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제사(祭祀)’의 어원
우리 속담에 "남의 제사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한다"는 말이 있다. 지역마다 제철 음식이 다르고 풍습이 다르며, 집안마다 가풍이 다르기 때문에 남의 잔치나 제사에 왈가왈부[타인지제/연 왈리왈시(他人之祭/宴 曰梨曰枾)]할 수 없다는 뜻으로, 남의 일에 주제넘게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라는 속담이다.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근본 의미는 왜곡되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제사상과 관련된 용어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사의 근본 원리는 하나로 다 똑같기 때문에 지역마다 집안마다 다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지역마다 제철 음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집안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은 분명 서로 다를 수 있을 뿐이다. 진설하는 방법은 결코 다를 수 없다. 어찌 원리가 다를 수 있겠는가?
제사상과 관련된 여러 용어는 서로 중복되어 나타낸 용어들도 있다. 제사상의 용어에 따라 그 모든 음식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바꿔 말하면 그 용어 중에 하나만을 취해 진설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비약해서 제사의 의미(목적)에 부합되는 차[다(茶)] 한 잔을 놓고 드려도 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정한수[정화수(井華水)/이른 새벽에 길은 우물물, 정성을 들이거나 약을 달이는 데 씀] 한 사발을 떠 놓고 치성을 드리는 것과 같다. 제사를 드리는 근본 목적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럼 제사란 무엇인가?
제(祭)와 사(祀)는 둘 다 갑골문에 나타난다. 곧 두 가지 의미로 나뉘어 있었다는 방증이다. 제(祭)의 갑골문은 입/구(口)가 오른쪽으로 누워있는 자형과 열/십(ㅣ)이 세 마디로 끊어진 변형체 그리고 오른손/우(又)의 회의자이다. 입은 말하는 일과 먹는 일을 나타낸다. 오른쪽으로 기울여 나타낸 것은 우꾼우꾼 돋우는[우(右)] 의미를 덧붙이기 위한 변형이다. 그러면 희생되어 끊긴 먹거리들의 얼[기울인 구(口)와 마디진 십(ㅣ)]을 나타낸다. 또한 십(ㅣ)과 우(又)가 이어지며 모인 자형은 다스릴/윤(尹)이기도 하다. 그래서 글말 ‘제’를 ‘제겨잇다(두 끈의 끝을 서로 어긋매껴대고 한 끝씩 꼬부리어 옭매어 잇다)/제기다(소장(訴狀)이나 원서(願書)에 제사(題辭)를 쓰다 --> 사뢰다)’로 보면, ‘희생(먹거리)의 못 다 이룬 얼[기울인 구(口)와 마디진 십(ㅣ)]을 제겨이어 다스려[윤(尹)] 제기다(축문을 쓰다/사뢰다)[제]’는 얼개이다. 즉, 먹거리의 희생을 기리고 그 못다 이룬 얼을 나의 얼과 이어 함께 이루겠다는 다짐으로 위로하는 의식이다. 한걸음 더 들어가면 마디마디 차례차례 이어가는 얼[마디진 십(ㅣ)]의 진행상황을 사뢰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祀)의 갑골문은 시(示) 그리고 정(丁/ㅁ)과 사(厶)로 이루어진 자형의 회의자 또는 형성자이다. 즉 ‘참되게 사르며(키질 조리질하며)[사(巳)] 사뢰어(삼가 말씀을 드리다, 아뢰다)[사] 보이다[시(示)]’는 얼개이다. 뱀이 허물을 벗으며 거듭나듯, 뱀/사(巳)로 변형된 까닭이다. 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의 마디마디를 사뢰는 의식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제(祭)의 의미가 희생물을 받치는 의미로 변질되자 보다 구체적인 의미의 사(祀)로 구분지어 나타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또는 ‘제물(제 몸에서 우러난 물 --> 희생의 얼)을 제대로 제겨이어[제] 사르며 사기어(새기어) 사뢰다[사]’는 준말을 각각 구분하여 나타낸 한말글이 제(祭)이고 사(祀)일 수도 있다. 제사(祭祀)를 일컫는 우리말이 없다는 것이 그 반증으로 충분하다. 어찌 글자는 있는데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우리말에 한자어가 많은 이유의 역설(逆說)이다.
모든 존재의 만물에 성령(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신앙)이 정령사상이고 정령신앙이다. 그 정령들을 서로 이어주며 소통시키는 것이 무당(샤먼)의 일이다. 정령사상이 샤먼니즘을 낳았고 또는 반대로 샤먼니즘이 애니미즘을 낳았다. 서로의 소통은 결국 얼잇기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생명은 또한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굴레(원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먹잇감이기도 하다.
먹이가 된 그 희생물의 영혼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 영혼을 달래주고 어르며 서로 하나 되는 얼잇기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 희생은 나의 <하나님(된 사람)되기(우리의 존재이유)>의 희생이다. 희생과 내가 하나 되는 얼잇기를 통해 다시 나와 함께 거듭 태어나 나와 함께 존재이유(하나님되기)를 실현하는 동반자가 됨으로서 그 희생이 위로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준 이유이기도 하다. 그 요식행위(절차)가 제사이고, 제사를 가장 단순화 시킨 것이 식사예절이고 식사행위이다. 한말 ‘진지’가 의미하는 뜻이다.
춤은 내가 천지 시공을 휘저으며 추어 마음(얼)을 무롸내는 것이고, 노래는 내가 노(얼)를 일어[놀] 내어[내] 천지를 울리는 것이다. 서로 얼을 일으켜 잇기를 하는 얼잇기(짝짓기)의 다름 아니다. 나아가 일은 마음을 일어 내는 것으로 나의 천명을 일어 나의 소명과 얼잇기하는 행위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모든 행위 그 움직임은 ‘우리어 마음을 무롸내어[움] 지어가며[직] 이어가는[이는]’ 행위로서 세상과 짝짓기 하는 일이다. 좋은 결실은 엑스터시 그 황홀경을 이루며 얼을 발사하여 얼잇기를 완성한다. 얼잇기의 결과는 새로운 탄생(잉태)을 낳는다. 창조의 일로서 스스로 창조자가 되는 일이다. 된 사람(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움직이며 살아가는 과정 그 마디의 차례에 그 마디의 됨됨이를 보여 된 사람이 되는 염원을 담아 근원의 조상에게 아뢰며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제사이다.
제사상에 기본적으로 올리는 음식은 홀수로 맞추는 것이 원칙이고, 대체로 5열로 상차림을 한다. 모두 홀수가 원칙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홀수는 양(陽)의 수(數)이다. 양(陽)은 태양이 일어 오르듯, 얼이 일어 자라는 확장의 개념이 담긴 뜻이다. 곧 된 사람이 되기 위해 얼을 사르는 과정의 다름 아니다. 제사는 그 과정을 보여 주며 사뢰는 행위이다. 당연히 그 뜻에 맞추어 홀수로 차리며 공명하기 위함이다. 제사의 근본 의미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참고적으로 감의 씨앗에 대한 잘못 설명된 의미를 다시 고쳐 덧붙이고자 한다. 감의 씨앗을 직접 확인해 본 결과 그 수는 여섯이 아니라 감마다 각양각색이었다. 하나부터 여덟 개까지 확인했다. 그 외의 수도 있을 수 있다. 감나무 자체가 시집을 들이는 나무이듯, 본래는 여섯 개의 씨앗이었는데 접붙이며 씨앗의 수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접붙이며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방증이다. 그런데도 굳이 여섯 개로 의미 부여한 까닭은 평균적인 수(數)로 그 의미를 짜 맞추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결국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고 사랑하여 새롭게(다르게) 거듭나는 의미이다.
한걸음 더 들어가면 자식의 천명은 각자 나와 다르게 받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나와 다른 새롭게 거듭난 자식으로 대(代)를 이어가는 뜻이다. 모두가 뜻은 된 사람이 되는 것이지만 천명은 각기 다르다는 뜻이다. 따라서 부모의 뜻은 자신이 못다 이룬 자신의 천명(가업)을 자식이 실현(청출어람)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천명대로 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모의 바람대로 자식을 강요해선 결코 안 된다는 경계의 암시도 담은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자식은 서로 다른 부모의 얼을 바탕으로 부모와 다르게 태어난 존재이다. 부모의 우성(優性)으로 거듭난 새로운 존재로서 자식의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