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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지방교회 고무줄 늘리기 놀이’를 비평함
사계 (2012.12.15. 14:20)
paul 12.12.15. 03:54
사계 님 맨 마지막 언급, ‘열 처녀 안에 가라지가 포함됐다.’는 결론은 마치 고무줄을 길게 잡아 늘였다가 놓으심으로 “탁” 하고 원래 위치로 돌려놓은 것이네요. 물론, 저는 그 결론에 이견이 있는 것이구요. 정훈택 교수님 취지는 열 처녀가 “참된 믿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당연히 포함되지 않습니다.
저는 본인도 같은 개혁신학자이심에도 “‘오직 믿음’을 가지고 ‘오직 성경’ 을 손상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신 정 교수님 고뇌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이 {신학지남}에 발표하신 몇 편의 논문은 오늘날 한국 교계가 왜 ‘행위’라는 개념에 대해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는지에 대한 배경 검토도 포함돼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 교계가 외치는 ‘오직 믿음’ 개념은 ‘행위가 가미된’ ‘오직 믿음 개념’으로 보완돼야 한다.”는 것이 이 분 결론입니다.
“마치 고무줄을 길게 잡아 늘였다가 놓으심”이라…. 나는 고무줄을 늘인 적이 없는데….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참 신자를 뜻(표상)하는 그림이 아니라고 처음부터 말했는데….
“열 처녀는 ‘참된 믿는 이들’이라는 것”이라…. 정확히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참된 믿는 이들’이라는 것인데, 이런 비유 해석은 마태복음 24장 <도적 비유>에서 ‘도적놈은 예수님’이라고 해석하는 고무줄 늘리기 식 해석, 이솝우화 식 해석과 똑같다는 사실을 납득하는 게 김바울 님에게 왜 그토록 어려운지 안타깝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 <그물 비유>, <열 처녀 비유>는 ‘종말에 관한 비유’입니다. 즉, ‘천국의 시작과 끝’에 관한 비유입니다. 물론, 천국의 끝은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알곡 씨앗들이 뿌려진 것은 천국의 시작입니다. 어부들이 바다에 그물을 던진 것은 천국의 시작입니다. 혼인잔치가 준비되는 것은 천국의 시작입니다.
알곡 씨앗들 속에 농부의 원수는 가라지 씨앗들을 뿌려 가라지들은 알곡들과 함께 자랍니다. 그물에는 좋은 물고기들과 함께 못된 물고기들이 걸립니다. 슬기로운 처녀들과 함께 어리석은 처녀, 즉 악한 처녀들이 있습니다.
추수는 천국의 끝을 예고합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건져 올린 것은 천국의 끝을 예고합니다. 신랑이 온 것은 천국의 끝을 예고합니다.
ㅡ지금부터 하는 제 풀이들에서 어떤 부분이나 어떤 단어를 가지고 ‘paul 님이 지방교회 성경해석의 주특기인 고무줄 늘리기 식, 이솝우화 식 알레고리 해석을 할까?’ 염려됩니다.ㅡ
가라지들은 단으로 묶여 ‘농부 집안이나 이웃들 집안을 따뜻하게 하는 연료’와 ‘빵을 굽거나 생선을 굽는 연료’로 쓰입니다. 알곡들은 맷돌에 갈아 반죽돼 불에 구어 농부 집안이나 이웃들 밥상에 놓입니다.
어부들은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먹지 말라.”는 모세 율법에 따라 유대인이 식용으로 먹지 않는 부정한 물고기, 쓸모없는 물고기들은 바다로 버립니다. 그래서 부정한 물고기들은 생명을 연장합니다. 또한 어부들은 좋은 새끼 물고기들을 ‘큰 물고기로 자라라.’고 바다로 내던집니다. 여러 큰 그릇에 담은 좋은 큰 물고기들은 불에 구어 유대인들 밥상에 놓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혼인잔치 집 밖에 버림을 당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혼인잔치에서 신랑 신부와 축하객들과 함께 좋은 빵과 좋은 생선을 나눠 먹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풀이 끝.)
‘이 세 비유의 공통점은 종말에 관한 비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가라지들’과 ‘못된 물고기들’과 ‘어리석은 처녀들’ 공통점, 즉 똑같은(同) 점을 생각하면, 그 똑같은 점은 무엇입니까? ‘버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라지들은 알곡들과, 못된 물고기들은 좋은 물고기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과 ‘함께(同)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산상보훈>에서 버림을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내 곁에서) 떠나가라.”는 선고를 받습니다. 물론, 어리석은 처녀들 역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선고를 받습니다. 그런데 “정훈택 교수님 취지는 열 처녀가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참된 믿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라…. 누가 고무줄을 늘이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일까요, paul 님일까요?
<산상보훈> 주님 선고에서 “내게서”라는 말이 뜻하는바 ‘거짓 선지자들이 주님 곁에 있다.’고 해서 그들은 거듭난 자, 즉 양이었을까요? 아니면, 양의 탈을 쓴 늑대였을까요? 또는 양과 비슷한 염소였을까요?
주님께서는 “양으로 거듭났는데, 늑대로 다시 거듭났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혹은 “양으로 거듭나게 했는데, 잘 자라지 못한 기형의 양이라서 늑대나 염소로 다시 거듭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양으로 거듭났는데, 늑대로 다시 거듭났다.’거나 ‘양으로 거듭나게 했는데, 잘 자라지 못한 기형의 양이라서 늑대나 염소로 다시 거듭나게 하겠다.’는 교리는 성경이 지지하는 교리인가요? 성령으로 거듭남이 이와 같이 힘이 없는 거듭남인가요?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힘이 없는 분이신가요?
언제까지 paul 님 고무줄 늘리기 놀이와 함께 해야만 할까요? 언제까지 이단 지방교회 사이비 사설에 하나하나 반론을 펴야만 할까요?
paul 님이 제 성경해석을 고무줄 놀이로 표현해 주셔서 고맙기는 하답니다. 그런데 paul 님과 제 고무줄 놀이 차이점은, 제 고무줄 놀이는 paul 님이 늘여놓은 고무줄을 “탁!”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 고무줄 원형을 복원하려고 애쓰는 고무줄 놀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나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며 간교하게도 저희들과 “주 안에서 형제 됨”을 강조하시는 paul 님 고무줄 놀이는 고무줄을 늘이기만 하는 고무줄 놀이라는 점입니다.
paul 님은 고무줄 원형을 복원할 줄 모르는 분이십니다. ‘고무줄을 너무 늘이다 보면 끊어진다.’는 사실도 모르는 분이십니다. 끊어진 고무줄을 매듭지어 잇거나 하는 차선의 방법도 모르는 분이십니다.
“개혁신학자이심에도 ‘오직 믿음’을 가지고 ‘오직 성경’ 을 손상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신 정 교수님 고뇌”라….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잘못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개혁신학자들 “오직 믿음”이 “오직 성경”을 손상한 적이 있었던가요?
개혁신학자들께서는 “믿음은 순종(행함)을 낳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김바울 님이 이른바 정훈택 교수님 “고뇌”를 언급하심으로써 지방교회 고무줄 늘리기 이설, 지방교회 이설을 포장하는 일은 늑대가 양의 탈을 쓰는 행위와 한가지(同)입니다.
물론, 한국교회에서 “복음주의 신학자”로 자처하거나 “복음주의 교회 목사”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로 “오직 성경”을 손상한 적은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개혁 신앙을 따르는 우리는 “믿어 순종케 하나니,”라는 바울 사도 [로마서] 말씀에서 오직 “믿어”만 말하는 그들을 “싸구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