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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풍경
음력 칠월 초순 조금 때의 밤 썰물 되어 바닥이 드러난 바다는 생동의 활기가 넘친다. 잘박거리며 남아있는 물속과 갯벌 깊은 곳의 무궁무진한 보물들은 생명의 호흡을 정돈한다. 수시로 영광의 탈출을 감행하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물때와 접선을 노리고 있는 무리도 있다. 짱구는 마당 평상 모기장 안에서 배시시 미소 짓는 입가에 조그맣게 침을 흘리며 곤히 자는 누나를 쿡쿡 찔러 깨우고 담배 한 개비 빼어 물며 뒷방을 기웃거린다.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며 에이마이너 코드와 씨, 에프, 지, 코드를 간단하게 오르내리며 기타 줄을 뜯고 노래를 읊어대며 노닥거리고 있는 친구 미친개를 불러낸다. 한지가 너덜너덜 뜯겨나가고 푸르스름한 모기장천을 덧댄 방문을 젖히고 몸을 뺀 미친개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온다. 상체를 두세 번 좌우로 흔들더니 가벼운 걸음을 놓고 날렵하게 총총히 뛰며 간간히 팔을 흔들고 고개를 급하게 좌우로 흔들며 주위 곳곳에 시선을 던진다. 눈초리가 매섭고 예리하며 순간순간 긴장이 감도는 폼이 특이하고 가냘픈 듯 단단한 몸매가 확연히 각인되는 평범한 차림이 아니다.
약간 어정쩡한 모습의 누나는 긴 머리를 가다듬어 머리 뒤로 돌려 한곳에 모아 고무줄로 묶은 후 양동이 하나를 집어 든다. 신었던 신발을 한 곳으로 벗어두고 맨발차림으로 서슴없이 나설 때 두 사내는 굵은 철사 끝에 매단 솜방망이에 성냥을 그어대 횃불을 만든다. 밤하늘 밝히며 기다란 집게와 호미를 들고 성큼성큼 삽작문을 나선다. 매서운 모기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몸 곳곳에 물파스와 안티푸라민을 듬성듬성 바르며 갯골 따라 바다에 도착해 주위를 살핀다. 바위틈 곳곳에 박가재와 농 게의 움직임이 급하고 물이 조금씩 흐르는 곳에 짱뚱어가 이리저리 날아오르며 기선을 제압한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엎드린 박가재를 집게로 집어 양동이에 넣고 검은빛 현란한 까무락 조개를 찾아 쉴 새 없는 숨바꼭질이 이어진다. 술래를 따돌리기 위하여 밤바다 갯벌위에는 소리 없는 호흡과 거친 숨소리 철벅거리며 물 튀기는 발걸음이 분주하다. 사정없이 별 빛이 쏟아져 내리고 활활 타오르는 횃불 따라 어우러진 삶과 생명의 그림자는 신들린 춤사위를 갯벌위에 수놓는다.
숨 가쁜 무언의 사투 자연과생물 인간의 삶이 드리워진 밤바다의 풍경은 시간을 쫓아 도망가고 미처 따라가지 못한 현재의 실상이 서로의 입장을 토로한다. 나름대로 각자위치에 적응할 즈음 멀리서 푸른 파도 거품이 갯바닥을 휩쓸며 몰려 들어온다. 연회색 빛 물안개와 짙푸른 변장으로 차츰 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세 사람은 서둘러 바다를 버리고 달음질친다. 황급히 돌아가는 인간의 모습 따라 갯골의 물길은 스멀스멀 능청떨며 갯벌을 메운다. 여기저기 튀어 오르는 물고기와 서서히 입을 벌리는 조개들의 합창은 감격에 찬 승전보의 기쁨이다. 미친 듯 설레발이치며 나대는 파도의거품은 제 잘난 멋에 감히 두려움이 없다. 뭍으로 나온 세 사람 곁에는 묵직한 양동이속에 담겨있는 앙증맞은 전리품이 서로 뒤섞여 조금씩 모습을 보인다. 차마 부끄러워 뒷걸음으로 고개를 묻는가하면 복잡한 처우에 불만을 표시하는 몇몇은 당당한 자존심과 어엿한 체통을 지키며 눈을 치켜뜬다. 아직 기개가 살아있음을 표시하고 가끔 억울한 듯 입가에 희미한 거품을 토해내며 반항하는 무리는 틈틈이 양동이를 들이받는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부리나케 식사를 끝내고 짱구와 미친개는 누나를 집에 남겨둔 체 간단한 여장을 꾸려 하 인천 시외버스정류소를 향한다. 짐바리 자전거를 타고 휘파람불며 새벽공기 가르며 선문답 하는데 부스러진 얼음덩어리에 묻힌 바다 손님은 도통 대답이 없다. 버스정류소에 도착한 두 사내는 짐바리 자전거를 근처에 있는 자전거포에 맡겨두고 서울 행 첫차 타고 흥에 겨워 콧노래 부른다. 한적한 길과 버스 안을 번갈아 두리번거리고 간간히 발장단 맞추며 한껏 신났다. 서울역 앞에서 하차한 두 사람이 염천 교 쪽으로 방향을 잡아 넘어가자 벌써부터 난장에서 장사가 시작되어 오가는 사람이 많다. 언제 나왔는지 물건을 다 팔고 손바닥을 탈탈 털며 돌아서는 사람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둘은 서둘러 얼음에 재운 고무 통을 내려놓고 사방을 향하여 목청을 돋우어 소리를 친다. 자 왔어요, 왔어 인천 박가재 까무락이 왔습니다. 아직 새벽잠이 덜 깨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생생한 인천 명물 왔습니다. 가격은 주시는 대로 받는 대신 한 번에 몽땅 떨이로 사가시면 됩니다. 거기 아주머니 그쪽 아저씨 판단을 주저 하지 마십시오. 인천 짠물의 대명사 박가재와 까무락 입니다. 낙지와 농게는 그냥 덤터기로 묻어가니 와장창 수지맞는 거예요.
두 사람은 정신없이 외쳐대며 번갈아 주위사람을 둘러보는데 문득 건장한 체구에 텁석부리 수염을 한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다가선다. 고무 통을 발끝으로 툭 치며 누가 떠드는지 궁금해서 왔더니 너희들이구나 하며 빙그레 웃는다. 순간 두 사람은 멈칫 놀라며 이내 반가운 기색으로 아니 형님 이른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음 마침 시간이 나서 물건 좀 구경하러 나왔는데 마침 너희를 만나서 다행이구나. 내가 할 얘기가 있으니 어서 짐 싸서 내려가자, 자칫 시간 지나면 얼음 다 녹아 생물 맛없어지니 서둘러 내려가자. 값은 내가 섭섭지 않게 주마. 네 알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희에게 얘기할 것이 무엇입니까? 음 그건 내려가면서 얘기하고 어서 서울 역으로 가서 열차를 타자. 세 사람이 서둘러 정리를 하는 찰나 부리나케 앞을 막아서며 다가선 아주머니 한 분이 물건을 전부 살 테니 내려놓고 가라고 사정을 한다. 값도 후하게 줄 테니 전부 다 내려놓고 고무 통까지 팔고가라고 다그치니 순간 머쓱하여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눈치 빠른 아주머니는 장사수완이 대단하여 성큼 지폐 몇 장을 세어 내려놓고 고무 통을 번쩍 들어 머리에 이고 커다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잰 걸음으로 사내들 시야를 비켜나간다.
참 재미있는 풍경에 세 사람은 한바탕 웃음을 흘린 뒤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 역에서 인천 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점점 더워지는 한여름의 더위와 함께 후끈한 얘기를 지피고 간간히 익살스런 농담과 장난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달려 나간다. 텁석부리 형님이 하는 얘기인 즉은 요즈음 서해연안에 새우 잡이가 시작되었는데 의외로 어획량이 많고 돈벌이가 좋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데 일할 사람이 부족해 배 한척은 작업이 신통치 않아 여기저기 사람을 알아보고 있으니 함께 일을 해보자는 것이다. 임금은 배가 뜨기 전에 품삯의 절반을 주고 포구에 들어와서 나머지 절반을 주겠다는 조건 또한 좋아 두 사람은 흔쾌히 승낙하고 초겨울 김장철까지 일하기로 약속하였다. 승선은 열흘 후 하 인천에서 하기로 하고 세 사람은 열차에서 내려 근처 해장국집에서 선지해장국과 동동주 한 공기씩을 들이키고 헤어졌다. 짱구와 미친개는 온 세상이 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일거리가 생기고 팔러나간 물건도 손쉽게 팔려 얼마간의 돈을 선수금으로 받아 쥐니 여름 낮 이글거리는 태양도 전혀 뜨겁지 않았다.
자전거포에서 짐바리 자전거를 끌어낸 두 사람은 앞뒤에 올라 타 와지끈 목청을 틔워 삼류 유행가를 부르며 플라타너스 가로수 곁을 스쳐간다. 기다리는 누나를 위해 브라보 콘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들어선다. 두 사람의 기척을 느낀 누나는 반가운 기색에 차려놓았던 밥상위의 보자기를 걷어내고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 들어간다. 순간 두 사람은 밥은 먹었으니 국은 누나 것만 퍼오라고 한 후 싱글거리며 아이스크림을 건네준다. 짱구는 아래 춤에 간직한 지폐 몇 장을 꺼내 누나에게 보여준다. 덩달아 미친개도 지폐 몇 장을 꺼내 건네주니 누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주춤거리며 차마 받아들지 못하고 망설인다. 이 돈은 물건 팔은 것이고 우리가 고깃배를 타게 되어 미리 선수금을 받아 온 것이라고 한다. 이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누나는 앞치마에 손을 닦은 후 지폐를 받아 쥐고 한참을 들여다보는데 눈가엔 촉촉한 이슬 자욱이 배어난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누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 조그만 책상위에 세워져 있는 다정한 부부의 사진 앞에 꼬깃꼬깃한 지폐를 가지런히 놓고 한참을 들여다본다. 빛바랜 사진 속 부부는 짱구와 누나의 부모님이고 육년 전 고기잡이 나갔다 풍랑을 만나 바다와 친구 되어 떠나셨다. 고교를 막 졸업한 열아홉 누이는 장례가 모두 끝난 며칠 후 혼절하여 이틀 만에 깨어났으나 그 후로 입을 닫아버리고 세상과 얘기하는 통로를 잃어버렸다. 어려운 살림에 방파제를 벗 삼아 갯벌에서 조개와 낙지 기타 어패류를 잡아 네 살 터울 막내 짱구를 키웠다. 한 번도 얼굴에 그늘 진적 없고 항상 밝은 얼굴과 깔끔한 몸짓으로 집안을 이끌어가는 집안의 어른이 된 것이다.
동트기 전에 일어난 세 사람은 뒷산에 있는 고추밭으로 향하는 발길이 바쁘고 멧새는 놀라 풀 이슬을 던지며 날아오른다. 둥지가 걱정되는 때까치 부부는 소란스럽기 그지없고 먼 골짜기 숨어있는 뻐꾸기는 사무친 모정을 앞산 메아리와 함께 띄운다. 부지런히 몸 놀려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에 서둘러 고추밭을 매고 오이 대를 세운 후 아욱과쑥갓을 솎아 바구니에 담아 밭머리를 돌아 나온다. 숲 속에서 군인들의 작전이 있는지 여기저기 참호에 철모와 총신이 간간히 보이고 무전기를 멘 통신병이 알 수 없는 암구호로 통화를 하고 있다. 군데군데보이는 형상이 특이하여 자세히 보니 미군의 훈련에 한국군이 보조를 맞추는 작전인 것 같다. 신기한 모습을 곁눈질로 스치며 부지런히 발길을 옮긴다. 오늘 세 사람은 동 인천 배다리 양키시장에서 옷을 사기로 했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한껏 기대가 부풀은 것은 항상 치마만 고집하던 누나가 이번에 바지와 셔츠를 입기로 결단하였기에 두 사내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음이다. 항상 같이 생활하고 은연중 몸을 스치다 보니 치마 입은 누나와 가끔 무안해서 눈길을 피할 때가있었고 애매한 상황이 가끔 돌출되기 때문에 바지를 애써 권장했던 것이다.
한 걸음으로 산을 내려와 마을 어귀로 들어서는 순간 앞서 마주오던 미군 짚 차에서 잠깐 비틀거리는 느낌과 빠른 불빛이 보인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짚 차는 균형을 잃고 개울 옆 커다란 상수리나무를 들이받고 옆으로 기울며 개울 밑으로 떨어지기 일보직전에 멈춰 선다. 세 사람은 기겁을 하여 놀랐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서둘러 달려가 보니 미군장교 차림과 사병이 운전석과조수석 구석에 틀어박혀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장교는 정신이 있으나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고 사병은 기절한듯하나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을 끄집어내야 상황을 알겠는데 자칫 개울 속으로 구르면 만사가 뒤틀어지는 얄궂은 형상이다. 잠시 상황을 살핀 짱구는 경운기를 끌고 오겠다며 집으로 뛰어가고 미친개는 조심조심 장교 곁으로 다가선다. 얼굴을 마주하고 들여다보니 간신히 고개를 뒤로 돌리며 짚 차 뒤의 무전기 안테나선을 가기키는 것이다. 기다란 무전기 안테나선이 엿가락처럼 휘어져있고 사방을 살펴보니 누나가 손짓으로 공중에 지나가는 전깃줄을 가리킨다. 전깃줄은 검게 그을린 자국으로 아슬아슬하게 붙어있어 끊어지기 일보직전이다.
이건 보통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만약 전깃줄이 끊어져 늘어진다면 자칫 고압전기에 감전 되서 불고기가 될 판이라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소름이 돋아 손발이 덜덜 떨리는데 때맞추어 짱구가 급히 경운기를 끌고 와 적재함에 있는 와이어 줄을 풀어 짚 차 뒤꽁무니에 묶어 살살 잡아끄니 손쉽게 빠져나온다. 서둘러 사병과 장교를 있는 힘과 요령을 다해 조심조심 차에서 끌어낸 뒤 경운기 적재함에 눕히고 바람같이 내달려 마당 안으로 들어선다. 경운기 적재함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세 사람은 힘을 합하여 조심스럽게 들어 마당 평상위에 뉘어놓는다. 상태를 확인하니 사병은 정신이 희미하게 돌아오는 것 같고 장교는 뭐라고 얘기를 하는데 도통 알 수가 없다. 방으로 들어갔던 누나가 구급약품상자와 필기구 공책을 들고 나와 장교 머리맡에 앉아 급하게 글을 써서 보여주니 이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누나는 적어서 보여주는 짓을 몇 번하더니 대충의뜻이 서로에게 전달되었는지 잠시 침묵이 흐른다. 누나는 장교의 정강이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 소독을 하고 간단하게 약을 발라 붕대로 감는다. 윗저고리의 앞단추를 풀어 숨쉬기 편하게 해주고 사병의 이마와 얼굴을 물 적신 수건으로 가만가만 쓸어내리니 정신이 돌아와 눈을 뜨고 말없이 주위를 둘러본다.
잠시 후 누나는 미군장교의 얘기를 전해 듣고 공책에 받아 적은뒤 대충의 의사를 전달한 후 짱구를 데리고 통장님 댁으로 향한다. 전화를 걸고 오겠다는 시늉을 하고 미친개에게 군인들을 잘 지켜보고 있으라고 손짓을 한 뒤 급한 걸음으로 사라진다. 미친개는 담배 한 개비 피워 물고 평상 구석에 걸터앉는데 미군장교가 손짓 하는 곳을 바라보니 우물가가 맞는 것 같다. 얼른 물 한바가지를 떠다 건네주니 횡설수설 씨불이며 정신없이 들이킨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바가지 잡은 손을 탁치고 건들이니 사래가 들려 컥컥거리며 기침을 하곤 빙그레 웃으며 쳐다본다. 피우고 있던 담배를 입가에 들이대니 몇 모금 빨더니 담배를 달라는 시늉을 하기에 얼른 불붙여 손에 쥐어주니 또 알 수 없는 소리로 씨불이며 빙그레 웃는다. 그사이 옆의 사병도 정신이 돌아와 무슨 소리를 하는데 도통 알 길이 없어 난감한 처지인데 장교가 몇 마디 얘기를 하자 이내 안심하곤 눈을 감고 빙그레 웃는다. 잠시 후 통장님과 누나 짱구 세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서고 누나가 장교에게 다가가 공책에 글씨를 써서 보여주니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통장님이 자동차가 넘어진 곳으로 가보자고 하여 몇몇의 사람들과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미군응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고 달려온다. 이내 통장님이 손을 흔들며 신호를 하자 응급차는 마을입구에 멈춰서고 군의관인 장교가 차에서 내려 일행에게 다가온다. 감당이 안 되는 사람들은 주춤되며 뒤로 물러서고 누나가 앞으로 나서서 공책에 글씨를 적어 보여준다. 알았다고 하며 더듬거리는 말투지만 한국말을 제대로 사용한다. 통장님이 얼른 나서서 저 안쪽 집에 누워있다고 하자 사병 너 댓 명을 시켜 들것을 준비한다. 누나는 공책에 글을 적어 보여준 뒤 일행을 데리고 급하게 움직인다. 마당에 도착한 사병들은 들것에 부상당한 사람을 옮겨 황급히 사라지고 군의관은 누나 공책을 받아들고 한참을 적어 누나에게 건네준다. 뜻을 확인한 누나가 다시 적어준 글씨를 들여다보더니 본인 수첩에 받아 적고 예의바르게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한 뒤 통장님과 몇 마디 더듬거리는 얘기를 끝으로 황급히 돌아간다. 간만에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너무 순식간 싱겁게 끝나버려 모였던 몇몇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떠난다. 세 사람은 외출하기 위하여 어질어진 평상을 대충치우고 밭에서 가져온 채소를 부엌에 들여놓은 후 옷매무새를 고친다음 버스정류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동 인천에 도착한 세 사람은 일단 중국집으로 들어가 자장면 한 그릇씩 비우고 잡채 한 접시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브라보 콘을 하나씩 들고 뜨거운 햇볕을 피해 그늘을 골라 건너뛰기로 장난하며 양키시장으로 들어선다. 여기저기 짝짝이 박수를 치며 골라잡아 외치던 몇몇의 상인이 친근한 눈인사를 보낸다. 군복과 청바지가 걸려있는 곳에 발길이 멈춰서고 누나는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쌍마(리바이스)청바지허리춤을 목둘레에 대어보고 빙그레 웃는다. 마침 미 해군들이 입는 여름 반팔 군복과 하늘색 티셔츠가 곁에 있어 짱구와 미친개는 서너 벌을 골라 값을 흥정한다. 그다지 많은 액수가 아니라 누나의 청바지 한 벌을 더 구비하여 봉투에 담고 근처에 있는 자유공원으로 향한다. 공원에 올라 소나무 밑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니 가슴이 탁 트이고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오전에 벌어졌던 급작스런 일들이 조용히 가라앉고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로움에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뻥튀기를 사서 비둘기에게 적선 하고 번데기 한 봉지씩 들고 천천히 공원을 내려오는데 간간히 아는 체를 하는 청년들이 많다.
더 놀다 갔으면 좋겠으나 요즘 물때가 좋아 조개와 박가재 낙지 등이 제철만나 쏟아져 나오니 밤에 썰물이 되면 쏜살같이 바다로 나가야한다. 아쉬움을 접고 그만 돌아가기로 마음을 달래며 대신 저녁은 먹고 들어가기로 합의를 본다.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배회하는데 누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인천명물 물텀벙이 집이 보인다. 세 사람은 만장일치로 뜻을 모아 물텀벙이 집으로 들어서고 성급하게 앉아 주문을 한다. 간간히 나오는 반찬을 남김없이 다 집어먹으니 정작 어느 것이 아귀인지 모르겠다고 주인아주머니가 한바탕 호들갑스런 장난을 한다. 미친개는 바닷가에 사는 처지를 토로하며 정작 맛있고 싱싱한 것은 잡았으되 우리가 먹지 못하고 팔아야 하는 처지인데 결국 그 돈으로 이곳에 와서 먹게 되니 돌고 도는 인생이 이런 것이라고 한다. 아주머니 얼굴이 예쁘고 마음씨가 고우니 음식 맛도 좋은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여 모두 함께 한바탕 웃는다. 식당을 나선 세 사람이 버스에 오르자 뉘엿뉘엿 해는 저물고 있으며 하늘 한쪽 붉게 물들이며 펼쳐지는 노을이 장관을 이루고 시선을 집중시켜 얼굴빛마저 차츰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개울근처 도로가 말끔하게 정리되었고 산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평탄하게 바뀌어 말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상수리나무에 박혀있던 미군 짚 차가 없는 걸 보니 미군들이 차량을 견인하면서 도로를 깔끔하게 정리한 것 같다. 어둑한 골목이 환하게 빛나는 것이 이상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전기공사를 하면서 전봇대를 곳곳에 세우고 가로등을 설치해 놓았다. 축축 늘어져 흉물스럽던 전깃줄이 팽팽하게 팔 벌리고 반듯한 모습으로 달리는 모습이다. 누나도 흐뭇하여 가로등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그 밑에 서서 그림자를 살짝 드리워본다. 차츰 별빛이 자기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니 오늘밤도 어김없이 우리는 자리를 찾아 삶의 진한그림자를 저 갯벌위에 펼쳐야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이다.
어둠속 물길을 더듬으며 생물체를 찾아 쏘아보는 눈빛은 때론 살기를 느낄 만큼 예리하고 호흡마저 중단되니 그야말로 상호간 생존의 사투이다. 동화책에 나오는 조개잡이나 그림판에 그려지는 낭만과 우수 기타 등등의 감정은 절대 현장에서는 이루어 질수 없다. 생명보존의 본능적인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 때론 허리가 끊어지듯 아프기도 하지만 눈에 들어온 것을 포획하기 전에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다. 상대 또한 잡히지 않기 위해서 은폐 엄폐의 술수를 최대한 이용하고 그 조그만 몸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기도 한다. 다만 교묘한 인간의 생존전략이 연약한 생물의 삶을 한순간 갈라버리는 것이다. 미친개는 커다란 갯바위 뒤에서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듣고 재빠르게 몸을 세워 바위틈을 비집고 기어 올라가 넘겨다본다. 커다란 웅덩이에 물이가득 고여 있고 수면위에 움직임이 있는 걸로 봐서 미처 물때를 따라 나가지 못한 물고기가 모여 있음을 눈치 채고 뜻밖의 호재에 급히 손짓하여 짱구를 부른다.
미친개와 짱구는 쾌재를 부르고 있으나 물속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이어진다. 졸지에 망가진 처지를 직감한 몇몇 무리는 이판사판 객기를 부리며 물위로 튀어 오르며 기선을 제압한다. 누나의 큰 눈망울이 물속에 빠질 것 같은 모습으로 휘둥그레 벌어진다. 짱구는 투망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잘 지키고 있으라고 한 뒤 날아오르듯 갯벌을 지치며 달려 나간다. 잠깐 여유로움에 미친개는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낮에 간직했던 천도복숭아 두개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누나에게 건네준다. 오늘은 이곳에 모여 있는 식구들만 데려가도 힘에 부치겠다고 한 뒤 굳이 서울 염천 교 난전까지 갈 필요 없으니 소래포구로 가자고 한다. 포구 한쪽귀퉁이 꿰차고 앉아있으면 순식간 주인 찾아 떠나갈 테니 오늘밤 아주 제대로 이산가족을 만난 것이라고 하며 장난을 한다. 잠시 후 짱구는 투망과 커다란 살림망을 가지고 돌아와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누나는 빙그레 웃으며 살며시 다가가 이마에 땀을 닦아준다.
짱구는 쉴 새 없이 투망을 던지고 미친개와 누나는 쏟아져 나오는 보물을 살림망에 차곡차곡 쌓기를 거듭한다. 다른 곳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몰려와 간간히 흐트러지는 우수리를 건져가기에 급하다. 욕심 같아서는 저 먼 바다까지 뛰쳐나가 한바탕 털어보면 좋겠으나 마음만 요원할 뿐이라 안타깝고 서서히 밀물의 조짐이 보이니 모두는 예와 같이 바다를 놓아두고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린다. 무거운 살림망을 억척스레 끌며 머리와 등에 이고지고 물 밖으로 나오니 학꽁치, 망둥어, 밴댕이, 박가재, 낙지, 까무락 조개 등이 합하여 한 가마니가 되었다. 때 아닌 횡재에 세 사람은 저 멀리 동트는 것을 바라보며 조금씩 시장 끼를 느끼고 나른한 몸을 추스른다. 저녁에 반죽해 놓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뜨고 낙지와 해물 몇 가지 텀벙거리니 오묘한 맛에 눈이 다 뒤집어진다. 상을 물린 누나는 어느새 바지로 갈아입고 미 해군 반팔군복을 입은 뒤 오늘은 가까운 소래포구로 함께 가겠다고 손짓한다. 누나는 운동화 끈을 고쳐 매며 발길을 재촉하고 짱구는 경운기 시동을 걸며 어느새 기타와 노래책을 주워 실었다.
포구 난전에 도착하니 때 마침 밀물 따라 들어온 고깃배에서 내려지는 보물들이 눈부시고 장사꾼들과 선원 마을사람들이 뒤섞여 한참 복잡하게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자칫하면 한 귀퉁이 자리도 차지하지 못할 형국이라 세 사람은 입구 한구석에 물건을 내려놓고 서둘러 근처 옥수수 밭 옆에 경운기를 세워둔다. 아카시아나뭇가지와 오리나무 잔가지를 골라 꺾어 한 아름씩 들고 돌아와 어패물위를 살짝 가려 그늘을 만들어놓고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여기서는 오가는 사람 모두 눈썰미가 좋기 때문에 굳이 소리를 외쳐댈 필요 없고 가만히 시간만 죽이고 있으면 자연스레 거래가 이루어진다. 미친개는 고무신을 한쪽으로 벗어두고 머리 위가 뚫린 밀짚모자를 고쳐 쓴 뒤 기타 줄을 퉁기며 짱구와 삼류유행가를 흥얼거린다. 누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금살금 오가며 지나가는 행인의 눈치를 살피고 연신 브라보 콘을 앙증맞은 입술위에 색칠한다. 그러던 중 풍채 좋은 오십 초반 아저씨 한분이 허벅지까지 올라온 장화를 신고 물건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손짓을 한다. 영문을 몰라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물건이 잡다하게 실린 손수레가 한쪽 편에 세워져있고 아마 그 곳에 실어달라는 표정인 것 같다.
미친개는 얼른 기타를 내려놓고 손바닥을 쫙 벌려 손가락 열개를 보여주고 아저씨는 두개를 접고 여덟을 보여주며 빙그레 웃는다. 본체만체하고 기타를 집어들으니 아저씨가 사정을 하며 점심 값만 빼 달라고 하자 미친개는 바지주머니 속에서 오백 원을 꺼내들고 아저씨에게 건넨다. 열 개를 달라는 표정이 제법 강경하며 여유로운 한편 부드럽다. 누나는 멀찍이 서서 조바심으로 건네 보고 짱구는 나 죽었소, 하고 딴청부리는데 기선을 제압당한 아저씨가 하는 수없이 만원을 건넨다. 대신 오백 원을 받아 쥐곤 손수레에 실어달라고 한다. 추이를 관망하던 누나가 나르듯 달려와 보퉁이 하나를 머리에 이고 잰걸음으로 지쳐나간다. 나머지 보퉁이를 세 사람이 웃으며 손수레에 싣고 누나는 브라보 콘 하나를 얼른 아저씨에게 건네주고 방글방글 웃으며 머리를 숙여 인사한다. 손수레를 밀어 포구 밖으로 보낸 뒤 세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경운기로 돌아와 움직일 채비를 갖추는데 건장한 청년 서너 명이 경운기 앞을 탁 가로막고 험상궂은 면상을 들이대고 얼쩡거린다.
낌새를 눈치 챈 세 사람이 긴장하며 왜 그러느냐고 묻자 돈을 벌었으니 자릿세를 내고가라며 제법 건들거리는 폼 새가 낯익은 모습이다. 미친개는 빙그레 웃으며 오늘은 처음이니 그냥가고 다음에 다시 올 때 주겠다고 한 후 비켜서라고 한다. 험악한 표정으로 두셋이 앞으로 탁 나서며 팔뚝과 배를 슬쩍 보여주는데 신체곳곳에 현란한 문신이 새겨져있다. 미친개는 슬쩍 들여다보고 얼마나 학용품이 귀했으면 거기다 미술을 했니? 그 때 내가 있었으면 도화지 몇 장 챙겨주는 건데 참 안타깝구나 하면서 혀를 끌끌 차는데 상대의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미친개는 옆으로 슬쩍 돌며 오른손 주먹으로 상대의 관자놀이를 예리하게 찍고 연타로 턱밑을 훑어 내린다. 미처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머리를 상대의 턱밑에 바싹 붙이고 달라붙어 옆구리간장(콩팥)과 명치를 후벼 파듯 두들기니 바로 달팽이가 되어 오그라진다. 순간 짱구가 뛰어오르며 이마로 옆에 있던 사내의 눈덩이를 들이받는다. 멱살을 잡아 오른팔을 비틀며 기어들어가 어깨에 걸고 엎어 치니 밭고랑에 쑤셔 박혀 개구리자세 제대로다. 주춤되며 물러서는 한명을 누나가 머리채를 홱 잡아채 끌고 짱구와 미친개는 누나에게 붙들린 사내를 교대로 쥐어박으니 바싹 구워진 오징어 모양으로 춤을 춘다.
멀리서 지켜보던 시장사람들은 환호성 치며 박수를 치고 고소해하는데 갑자기 큰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텁석부리 선장님이 달려오고 있다.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사내의 귀싸대기를 훔치던 누나를 달래 가로막으며 큰소리로 넘어져있는 사내를 꾸짖는다. 상대를 보고 덤벼야지 죽으려고 환장 했느냐며 두 번 다시 이 포구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호통 친다. 건달들은 아마 텁석부리 형님을 알아보는 듯 꾸부정한 차림으로 인사한 뒤 절룩거리며 서로 부축하여 포구를 빠져나간다. 대충의 사태를 마감한 일행은 경운기를 몰고 포구를 빠져나온다. 오는 도중에 미친개가 형님이 여긴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묻자 며칠 후 승선하려면 선원수첩으로 출항 신고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너희들 주민증이 필요하여 마을에 갔더니 통장님이 이곳에 갔다고 하기에 서둘러 온 것이라 한다. 어차피 나왔으니 증명사진도 찍고 점심도 사줄 테니 먹고 들어가라고 하며 가까운 식당으로 가자고한다.
사진을 찍고 주민증을 건네준 뒤 식당으로 들어서서 식사를 하던 중 형님이 포구에 조그만 가게를 얻어줄 테니 누나에게 장사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세 사람은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어차피 배가 들어오면 경매로 나가는 것 이외에 남아있는 잡고기와 기타 어패류는 도매나 소매로 팔아야한다는 것이다. 조그만 가게를 포구에 두고 있으면 처리하는데 시간이 훨씬 적게 들고 약간의 경비와 간단한 용돈은 받아 쓸 수 있으니 서로가 좋은 것이라고 한다. 대신 누나가 조금 힘들 것이라고 하며 표정을 살핀다. 누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뜻을 전하고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보겠다는 손짓을 하며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럼 배가 들어오는 날 가게 터를 인수 받기로 했으니 우리가 출항해서 돌아오는 날 포구에서 만나기로하고 두 사람은 승선날짜에 일찍 부두로 오라고 한다. 몇 가지 볼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비우겠다고 한 뒤 텁석부리 형님은 일행을 남긴 체 밖으로 나간다. 음식 값을 지불하고 간다는 얘기와 함께 식당 문을 나서자 누나는 황급히 따라 나가 인사한 뒤 배웅하고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 누나는 부엌에서 몸짓이 분주하고 짱구와 미친개는 목욕과 이발을 한 뒤 깨끗한 차림새와 단정한 모습으로 집안을 말끔히 정리하였다. 초승달을 조금 넘어선 달빛과 점점이 찍힌 별빛이 마당 안에 들어차고 산속에서 간간히 부엉이 우는소리가 들린다. 짱구와 미친개는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커다란 쟁반에 담아 앞서 나간다. 누나는 부모님사진과 생전에 아버지가 쓰셨던 선장모자에 하얀 천을 곱게 씌워 막걸리병과 함께 들고 조용히 뒤따라 나선다. 갯바위에 도착한 세 사람은 말없이 하얀 모조지를 깔고 그 위에 음식쟁반을 살며시 내려놓고 부모님사진과 모자를 들여 놓는다. 잠시 분위기가 숙연해지고 목메어 눈시울 붉어지는데 잔잔히 스치는 바람 따라 애틋한 사연들이 넘실거리며 흘러간다. 막걸리를 따라 놓고 세 사람은 수차례 절을 올린다. 잠깐 여운이 흐르고 누나는 한지에 먹을 갈아 쓴 글과 알 수 없는 그림을 불붙여 태운 뒤 쟁반위의 과일을 조금씩 집어 바다 곳곳에 들여놓는다. 두 사내는 조용히 누나의 그림자를 보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애써 눈물을 참으려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누나는 예전에 아버지가 바다에 나가기 전에 하였던 의식을 간직하고 있었다. 다시금 그 자식이 바다에 나가 삶을 펼치게 되자 바다에 계시는 부모님께 인사를 여쭙고 부디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다. 잠시 후 누나는 두 사내에게 술을 한잔씩 따라준다. 아버지의 모자를 짱구에게 씌워주고 외항선원 나침판을 미친개 손에 꼭 쥐어 건네준다. 잠시 머쓱했던 순간이 지나고 세 사람은 막걸리 한 병과 가지고간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물비늘 춤추는 바다를 바라보며 서로의 손을 합하여 흔든다. 힘찬 주먹을 쥐며 가슴을 활짝 열자 달빛도 숙연하여 살며시 구름 속에 얼굴을 묻는다.
드디어 출항하는 날이 다가와 세 사람은 이른 새벽 부두로 향하여 간단히 인사를 한 뒤 짱구와 미친개는 승선신고를 한다. 두 사내가 배에 오르고 누나는 먼발치에서 손을 흔들며 서있다. 짱구와 미친개도 손을 흔들어 누나에게 화답하며 닻을 올리고 출항하는데 갑자기 뜻밖의 소리가 들려 서로는 정신을 가다듬고 두리번거린다. 다시금 소리 나는 쪽으로 귀 기울여 부둣가를 살펴보니 황급히 누나가 물러선다. 자세히 보니 누나가 앙증맞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너무 깊은 감격에 누나는 잃었던 목소리를 다시금 찾은 것이다. 텁석부리 형님도 놀라서 박수를 치며 환호성으로 답하고 뱃머리는 파도를 부수며 돌진한다. 뱃전에 부딪히는 누나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파도에 감겨 출렁 거린다. “바다의 사나이 너희는 최고다, 부디 기다리는 여인을 잊지 마라 살아있는 있는 남자 짱구야 미친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