군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그 이후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멍멍하게 울리던 함성, 번쩍이는 플래시, 내 목에 걸린 지구 모양 메달의 무게, 대형 홀로그램 화면을 꽉 채우던 실시간 리플들, 밤하늘에 수없이 아로새겨지던 네온 폭죽들, 밖으로 튀어나올 듯 거세게 뛰던 내 심장 박동, 그런 것들이 드문드문 기억날 뿐이다.
다음날 새벽, 눈뜨기가 무섭게 최신형 AVR 세트 광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AVR 콘택트렌즈와 귀 뒤에 부착하는 센서티브 패치, 웨어러블 슈트에 AVR 워치까지, 그야말로 풀세트였다. AVR 기기를 주렁주렁 차고 침대에 누워 있자니, 실험용 생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괜히 몇 번 몸을 떨었다.
광고 촬영 장소는 카페였다. AVR 시스템에 접속해 장소를 설정하고 이동 버튼을 누르자, 나는 순식간에 어느 대형 체인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이동하자마자 맨 먼저 느껴진 것은 감미로운 커피 향과 갓 구워진 빵 냄새였다. 뒤이어 은은하게 흐르는 카페 안의 음악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쿠션감이 가득한 의자는 편안했고, 노란빛이 감도는 조명은 정면으로 올려다보아도 눈이 시리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나는 자고 일어난 모양 그대로 숙소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을 텐데, 한껏 꾸미고 카페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또 다른 나는 테이블에 세팅된 초콜릿 케이크를 포크로 우아하게 떠냈다. 촉촉한 빵과 끈적이는 초콜릿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떠낸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
쌉싸름하고 달콤한 초콜릿이 혀를 싸고돌았다. 프로틴 바만 먹고 살았던 나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맛이었다. 입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한 느낌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저기, 머큐리다!”
날카로운 하이 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몰려든 내 팬클럽 회원들이 카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촬영감독의 미간이 확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죄송하지만, 촬영에 조금만 협조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저렇게까지 공손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감독은 C구역 사람인가 보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감독의 애처로운 부탁에도 불구하고, 카페에 접속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가히 폭주 상태였다. 어느새 넓은 홀을 꽉 채우며 테이블 바로 앞까지 몰려온 그녀들은 내 몸 이곳저곳을 함부로 만지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악! 아파!”
비명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아픔도 감각이라는 걸 잊고 있었어! 최신 버전 AVR답게 머리카락이 통째로 뜯기는 아픔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AVR 전원을 껐다. 짧은 삐 소리와 함께 다시 침대 시트와 주렁주렁 달린 AVR 세트들의 감촉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왠지 모를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치고 QUEEN에 도착하자마자, 공기는 180도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A구역 여자들마저 극성팬으로 만든 기적의 소년이었는데, QUEEN으로 들어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다시 D구역 머저리 남자아이가 되어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훑는 눈길들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우주로 갈 거야.
“네가 머큐리구나. 나는 이번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인 비치 박사라고 한다.”
그녀의 첫인상은 뭐랄까… A구역을 사람으로 만들면 나올 것 같은, 그야말로 ‘A구역 표준형 인간’이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탄력 있는 피부와 완벽한 몸매, 지적이면서도 단정한 인상까지. 금발 머리를 한 올도 삐져나오지 않게 틀어 올렸는데, 그 동그란 머리가 각진 은빛 유니폼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7일간 여기 머물면서 우주 비행에 필요한 훈련과 검사들을 할 거야. 그리고 7일 후 우주로 출발한다. 더 궁금한 점은?”
“아, 저기….”
“다음 일정은 기자회견이야. 이동.”
내 말은 못 들은 건지 안 들은 건지, 비치 박사는 자기 팔목에 채워진 AVR 워치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못 다한 말을 혀 밑에 꾹 눌러 씹은 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벌써 세 시간이 지났는데, 기자회견은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A구역마저 사로잡은 애교 한 번 보여 달라는 기자의 끈덕진 요구에 나는 마지못해 볼에 어색하게 바람을 넣었다. 욕이 나오려는 걸 꾹꾹 참고 억지로 웃어 보이느라 광대뼈가 아려왔다. 내가 생각한 인터뷰는 이런 게 아니었다. 아니, 다른 우주비행사들 인터뷰 영상에는 멋있고 프로페셔널한 질문들이 막 넘쳐나던데, 어? 그래서 어제 밤을 새서 예상 질문이랑 답변도 다 연습했는데. 왜, 왜 나한테는 피부 관리 비결이나 물어보고, 애교나 부리라는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 그럼 다음 질문. 자신이 QUEEN의 수석연구원이었다고 주장한 메이 박사가 공개한 영상이 오디션이 진행되는 내내 큰 이슈가 되었는데요. 머큐리 군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그게 무슨….”
“잠깐,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질문입니다. 머큐리 군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비치 박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QUEEN에서 이미 입장을 발표한 바와 같이, 문제의 영상은 논리적 근거가 1%도 없는 가십성 루머에 불과합니다. 현재 QUEEN은 이에 대한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메이 박사의 영상과 관련해 매니스트(MENIST) 또한 QUEEN 측에 의혹을 제기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QUEEN의 입장은 앞서 말한 바와 같으며, 따로 언급할 가치가 없는 사안입니다.”
기자들의 머리 위로 앞다투어 초록색 광선이 나타났다. 다들 실시간 기사 전송 중이구나.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한 번 초록색 광선이 우수수 떠올랐다. 좋아, 완벽했어.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아무도 눈치 못 챘을 거야.
나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AVR 검색 기능을 켰다. 메이 박사는 뭐고, 매니스트는 또 뭐야? 생전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D구역에는 제대로 된 미디어나 검색 장치가 하나도 없었다. 고작해야 스마트폰이니, 말 다했지 뭐. 요즘 누가 스마트폰 쓴다고.
‘메이 박사 영상’을 입력하자 사람들이 올려놓은 문제의 영상이 여기저기 떴다. 이미 모두 재생이 막힌 상태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영상 아래 달렸던 댓글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정보의 조각들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가 실험체라는 거네?”
메이 박사의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QUEEN의 최종 목적은 우주 공간에서 AVR 시스템을 구현시키는 것으로,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주는 지구와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실험체가 꼭 필요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희생당할 게 뻔한 실험체를 QUEEN의 고급인력들로 채울 수는 없었다. 실험을 진행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 또한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열린 게 ‘남자를 위한 우주비행 프로젝트’라는 거였다. 실험체도 얻고, 프로젝트에 쏟아지는 사람들의 관심에 따라 거대기업들로부터 굴러들어오는 지원금은 덤이라는 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사람들은 댓글마다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이게 진짜일까요?>
<queen에서 듯.=“” 헛소리인=“” 그냥=“” 생각에는=“” 제=“” 한다던데요?=“” 강경대응=“”>
<매니스트에서도 진상규명을 요구하던데, 뭔가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닐까요?>
맞다. 매니스트. 저건 뭐지? 나는 다시 검색어를 입력했다.
<매니스트: 여남이 평등하며 가치가 동등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 또는 그 단체.>
백과사전에서 말하는 매니스트는 간단명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훨씬 복잡한 댓글들이 가득했다.
<여남의 권리 평등은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데 웬 헛소리?>
<이론과 실제는 다르죠. 모든 직업에 여남 모두 지원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 남자가 뽑혔단 얘기 들어보셨어요? 분명히 차별은 있어요.>
<여자가 가진 특성이 현대 사회에 더 적합한 걸 어쩌란 말입니까? 남자들이 가진 거라고는 육체적 힘뿐이잖아요. 요즘 세상에 로봇이 있는데 누가 그걸 남자한테 시키겠어요?>
<그러니까 문제죠. 심지어 D구역에서조차 여아선호사상 때문에 남자가 태어나면 버리거나 낙태시킨다고 하더라구요. 최소한 아이들이 죽는 건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분 대화가 안 통하네. D구역 여자들이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는 걸 우리가 무슨 수로 막아요? 당신 매니스트죠?>
<아니, 그건 아닌데….>
한 가지 확실한 건, ‘매니스트’라는 단어는 욕이나 마찬가지였다. 너 매니스트지? 는 상대방을 꼬리 내리게 하는 마법의 주문 같았다. 아니, 그런데 매니스트고 뭐고 간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분명히 알게 된 건 많은데, 정작 중요한 의문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메이 박사 영상이 사실일까?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소설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남자, 그것도 D구역 남자니까.
“에휴, 모르겠다.”
나는 AVR 워치의 전원을 꺼 버렸다. 렌즈도 빼고, 센서티브 패치도 떼고, 종일 입고 있던 슈트도 벗어던지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메이, AVR 시스템, 실험체, QUEEN, 매니스트, 여자, 남자… 방금 전까지 봤던 낱말들이 뒤죽박죽 섞여 머리 위를 떠다녔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몰려드는 글자들을 쫓아냈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다음날 첫 번째 일정은 우주선 홍채 등록이었다. 홍채 등록은 AVR로 대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세밀한 작업이기 때문에 실제 눈동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직접 우주선으로 가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을 딴 우주선, 머큐리-17473호는 모든 점검을 마치고 발사대에 설치된 상태였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우주선을 보자 새삼 가슴이 벅찼다.
“자, 홍채가 제대로 등록됐는지 점검한다. 눈을 여기 갖다 대.”
비치 박사가 시키는 대로 홍채를 인식시키자, 육중한 우주선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없이 우주선 내부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계기판과 레버, 버튼들이 깜박이고 있었다.
“저 중앙에 있는 녹색 버튼이 출발 버튼, 그 옆에 있는 건 자동항로검색장치….”
“자동항로검색장치를 아나?”
“인공 지능에 등록된 우주 지도를 이용해서 목적지의 좌표를 찍으면 알아서 최단거리의 항로를 찾아주는 장치죠,”
“그 위에 있는 파란색 레버는?”
“수동조종레버요. 작동법도 싹 다 외웠어요. 물론 실제로 해 본 적은 없지만.”
“보통이 아니군.”
비치 박사가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 또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디서 감히….”
비치 박사가 입을 열려는 찰나, 연구원 한 명이 그녀에게로 급하게 뛰어왔다. 그녀의 말을 듣던 비치 박사가 곧 입술을 잘근거리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넌 일단 돌아가 있어.”
비치 박사는 그 말만 남긴 채 쌩하니 몸을 돌렸다. 하여튼 싸가지 없긴. 이번엔 또 뭐야? 나는 부지런히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매니스트, QUEEN 측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시위 시작?”
AVR 시스템을 켜자마자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아까 숙소로 올 때 주변에서 어른거리던 것들이 그럼 매니스트 회원들이었나 보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기사를 클릭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아뿔싸.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비치 박사가 문간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5분 내로 인터뷰실로 이동해. 긴급 기자회견이야.”
“하지만….”
“메이의 영상은 당연히 거짓말이야. 그래서 너한테 알리지도 않은 거고. 다만 지금 여론이 너무 뒤숭숭하니까 네가 나서서 불필요한 헛소문을 좀 멈추라는 뜻이야. 알겠니?”
“….”
“지금 헛소문이 돌아봤자 너한테 좋을 건 하나도 없어.”
그래. 지금 헛소문이 돌아봤자 나한테 좋을 건 하나도 없지.
나는 비치 박사의 말을 떠올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는 QUEEN과 비치 박사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매니스트 회원들은 근거 없는 루머에 휘둘리고 있어요. 당장 불법 시위를 멈춰야 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지켜보고 있던 비치 박사가 손을 들어 웅성거리는 장내를 정리했다.
“머큐리 군의 입장 표명은 이상입니다. 기자회견을 종료하기 전에, QUEEN 측에서 준비한 영상을 이 자리에서 최초로 공개하겠습니다.”
비치 박사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버튼을 눌렀다. 심드렁하게 화면을 쳐다보던 나는 영상이 재생되자마자 튕기듯 일어섰다.
“프레디!”
화면에 등장한 건 프레디의 얼굴이었다.
“안녕, 머큐리. 잘 지내고 있지? 오늘이 벌써 9월 4일이야. 네 생일 이브.”
그러고 보니 내일이 내 생일인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우리는 항상 9월 4일에서 9월 5일로 넘어가는 밤, 12시가 되면 기숙사 옥상에서 영화를 봤지.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었는데, 이번 생일에 너는 QUEEN 숙소에 있겠구나. 그곳 옥상은 어때? 보고 싶어, 머큐리.”
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기자들이 앞다투어 소감을 물었다.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너무 놀랍고 보고 싶다는 등의 말을 주워섬겼다. 기자들의 머리 위로 녹색 광선이 휙휙 지나갔다. 아마 실시간으로 ‘머큐리와 프레디, 감동적인 만남의 현장!’ 따위의 기사가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나와 프레디의 기사가 매니스트의 시위 기사를 밀어낼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비치 박사는 꽤 만족한 얼굴이었다.
“좋아.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이야. 쉬어도 좋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숙소로 이동했다. AVR 워치를 뽑아내듯 벗겨내 던져 버리고,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았다. 춥지도 않은데 몸이 덜덜 떨려왔다.
프레디와 나는, 단 한 번도 9월 4일에서 9월 5일로 넘어가는 밤 12시에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영화를 보던 날은 9월 5일에서 9월 6일로 넘어가던 밤이었다. 그 이후로는 시도 때도 없이 영화를 봤었고, 생일이 되면 내가 영화를 보여 달라고 조르긴 했지만 시간을 정해놓은 적은 없었다. 옥상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처음 영화를 보던 날, 내내 옥상에서 찬바람을 맞은 내가 지독한 감기에 걸려 몇 주를 앓았기 때문에 프레디는 그 이후로 옥상이라는 말만 나와도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프레디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9월 4일에서 9월 5일로 넘어가는 밤, 12시가 되면 기숙사 옥상에서 영화를 봤지.’
‘이번 생일에 너는 QUEEN의 숙소에 있겠구나.’
‘그곳 옥상은 어때?’
‘보고 싶어.’
순간 머릿속에 불이 번쩍, 했다. 지금이 몇 시지? 튕기듯 일어나 AVR 워치를 켜자, 11시를 가리키는 계기판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알림음이 끝나기도 전에 AVR 시스템의 전원을 껐다. A구역에서 AVR 없이 움직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실시간 위치를 노출시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살금살금 숙소를 빠져나왔다. 옥상은 여기서 61층 위. 진공관에 타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들킬 위험이 너무 높다. 나는 계단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마 이 건물이 세워진 이래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계단일 것이다. 1일 필수 운동량조차 실내 운동기구로 해결하는 A구역 사람들이 건물에 계단을 만든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하지만 D구역에서 14년을 살아온 나라면 얘기가 다르지. 나는 심호흡을 하고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각오는 했지만, 61층을 걸어 올라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계단을 오르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AVR 시스템을 껐으니 지금이 몇 시인지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최대한 빨리 도착하는 수밖에. 나는 얼얼한 다리를 이끌고 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옥상이었다. 나는 쓰러지듯 한쪽 벽에 기대앉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나 하나뿐이었다. 여기 춥고 무서워, 나는 중얼거리며 두 팔로 무릎을 감쌌다. 그 순간 내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네 살짜리가 볼 건 아닌데, 그래도 볼래?”
“프레디!”
조용히 해야지, 프레디가 속삭였다. 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프레디가 씩 웃으며 팔에 붙은 버튼을 만지작거렸다. 깜깜하던 밤하늘이 환해짐과 동시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영상에 등장한 사람은 비치 박사였다. 그리고 그녀 앞에 한 사람이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시위가 갈수록 커지고 있어. 이제는 머큐리 팬클럽까지 합세하고 있다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그럼? 대체 이것보다 큰 문제가 뭐야?” “머큐리가 우주선 조종법을 알아. D구역 남자애 주제에 건방지게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하도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줄 알고 뽑아놨더니, 내 발등을 내가 찍었어.”
“뭐? 그럼 어쩌자고?”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머큐리가 우주선 안에서 수동조종이라도 한다면 통제할 방법이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저런 걸 우주선에 태워선 안 돼.”
영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늘 밤 12시에 공개될 거야.”
프레디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다시 입을 연 건 프레디였다.
“돌아가자, 머큐리.”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프레디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방금 영상 못 봤어?”
“봤어.”
“여기 있으면 위험해. 메이 박사의 영상은 거짓말이 아냐. 저들은 애초에 널 우주선에 태울 생각이 없어! 그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널 카메라 앞에 내세워서 이용할 뿐이지, 나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나도 알아.” “그럼 돌아가자. 난 이런 곳에 너를 1초도 놔둘 수 없어.”
“아니, 나는 안 돌아가.”
“머큐리!”
프레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레디, D구역과 우주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뭐?” “둘 다 AVR 시스템이 안 통한다는 거야. 우주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곳이니까. 우주에 가는 길이 평등하지 않아서 문제였지. 그런데 이렇게 기회가 왔잖아. 이제 와서 스스로 이걸 포기하라고?”
“머큐리, 우주에 가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니, 내가 더 간절할지도 모르지. 너는 7년 동안 간직한 꿈이지만 나는 59년이니까.”
프레디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머큐리, 지금 네가 우주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0%에 수렴해.”
“0%에 수렴한다는 말은 0%는 아니라는 말이네. 생각보다 희망적인데?”
“머큐리!”
“내가 우주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0%에 수렴한다면, 내가 지구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그냥 0%야. 왜 아직도 그걸 몰라?”
“뭐?”
“네가 영원히 아이 돌보기 로봇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나 또한 영원히 D구역 남자니까. 지구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가 있어?”
“….”
“아주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난 그걸 택하고 싶어.”
다시,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건 프레디였다.
“머큐리, 마지막으로 물을게. 정말 나랑 같이 가지 않을 거야? 나를 여기 데려다 준 매니스트 회원들이 우리가 돌아가는 걸 돕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어.”
“미안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럼 좋아, 머큐리. 우주에 간다 치자고. 지금 QUEEN 주위에 수십만 명이 있어. 우주선까지는 어떻게 갈 거야?”
“어차피 다 AVR 홀로그램이야. CCTV에만 안 들키면 돼. 밤이고, 나는 몸집이 작으니까 잘 숨으면 눈에 안 띌 수도 있어.”
“무모한 짓인 걸 알면서도 해보겠다는 거지, 결국은.”
프레디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럼, 네 AVR 세트를 나한테 줘.”
“뭐?” “난 인간형 로봇이니까, AVR 착용이 가능할 거야. 그럼 너 대신 내 위치가 노출되겠지. 오래는 못 버티겠지만, 시간을 조금 더 벌어줄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프레디, 너무 위험하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하면서, 나는 하지 말라는 건 반칙 아냐?”
프레디가 내 손에서 AVR 워치를 풀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어쩐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멍청히 서 있는 사이, 프레디의 손목에 내 워치가 채워졌다. 다음은 렌즈, 그 다음은 센서티브 패치, 마지막으로 내 웨어러블 슈트와 프레디의 옷까지 바뀌었다. 내가 된 프레디가, 프레디가 된 나를 보고 웃었다.
“이 마당에 부담 주긴 싫지만, 이렇게 된 이상 넌 꼭 성공해야 돼.”
“프레디….”
지금 울면 안 돼. 프레디의 기억 속에 그렇게 남으면 안 돼. 애써 웃어 보이려 노력하는데도 눈가가 자꾸 화끈거렸다. 프레디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머큐리, 그거 알아? 네가 이 프로젝트 지원하던 날 밤에 본 영화, 그게 내 저장 장치 속 마지막 영화였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프레디가 등을 돌렸다. 곧이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계단을 향해 무작정 소리쳤다. 울음 때문에 발음이 제멋대로 뭉개져 나왔다.
“프레디! 나 꼭 돌아올게! 옥상, 옥상으로 올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무조건 기다리고 있어야 돼!”
내 말이 들렸을까. 발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곧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홀로그램들이 크게 동요하며 일렁거렸다. 홀로그램들은 일제히 비행장 반대 방향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으로 달렸다.
바깥은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저기 홀로그램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고, 경비로봇들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비행장 쪽으로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목에서 쇠 맛이 나더니, 나중에는 피 맛이 났다. 머큐리-17473호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열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홍채를 인식합니다.”
정신없이 얼굴을 갖다 대자, 경쾌한 안내 음성이 울렸다.
“환영합니다! 비행사는 우주선 안으로 입장해 주십시오.”
우주선 전체가 윙윙거리며 진동했다. 계기판과 레버, 버튼에 불이 깜빡였다. 머큐리-17473호는 날아오를 준비를 마치고 비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조종간으로 다가갔다. 녹색 버튼을 누르자 추진 로켓이 굉음을 내며 떨리기 시작했다.
7살 생일날 밤, 내 앞에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반짝이던 별들이 떠올랐다. 주인공 로봇을 흉내 내던 프레디의 눈물방울이 별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꿈꾸는 듯 펼쳐졌던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 우주선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과 겹쳐졌다. 얼굴에 번진 눈물을 대충 훔쳐내고, 조종석에 앉아 벨트를 채웠다.
남자, 여자, D구역, A구역, 비치 박사, QUEEN, 그리고 나를 괴롭게 했던 모든 것들. 안녕히 계세요. 나는 이제 떠날 거예요. 우주로 갈 거예요. 장미성운의 그 오묘한 빛깔을 내 눈으로 보고, 말머리성운의 머리 위를 비행할 거예요. 별의 물결이 흐르는 파로크 바다를 항해하고, 불사라 지구의 쏟아지는 운석들 사이에서 아찔한 곡예비행도 할 거예요. 이제 막 태어나는 별을 발견하면 프레디와 내 이름을 붙여줄 거고, 주어진 운명을 다하고 사라지는 별도 말없이 지켜볼 거예요. 우주에서라면 그 모든 것이 가능하죠.
나는, 그냥 머큐리일 뿐이니까.
“가자, 머큐리.”
수동 조종 레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2166년 9월 5일 01시 06분 11초, 머큐리-17473호 발사. <끝>
[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품 ]
길 잃은 편지/ 황미주
이사온 곳은 벽돌이 빨간 4층짜리 빌라야. 집 바로 뒤에는 산이 있어. 사방이 경사라 길은 물론이고, 집도 사람도 모든 게 기울어진 것처럼 보여.
누군가는 우리 집을 가리키면서 어떻게 저런 집에서 살 수 있냐며 흉을 볼지도 몰라. 내가 봐도 그 모습이 꼭 등짐진 할머니가 비탈길 위에 서 있는 것 같아서 위태롭게 보이거든. 그런데 말이야,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아. 지구가 기울어져 있어도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아.
아빠는 다 좋은데 보는 눈이 없었다. 욕조 없는 욕실, 손바닥만한 창문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빌라. 엄마가 알았더라면 분명 말렸을 것이다.
큰방에서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간간히 새어 나왔다. 문에서 귀를 떼고 노크를 했다.
“아빠, 엄마?”
아빠는 한참 후에 나왔고, 전에 본 적이 있는 여자가 뒤따라 나왔다.
작년 이맘때 윤주와 공원에서 자전거를 탔다. 우리는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가 좁아지는 길목에서 두 자전거의 바퀴가 뒤엉켰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전거와 멀리 떨어진 곳에 엎어져 있었다. 가랑이가 얼얼했고 앞니가 조금 깨졌다.
얼마 후 아빠가 차를 끌고 데리러 왔다. 조수석에는 일로 알게 되었다는 친구, 오늘 온 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수석은 늘 내 차지였다. 아빠는 때때로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곤 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아빠의 친구에 대해 궁금해 한 적이 없다. 이사온 이후로 처음 학교에 가는 날이라서 아빠는 서둘러 채비를 끝내고 학교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등굣길 차 안에서 우리는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장맛비가 뿌릴 것이니 우산을 챙겨 나가라는 일기 예보가 흘러나왔다.
전에 살던 동네는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이고 평평하고 넓었는데 이곳은 가파르고 좁은데다가 구불구불하기까지 했다. 내려오는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고 미로를 빠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연립주택 옆에 연립주택, 어린이집을 지나 구멍가게와 세탁소, 약국을 지나 큰길, 대중목욕탕 옆의 사진관, 낮은 아파트를 지나 문방구, 그리고 교문.
아빠는 접이 우산을 쥐여 주며 작은 목소리로 우리 딸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전학생이 왔다는 소문이 복도 끝까지 퍼졌는지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보러 왔다. 누구는 창문에 누구는 뒷문에 매달렸다.
전학을 좋아하는 애들은 없겠지? ‘전학생을 위한 안내서’와 같은 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에만 갇혀 있지 않을 뿐이지 원숭이가 된 기분이야. 저희들처럼 나도 육학년일 뿐인데 신기한 동물 보듯이 대하는 이유가 뭘까. 단지 다른 동네에서 이사를 왔기 때문일까. 게다가 우스운 건 다 들리는데 마치 저희들끼리 있는 것처럼 이런저런 말로 나를 평가한다는 거야. 그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고 대꾸해 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 되면 동물이 말을 하게 되는 꼴이니까 참기로 했어.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몬스터 취급을 받았을 거야.
체육 시간에 철봉에 거꾸로 매달렸는데 얼굴이 긴 남자 아이가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어.
“너는 어떤 문제집 풀어?”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때마침 체육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었어. 나랑 친해지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조회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교탁에 나를 세워 두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전학을 왔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일까.
종례 후 구령대를 돌아 수돗가를 지났다. 멀리 보이는 교문 밖에는 학생들로 붐볐다. 운동장에서 축구부원들은 훈련을 하고, 저학년들은 정글짐 위에서 소리를 질렀다. 잡기 놀이는 생각만 해도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정문을 나서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빠는 예상대로 보이지 않았다. 혼자 잘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깨를 펴고 책가방을 고쳐 맸다. 아이들 틈에서 와플 하나를 사고 걸어 내려갔다. 낮은 아파트와 파출소를 지났다. 이만큼 오면 대중목욕탕이 나와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길을 잃었던 적이 있다. 윤주는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겁쟁이, 걱정할 것 없어. 입은 뒀다 뭐 하니?’
바람에 원피스가 펄럭였다. 한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길을 물어 보길래 모른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이쪽 동네가 처음이야.”
경찰 아저씨가 보였다.
“저분한테 물어보세요.”
종종걸음을 치다가 앞만 보고 마구 달렸다. 아저씨는 어른이다. 어른이 아이의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한참을 뛰었다. 누가 나를 불렀다. 되돌아보았더니 이용기다. 용기라는 이름은 잊을 수 없다. 이름 때문이기도 하고 나에게 어떤 문제지를 푸는지 물어왔던, 처음 따로 말을 걸어주었던 아이이기 때문이다.
“누가 잡으러 오기라도 해, 어디 가?”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집.”
“이 근처야?”
“아마도.”
용기와 가깝게 지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현대아파트에 살아.”
내심 용기가 같은 방향이라고 말하기를 바랐지만 용기는 직진, 나는 골목으로 가야 했다.
뻥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빼빼 마른 뻥튀기 장수였다. 와플을 먹은 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배가 고픈 것일까. 호주머니에는 동전 몇 개뿐이었다. 아저씨만 괜찮다고 한다면 가방이라도 팔고 싶었다.
하도 걸었더니 다리가 아팠다. 학교가 집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몰랐다. 이만큼 오르면 어린이집이 보이고 우리 집도 있어야 하는데 하나같이 처음 보는 집들뿐이었다. 둘이 한 통속이 되어 몰래 이사라도 가버린 것일까.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내가 너무 여유를 부렸던 것일까. 와플을 사먹지 말았어야 했나. 모퉁이를 돌면 집이 나올 것 같았는데 막다른 골목이었다. 회색 벽돌담은 묵묵히 서 있었다.
윤주야 길을 잃었어. 이리 가도 저리 가도 그게 그 길이야. 등굣길은 내리막이라 빠르고 쉬웠는데 말이야. 집을 못 찾진 않겠지.
너한테 말 안 한 게 있어. 작년에 자전거 사고났을 때 아빠랑 온 친구 분 있지? 그 분이 우리 집에 놀러 왔어. 네가 날 너희 집에 데리고 간 것처럼 아빠도 그런 것일까. 어른도 사람이니까 우리랑 똑같겠지, 그렇지?
너희 집에 들렀던 생각이 난다.
운동회였다. 윤주가 플래카드를 집에 두고 왔다고 해서 우리는 흰 체육복을 입은 채로 교문을 빠져 나왔다. 손을 잡고 가는 내내 윤주가 어떤 아파트에서 살고 방은 어떤 색깔로 꾸며 놓았을지 몹시 궁금했다.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 번째 집이었다. 대낮인데도 실내는 어둡고 눅눅했다. 벽을 더듬어 전기 스위치를 켠 윤주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누군가가 윤주를 불렀다. 한쪽 방구석에 누워 있던 윤주 엄마는 일어나 앉았다. 얼굴은 창백했고, 윤주와 같은 갈색 머리카락은 거의 빠진 상태였다.
윤주의 방은 따로 없었다. 그러니까 분홍색 침대도 번듯한 책상도 없었다. 나는 풀 죽은 강아지마냥 윤주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나왔다. 밖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고 활기가 넘쳤다. 윤주는 알록달록한 플래카드를 내게 들어 보였다.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스피커 소리와 함성 소리가 커졌다. 윤주는 가만히 있다가도 심장이 찌릿하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 보라고, 나도 그럴 때가 있다고 안심시켰다.
내 말만 하느라 네 얘기는 물어보지도 않았네. 운동회 이후로 네가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 이틀 연달아 결석한 날 너희 집으로 찾아갔어. 문이 닫혀 있더라. 그 다음날, 그 다음날도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갔어.
어느 날 선생님이 너희 엄마가 심장이 아파서 입원 중이시라고 했어. 그러고 나서는 온갖 소문, 너희 엄마가 심장을 이식을 받았다느니, 그렇지 못 했다느니 하는 그런 말들이 돌았어. 어떤 애들은 네가 엄마를 돌보느라 학교에 잘 나오지 못해서 내년에 오학년 애들과 한 해 더 수업을 받게 될 거라고도 말했어. 그렇게 되면 학교로 놀러 갈게. 너에게 주려고 하루도 빠짐없이 쓴 모든 편지를 들고 말이야.
앗, 빗방울이다. 일기예보가 맞았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교차하는 곳에 서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갈지 망설이고 있는데 안경을 낀 여자아이가 쏟아질 듯 뛰어내려왔다. 이삼 학년쯤으로 보였다. 윤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저기, 이 동네가 처음이야. 이 근처 어린이집이 어디에 있는 줄 알아?”
아이는 불쑥 내 손목을 끌고 앞질러 달렸다.
“저기, 보여요?”
씩씩한 아이가 손가락으로 하얀색 건물을 가리킬 때, 나는 건물 뒤쪽 너머의 빨간 벽돌, 우리 집을 찾았다. 파출소 앞에서 나를 불러 세웠던 아저씨도 어쩌면 정말로 길을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호주머니에 있던 동전 몇 개가 떠올랐다. 가려던 아이를 붙잡아서 오백 원을 건넸다. 여자아이는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이것 밖에 없어.”
부끄러웠다. 아빠는 방을 치우고, 설거지를 해 놓을 때마다 내게 용돈을 주었다.
어린이집을 지났다. 하늘은 마치 이제는 괜찮다는 듯이 큰비를 마음껏 뿌렸다. 아빠가 챙겨준 우산을 펼쳤다. 꼭대기 중의 꼭대기에 숨어 있는 우리 집은 산을 등에 지고도 꿋꿋이 서 있었다. <끝>
[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품 ]
두 번째 짝/이경옥
엄마, 이제 아파트로 이사 가는 거야?”
새벽부터 이삿짐센터에서 온 아저씨들이 짐을 싸고 있어요. 나희는 신이 나서 뛰어다니고 나희 엄마와 아빠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해요.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어요. 지금 사는 집보다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고 해서 어떤 집인지 궁금했거든요.
쨍그랑!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어요. 이삿짐을 나르던 아저씨가 나와 내 짝인 항아리를 떨어뜨린 거예요. 아파트로 이사 간다고 나희 엄마가 조금 남은 고추장을 걷어내고 깨끗하게 씻어놨거든요. 내 짝인 항아리는 산산조각 나 버렸어요.
“어머, 어떡해!”
우리를 보고 달려온 나희 엄마가 깨진 항아리 조각 앞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죄송합니다. 옮기다가 그만 손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아저씨는 연신 고개를 숙였어요.
“친정 엄마가 준 항아리인데…….”
나희 엄마는 한숨을 길게 쉬었어요.
“일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나희 아빠 말에도 나희 엄마는 깨진 항아리를 밀치고 나를 집어 햇빛에 비춰봤어요.
“이것도 금이 갔네.”
나희 엄마가 나를 살피는 동안에도 나는 온 몸이 욱신거렸어요.
“아파트에 놓을 자리도 없던데 항아리 정리 좀 해. 금이 간 건 쓸모없으니 버리고.”
나를 버리라는 나희 아빠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한참 망설이던 나희 엄마가 깨진 항아리를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어요. 나희 아빠 말대로 이대로 버려지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어요. 난 누군가를 덮어야 하는데 금이 가서 쓸모가 없어졌으니까요. 나희 엄마는 다시 한 번 나를 들어보더니 깨진 항아리 조각 위에 얹어놨어요. 나는 다른 항아리 친구들과 인사도 못한 채 대문 밖으로 나왔어요.
“나희 엄마, 이사 가우?”
“네. 할머니 건강하게 계세요.”
길 건너 언덕 위에 혼자 사시는 유모차 할머니예요. 항상 유모차를 끌며 폐지를 주우러 다녀요. 나희 엄마가 신문지를 몇 번 준 적이 있어서 나도 알아요. 할머니는 깨진 항아리 조각과 나를 빤히 쳐다봤어요.
“근디 뭘 그렇게 내 놓은 거여?”
“항아리가 깨져서 버리려고요.”
“뚜껑은 쓸 만 헌 거 같은디?”
“살짝 금이 갔어요. 제 짝도 없어서 마땅히 쓸데도 없고요.”
나희 엄마가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대답했어요.
“뚜껑은 내가 가져가도 될랑가?”
“금이 가서 못 쓸 텐데....... 필요하시면 가져가셔요.”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유모차에는 재활용 병과 신문지가 고무 밴드로 단단히 묶여 있었어요. 할머니가 나를 번쩍 들어 단단하게 여며주었어요.
“세상에 쓸모없는 게 어디 있당가. 짝이 없어도 서로 어울리는 것이 따로 있것제.”
할머니가 유모차를 힘껏 밀면서 중얼거렸어요.
할머니 집에 도착하니 마당에는 재활용 물건들이 많았어요. 신문지, 박스, 온갖 병들이 차곡차곡 한 쪽에 쌓여 있었거든요. 마당 한쪽 감나무 옆에는 작은 항아리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어요. 할머니는 나를 조심스럽게 들어 장독대로 가더니 엎어놓고 물을 부었어요. 그러자 내 몸에서 물이 방울방울 빠져나갔어요. 난 불안해졌어요. 할머니 집에서도 버려질까봐서요.
“뚜껑으로는 못 쓰것구먼. 그랴도 따로 쓸데가 있것제.”
후, 다행이에요. 할머니는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항아리만 덮다가 배를 드러내고 있으니 조금 허전했어요. 바람이 온 몸을 휘감고, 햇빛도 한꺼번에 쏟아져 눈이 부셨어요.
다음 날, 현관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나왔어요.
“다녀오마.”
대문을 밀고 나가는 할머니가 마당에 대고 인사를 했어요. 마치 나에게 인사 하는 것 같았어요.
“할머니, 집 걱정 마시고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나는 할머니 등에 대고 큰소리로 말했어요.
할머니는 매일 아침이 되면 빈 유모차를 끌고 나가 저녁이 되어서야 신문지와 박스를 가득 싣고 돌아왔어요. 그러고 늦은 저녁에 혼자서 밥을 먹었고요. 그러다 가끔씩 장독대로 다가와 길게 한숨을 쉬었어요.
할머니가 신문과 병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어요. 전화벨이 울렸어요.
“힘들쟈? 그려도 힘을 내그라. 무슨 방도가 있것제.”
할머니가 아들과 통화를 하는 소리에요. 할머니 아들이 사업에 실패해서 찾아오지도 못하고 있었거든요. 전화를 끊은 할머니의 주름살은 더 깊어보였어요.
“내 자슥도 가슴에 금이 나서 저렇게 마음을 못 잡는구먼.”
할머니가 나를 쓰다듬으며 하늘을 올려다봤어요. 그걸 보니 내 가슴도 먹먹해졌어요.
“아이구!”
이튿날 할머니가 현관문을 나오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어요.
“누구 없어요? 할머니가 다쳤어요!”
나는 깜짝 놀라 크게 소리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요. 한참 동안 앉아 있던 할머니가 벽을 짚고 한 발짝씩 걸어 다시 방으로 들어갔어요. 나는 걱정이 되었어요. 저러다 못 일어나실까 봐요.
오후가 되자 할머니는 절뚝거리며 유모차를 끌고 나가서 평상시보다 더 늦게 돌아왔어요.
“하나, 둘, 셋.......이렇게라도 도움이 될랑가 모르것구먼.”
빈 유모차를 끌고 온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세고 있었어요. 아들에게 보내려나 봐요. 돈을 세는 할머니 얼굴이 환했거든요.
감나무 잎이 주홍빛으로 물들었어요. 바람까지 몹시 심하게 불던 날, 금이 간 내 몸 위로 비가 쏟아졌어요. 그런데 빗물이 톡톡 떨어진 곳에 어디선가 작은 씨앗이 날아왔어요.
“아이, 추워!”
아직 빗물이 남아 있어서인지 오들오들 떨었어요. 나는 씨앗을 꼭 끌어안았어요. 씨앗도 나에게 살짝 기대었고요. 나는 갈라진 틈으로 씨앗이 빠져나갈까 봐 몸을 바짝 움츠렸어요. 그 모습을 봤는지 감나무가 잎을 떨어뜨려 씨앗을 덮어주었어요. 감잎 덕분에 씨앗은 바람을 피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다 모래가 날아들었어요. 내 몸은 점점 무거워졌지만 씨앗의 숨소리는 점점 편안해졌어요.
“쉴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씨앗은 나에게 소곤거리더니 잠이 들었어요. 나는 찬바람을 막아주려고 온 몸에 힘을 주었어요.
“어, 그랴. 괜찮다. 걱정허지 말그라.”
할머니 목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어요. 또 할머니 아들한테 전화가 온 거 같아요. 할머니는 바보예요. 아픈 데도 괜찮다고 말해요. 넘어진 뒤로 할머니는 절뚝거리며 걷는 데도요.
갑자기 찬바람이 씽 불어왔어요. 감잎이 덮어주긴 했어도 점점 떨어지는 기온 때문에 덜덜 떨려 왔어요. 오늘은 하늘에 구름까지 가득했어요. 삐그덕, 문 여는 소리와 함께 할머니가 나왔어요.
“눈이 오려나. 에구, 무릎이 또 말썽이구먼.”
바람 부는 하늘을 쳐다보던 할머니가 몸서리를 치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어요. 이제 할머니는 밖에 잘 나오지 않아요. 예전처럼 할머니가 환하게 웃는 모습도 볼 수가 없어요.
다음 날 온 세상에 하얀 눈이 왔어요. 감잎으로 뒤덮인 내 몸에도 하얀 눈이 쌓였어요. 감나무에는 빨간 홍시 한 개만 바람에 힘없이 흔들렸고요.
“할머니, 눈이 왔어요. 나와 보세요.”
소리쳐 불렀지만 방에서는 할머니 기침 소리만 들려왔어요. 겨울이 깊어갈수록 할머니는 나오지 않고 마당에는 차가운 바람만 머물다 갔어요.
그러다 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었어요. 내 몸이 자꾸만 간질거렸어요. 내 몸 구석에서 뭔가 꿈틀거렸거든요. 나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어요.
“아, 따뜻해!”
난 깜짝 놀랐어요. 연두 빛 새싹이 내 몸에서 쑥 나왔거든요.
“넌 누구야?”
“민들레에요.”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뚜껑님이 절 안아주었잖아요. 감잎은 이불이 되었고요, 모래는 나를 날아가지 않게 단단히 여며주었어요. 뚜껑님 몸에 금이 가 있어서 내가 살 수 있었어요. 물이 잘 빠져서 썩지 않았거든요.”
나는 어리둥절했어요. 새싹이 틀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오후가 되자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나왔어요. 겨우내 할머니 얼굴이 핼쑥해졌어요. 그걸 보니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나를 보자 눈을 크게 뜨고 장독대로 빠르게 왔어요. 그러면서 함박 웃었어요. 얼마 만에 보는 웃음인지 모르겠어요.
“겨우내 씨앗을 품느라 애썼구먼. 그려, 혀야 헐 일이 정해진 것은 아니제. 항아리는 깨졌어도 두 번째 짝은 꽃이구먼. 우리 준석이도 너처럼 다른 일을 찾것제.”
할머니는 몇 번이고 나를 쓰다듬었어요.
“노랑꽃이 이쁘구먼.”
할머니가 내 옆에서 오랫동안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어요. <끝>
[ 2018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품 ]
고슴도치를 부탁해 /유혜진
아파트 현관문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나는 점퍼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아파트 게시판으로 갔다. 전단지들이 만국기처럼 펄럭인다. 아파트 입구에서 혁기가 나에게 소리쳤다.
“한지윤! 너 게시판에 낙서하는 거 내가 다 봤어.”
“낙서 아냐. 고슴도치 찾으려는 거야!”
“고슴도치!”
혁기가 쏜살같이 달려와서 내가 쓴 글을 읽었다.
“고슴도치는 한 마리뿐이야, 나머지 고슴도치가 있는 곳을 알려 줘? 이게 다 뭐야?”
“나 무지 바빠. 너랑 얘기할 시간 없어.”
아파트 뒤에 있는 게시판 쪽으로 뛰자 혁기가 뒤따라왔다. 말해줄때까지 계속 따라올 모양이다. 차라리 빨리 말하는 것이 낫겠다.
“금요일 밤에 베란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야. 나가 봤더니 고슴도치가 고구마 상자 안에 있는 거 있지. 고구마를 이렇게 오도독, 오도독 먹고 있었어. 진짜 신기하지!”
내가 고슴도치 흉내를 내자 혁기도 살짝 이를 드러내며 따라했다.
“고슴도치가 어떻게 집에 들어온 거야?”
“내 생각에는 분리수거 할 때, 재활용가방 안으로 들어 온 거 같아. 가방에 구멍이 났었거든, 거기로 들어온 거 같아.”
혁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고슴도치 찾아가라고 게시판에 전단지를 붙였어. 그런데 오늘, 집 앞에 이만한 고슴도치집이 있는 거야! 고일, 고이를 부탁한다는 편지랑 같이 말이야. 고슴도치가 두 마리라고 적혀 있는데 우리 집에는 한 마리밖에 없어.”
“고일, 고이? 우리 형은 고3인데.”
혁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을 했다.
“갑자기 고3이 왜 나와. 아무튼 고슴도치를 찾으려고 게시판에 글을 남기는 거야. 주인이 글을 보면 고슴도치가 있는 곳을 알려 줄 거야.”
“고슴도치를 버린 주인이 그런 걸 알려 줄까? 모른 척 할 것 같은데. 그리고 고슴도치가 인형도 아니고, 벌써 다른 곳으로 도망쳤지. 그러지 말고, 우리가 찾아보자. 놀이터부터 찾자.”
혁기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혁기가 먼저 놀이터를 향해 달렸다. 나는 지기 싫어 혁기를 앞질렀다. 우리는 나뭇가지를 들고 놀이터 모래바닥을 헤집으며 고슴도치를 찾았다.
“고이야, 어디 있니?”
“권혁기! 고슴도치가 고이인지, 고일인지 모르잖아. 이름을 틀리게 부르면 고슴도치가 짜증나서 도망갈 거야.”
혁기는 코를 훌쩍 마시더니, 다시 고슴도치를 찾았다.
“고일인지, 고이인지 얼른 나와. 우리가 구해줄 게!”
“너희 고슴도치 잃어버렸어?”
놀이터 앞을 지나가던 지오가 달려왔다. 혁기, 지오, 나는 같은 반이다. 혁기랑은 친한 편이지만 지오는 좀 불편하다. 지오 아빠가 기중기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후부터 지오는 웃지 않는다. 수업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웃지 않는다.
분리수거를 마치고 나오다가 부딪쳤을 때도 지오는 인사도 없이 갔다.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지오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런 지오가 오늘은 먼저 말을 걸었다.
“근데 우리가 고슴도치 찾는 거 어떻게 알았어?”
혁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 그게, 고일, 고이가 고슴도치 이름 같아서. 지금 그게 중요해. 고슴도치를 잃어버리면 어떡해. 바보 같이!”
지오가 소리를 질렀다. 마치 내가 고슴도치를 잃어버린 것처럼 째려봤다.
“누가 바보야! 내가 잃어버린 거 아니거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도 지오를 흘겨봤다. 혁기가 고슴도치 이야기를 마치 자기 일처럼 말했다.
“가방에 구멍이 났었다고! 그럼 이런 곳에서 찾으면 안 돼. 고슴도치는 밝은 곳을 싫어해. 숨을 데가 많은 화단을 찾아 봐야지. 으, 답답해.”
지오가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난 척에 슬슬 짜증이 난다.
“네가 고슴도치 박사냐! 고슴도치 키워 봤어? 내가 찾을 테니까, 상관 말고 가.”
“한지윤, 네가 뭔데 가라마라야! 고슴도치 주인도 아니면서.”
지오가 양손으로 허리를 잡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찾아서 키울 거니까 내가 주인이다! 엄마가 주인 나타나지 않으면 키워도 된다고 했어.”
“그런 게 어디 있어! 찾는 사람이 주인이지.”
지오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나를 보았다. 속이 부글거린다.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하는데 혁기가 손을 들었다.
“저기 얘들아, 찾는 사람이 고슴도치 갖는 거야? 난 안 되는데, 우리 형이 고3이라 고슴도치 데려오면 싫어할 거야.”
혁기가 입을 내밀었다.
“이렇게 떠들고 있을 시간 없어. 빨리 찾자!”
지오가 나를 흘겨보고 화단으로 갔다. 혁기는 눈치를 살피더니 지오를 따라갔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둘을 째려보았다. 찬바람이 옷 속으로 들어왔다.
‘고슴도치도 춥겠다.’
나는 지오 뒤통수를 째려보다가 화단으로 걸어갔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는 곳을 나뭇가지로 헤집어 보고, 화단 돌 사이도 살폈다. 강아지 산책을 시키던 할머니가 우리를 보며 소리쳤다.
“너희들 거기서 뭐하니? 화단 망가져! 얼른 나와.”
“고슴도치 찾아요. 누가 고슴도치를 버렸대요.”
혁기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가 서둘러 강아지를 안았다. 강아지가 낑낑거리며 벗어나려 했다.
“안 돼. 얌전히 있어. 고슴도치 가시에 찔리면 어쩌려고.”
할머니가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가족 같은 동물을 버리다니, 에이 못된 사람들. 쯧쯧.”
할머니는 강아지를 안고 지나갔다. 지오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
“왜 부러뜨려! 나무가 얼마나 아프겠냐. 말 못한다고 함부로 하고, 너도 고슴도치 버린 사람하고 똑같아.”
지오가 펄펄 뛰며 화를 낼 줄 알았는데 풀썩 주저앉았다. 혁기가 쪼르르 지오 옆에 앉았다.
“고슴도치, 죽었을 거야. 먹을 것도 없고, 추워서 얼어 죽었을 거야.”
지오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너 뭐야! 왜 그런 소릴 해. 짜증나. 고슴도치는 살아 있어!”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고슴도치가 죽었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지오가 정말 싫다.
“아, 배고파. 고슴도치도 배고프겠다. 고슴도치는 뭘 먹고 살지?”
혁기가 배를 만졌다.
“과일, 채소, 벌레, 뭐든지 잘 먹어.”
지오는 어깨를 늘어트린 채 대답했다. 혁기가 눈을 반짝이며 지오와 나를 보았다.
“벌레? 지하 주차장에 많던데. 내가 어제 봤어. 모기도 있더라.”
“진짜 벌레가 있어?”
“응, 우리 형도 같이 봤어. 지하주차장이 따뜻해서 벌레가 살아 있는 거래.”
지오 눈이 커졌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지하주차장은 컴컴해서 고슴도치가 좋아하는 곳이야. 벌레까지 있다면 분명히 거기 갔을 거야.”
지오가 벌떡 났다. 나는 지하주차장 입구로 달렸다. 혁기와 지오도 달렸다.
“우리 고슴도치 꼭 찾자!”
혁기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나는 지오와 혁기를 보았다. 혁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오는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셋은 지하 주차장 앞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혁기를 따라 벌레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여기야. 여기 벌레가, 잉? 다 없어졌네.”
“아냐, 고슴도치가 먹은 거야! 똥이 있어. 고슴도치 똥이 있어! 아직 따뜻해.”
지오가 똥을 만지며 눈에 힘을 주었다. 혁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다. 똥을 보니 마음이 놓여.”
나도 고슴도치 똥을 보니 막 힘이 났다.
“쉬! 조용히 해. 고슴도치는 귀가 밝단 말이야. 어서 찾아보자. 도망갈지 모르니까 조용히 다녀.”
잘난 척 하는 지오가 얄밉지만 고슴도치를 위해서 나는 까치발을 들었다. 지오는 주차장 벽을 따라 걸으며 고슴도치를 찾았다. 혁기는 아예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는지 애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며 차 밑을 보았다.
“애들아, 여기 있어! 차 밑에…….”
혁기가 속삭였다. 나는 엎드려서 차 밑을 보았다. 지오가 내 옆에 엎드렸다. 고슴도치가 발을 꼬무락거리며 자고 있다.
“아!”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근데, 고일일까? 고이일까?”
내가 묻자, 혁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형은 고3인데.”
“너 왜 자꾸 고3, 고3하는 거야. 오빠 있다고 자랑하는 거냐?”
“자랑하는 거 아냐. 우리 형이 얼마나 무서운데. 내가 조금만 떠들어도 꼭 고슴도치처럼 머리카락을 이렇게 세우고는 막 혼낸단 말이야.”
혁기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뿔처럼 세웠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실룩거렸다. 꼭 뿔난 금붕어 같다.
“크하하하!”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지오도 웃었다. 우리 웃음소리에 고슴도치가 꿈틀거렸다. 우리는 동시에 입을 가렸다. 고슴도치가 뒤척거리다 다시 잠이 들었다. 커다란 음악소리와 함께 자동차가 들어왔다. 고슴도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시를 빳빳하게 세웠다.
“쉭, 쉭쉭, 쉭.”
고슴도치가 뒷걸음질 쳤다.
“어떡해? 고슴도치 화난 것 같아.”
“아냐, 겁나서 그런 거야. 모두 가만히 있어.”
고슴도치는 가시를 빳빳이 세우고, 뒤쪽으로 도망쳤다. 혁기가 발소리를 내며 차 뒤로 달렸다. 혁기 발소리에 고슴도치가 앞으로 왔다. 고슴도치가 코를 벌렁거리더니 지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고슴도치는 빳빳하게 세웠던 가시를 내리고 지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지오가 손만 뻗으면 고슴도치를 잡을 수 있을 거리가 됐다. 지오가 손을 내밀자 고슴도치가 코를 실룩거렸다. 쉭쉭 소리를 내며 뒷걸음쳤다. 고슴도치가 도망칠 것 같아 내가 얼른 손을 뻗었다.
“아, 따가워.”
가시에 손을 웅크렸다. 고슴도치가 자동차 밖으로 도망쳤다.
“고이야!”
지오가 고슴도치를 쫓아 뛰었다. 그때, 자동차가 고슴도치 쪽으로 왔다. 자동차 빛에 고슴도치가 멈춰 섰다.
“고슴도치야 달려!”
내가 아무리 소리쳐도 고슴도치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때, 지오가 고슴도치 쪽으로 몸을 던졌다.
“지오야, 안 돼!”
혁기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운전사에게 멈추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만 휘저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끼익!”
자동차가 멈췄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야, 그렇게 나오면 어떡해.”
지오가 일어나자 운전사가 화를 내며 지나갔다.
“너 왜 그랬어! 큰일 날 뻔 했잖아. 죽을 뻔 했다고.”
나는 지오에게 달려갔다.
“네가 갑자기 잡으려고 하니까 고이가 도망친 거야. 우리 고이 죽을 뻔했잖아.”
고슴도치를 잡은 지오 손이 떨렸다.
‘고이? 우리 고이.’
머릿속에서 지오 말과 행동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저기, 너 고슴…….”
빙그레 웃으며 고슴도치를 쓰다듬는 지오를 보며 나는 말을 꿀꺽 삼켰다.
“정말 다행이야. 지오 대단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혁기가 벽을 잡고 걸어오며 말했다.
“지오야, 고슴도치 가시 따갑던데 어떻게 잡은 거야?”
“이렇게 코를 살짝 잡으면 고슴도치가 가시를 내려.”
지오가 고슴도치 코를 잡으며 살며시 웃었다.
“저기, 고슴도치 지오가 구했으니까 지오가 키우는 거야?”
혁기가 지오와 나를 보며 말했다. 지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고슴도치가 지오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지오는 고슴도치를 꼭 안았다.
‘저렇게 안으면 가시 때문에 배가 따가울 텐데. 많이 아플 텐데.’
나는 가만히 지오를 보았다. 지오 이마에 옅은 주름이 잡히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지오가 나에게 고슴도치를 건넸다.
“한지윤, 고슴도치를 부탁해.”
“정말? 내가 키워도 돼?”
나는 조심스럽게 고슴도치를 받았다.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웠다. 따끔했지만 나는 참아냈다. 지오가 가르쳐준 대로 코를 잡았다. 고슴도치가 뻣뻣한 가시를 축 내려뜨렸다. 나는 가시 결을 따라 쓰다듬었다. 지오가 배를 쓰다듬으며 고슴도치를 보았다. 혁기가 몸을 숙여 고슴도치와 눈을 맞췄다.
“나도 고슴도치 키우고 싶다. 우리 형이 고3이라 힘들겠지.”
“고슴도치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놀러와. 우리가 같이 고슴도치를 구했잖아.”
혁기가 제자리에 펄쩍 뒤며 웃었다. 지오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지오야, 고슴도치에 대해서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 봐도 되지?”
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던 고슴도치가 편안하게 누웠다. 따가우면서도 따뜻한 고슴도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