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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와 지역의 자립
- 윤형근(사단법인한살림 상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불안하던 미국 경제가 작년 9월 중순 메릴린치, 리먼브라더스 등 연이은 투자은행의 파산으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기축통화의 나라 미국의 경제위기는 급속하게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경제 위기 혹은 대공황
1929년 대공황 때처럼 앉아서 가만히 당하지 않겠다며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각국 정부는 발 빠른 공조를 통해 1조 달러를 넘는 구제금융을 쏟아 붇기로 했고, 지난 11월 중국에서는 4조 위안(800조 원)에 이르는 경기부양책을 발표했고, 그 후에도 나라별로 또는 국제 공조를 통해 전 세계가 수많은 대응책들을 토해내며 발 빠르게 위기를 진화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해 보이지만은 않다. 10년 전 아시아 금융위기를 예언했던 뉴욕대학 루비니 교수가 예측한 시나리오, 즉 주택시장 침체 - 서브프라임 모지기(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손실 확대 - 신용카드, 자동차 할부, 대출 등 소비자 신용 부실 - 채권보증업체 신용등급 하향 조정 - 상업용 부동산시장 붕괴 - 전국 대형 은행 파산 - 금융시장 부실 확대의 시나리오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주가가 급락하고 자동차 산업이 바닥을 기고, 금융위기가 이미 실물경제로 전이되어 가고 있다. 공황에 접어든 것이냐, 아니냐 논란은 있지만, 대공황이라는 유령이 우리 앞으로 다가서며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원인은 겉보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 경제가 고용과 소득이 아닌 기축통화인 달러의 발행(부채)에 기초한 소비로 지탱되어 왔다는 데 있었다. 즉,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고용을 창출하여 소득을 향상시키는 <소득향상 - 예금 - 대출 - 투자>의 선순환 구조가 아니라 <투기 - 버블 - 소비>란 악순환의 버블 경제가 미국경제의 본질이었다는 데 있다.
그 미국의 버블 붕괴가 투자은행 파산을 계기로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1980년대 이후 경제를 ‘금융자본주의’라고 부르듯이 ‘경제의 금융화’와 ‘금융의 세계화’로 인한 것이었다.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금융의 비중은 팽창하고 제조업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금융의 세계화는 각종 파생상품, 투기자본 등을 양상하고 그들이 도박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면서 위험을 분산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세계화해 왔다. 현재 한해 이루어지는 실물거래가 12조 달러인데, 금융거래는 하루 3.2조 달러에 이른다. 실물의 100배에 이르는 금융거래, 숫자상의 허수거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토빈세 등 자본의 국경 이동에 대한 규제를 주장하는 일부 의견이 있었지만, 자본의 이동(혹은 농간?)에 대한 어떤 제재도, 시장의 자기 조정 능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달러의 기축통화에 대한 방어체계로 ‘유로’라는 화폐를 만든 EU조차도 속절없이 위기에 빠져들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 일본도 이 위기에서 자유롭지만은 않은 것 같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경제, 대외의존도가 일본보다 두 배 이상 높은 한국경제는 위기에 전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달러의 가치 등락과 무관하게 위기가 본격화한 9월 이후 한국의 외환시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국가 개입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변동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2008년 들어 시작된 경상수지 적자, 2007년 이후 외국인 주식 순매도와 달러화 환전 송금, 환투기 세력 개입 등으로 초래된 양상이다.
외환위기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외국인들에게 완전 개방된 국내 상업은행들은 자금 중개 기능보다 2003년 신용카드 대출, 2006년 주택담보 대출, 보험이나 펀드 판매를 통한 수수료 수익 등 수익 위주의 경영에 목을 매었다. 그렇게 마련된 수익은 투자로 선순환 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외국인 주주들에게 현금 배당 되었다.
자본시장 개방으로 한국의 주식시장은 이미 2004년 멕시코와 엇비슷한 40%의 외국인 지분률을 돌파하였다. 그런데 2007년 6월 서브프라임 부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에서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위기가 본격화되면서 대규모 주식 매도는 더 규모가 커졌고, 결국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정부의 의도적인 연기금 투자가 주가지수를 떠받쳐 현재 1000~1200선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 주가가 폭락해 주가가 지금보다 반 토막, 최고점의 1/4 수준이 될지 알 수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던 수출 또한 급감하고 있다. 전년 동월 대비 2008년 11월에는 18.3%, 12월에는 17.4% 마이너스를 기록하더니 지난 1월에는 33% 이상 급락해 버렸다. 수입마저 급감하여 10월 이후 흑자 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2009년 들어서 1월에만 경제수지가 26억 달러에 달했다. 747정책을 자신있게 내놓던 정부부처에서조차 수출도, 전체 성장률도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외국 기관들에서는 최대 5% 가까운 최악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11월 중순 한 중형 건설사가 사실상 부도 처리되면서 정부가 우리 경제의 마지막 버팀목으로 삼던 토목건설 산업마저 줄 도산이 우려되고 있다. 정부가 4대강 정비사업, 부동산 규제 철폐, 감세 등 대운하 포석, 투기 조장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건설경기 진작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상황이 녹록치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외환위기 때만 해도 우리 내부의 구조조정만으로(물론 피눈물의 과정이기는 했지만) 수출이라는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의 수출상대국의 상황은 건실했다. 하지만 이번 위기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이나 중국, 유럽 등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수출상대국에 더 큰 위기의 상황이기에 문제를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1월의 20일 동안 자동차수출은 유럽에서 84%, 미국에서 50%가 줄었다. 중국에 대한 수출도 30% 이상 감소해 버렸다. 이런 정황은 이번 위기가 IMF위기와 달리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양심적인 전문가들이 나서서 내수가 중요하다고 하는 건데, 우리 정부는 여전히 ‘대공황과 뉴딜’ 그리고 ‘녹색성장’이라는 허깨비 이미지를 통해 토목건설에 올인 하려고만 한다. (오늘의 위기가 1929년 대공황의 상황과 다르고, 또 당시 루즈벨트의 뉴딜도 알려진 것과 달리 토건보다 법 제도 등의 정비를 통해 거품 경제를 방지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회 서비스의 확대를 기본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토목건설에 대한 올인은 넌센스다. 토목건설에 녹색의 수사를 붙이는 것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처사라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오히려 일부 경제학자들은 내수 진작에 힘을 써야 할 곳은 진짜 녹색이라 할 수 있는 농업과 신재생에너지를 든다. 이런 형편인데도 한편에서 대통령은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어쨌든 세계경제는 물론이고 한국경제도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든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위기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금융 이전에 위기는 이미 다른 차원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2008년 들어서면서 오일피크에 대한 우려와 투기자본의 농간으로 배럴당 60달러 전후 하던 석유가 150달러 가까이 치솟았다. (이 과정에서 기후 변화로 인한 인류를 포함한 생명계의 절멸을 경고하면서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터져 나왔다.)
에너지 위기와 맞물려 식량 위기도 극에 달했다. 2006년 중반부터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한 국제 곡물가가 2007년 말을 지나 2008년 들어서면서 연일 기록을 경신하는 폭등세가 이어진 것이었다. 국제 선물시장에서 최근 2년 동안 옥수수는 132.9%, 대두는 151.1%, 밀은 182.9% 폭등하였다. 2008년 2월에는 국제 밀값이 한달새 90% 올랐고, 2월 27일에는 태국산 쌀값이 톤당 580달러에서 760달러로 하루새 30%가 폭등했다는 보고도 터져 나왔다. 카메룬, 이집트, 세네갈, 멕시코, 아이티, 필리핀, 타이, 인도네시아에서 식품가격 폭등으로 시위와 폭동이 발생했다는 외신이 전해졌다.
식량위기의 원인은 석유 가격 폭등과 그로 인해 생산비가 증가하고 옥수수 등 곡물을 바이오연료로 전용하는 정책이 추진되면서 공급이 줄어든 때문이었다. 또한 중국, 인도 등 인구대국의 경제개발로 인한 곡물 소비량 증가, 기상 이변으로 인한 수확량 감소, 곡물 독점과 투기, 에그플레이션에 대한 수출제한 조치 등이 맞물려 있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세계적인 농업 구조조정으로 각국의 국내적 식량생산 기반이 붕괴되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 금융위기를 당한 멕시코는 세계은행과 IMF에 구제금융을 받기로 했다. 단, 그 전제조건은 자유무역 체제 편입과 농업의 구조조정이었다.
그것은 식량자급 정책을 포기하고 미국과 유럽연합의 값싼 밀과 옥수수를 수입하는 것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곡물가격이 싼 이유는 보조금 때문이다.) 자급소농은 몰락하고 미국의 이주노동자가 되었다. 나프타 체결 이후 이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쌀 생산 대국이었던 필리핀도 마찬가지 경로를 거쳤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면서 쌀 생산량의 1-4%를 의무수입하기로 한다. 그 영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쌀값이 떨어져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이어지고 결국 쌀이 부족해진다. 그 생산 부족분을 다시 수입하는 악순환을 거쳐 쌀 생산기반이 완전히 붕괴해 버린 것이다. 멕시코와 필리핀 양국 모두 이번 식량 위기로 식품가격이 폭등하자 폭동이 일어났다. 멕시코의 경우는 OECD에 가입된 국가 중 처음으로 농민들의 무장투쟁이 일어난 나라가 된 것이다.
식량위기에 취약한 국가들의 거의 대부분은 세계무역기구 가입하거나 IMF 구조조정을 받거나 FTA가 체결되면서 근대화, 산업화나 경제성장이란 명목을 바탕으로 국내 농업의 기반이 붕괴하고 자립소농이 몰락하는 길을 걸어왔다. 식량을 공급하는 농업이 상품경제에 편입되면서 환금작물로 단작화 하고, 그 판매대금으로 몇 안 되는 농산물수출국의 농산물을 사다 먹는 형편으로 변한 것이다. 종자부터 식품까지 몇몇 다국적 농식품 기업의 지배를 받으며 농업도, 농업을 담당하던 농민들도 세계경제 시스템에 편입되어버린 것이다.
각국의 농업과 농민은 다국적 농식품 기업을 위한 돈벌이 수단이 되어 있었다. 식량가격 폭등이라는 세계경제의 흔들림에 자국의 농업생산, 식량생산 기반이 붕괴된 이들 나라들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도 이득을 누리는 것은 다국적 농식품 기업들이었다.
금융도 농업의 생산기반 붕괴와 거의 유사한 경로를 걸었다. IMF 구제금융을 받으며 자본시장이 대대적으로 구조 조정되고 대외적으로 개방되면서, 한국의 은행들은 외국자본들에 의해 잠식되었다. 그로 인해 국가경제에서 금융이 담당해야 할 역할을 방기하고 주주들인 외국자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투자를 통한 고용창출 등의 은행 본래적 기능과 상관없이 신용카드 대출, 주택 담보 대출, 펀드 판매와 같은 단기적 순익만을 쫓게 된 것이다. 금융도 세계경제 시스템의 하부구조로 기능하면서 결국 외국자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외국자본들이 슬쩍 발을 빼면서 한국의 금융시장에 위기가 증폭되었다. 투자유치를 위해 무제한으로 개방한 자본시장이 금융위기 국면에서 오히려 위기를 증폭시켰던 것이다. 금융이든 농업이든 구조조정을 통해 세계시장 시스템의 하부로 편입되면서 국내에서 생산된 부는 자연스럽게 세계시장의 중심부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부의 역외 유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제3세계 사람들이 생산한 부를 기축통화 달러의 발행을 통해 이전함으로써 미국은 풍요를 구가해 왔던 것이다. 제3세계라 할 수 없지만,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환율 변동으로 국민생산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경험을 이미 외환위기 때 경험하지 않았던가.
‘서브시스턴스(subsisitence)’라는 길
해법은 단순하다. 세계경제 시스템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독립적 공간, 블록을 마련하는 것이다. 실제 기축통화 달러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유럽연합이 유로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고 경제 통합을 통해 독자적인 경제 블록을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유럽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번 경제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금융 부문이 너무 세계화되어 있고 또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로의 힘은 세질 것이 분명하다.)
이미 세계화가 국가적 이슈가 되던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일부 전문가집단에서 동아시아 경제공동체가 거론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고, 최근 경제위기 상황에서 일본과 중국, 한국의 협력이 하나의 길로 제시되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견실한 내수 시장의 확대를 거론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그 독립적 공간, 블록은 여러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유럽연합이나 동아시아처럼 권역적(region) 차원, 국가적/민족적 차원, 지역적(local) 차원, 그리고 한 가정 혹은 한 개인의 차원도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세계경제 시스템에 포획되어 있던 한 가정이나 한 개인이 그 시스템으로부터 낙오하는 순간, 어떤 나락이 기다리는지 우리는 이미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서글픈 일이지만 앞으로 우리는 또 그런 비극적 이야기를 얼마나 듣게 될까).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몇몇 나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역자치와 자립의 체계가 굳건한 이탈리아나 스페인 같은 나라들이다(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이번 위기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유를 국가 개입이 여전히 강한 곳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하기도 한다). 오히려 스웨덴 등의 북구 쪽 사회민주주의 국가들도 이번 금융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이들 나라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서브시스턴스(subsistence)가 해법이다. 자립에 기반한 생존.... 번역이 어렵지만, 세계경제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생존이 가능한 자립적 상태를 말한다.
마리아 미즈는 <힐러리에게 암소를>이란 글을 통해 서브시스턴스의 의미를 밝힌다. 인도 시골마을의 가난한 여성들이 생산수단인 소를 기르지 않는 미합중국 대통령 영부인 힐러리를 오히려 불쌍히 여긴다. 비록 가난하지만, 이윤 추구의 시장경제로부터 자유로운 그 여성들은 화폐가 없이도 매일매일 먹을 것을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다. 세계경제 시스템 덕택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는 현대인, 선진국 사람들, 우리들은 세계경제 시스템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화폐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경제위기에서도 세계경제 시스템으로부터 자립한 체계를 갖고 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식량을 자급하고 남는 것을 시장에 내다파는 농사꾼은 위기와 무관하다. 하지만 시장에 내다팔 물건만을 재배하고 그 판돈으로 식량을 사다먹는 사람은 물건값을 제대로 못 받거나 그 물건을 시장이 사주지 않을 때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카무라 히사시(中村尙司)는 자립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자급자족의 의미, 자치를 뜻하는 자기결정권의 의미, 그리고 주류의 경제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라는 의미.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세 번째, 주류의 세계경제 시스템으로부터 자립이다. 이 자립을 이룰 수 있다면, 최근의 경제 위기와 같은 상황에도 우리는 큰 위협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은 화폐 중심의 경제 시스템으로 흡수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화폐 없이도 잘 살던 사람들이 모두 화폐 시스템에 포획되어, 폴라니의 말대로 경제에 파묻힌 사회(embeded)가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 모두 어느 날 갑자기 화폐와 시장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여기서의 탈주가 바로 주류의 경제 시스템으로부터의 자립이라 할 수 있다.)
노동력, 신용, 토지의 지역화와 지역산업의 육성
주류의 세계경제 시스템으로부터 자립을 이룰 수 있는 최소 단위는 지역(local)이다.
그 최소 단위가 한 개인이나 한 가정이기는 어렵다. 인간사에서 자급자족이란 원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의존, 인간의 상호 의존이라는 관점에서도 바른 길이라 할 수 없다.
유럽공동체(EU)나 유로처럼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나 동북아 단일 통화권의 모색이라는 권역(region)의 자립, 내수경제의 진작이라는 국가적 자립이 대안으로 제시되고는 한다. 물론 그것이 나름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나 권역이 온전한 대안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도 지역이 그 근간이 되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하나로 통합되는 공간이면서 전일적 생명활동의 장인 지역. 이 지역이 자립의 최소 단위이다.
즉, 지역(region)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고 한 가정이나 개인이 아닌 지역(local)의 자립에 대안은 존재한다. 한데, 현재 우리의 지역은 한국사회의 내부 식민지로 세계경제 시스템의 가장 하단에 속해 있는 곳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지역 경제는 자립과는 전혀 거리가 먼 세계 경제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특히 생명 유지의 기본적 조건인 먹을거리로부터 시작해서 고용, 물류, 금융, 교육 등 인간이 살아가는 거의 모든 것들을 세계 경제에 일방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생명과 환경이 위기에 처하여 우리의 생존 자체를 뿌리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지역이 세계경제 시스템에 어떻게 예속되어 있는가는 대형마트의 사례를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다. 한 지역에 외부의 자본이 들어와 대형마트를 건설한다. 대대적인 사전 홍보처럼 대형마트는 물론 지역의 고용을 창출한다. 한데 실상을 살펴보면, 주요 관리직은 서울로부터 파견된 사람들이고, 많은 비정규직이 지역 사람들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진열되어 팔리고, 그 판돈의 대부분은 서울의 본사로 옮겨간다. 온전한 의미에서 지역의 노동력도, 지역의 신용도 창출되지 않는다. 또 지역의 건물과 토지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지역 외부의 사회관계에 의해 규정될 뿐이다. 경제의 기본요소인 토지, 신용, 노동력이 모두 지역 외부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지역의 부가 외부로 유출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부가 미국으로 유출되고 있는 모습의 축소판인 셈이다.
지역의 자원을 지역 밖으로 유출하는 월마트, 이마트에 대해 반대하면서 지역의 소상인을 보호하려는 운동도 지역의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경제 시스템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력, 신용, 토지의 지역화와 연결되고, 이 기초적인 틀의 확장이 지역의 자립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한국사회가 세계경제 시스템으로부터 자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역의 경제 자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역의 경제자립,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력과 신용, 더 나아가서는 토지의 지역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력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으로 돌아오는 시스템 - 지역의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해당 지역에 취업을 하고 지역의 공공기관에 지역 출신의 사람들로 채워지는 노동력의 지역화, 신용이 지역 내에서 순환되는 시스템 - 지역 내부에서 돈이 모아지고 그것이 지역의 사업에 쓰이는 신용의 지역화, 지역의 토지가 외부인의 소유가 아니라 지역의 사회관계 속에 정립되는 시스템, 즉 토지의 지역화가 바탕을 이루고 그 바탕 위에서 지역산업이 육성되어야 한다.
지역 경제자립의 관건은 지역산업의 육성에 있다. 지역산업은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에서 소비하는 산업을 말한다. 그 가장 기본을 이루는 것이 지역 순환형 에너지, 그리고 농림수산업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에너지를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 농림수산업의 생산물을 가공하고 유통하는 것도 지역산업의 근간이 된다.
에너지 자립도가 바닥인 우리의 경우, 재생에너지는 오히려 지역의 재생을 가져올 고리가 될 수 있다. 지역 내부의 고용을 창출하면서 지역의 자생적, 내발적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태양광, 풍력 등 자연에너지, 축분을 이용한 바이오가스 등 재생 에너지뿐만 아니라 유기농업의 육성은 그 자체로 지역의 에너지 자립과 연관된다.
먹을거리를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에서 소비하는 운동을 고리로 지역의 자립시스템의 근간을 갖춰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귀농운동에 대한 지원, 다종다양한 마을공동체 운동, 각종 지역 살리기 운동, 농지 트러스트 운동, 유기농업운동, 로컬푸드 운동으로 통칭되는 지역 내 생산 식품 가공 유통 소비 운동, 학교급식, 단체급식, 군대급식, 병원급식 등 급식운동, 생협운동, 직거래운동, 시민자본의 형성, 농민시장, 지역자급운동, 먹을거리 정의와 복지 운동, 지역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는 지역통화 시스템 등……
이 지역산업의 육성은 노동력과 신용의 지역화와도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지역의 신용기관을 통해 지역에서 생산된 부가 지역에서 순환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지역화의 근간에는 사회적 자본이라는 ‘신뢰’가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음은 나카무라 히사시가 제시하고 있는 지역농업 재건을 통한 지역의 경제자립 구상 10가지이다. ① 주요 지역자원을 탈상품화하고 주민들이 공동관리한다. ② 지역에서 토지를 널리 공동이용하면서 영농을 다각화한다. ③ 다양하고 다층적인 협업 조직을 만들어 지역주민에 의한 집단영농의 고도화를 추진한다. ④ 갈이(耕種)농업과 과수, 축산, 수산, 임업, 양조 등을 조합한 지역 복합농업을 형성하는 데 힘쓴다. ⑤ 화학비료나 약제에 의존하지 않는 유기농업을 중심으로 하면서 바이오 가스나 소규모 배수정화시설을 통해 자원을 리사이클 한다. ⑥ 상품화 되지 않은 노동력을 자주관리 방식으로 조직하여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경영에 참여한다. ⑦ 농업관련 산업을 모체로 한 농촌공업을 진흥한다. ⑧ 잉여농산물의 판매나 소비재의 구입은 지역시장이나 인근 지역과 비시장적인 장기협정을 체결하여 시장 메커니즘을 보완한다. ⑨ 신용조합을 발전시켜 경제활동에 필요한 자금의 지역 내 순환을 촉진한다. ⑩ 지역주민들이 다른 지역사람들과 인격적인 교류에 참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한다.
재생에너지와 농업을 통한 지역산업의 육성은 경제위기에 대한 당장의 대안이면서 동시에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안이기도 하다. 내수를 진작할 수 있는 길이며, 수많은 고용 창출이 가능한 길이며, 또 대외의존적인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호혜의 지역, 지역의 대안
교환을 중심으로 한 시장질서가 초래한 경제 위기를 대개 국가 시스템을 강화하여 시장을 견제하는 방식으로 풀려는 이론과 시도들이 대개 대안의 주류를 이룬다. 아마도 이것이 경제위기에 대한 케인즈식 해법일 것이며, 사회민주주의 내지는 북구형 복지국가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금으로 움직이는 국가의 재분배 기능을 강화하여 대규모 토목건설로 경기를 부양하고 투기를 막는 법과 제도를 정비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서비스를 확충하는 방법을 말한다.
하지만 이 해법도 자립적인 지역에 기반 했을 때만 유의미해질 수 있다. 여기서 지역은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호혜의 관계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로 도와가며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상호부조의 자구적 조합들의 그물이 중요하다. 상호부조와 자구에 근거할 때 노동력이든 신용이든 토지든 그것이 지역화 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폴라니의 말을 빌자면, 인간의 경제는 희소성 있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교환이나 재분배보다 인간의 삶과 직접 연관된 살림살이로서의 호혜에 기반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어떠한 경제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호혜의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지역에 활력을 주고 지역을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드는 길.... 농업 생산과 소비, 먹을거리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를 고리로 지역의 자립 시스템의 근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지역농업, 농림수산업을 근간으로 하는 생태적 물질순환과 경제적 기반의 조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호혜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영성 문화적 교감, 그리고 지역의 자립과 자치를 통한 공공영역의 창조가 통합되는 장으로서 지역에 대한 통합적 전망일 것이다. 교육, 문화, 복지, 생태, 환경, 경제, 의료, 자치, 공동체를 포괄하는 지역…… 사회적 협동의 호혜 관계를 바탕으로 한 지역사회의 재구성, 그리고 그것을 통한 전일적 삶의 창조..... 여기에 위기 극복의 길이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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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와의 소통, 이동수 엮음, 이매진, 2008
칼 폴라니, 사람의 살림살이1,2, 박현수 역, 풀빛, 1998
-호혜적 지역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워크샵에서 발췌 -
■ 일시 : 2009. 5. 21(목) 오후 2시 ~ 5. 22(금) 오전 10시
■ 장소 : 대전시 계룡산 동학산 <동학 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