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를 키우며
김선희 汀彬 세상에 이런 일이! 매미 덕분이다. 장마가 이어지다 반짝 해가 난 8월 어느 날, 매미가 짝을 찾느라 온몸으로 소리를 내고 있다. ATM에 일을 좀 보려고 평소에 다니지 않던 아파트 단지 안 길을 걸어가는데, 맴~ 맴~ 난리가 났다. 소리만으로도 참매미인 건 알겠는데, 아주 가까이서 들리니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쪽 팔을 뻗으면 닿을만한 벚나무에 앉아서, 바르르 바르르 쉼 없이 몸을 흔들며 자기 존재를 알리고 있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 나는 손을 뻗어 매미를 잡으려다 말고 ‘일시 정지’가 되고 말았다. 분명 벚나무인데. 소나무가 앙증맞게 자라고 있다. 이제 겨우 하나 밀어 올린 줄기에 함박꽃 핀 것처럼 솔잎을 한 무더기 달고 있을 뿐인 아기다. 처음엔 솔잎 색깔도 여리고 기껏해야 한 뼘 정도 자란 소나무가 너무나 기특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세상에나! 이렇게 안쓰러운 벚나무는 또 처음이다. 벚나무 밑둥에 톱밥처럼 나뭇가루가 쌓여있는 것을 보면서 ‘참나무도 아닌데 장수풍뎅이가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가 있나 보다 생각할 만큼 많이 쌓여있어 꼼꼼히 둘러보게 되었다. 줄기가 부풀어 오른 벚나무는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느라 진을 줄줄 흘리고 있는데, 소나무는 제 몸의 네 배나 되는 뿌리를 벚나무 속으로 뻗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벚나무는 소나무 뿌리 때문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면서 나뭇가루가 밀려 나와 떨어져 쌓였다. 줄기와 가지 사이에 자리를 잡은 소나무는 땅 대신 벚나무에 터를 잡느라 야리야리한 모습 하고는 다르게 폭군이 되었나 보다. 캥거루 주머니에 망아지가 사는 꼴이다.
소나무는 원래 강인한 생명력과 탁월한 유전자가 있는 나무다. 햇빛만 풍부하면 척박한 땅은 물론 돌무더기 틈이나 바위에서도 자란다. 자가수정을 피하려고 암꽃은 새로 자란 가지 끝에 매달고 다른 소나무의 수꽃을 받아 수정한다. 암꽃보다 일주일쯤 뒤에 3~4cm 아래에서 수꽃을 피우는 작전으로 열성유전자 탄생을 피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람에 의해 수분이 일어나다 보니 가능한 일이겠으나, 바람이 어디 얌전하기만 할까. 그래서 그런지 간혹 암꽃이 내려와 있고 수꽃이 꼭대기에 가 있는 경우도 보인다. 혹여 근방에 소나무가 없어 수분을 못 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진즉 발견했으면 소나무를 들어내 땅에 심었을 텐데, 너무 늦게 발견한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소나무를 온전히 빼내자니 벚나무가 무너지겠고, 벚나무를 좀 덜 상하게 하자니 소나무 뿌리를 캐낼 수가 없고 난감하다. 소나무만 보자면 대견하고 기특한데, 벚나무는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버텨본들 끝내는 산산이 부서져 무너지고 말 것이다. 어느 곳 하나 막힘 없는 넓은 아파트 화단에서 햇볕 잘 받으며 쑥쑥 자라다가 난데없는 시련을 속수무책으로 당한 모습을 보면서, 사람 사는 세상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힘내”라는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상을 어찌 혼자 힘으로만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도움 준 상대를 죽이면서까지 그러는 건 아니다 싶다. 저 소나무가 본의로 그런 게 아니라 바람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묘안이 없다. 오늘도 소나무를 키우며 눈물 흘리는 벚나무 앞을 서성인다.
김선희 汀彬 kimsunny0202@hanmail.net 『한국수필』등단 (2006), 생태역사문화체험 자연에서 대표,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경기도문학상 수상 (2014),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2017) 수필집 『보석 步石』, 동시집 『천사를 위하여』, 『독서논술 낙서처럼 즐겁다』 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