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
김병권 수필가 추모
대표작 : 「오월의 나비」 「숨어서 피는 꽃」
1. 오월의 나비
ㅡ 김병권
나이가 들어서야 추억의 진미를 안다고 했던가.
내 벌써 종심(從⼼) 고개를 넘고 보니 지나온 날들에 대한 갖가지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가슴속에서 회억(懷憶)의 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나는 곧잘 아득한 세월의 강 저 너머로 홍안(紅顔)의 젊었던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 누구인들 가슴 아린 추억거리가 한두 가지쯤 없을까만 참으로 삶과 죽음의 구획마저 가늠할 수 없었던 전쟁 마당에서의 회억만큼은 절실하지 못하리라. 북한 공산군의 기습 남침으로 야기된 6‧25 전란이 한창일 때 나는 금강산이 내려다보이는 동부전선 최전방 고지에서 보병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아무리 무쇠처럼 단단한 젊은 몸이라고 하지만 몇 날 몇 밤을 공방전투(攻防戰鬪)로 시달리고 나면 그야말로 온몸이 녹초가 되어 아무 데서나 곯아떨어지고 만다.
1952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간밤의 격전으로 피로에 지친 나는 잠시 참호 속에서 낮잠에 빠져 있었다. 아니 그냥 졸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적할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한 총소리가 들리더니 뒤미처 소대원 한 사람이 전사했다는 무전 보고가 왔다. 정말 눈 깜빡할 사이의 일이었다.
전쟁 마당에서야 항용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날따라, 아니 오늘날까지도 내 마음을 애절하게 에이는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그 병사야말로 절절한 심혼(⼼魂)의 감동으로 시를 쓴 시인이며, 마지막 선혈(鮮⾎)을 녹여 시어(詩語)를 토해낸 격정(激情)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 남쪽 지방에는 이미 온갖 백화가 만발했을 때이건만 38선보다 더 북 쪽에 위치한 전선 고지에는 아직 을씨년스러운 냉기(冷氣)가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응달진 골짜기에는 덕지덕지 백설기 같은눈이 쌓여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듯 한랭기온(寒冷氣溫)이 가시지 않은 살벌한 고지에 노랑나비 한 쌍이 찾아온 것이다. 졸린 눈을 간신히 뜬 채 적진을 경계하고 있던 L병사는 “아- 저 나비!” 하면서 상체를 일으켜 나비를 잡으려는 순간 적의 총탄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 당시의 적은 고도로 숙련된 저격수들을 곳곳에 배치해 놓고 있어 우리의 허점이 조금만 노출되면 영락 없이 공격해 오는 장기(⾧技)를 가지고 있었다
찰나적인 순간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너무나도 철없는 병사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싸움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그놈의 나비 때문에 죽다니….”
전우들의 원망 어린 애곡(哀哭)의 넋두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 역시 “바보 같은 녀석…”을 연거푸 뇌이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니 그 병사야말로 누구보다 시심(詩⼼)이 풍부했던 문학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비의 전생은 번데기다. 그는 한여름 내내 지친 몸을 추스르며 고치 속에서 안식을 취한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안식이 아무리 안락무량(安樂無量)하다 하더라도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자유에는 비기지 못하리라.
불현듯 자유가 그리워진 그 병사는 전쟁 놀음에 미친 인간들을 비웃으며 그 나비들에 이끌려 애틋한 향수의 나라로 줄달음질 쳤던 것이다. 몸은 비록 전쟁이란 사슬에 매어 옴짝달싹 못한다 하더라도 전쟁을 혐오하는 그의 마음은, 벌써 두둥실 나비들과 어울려 찬란한 평화의 나라로 비상(⾶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아- 저 나비!”를 남기고 간 그 병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시의 본질은 발견이다”라고 설파한 영국 시인 새뮤얼 존슨의 말처럼 그는 예상치 못한 ‘발견’을통해 새로운 경이와 환희를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 병사는 산새마저 피신해버린 황량(荒涼)한 전야(戰野)에 평화의 여신인 양 한 쌍의 노랑나비가 너울거리는 것을 보는 순간, 자신 속에 내재한 뜨거운 감동을 발견했던 것이다.그리하여 그내면 깊숙이 침잠(沈潛)한 아련한 추억을 끄집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동구 밖 자드락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개나리와 산 벚꽃들, 그리고 온통 앞산과 뒷동산을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가 흐드러질 무렵이면, 뒤꼍 장다리 밭에는 수많은 나비 떼가 몰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옆집 ‘순이’와 장다리 밭을 헤집으며 하루 종일 그 나비 떼를 쫓던 추억이, 그 순간 가슴속 밑바닥으로부터 밀물처럼 밀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 병사의 망막에 비친 한 쌍의 노랑나비는 단순한 나비가 아니라 바로 그 ‘순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오버랩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뜨거운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던 열정과 또 장다리 밭에 얽힌 수줍은 추억을 반추해 보고 싶은 그 마음 바탕이야말로, 바로 영혼의 불꽃으로 달구어낸 시심(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봄이 물러가는 5월의 길목에 서면 나는 곧잘 그때의 상념들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 저 나비!” 이 외마디 서사시는 반세기의 시공(時空)을 격(隔)한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서 짜릿한 감동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출처: 한국 현대수필 100년, 연암서가)
2. 숨어서 피는 꽃
우리집 정원에는 지난 1년 동안 시들했다가 생기를 되찾은 수국 한 그루가 있다. 나는 꽃나무의 생리를 잘 몰라 별로 손질해 주지는 못했지만 이 수국은 지난해 삿갓 모양의 넙죽한 향나무 밑에서 호된 홍역을 치러 하마터면 죽을 뻔한 것을 아내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옮겨 심어 가까스로 기사회생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는 꽤 싱싱하게 자랐는데도 다른 집의 풍성한 수국보다는 포기가 적고 나이는 그럭저럭 5년째로 접어 든다. 다른 수국 같으면 벌써 꽃송이가 만발했을 때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야 겨우 한 송이 피었는데 그 꽃의 빛깔은 바로 내가 좋아하는 연보랏빛이었고 그 크기는 제법 밥사발만 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겨우 한 송이 핀 꽃이 올바른 제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 무성한 잎새에 가려진 채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어 사람의 손이 잎새를 헤쳐주지 않고는 눈에 띄기조차 어려웠다. 옆에 있는 옥잠화ㆍ실비아ㆍ채송화ㆍ장미ㆍ목단ㆍ국화 등이 저마다 요염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데 비해 혼자 외로이 외면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측은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꽃들과 미색을 다투지 않고 홀로 잎새 속에 숨어서 피어있는 자태는 사뭇 고고하기까지 했다.
꽃나무도 감성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지난해 여름 그 홍역을 치른 후 제 나름으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탓인지 저렇듯 자신의 모습을 움츠리는 겸허 속에는 꼭 까닭이 있는 것만 같았다. 주변에 피어있는 뭇 꽃들이 화려하면 할수록 나의 마음 쓰임은 저 무성한 잎새 속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수국에게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인생살이도 이와 마찬가 지가 아닌가.
저마다 난체하려 들고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얼굴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씁쓸한 현대인의 경박한 생리를 생각하다가 문득 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수국 앞에 와서는 겸허하게 자신을 도야하는 은자의 교훈을 느끼게 된다. 정금미옥(精⾦美⽟)은 반드시 열화 속을 거쳐 단련되어야 이루어지듯이 죽음의 경지에까지 도달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생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쇠붙이나 돌덩어리보다도 약한 자신인 줄안다면 어찌 함부로 고개를 쳐들고 교만을 피울 수있으랴! 그런 의미에서 온상의 화초처럼 길러져 강한 햇빛만 받아도 시들해지는 저 모든 꽃들이 어찌 신산인고(⾟酸忍苦)를 다 겪은 수국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랴 싶다.
나는 문득 '늙은 학은 아무리 굶주렸어도 식음이 오히려 한가하니 어찌 닭이나 집오리처럼 아웅다웅 먹이를 다투랴!' 하는 옛 현인들의 명구를 뇌이면서 저 수국의 겸허한 모습에 학의 고고한 자세를 느끼기까지 했다.
현대인들은 아무리 보아도 채송화나 분꽃이나 나팔꽃처럼 너무 예민하고 직설적인 것 같다. 참 인생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닌데, 좀 더 은인자중(隱⼈⾃重)하여 인생을 관조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저 수국으로 하여 더욱 절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밝은 태양이나 촛불도 실은 스스로 숨어서 몸을 태우고 있는 것이지만 그 덕망의 빛이 너무나 강렬하다 보니 저렇듯 만물의 눈을 부시게 하는 것이 아닌가.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란 말도 이와 같아 옛 선비들도 숨어서 도를 닦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지만 닦으면 닦을수록 그 빛이 번져 나가는데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한때는 은자였던 저 유명한 강태공이나 제갈량 같은 이의 입신양명도 이런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자신의 처세에 급급한 나머지 항시 초조와 불안에 쫓기는 현대인의 생활은 한마디로 말해서 강박관념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공식적인 스케줄에다 빈틈없는 각본으로 연출해야 하는 나날 속에 휴식마저 강박관념에 얽매이다 보니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가 없다.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각종 노이로제 우울증 정신질환 속에서 현대인의 심신은 몹시 지 쳐있다.
생활의 여유,이는 반드시 바쁜 일에 쫓긴다고 해서 빼앗기는 것은 아니다. ‘동중정(動中靜)’이란 말이 있듯이 마음의 여유를 지닌 사람은 저 시끄러운 광장의 한가운데서나 포화가 들끓는 전장 마당에서도 오히려 한가한 마음을 가꿀 수있다. 이러한 심경의 취사는 자기의 능력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한가로운 마음의 경지를 이룩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한 다하더라도 사물의 심부름꾼 노릇밖에 못하여 결국은 자아 상실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진실로 큰일을 하려면 사물의 바깥 세계에 서서 사물을 볼 줄 아는 경륜을 닦아야! 할것이다.
잎새에 가려지고 고개마저 떨구고 있는 한 송이 수국 속에서도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철리(哲理)를 느낀다면 비록 번잡한 곳에서 시달리고 있더라도 마음은 털끝 하나 물들지 않는 쾌락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끝)
김병권(⾦秉權. 1931년 8월 3일 ~2023년 2월 11일)
아호: 죽헌(⽵軒). 1931년 8월 3일(실제 1930년 10월) 강원 평창 출생. 1949년부터 평창군 미탄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자원 입대했다. 동부전선 소대장, 육군 참모총장 홍보관. 주월 한국군사령부 대변인을 거쳐 육군대령(정훈)으로 예편했다. 단국대학교 법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로 1971년 수필 「남국의 향수」로 『월간문학』(수필)에서 등단.
1974-1980년 강릉문화방송 상무이사, 1980-1988년 설악관광 대표이사, 1988-1990년 대해기업 회장을 역임했으며, 숙명여대 및 중앙대 사회교육원. KBS 방송문화센터 수필창작 강사. KBS 라디오 칼럼 집필위원. 국방일보 객원논설위원 역임.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회장. 한국기독교수필문학회장(1992-2002).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2007-2011).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2005-2006).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을 역임.
수필집으로 『속아주는 멋』(1981) 『물구나무 인생』(1989) 『오월의 나비』(2000) 『걸림돌과 디딤돌』(2009) 『앉아서 꿈꾸는 산』 『생각하는 눈』이 있으며 6ㆍ25 전쟁 영웅전기 『세월의 이끼에 가려진 보석』(2010)이 있다. 화랑무공훈장 (1968)을 비롯 노산문학상(1989). 한국수필문학상(1996)과 한국문학상. 수필문학대상. 신곡문학상. 순수문학대상. 한국전쟁문학상(1990). 단국대문학상. 한국문화예술 대상. 산귀래문학상. 올해의 수필인상. 원종린문학대상. 한국수필공로상(2022)을 수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