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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국용전제(國用田制)
정의
위전으로 분산되어 있던 전세 재원을 1445년(세종 27) 국용전으로 통합한 재정 운영 방안.
개설
국용전제(國用田制)는 세종대 공법(貢法)이 원래 정액제로 출발하였다가 정률제로 귀착됨에 따라 마련된 재정 운영 방안이었다. 1428년(세종 10) 시작된 공법 개정은 정액세를 관철시킴으로써 안정된 세수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세종실록』 10년 1월 16일]. 그러나 1444년(세종 26) 공법은 6등 전품(田品)에 9등 연분(年分)을 수용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다[『세종실록』 26년 11월 13일].
이처럼 공법이 당초 의도와는 달리 정률세로 귀결됨으로써 안정된 세곡의 징수를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용도에 따라 각종 명목의 위전을 분급하고 세액은 답험에 의해 결정하던, 기존의 위전제(位田制)에 입각한 재정 운영 방식을 포기하였다.
위전제는 각사(各司)가 지정된 토지에서 그 토지에 대한 답험 결과를 수용하여, 통보된 액수만을 해당 군현에서 징수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국용전제 시행 이후에는 모든 토지가 국용전으로 일괄 편입되었다. 따라서 해당 군현이 징수한 전체 세곡 중에서 각사의 몫으로 정해진 양은 상납하고, 나머지는 잔류시키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 방식은 전체 세입이 국용(國用)의 총량을 밑돌지 않는 한 재정 운영 자원을 확보하는 데에 한층 안정된 방법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 조선전기 답험손실법과 위전제
조선시대 전제(田制)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전(量田)에서부터 과세 및 수납, 재원의 분정 방식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양전은 재원을 파악하는 과정이고, 분전(分田)은 파악한 재원을 나누는 과정이었다. 과세 및 수납은 대상지에 대한 과세액을 대상자에게 고지하고 수납하는 일체의 과정을 말하였다.
1428년(세종 10) 새로운 공법안이 제기되기 이전의 양전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면적이 서로 다른 상·중·하 3등전으로 구분하고, 결부(結負) 단위로 양전하여 자정(子丁) 별로 양안에 등재하였다. 파악된 전지를 재정 수요가 있는 곳에 분급하여 재원으로 삼았는데, 분속된 전지를 위전이라고 하였다. 각사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면 각사위전(各司位田)이라 하고, 잡물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면 잡물위전(雜物位田), 수령의 봉록을 지급하기 위한 것이면 아록위전(衙祿位田) 등이라 하였다. 위전은 조선초기 정부가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필수적인 재원이었다. 이에 모든 토지에 조세가 부과되었으며, 경작자의 분속처가 어디인가에 따라 최종 수납처가 달랐다.
세액은 동일한 1결에 동일한 과세를 부담한다는 원칙하에 1결당 30두(斗)를 상한으로 하였다. 그렇지만 최종 과세액은 답험(踏驗)에 의해 정해졌다. 해마다의 작황을 살펴보고 전조(田租)를 일정한 비율로 감해 주는 방식, 즉 ‘1분(分)의 실(實)에 대해서도 1분의 조(租)를 징수하고 1분의 손(損)에 대해서도 1분의 조를 감하는’ 취지의 세법이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었다.
답험은 다른 지역 출신의 위관(委官)이 파견되어 업무를 감독하고 해당 지역의 향리·서원 등이 경작지의 작황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는 수령과 관찰사를 통해 중앙에 보고되었고, 때에 따라 경차관이 파견되어 군현 단위 답험을 감독하였다. 위전의 경우 수조권자인 각사에게는 답험권이 없었다. 고려말 각 경작지의 수조권자가 직접 경작자에게 조세를 부과할 뿐만 아니라 직접 징수하는 방식과는 크게 달랐다. 각사에서는 공적 조직에 의한 답험 결과를 수용하여 통보된 액수만을 해당 군현에서 징수하였다. 현지에 가서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구축한 유통망을 통해 올라온 세곡을 해당 군현의 공리(貢吏)에게서 징수하였다. 즉 조선의 전세수납제도는 수조권과 납세자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능하면 배제시켰던 것이다.
그렇지만 답험손실법은 작황에 따라 손실을 인정해 주었으므로 세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답험실무자의 재량권이 커서 손실의 규모가 증대되고 농간을 부릴 여지가 항상 존재하였다. 답험법이 적용되어 목표액이 미달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보충하는 조처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답험제의 제도적 한계에서 비롯된 재정 운영상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1428년(세종 10) 정액세인 공법이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2. 공법 제정 과정과 국용전제로의 변화
세종대의 공법은 단순히 전세법의 개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양전에서 재정 운영의 방식 전반에 걸친 개혁안이었다. 1428년(세종 10)부터의 양전은 답험제 수세(收稅)의 바탕이 되는 마지막 양전이자 초기 공법 운영의 토대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때의 양전에서도 경작되지 않는 토지가 원전(元田)으로 파악되었고, 이로써 답험법 아래에서 남는 곡식을 빌려다 쓰는 전청(傳請)이 일반화되었다. 이처럼 안정적인 재정 운영을 기할 수 없게 되자 이를 타개할 방책으로 모색된 것이 공법이었다. 공법을 도입하는 과정에서는 세액을 낮추는 대신, 파악된 모든 토지에 대해 세를 부과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부과 방식으로 도입된 것이 1437년(세종 19) 반포 법안과 1440년(세종 22)의 수정안이었다. 1437년 공법에서는 상·중·하전에 대해 동일한 1결에는 동일한 세액을 부담한다는 원칙이 포기되었으며, 하삼도 지역과 기타 지역 사이에도 세액을 차등화하였다. 1440년 법안에서는 도내의 군현 단위로 전품을 달리 설정하면서, 상·중전과 하전으로 지품(地品)을 나누어 차등수세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종전에는상·중·하전 각 1결은 면적은 다르지만 동일한 세액을 부담하였는데, 이제는 상·중전에는 동일한 세액을 부담하지만 하전에서는 이보다 낮은 조세를 부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토지의 소재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서 다른 세액이 부과되었다.
양전제의 이러한 변화는 전국적으로 분포한 위전의 운영, 즉 재정 운영의 방식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100결의 위전은 지역이나 지품에 관계없이 동일한 가치를 지녔는데, 이제는 지품과 소재지에 따라서 지니는 재정적 가치가 달라졌다. 경기도의 경우는 과전이 지급되는 곳이었다. 경기 군현별로 과세액이 달라진다는 것은 과전의 지급 상황을 전면 재조정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1444년(세종 26) 공법에서 지역에 따른 차등과세 방안은 그래서 배제되었다. 어느 등급의 토지라도 동일한 1결은 동일한 과세 대상지가 되도록 하는 동과수조(同科收租)의 원칙을 지키기로 하였다. 위전을 중심으로 재정이 운영되는 상황에서도 동과수조의 원칙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품을 세분화하는 방식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결국 공법은 전국을 동일한 기준에 의해 파악하는 전분 6등과 해마다의 작황을 9등으로 판정하는 연분 9등제를 골자로 하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결의 면적은 각 전품별로 400두를 생산할 수 있는 면적으로 정했기 때문에 세액은 전품에 구분 없이 상상년에 20두를 정점으로 2두씩 체감하여 하하년 4두에 이르기까지 9종으로 결정되었다. 연분 상정 방식은 군현단위로 함으로써 정실에 따른 부정의 개입 여지를 최소화하였다.
그렇지만 이로써 공법을 도입하려던 본래 의도는 무색해지고 말았다. 공법 개정의 발상은 정액제를 관철함으로써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20여 년에 걸친 검토 과정을 거쳐 확정된 세법에는 9등 연분이라는 작황 판단 기준이 더해지게 되었다. 출발할 때의 목적과는 달리 정률세제로 귀착된 것이다. 연분이 도입됨으로써 여전히 세수의 불안정성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6등 전품제를 시행함으로써 재정 운영의 토대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전품의 분등 방식이 바뀌었고 결의 파악 방식이 변하였으므로 기존의 일정한 결수에 해당되었던 위전은 소수점 아래의 단위로 계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원칙이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기존의 위전은 본래 주어진 위치에 원래의 면적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잠정 결정하였다. 국용전제는 이러한 재정 운영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1445년(세종 27) 그 제도가 마련되었다.
내용
국용전제는 1444년(세종 26)의 공법이 정액세가 아닌 정률세화 됨으로써 답험법과 동일하게 세수의 안정을 꾀하기 어려운 현실적 조건에서 시행되었다. 정부는 국용전제 밑에 세원을 통합하여 전체 세수(稅收)가 세출보다 많게 유지하려 하였다. 이에 기존의 위전은 다섯 유형으로 정비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첫째, 각사위전과 군자전, 광흥창 위전을 통합하여 국용전으로 관리하기로 하였다. 둘째, 경기전, 사직·문선왕, 사전소재(祀典所在) 악·해·독·성황 등 각종 제사의 경비를 충당할 목적으로 위전을 지급하는 일은 폐지하기로 하였다. 대신 국고에서 필요한 경비를 지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셋째, 인리위전(人吏位田)을 비롯한 각종의 특수한 역 부담자에게 지급되던 위전은 폐지하기로 하였다. 넷째, 역에 지급되었던 위전은 부수적인 문제들에 대한 처리 방침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조정을 보류하였다. 다섯째, 아록전을 비롯하여 기타 존속시키기로 한 일부 위전들은 규모가 조정되었다. 다음은 국용전제에서 위전이 조정된 내용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변천
국용전제의 원칙이 실효성을 얻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9등 연분에 따라 서울의 각사와 지방의 전세 공안(貢案)이 다시 작성되어야 했고, 양전과 6등 전품 판정이 있어야 세액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국용전제가 상납항수(上納恒數)를 정하는 것이었으므로 합리적인 항수를 상정하는 것도 단순한 작업이 아니었다. 세조대 횡간(橫看)의 책정 노력은 합리적인 항수를 도출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때 재정 정비를 전담한 부서는 상정소(詳定所)였다.
횡간은 서울과 지방 모든 관서의 재정 비용을 정리한 문서로 국용전제의 원칙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이에 횡간의 책정과 교정 작업은 세조가 직접 관장하다시피 하였으며 1467년(세조 13) 일단락되었다[『세조실록』 13년 11월 12일]. 세조대의 횡간은 성종대에 대대적인 정비 과정을 거치면서 전반적인 지출 경비가 예측될 수 있었고, 지출을 염두에 두면서 세수 관계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향후 세법의 운영에서 연분이 하년(下年)으로 판정되면서 전세 징수액을 축소해 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총 지출 비용을 예측할 수 있는 횡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법의 세수 운영은 답험법과는 크게 달랐다. 답험법에 의해 세수가 결정될 때에는 작황과 그에 근거한 세수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재정 부족분을 메워 줄 일정 규모의 국고곡(國庫穀)을 유지하는 것이 재정 운영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다. 공법이 도입되고 세수가 국용전으로 통합되어 운영되면서 전체적인 지출 규모가 횡간을 통해 파악되었다. 이로써 재정 운영의 예측성이 그만큼 증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성종대에도 국고곡은 여전히 방대한 규모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재정 운영상의 긴요함은 답험법 세수가 적용될 때보다 훨씬 축소되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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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섭, 「고려 말·조선 초 각사위전을 통해서 본 중앙 재정」, 『한국사론』 27,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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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삼감(軍資三監)
정의
조선시대에 군자감에서 관장하던 군자본감·군자강감·군자분감을 합쳐 부르는 말.
내용
1. 군자감의 직제
군자감(軍資監)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미곡 등 각종 물품[軍需儲積]들을 관장하는 정3품아문이었다. 본감(本監)은 도성 안의 광통교(廣通橋) 부근에, 강창(江倉)은 용산강(龍山江)에, 별창(別倉)은 송현(松峴)에 있었다.
군자감은 군려(軍旅)의 양향(糧餉)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정3품 판사(判事) 2명, 종3품 감(監) 2명, 종4품 소감(少監) 2명, 종5품 승(丞)·겸승(兼丞) 각 1명, 종6품 주부(注簿) 3명, 종6품 겸주부(兼注簿) 1명, 종7품 직장(直長) 2명, 정8품 녹사(錄事) 2명이 배치되었다. 그 뒤 1403년(태종 3) 관제개혁 때 연경궁(延慶宮)을 군자감에 합쳤으며, 1414년(태종 14)에는 군자감 감을 정(正), 소감을 부정(副正), 감을 판관(判官)으로 각각 고쳐 불렀다. 1466년(세조 12)에는 군자감의 녹사 1명을 혁파하는 대신, 판관·주부·부봉사·참봉을 각각 1명씩 더 두었고, 다시 1469년(예종 1)에 판관·주부·직장은 각각 1명씩 증원하였다.
2. 군자감 창고의 조성과 변화
반드시 일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매년 전국 각지로부터 서울의 군자감으로 수납(輸納)되는 군자전세(軍資田稅)는 약 50,000석에 달하였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서울의 군자창[軍資本監, 京監]만으로는 보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따로 창고를 지었는데, 그것이 송현의 분감(分監)과 용산강가의 강감(江監)이었다. 본감은 한양 도성을 건설할 때 광흥창(廣興倉)·풍저창(豊儲倉)과 함께 광통교 근처에 지었으며, 1413년(태종 13)에는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의 감독으로 용산강에 84칸 규모의 창고를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고의 공간이 부족하여 1452년(단종 즉위년)부터 조성소(造成所)를 상설하여 매년 50칸씩 증설하도록 조치하였다. 그 결과 1463년(세조 9) 본감의 앞쪽 좌·우 민가들을 철거하고 그곳에 대창(大倉)을 준공하였다.
3. 군자감 창고의 출납 운영
군자감을 송현·용산강·본감에 분산·설치하였기 때문에 출납(出納)할 때에 관원(官員)들이 한곳에 모이게 되면 나머지 두 곳은 감수(監守)하는 관원이 없이 고지기[庫子]만 있게 되므로 도둑을 당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런 문제들을 개선하고자 1460년(세조 6)부터 풍저창·광흥창의 예에 따라 군자 본감은 판관 1명·직장 1명, 송현은 부정(副正) 1명·직장 1명·녹사 1명, 용산강은 정(正) 1명·주부 1명·녹사 1명이 나누어 맡아 출납(出納)을 감수(監守)하도록 하였으며, 판사는 항상 본감에 출근하여 세 곳을 총괄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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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섭, 「고려말·조선초 각사위전을 통해서 본 중앙재정」, 『한국사론』 27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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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화, 「조선초기 군자정책과 운영실태」,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군자위전(軍資位田)
정의
고려말 이성계 일파가 전제를 개혁할 때 군량과 진휼곡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기본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설정한 전지.
설치 목적과 의의
고려말 전제개혁론자들이 군자전을 설정한 동기는 군량과 진휼곡의 확보라는 당시의 시급한 과제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전지(田地)와 농민에 대한 국가의 직접 지배력을 확대·강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새로운 왕조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국가 재원을 보다 충분히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군자전은 고려말 전제개혁론자들의 의도가 가장 잘 반영되었던 전지 가운데 하나였다.
설치 및 확대과정
군자전은 고려말 전제개혁 당시 고려후기의 군수전(軍須田)을 회복시켜 군자전을 설정하였다. 그렇지만 군수전만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양전(量田)을 통하여 새로이 파악된 황원전(荒遠田)을 군자전에 포함시켰다. 이때 설정된 군자전을 원속군자전(元屬軍資田)으로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친 양전으로 새로이 파악된 전지들을 원칙적으로 모두 군자전으로 소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혁파된 사사전(寺社田)이나 국가기관의 절수지(折受地)나 개인 수세지(個人收稅地)들을 가능한 한 군자전에 포함시켰는데, 이렇게 확보된 군자전을 영속군자전(永屬軍資田)으로 불렀다. 또한 사망한 사람이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과전(科田), 그리고 혁파된 인리위전(人吏位田)을 가속군자전(假屬軍資田)의 명목으로 임시로 군자전에 소속시키기도 하였다. 그 결과 군자전은 가장 규모가 큰 전세(田稅) 수입원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1444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 때 각사위전(各司位田)·풍저창위전(豊儲倉位田)·광흥창위전(廣興倉位田)을 국용전(國用田)으로 통합시키면서 군자전은 전세가 서울의 군자감으로 납입되는 군자감위전(軍資監位田)과 지방군현에 소재한 국고(國庫)에 보관되는 외군자위전(外軍資位田)으로 구별되었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경영
군자전은 민전(民田) 위에 설정된 국가 수세지(國家收稅地)였다. 군자전으로 설정된 민전은 대체로 생산력이 낮은 전지였으며, 경제적 기반이 미약했던 사람들의 전지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가족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자가소경(自家所耕)이 지배적인 경작 형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군자전의 전호(佃戶)가 짊어졌던 실질적인 부담은 수령·향리 등의 법외 남탈(法外濫奪)로 과전과 같은 개인 수조지(個人收租地)의 전호가 짊어졌던 부담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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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담, 「리조 초기(14세기말~15세기말)에 있어서 봉건적 토지소유 관계와 농민들에 대한 착취 제 형태」, 『력사 논문집』 3, 1958.
이명화, 「조선초기 군자정책과 운영실태」,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군자전세(軍資田稅)
정의
군자전에서 거두어들인 전세.
내용
수취된 군자전세는 일부가 서울의 군자창(軍資倉)에 운반·보관되었지만, 대부분은 지방 소재의 국고(國庫)에 그대로 보관되었다. 그리고 군자전세의 출납 운영은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 일원화되어 있었다. 한편, 군자전세의 지출 용도로는 군량과 진휼곡이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 밖에 사대교린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비도 모두 군자전세로 충당되었다. 또한 군자전세는 중앙정부와 지방관청의 부족한 재정을 보조해 줌으로써 국가 재정의 합리적인 운영을 위한 예비 재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결국 군자전세는 중앙집권적 양반신료 체제(兩班臣僚體制)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국가 재원이었던 것이다.
용례
戶曹啓 今承傳敎 慶尙道軍需不裕 其上道田稅 納于京中 中道以下田稅 各其州倉收納節目 商議以啓 臣等參詳本道所儲 軍需果不裕 請限周足 尙州善山安東醴泉榮川金山知禮豐基開寧龍宮奉化仁同聞慶咸昌軍威義城比安禮安等十八邑軍資田稅 依前上納 慶州晋州星州昌原金海寧海密陽靑松大丘陜川咸陽草溪淸道永川興海蔚山梁山咸安昆陽盈德慶山東萊固城巨濟南海居昌三嘉宜寧迎日長鬐靈山昌寧泗川機張熊川等四十八邑軍資田稅 各納邑倉 從之 [『성종실록』 성종 8년 윤2월 28일 5번째기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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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우, 「조선초기 군자전에 대한 일고찰」, 『역사학보』 118, 1988.
이명화, 「朝鮮初期 군자정책과 운영실태」,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군전(軍田)
정의
고려말 전제개혁 때 지방에 거주하던 한량품관에게 지급하였던 수조지.
개설
정부가 군전을 지급한다는 것은 땅 자체를 나누어 준다는 뜻이 아니라 그 땅에 대해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준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군전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땅에 대해 면세권을 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여말 선초기에 왕조교체 과정에서 지방 유력자들을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명목만 남게 되었고, 세조 때 직전법이 시행되면서 소멸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말 전제개혁 때 설치된 군전은 전시과제도 상의 군인전에 해당하는 전지(田地)였다. 군인전은 998년(목종 1) 전시과를 개정할 때 처음 설치되었으며, 1076년(문종 30) 전시과를 개정하면서 지급액을 조정하였다. 고려후기에 들어서는 일률적으로 17결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고려 중엽부터 군인전은 권세가들의 점탈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고려후기가 되면서 권문세족들이 겸병(兼倂) 등을 이용하여 농장(農莊)을 확대시키면서 군인전은 군역과는 관계가 없는 유명무실한 전지가 되고 말았다.
조준(趙浚) 등 고려말 전제개혁론자들은 이전의 군인전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재예(才藝)를 시험하여 선발된 군인에게 “20세에 군전을 지급하고, 60세에 환수한다.”는 규정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 소유할 수 있었던 군인전과는 달리, 군전은 국역을 담당하는 기간 동안에만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내용
1391년에 일단락된 고려말 전제개혁에서 지방에 거주하는 전함관(前銜官)·첨설관(添設官) 등과 같은 한량관(閑良官)들에게 품계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그들이 원래 보유하고 있던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5결 또는 10결의 군전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경기와 동·서 양계 지방을 제외한 6도에 거주하는 한량관으로 1년에 3개월간 서울에 와서 왕실을 지키는 자에게 군전을 지급하였다.
군전은 고려후기에 권세가들이 규정을 무시한 채 함부로 차지하였던 개인 수조지(收租地)로서의 외방 사전을 전면 혁파하는 대신, 해당 지역 유력자층인 한량관들에게 최소한의 명목만을 붙여서 인정해 준 개인 수조지였다. 이를 지급받은 한량관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소유지[本田] 5~10결에 대한 전조(田租)를 면제받은 셈이었다[『태조실록』 7년 12월 1일]. 이러한 군전을 지급받은 한량관들의 숙위는 병역의 의무인 동시에 명예가 되기도 하였다. 중앙정부가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지방 유력자인 한량관리들을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에 두는 동시에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은 농민들이 유사시에는 병역도 담당하는 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라 농민들에게 군역을 부과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토지를 지급하지 않았던 반면, 한량관들에게는 군전을 지급함으로써 새로운 군역 체계를 확립하였다. 따라서 군전을 지급받은 한량관리들은 일반 정병(正兵)과는 다른 상층 군인으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에 숙위해야 하였다. 만일 정당한 이유 없이 100일 이상 숙위에 응하지 않을 때는 신고하는 사람에게 그 군전을 주도록 하였다.
변천
군전을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정부의 조처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들은 서울에 와서 시위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아들·사위·손자·동생·조카·노복 등을 대신 시키거나, 익명서를 내어 정부의 시책과 당국을 비방하였다. 그래서 60세가 넘거나 질병으로 의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아들·사위·동생·조카 등이 대신 시위의 임무를 담당하면서 과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군전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이러한 조치가 그들의 저항 때문에 취해진 것만은 아니었다. 태종이 즉위한 뒤 갑사·별시위 등 궁성 숙위를 위한 금군(禁軍)이 설치되고, 또한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면서 군인으로서 적합하지 않은 노약자들을 그들의 아들·사위·동생·조카로 대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이 건국된 이후 군전에 대한 회수와 지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록 이에 대한 규정이 있기는 하였지만, 고려말 전제개혁이 일단락되면서 사실상 군전의 지급이 완료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려말 전제개혁 때 지급된 군전은, 한량관으로 서울에 올라와 군역을 담당하던 수전패(受田牌)의 아들·사위·동생·조카가 대신할 때는 물려줄 수 있었으므로 군전이 당장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1394년(태조 3) 재예를 시험해 선발된 한량관리에게만 군전을 지급하도록 하면서, 일정한 임무를 맡지 않은 자는 토지 지급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1409년(태종 9) 이들은 수전패 또는 무수전패(無受田牌)라는 이름으로 재편되면서 군전의 혜택 없이 군역을 지는 한량층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이들이 갑사(甲士)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군전은 선초까지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제도상으로만 존속되다가 1466년(세조 12) 직전법(職田法) 시행을 전후로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사회가 점차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군사·군역제도가 정비되면서 한량품관의 필요성이 감소된 것이다. 이에 따라 고려말기에 남발된 첨설직 같은 관직이 없어지면서 한량품관이라는 신분이 유지될 수 없음에 따라 더 이상 군전을 지급할 필요가 없어졌다. 첨설직은 실질적인 업무는 없으면서 관직 이름만 부여한 관직으로, 정부가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실질적인 상금을 내릴 수 없어 임시방편으로 부여한 관직이었다.
참고문헌
강진철, 『고려토지제도사연구』, 일조각, 1980.
강은경, 「조선 초 무수전패의 성격」, 『동방학지』 77·78·79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3.
김태영, 「과전법의 성립과 그 성격」, 『한국사연구』 37 , 한국사연구회, 1982.
김태영, 「과전법체제에서의 수조권적 토지지배관계의 변천」, 『경희사학』 9·10, 경희대학교 사학회, 1982.
이희관, 「고려말·조선초 전함관·첨설관에 대한 토지분급과 군역부과」, 『고려말·조선초 토지제도사의 제문제』, 서강대학교 출판부, 1987.
한영우, 「여말선초 한량과 그 지위」, 『한국사연구』 4 , 한국사연구회, 1969.
급손(給損)
정의
농사의 작황을 직접 조사하여 평상년을 기준으로 손실률을 결정하는 일.
개설
고려말 전제개혁 때 제정된 조세 규정에는 1결당 30말[斗]을 전조(田租)로 수취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해마다 농사의 작황이 같을 수 없었기 때문에 평상년(平常年)을 기준으로 손실이 발생하면 그만큼 전조를 줄이는 수손급손(隨損給損) 방식을 적용하였다. 그렇지만 답험손실을 통한 수손급손 방식은 구체적인 기준이 애매하였기 때문에 담당자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폐단을 개선하고자 마련한 제도가 공법(貢法)에서의 ‘급재(給災)’ 규정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말 전제개혁 때 제정된 조세 규정에는 공전(公田)·사전(私田) 모두 평상년을 기준으로 수전(水田) 1결에 조미(糙米) 30말, 한전(旱田) 1결에 잡곡(雜穀) 30말을 전조로 수취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해마다 농사의 작황이 같을 수 없었기 때문에 평상년의 작황을 10분(分)으로 잡아 손실률이 1/10이면 전조를 1/10 줄여 주는 방식을 적용하였다. 만약 손실이 8/10에 이르면 전조를 모두 면제해 주었다. 이를 ‘수손급손’이라고 한다.
내용
수손급손제도는 1393년(태조 2)에 일부 규정이 바뀌었다. 즉, 그동안 2/10 이하의 손실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이를 손실로 인정하지 않고 규정된 전조를 수취하였지만, 이제 1/10이라도 수확이 있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전조를 수취하였던 것이다. 또한 1/10이라도 손실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그만큼 전조를 줄여 주었다.
이를 위해 먼저 해당 지방에서 차출된 손실위관(損實位官), 즉 답험손실관(踏驗損實官)이 작황의 정도를 조사하여 그 결과를 수령이 직접 심사하고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관찰사는 이를 다시 심사하여 그 결과를 호조(戶曹)로 보냈다. 호조는 손실경차관(損實敬差官)을 파견하여 심사한 다음 전세 수취액을 확정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답험손실을 통한 수손급손 방식은 구체적인 기준이 애매하였으므로 담당자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태종실록』 15년 8월 1일].
변천
이처럼 답험손실을 통한 수손급손 방식은 구체적인 기준이 애매하였기 때문에 담당자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폐단을 개선하여 보다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전세 수취액을 판정하고자 마련한 제도가 공법에서의 ‘급재’ 규정이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이장우, 『조선 초기 전세 제도와 국가 재정』, 일조각, 1998.
급재(給災)
정의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전지에 대하여 피해 정도에 따라 전세를 면제하거나 줄여 주는 일.
개설
공법(貢法)이 실시되면서 10결 이상 연이은 전지에 재해를 입었을 경우에만 전세(田稅)를 줄여 주거나 면제해 주었다. 그러다가 연이은 5결 이상의 전지에 재상(災傷)이 발생했을 경우에도 전세를 감면시키도록 규정이 완화되었고, 이어 이 조건에 충족되지 않더라도 한 구역의 전지에 재상을 입었을 경우에도 전세를 면제시켰다. 더 나아가서는 재상이 절반을 넘는 전지와 질병으로 경작하지 못한 전지에도 손실률에 따라 전세를 감면시켰다. 이러한 급손제도는 『경국대전』에 거의 그대로 등재되었다.
내용
답험손실에 의한 수손급손 방식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세종은 1444년(세종 26) 연분9등(年分九等)과 전분6등(田分六等)에 의거하는 공법을 제정하였다. 공법에서는 먼저 10결 이상을 연이은 전지가 재해를 당했을 경우에만 수령이 경작자[佃夫]의 신고를 받아 직접 심사하게 하였다. 심사 후에는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수령관(首領官)과 다시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을 파견하여 손실을 입은 정도를 심사하게 하고 이 결과를 토대로 전세를 줄여 주거나 면제하였다.
그런데 재상은 주로 생산력이 낮은 척박한 전지에서 발생하였고, 이러한 전지를 소유하고 경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하층 농민들이었다. 게다가 이들이 10결 이상 연이어 있는 전지를 가진 경우는 없었다. 이 때문에 연이은 5결 이상의 전지에 재상이 발생하였을 경우에도 전세를 감면시키도록 규정을 완화하였다[『세종실록』 28년 6월 4일]. 이어 연이은 5결의 조건에 충족되지 않더라도 한 구역의 전지가 재상을 입었을[全一田災傷] 경우에도 면제시켰다[『세종실록』 28년 8월 16일]. 더 나아가서는 재상이 절반을 넘는 전지와 질병으로 경작하지 못한 전지에 대해서도 손실률에 따라 전세를 감면시켰다[『문종실록』즉위년 10월 7일]. 이러한 급손 제도는 『경국대전』에 거의 그대로 등재되었다.
그렇지만 재상의 손실률을 심사하는 일이 복잡하고 번거로워서 현실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까닭에 손실률을 판정할 때 지방관이나 향리·토호들의 부정이 자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전지는 재상을 당했어도 정상적인 수확을 한 것으로 판정받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부유하고 세력 있는 사람들의 전지에 재상이 부여되는 형편이었다. 비록 공정한 재상 등급을 부여하기[給損] 위해 경차관과 어사(御史), 즉 행대감찰(行臺監察)을 파견하고, 재상의 등급을 실제와 다르게 판정한 수령을 처벌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하였지만, 부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변천
공법을 제정하면서 가난한 농민들을 보호하고자 마련했던 급재 방식은 원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현실적으로 연분의 등급과 재상의 정도를 심사하는 일이 복잡하고 토지의 작황을 일일이 파악하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서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연분을 실제보다 거의 낮게 적용하여 보통 1결당 4~6말[斗]을 거두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결국 1635년(인조 13)에 영정법(永定法)을 제정함으로써 사실상 1결당 4말로 고정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박시형, 「이조 전세 제도의 성립 과정」, 『진단학보』 14, 1941.
급전사(給田司)
정의
조선초 중앙과 지방의 각 관사와 기관, 문·무반을 비롯한 각종 국역 담당자들에게 전지를 나누어 주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담당했던 호조 소속 관사.
개설
고려말 전제개혁(田制改革)이 추진되면서 1388년(창왕 즉위년) 설치된 급전도감(給田都監)에서는 관품(官品)에 따른 새로운 전지 분급 규정을 정비하였다. 그런 다음 1392년(공양왕 4) 5월에 급전도감을 폐지하고 그 업무를 호조(戶曹)에 이관하였는데, 이때 급전사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급전사는 1405년(태종 5) 호조 소속 관사로 확정되면서, 영업전(永業田)·구분전(口分田)·문무직전(文武職田)·공해전(公廨田)·원택(園宅)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도록 규정되었다[『태종실록』 5년 3월 1일]. 그 뒤 세조 때 급전사가 폐지되고, 대신에 경비사(經費司)가 신설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조준(趙浚) 등이 앞장서서 전제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1388년 10월 급전도감을 설치하였다. 급전도감은 1390년(공양왕 2) 1월에 관품에 따른 새로운 전지 분급 규정을 제정하였다. 또 외관원(外官員)·향리·역리·진척·원주(院主)의 전지와 풍저창(豊儲倉)·광흥창위전(廣興倉位田)의 지급 액수도 정비하였다. 그런 다음 1392년(공양왕 4) 5월에 급전도감을 폐지하고 그 업무를 호조에 이관했다. 이 과정에서 급전사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
급전사는 1405년(태종 5) 3월 육조(六曹)의 직무 분담과 소속 관사를 정비할 때 판적사(版籍司)·회계사(會計司)와 함께 호조 소속 관사로 확정되었다. 급전사는 영업전·구분전·문무직전·공해전과 원택(園宅)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정5품의 정랑(正郞) 1명과 정6품의 좌랑(佐郞) 1명이 배치되었다.
변천
세조 때 급전사는 폐지되었다. 대신에 중앙관사의 각종 물품 조달과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에 사신으로 오는 왜인(倭人)에 대한 식량 지급 등을 담당하는 경비사가 신설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장우, 『조선 초기 전세 제도와 국가 재정』, 일조각, 1998.
급주전(急走田)
정의
역에 소속되어 일하는 급주노비에게 보수로 지급한 전지.
개설
긴급한 전령(傳令)·전신(傳信)을 담당하는 급주노비(急走奴婢)에게는 3명을 하나의 호(戶)로 편제하여 1결의 구분전(口分田)을 지급하였다[『세종실록』 7년 2월 25일]. 그러다가 『경국대전』에서는 각자수세전(各自收稅田) 50복(卜)을 지급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각자수세전은 민전(民田)이지만, 전세(田稅)를 관청에 납입하지 않고 사역(使役)의 대가로 스스로 수취하는 전지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초기 역(驛)에는 역리(驛吏) 외에 일수양반(日守兩班)·전운노비(轉運奴婢)·급주노비·관부(館夫)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급주노비는 긴급한 전령이나 전신을 담당하는 역졸(驛卒)이었다.
내용
급주노비는 마부(馬夫)인 전운노비와 함께 역의 잡다한 일에 종사하였다. 급주노비는 전운노비와 마찬가지로 인적 사항[根脚]]과 이름, 출산한 자식[生産]을 문서[文簿]에 기재하여 병조·감영(監營)·소재지의 고을·소속된 역에 각각 보관해 두었다. 이는 이들이 도망갈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급주노비에게는 3명을 하나의 호로 편제하여 1결의 구분전과 50복의 소경전(所耕田)을 지급하였다. 구분전은 민전에 설정되어 직접 수세권(收稅權)을 행사하였던 데에 비하여 소경전은 소유권을 행사하였던 전지(田地)였다.
변천
『경국대전』에서는 각자수세전(各自收稅田) 50복을 지급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각자수세전은 민전이지만, 전세를 관청에 납입하지 않고 사역의 대가로 스스로 수취하는 전지를 의미하였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변태섭박사화갑기념 사학논총간행위원회 편, 『사학논총: 변태섭박사화갑기념』, 삼영사, 1985.
이장우, 『조선 초기 전세 제도와 국가 재정』, 일조각, 1998.
조병로, 『한국 근세 역제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5.
급진(給陳)
정의
국가에서 오랫동안 경작되지 않은 진전으로 인정하여 토지에 대한 세를 면제해 주는 것.
개설
조선시대에는 해마다 토지를 경작하는 연작상경(連作常耕)이 보편화되었다. 이에 따라 세종대에 만들어진 공법(貢法)에서는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상에 정전(正田)으로 등록된 토지에 대해서는 진전(陳田)을 인정해 주지 않고, 해마다 세를 부과하는 것이 원칙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양한 형태로 진전이 발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세금 부과를 강행할 경우 많은 문제를 불러올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완전히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진전[全陳田]에 대해서는 경작자가 이를 신고하여 면세받을 수 있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해 놓았다. 이처럼 진전으로 인정하여 면세 혜택을 내려 주는 것을 급진(給陳)이라고 한다. 이후 진전에 대한 세 규정은 몇 차례 세부 규정이 변화되었으나, 대체적인 형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급진이 제정된 원인은 당시 농업생산이 불안정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국가 입장에서는 되도록 진전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였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원인으로 진전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수세를 강행할 경우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부담을 담당하는 사람은 극단적인 경우에는 토지를 버리고 도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더 많은 진전이 발생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셈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전에 대한 면세 규정을 두어 과도한 세 수탈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내용
진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경작자가 고을의 수령에게 직접 보고해야 했고, 수령은 진전 여부를 직접 조사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해야 했다. 관찰사가 다시 중앙에 이를 보고하고 중앙에서는 해당 사실을 조사할 관원을 파견하여 사실 여부를 조사한 후왕에게 보고하였다. 이후 최종적으로 왕의 결정에 따라 면세 여부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규정은 세종대에 정해졌으나[『세종실록』 2년 11월 21일], 실제 입법화된 것은 성종대인 듯하다[『성종실록』 5년 1월 25일].
변천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전세 수취는 비총제(比總制)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각 필지의 연분, 경작 현황 등을 매해 일일이 살피는 것이 아니라, 대체적인 작황을 판단하여 그에 맞는 세액을 각 군현 단위로 거두는 것이었다. 이때 급진은 기존처럼 경작자의 신고가 아니라, 왕이 군현 단위로 내려 준 결수를 토대로 지방 차원에서 세액을 조정하거나 면제해 주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철성, 『17·18세기 전정운영론과 전세제도 연구』, 선인, 2003.
녹과전(祿科田)
정의
관리들에게 부족한 녹봉을 보충해 줄 목적으로 나누어 주었던 전지.
개설
1257년(고종 44) 전지(田地)를 분급하여 부족한 녹봉에 대신한다는 분전대록(分田代祿)의 원칙을 마련하고,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세워 강화도의 토지를 관리에게 지급하였다. 개경으로 환도한 뒤에는 경기 8현의 전지를 분급하였다. 녹봉의 지급이 정상화된 다음에도 녹과전은 개편·보강되어 직전(職田)의 이름으로 지급되었고, 고려말 전제개혁(田制改革) 이후에도 한동안 존속하였다. 녹과전은 원칙적으로 수확의 1/10을 징수하는 개인 수조지(收租地)로, 과전(科田)과 같은 성격의 전지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시과(田柴科)는 문무 관리와 각종 직역 종사자의 복무에 대한 대가로 등급에 따라 수조지를 지급하는 제도였다. 976년(경종 1)에 처음 제정되어 1076년(문종 30)에 정비가 완료되었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12세기 초부터 붕괴되기 시작하여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이후 불법적으로 전지를 빼앗는 일이 광범위하게 자행되면서 제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게다가 몽골과의 전쟁으로 국가의 조세 수입이 격감하면서 관리들에게 녹봉을 제대로 지급해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특히 신진 하급 관리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정부는 이에 대해 1257년(고종 44) 전지를 분급하여 녹봉에 대신한다는 분전대록의 원칙을 마련하고, 급전도감을 세워 강화도의 토지를 관리에게 지급하였다.
내용
녹과전은 1257년(고종 44) 처음 지급되었다. 이후 개경으로 환도한 뒤 1271년(원종 12) 분전대록의 선례를 확대시켜 녹봉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관리에게 경기 8현의 전지를 분급한다는 원칙이 마련되었다.
녹과전을 경기 8현에 설치하였던 것은 관리들에게 경기의 땅을 주어 예우하고 편리를 제공하는 한편, 토지 겸병(兼並)과 농장(農莊) 발달이 성행하는 추세에서 녹과전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녹과전제도는 규정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오히려 권문세족들의 탈점 또는 겸병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녹과전은 부족한 녹봉을 보충해 주기 위하여 분급되었지만, 녹봉의 지급이 정상화된 다음에도 그대로 존속됨으로써 불완전한 상태로 녹봉과 함께 운영되었다.
1345년(충목왕 1)에는 경기 8현의 모든 토지에 경리(經理)가 행하여지는 가운데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건의에 따라 녹과전은 개편·보강되었다. 이에 직전(職田)의 이름으로 관료들에게 지급됨으로써 고려말 전제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한편 녹과전이라는 명칭은 1414년(태종 14)까지도 사용되고 있었다[『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녹과전의 분급 대상은 인종 때 정해진 문무반록(文武班祿)의 지급 대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문하시중부터 잡직승(雜職丞)에 이르기까지 28등급으로 나누어 지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녹과전 지급 결수는 전시과의 경우보다는 훨씬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녹과전은 경기 8현에 설치되었던 점으로 보아 지급받은 사람이 전주(田主)로서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에 근거하여 녹과전이 사전(私田)으로서, 전호제(佃戶制) 하에 병작반수(竝作半收)로 경영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확의 1/10을 징수하는 개인 수조지였다.
녹과전을 둘러싼 운영상의 문제는 조선 건국 후에도 지속되었다. 1398년(태조 7) 태조는 녹봉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호조(戶曹)의 급전사(給田司)에게 군자전(軍資田)의 일부를 녹과전으로 옮기도록 지시하였다[『태조실록』 7년 4월 3일]. 군자전은 민전(民田)으로 국가가 직접 전세를 거두어들이는 전지였다. 이 기사를 염두에 둔다면, 고려말 전제개혁 이후에도 녹과전은 민전 위에 설정된 개인 수조지로서, 과전과 같은 성격의 전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14세기 고려사회 성격 연구반, 『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민현구, 「고려의 녹과전」, 『역사학보』 53·54,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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