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조암
거조암(居祖庵)
몇 번씩이나 숨을 못 쉬게 사람을 놀래키는 절이다. 우선은 그 엄청난 나한들이 위엄이 아닌 친근감과 다양함, 경쾌한 발랄함으로 숨을 죽이게 하고, 밖에 나오면 뜰에 가득한 햇살에 스민 좋은 생기가 찌르듯이 몸안으로 들어와 숨을 죽이게 된다.
뜰의 한 줌 꽃들이 품는 서 말이나 되는 생기가 하늘로 쨍하니 퍼진다. 사흘을 빌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영산전 나한상의 영험함이 먼저 꽃들에게 통하나보다. 나한의 기운과 꽃의 기운과 맑은 공기의 기운과 함께 어우러져 소리없는 축제를 한판 벌이는 듯하다. 고려조 목재 건축물 영산전이 할아버지처럼 편안한 모습으로 축제 속에 몸 담근 나를 내려다 본다.
소재지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622
방문일 : 2020.10.7.
1. 거조암
창건 당시에는 거조사(居祖寺)라 불렀다. 근래에 은해사의 말사로 편입되어 거조암이라 불리고 있다. 거조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銀海寺)의 산내 암자로 팔공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다. 693년(효소왕 2)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경덕왕 때 왕명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809년 창건한 본사 은해사보다 앞선다.
거조암은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이라 하나, “선종(禪宗)의 조사 스님인 조(祖)가 거(居) 한다”라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정혜결사를 처음 열었던 선사찰(禪寺刹)이었고, 진언과 참법에 기초한 기도 도량으로 부각되었다가 1799년 『범우고』 집필 이전에 폐사되었다. 그 후 다시 중창하여 영산전의 오백나한을 중심으로 한 나한 기도 도량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정혜결사(定慧結社)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론(定慧雙修論)으로 세속화되고 정치와 결탁한 타락한 불교를 지양하고 선(禪) 수행에 전념하자는 불교 개혁 운동이었다.
거조암은 고려시대에 지눌(知訥)이 송광사에 수선사(修禪社)를 세워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룩하기 전에 각 종파의 고승들을 맞아 몇 해 동안 수행했던 사찰이다. 1188년(명종 18) 봄 거조암 주지 득재(得財)가 지난 날 경사를 기약했던 수행자를 모으고, 당시 예천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 머물러 있던 지눌을 청하여 이 절에서 처음으로 정혜결사를 열었다. 그 뒤 이 결사는 송광사로 옮겨 갔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靈山殿)과 2동의 요사채가 있다. 영산전 안에는 청화화상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빌려 앞산의 암석을 채취하여 조성했다는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상언(尙彦)이 그린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 중 법계도(法界圖)를 따라 봉안된 나한상은 그 하나하나의 모양이 특이하고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영산전 앞에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3.6m의 삼층석탑 1기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산루를 오르면 바로 영산전이다.
*영산전 바로 앞에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다. 경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2.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永川銀海寺居祖庵靈山殿)
국보 제14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고려 시대에 처음 지어진 불교 건축물이다. 영산전은 거조암의 본전이며, 해체 보수할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우왕 원년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다고 한다. 그 안에 526분의 각기 다른 표정의 석조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영산전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국내에 6곳밖에 없는 고려시대 목조건물로로서 규모가 가장 크다. 거조암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柱心包式) 맞배지붕건물이다. 불규칙하게 채석된 장대석(長臺石)과 잡석(雜石)으로 축조되어 측면 중앙에 간단한 돌계단을 가진 비교적 높다란 기단 위에 선 길쭉한 건물이다.
공포의 형태나 마룻도리를 받는 솟을합장의 곡률[曲率: 굽은 정도]이 작은 점 등을 전라남도 강진의 무위사극락전(無爲寺極樂殿, 국보 제13호)보다 오래된 양식으로 보는 근거로 삼는다. 측면 외벽 위아래로 2층 창이 나란히 있어 채광을 해결한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럽고 풍부한 빛이 넓은 영산전 내부를 밝혀줘 나한상을 한층 경쾌하게 보이도록 해준다.
*삼층석탑에서 영산루를 바라보았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석가여래불상을 협시하고 있다.
3. 나한
영산전에 모셔진 석조나한상은 흔히 ‘오백나한’으로 불리지만, 아난과 가섭을 비롯한 석가모니부처의 10대 제자와 16나한을 합친 526위이다. 거조암을 창건했다는 법화화상이 신통력을 발휘해 각 불상이 스스로 제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나한(羅漢) 혹은 아라한(阿羅漢)은 인도어의 아르한(Arhan)을 음역한 말이다. 아라한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 성인으로 더는 윤회를 하지 않아 공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나한들은 원래 세속 잡인이었으나 불타의 설법에 감복해 삶의 진리를 깨닫고 오도성불(悟道成佛)한 불제자들이다.
오백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이후 칠엽굴에 모여 경전을 편찬한 500명의 아라한을 상징한다. 이 때문에 불자들은 수행으로 성불한 오백나한을 ‘덕이 매우 높은 성자’로 받들고 예배한다.
거조암 오백나한들은 인근 도둑 떼들이 스님의 신통력으로 모두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로 변장한 스님이 소를 훔치려 했던 500여명의 도둑을 교화시켜 깨닫게 했다는 것이다. 세속의 누구라도 수행하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극락도에 따라 배열된 오백 나한은 조선 후기 작으로 추정되는데, 각각의 높이는 40∼50㎝ 정도이다. 나한상은 모두 다른 자세,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오백나한은 각기 다른 모습과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은 성자”이기 때문이다. 원래 세속 잡인이었던 신분에 맞게 나한은 다른 불상과는 달리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나한의 표정은 천진스럽고 익살맞고 해학적이다. 법당을 메운 오백나한이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기다리는 듯 즐거운 표정이다. 보통 법당과는 달리 중앙 문으로 들어서야 하는데, 한꺼번에 만나는 왁자한 기운은 마치 축제 현장으로 온 것같은 착각이 일 정도다. 최소한의 특징을 중심으로 만들어낸 조각상은 숙련공의 조각이 아니라 초보자가 생동하는 기운을 담아 만든 서툰 습작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오히려 진지함보다 가벼운 기운을, 엄숙함이 아닌 발랄한 기운을 불어넣은 것 같다. 나한의 밝은 기운에 압도되지만 점차 그 기운 속에서 나도 밝아지는 듯한 느낌, 그래서 불도가 법문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내 몸 안에 있다고 알려주는 듯하다.
아마 이런 기운이 사흘만 빌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나한의 영험함이 아닌지 모르겠다. 삶을 긍정적으로 보게 만들어 주는 밝은 기운을 받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부정을 긍정으로 보지 않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
거조암은 매년 나한대재(羅漢大齋)를 봉행한다. 나한대재는 고려시대부터 국난극복을 기원하며 봉행하다가, 조선시대 이후 맥이 끊어진 것을 2005년부터 매년 거행하고 있다.
올해 1327돌을 맞은 거조암은 2020.10.31. 나한대재를 거행했다. “거조암은 나한신앙의 본거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결사 정신이 살아있는 도량”이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러 신문기사 자료 및 기타 자료
산신각
글을 쓰며 다시 보니 거조암이 아니고 거조사이다. 일주문의 현액이 '팔공산거조사'이고, 나한대재를 알리는 현수막에도 거조사라 되어 있다. '거조사'가 '거조사'라 부르기로 했다면 거조사라 부르는게 맞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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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수리사의 나한전 모습이다. 나한의 모습이 엄숙하고 무겁다. 거조사의 나한이 왜 특별한지 비교가 된다.
첫댓글 얼마 전 포항에 갔다 오다가 군위 삼존불에 들렸습니다. 다음 달 초 포항에 또 내려갈 일이 있는데, 그땐 영천 거조사를 찾아갈 생각입니다. 파란 하늘과 툭 트인 공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뻥 뚫렸습니다. 오백나한과 여러 건물과 현판 글씨는 들렸을 때,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거조사는 정말 강렬한 인상을 주는 절입니다. 크지도 않고, 건물은 단순하면서도 매우 고풍스러워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영산전을 들어가는 순간, 통풍 통광이 잘되는 건물 덕분인지 환한 햇살에 가득한 나한상이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나한들은 어둡지 않고 밝으면서도 제각각 제 몫의 일을 가진 듯한 모습으로 마치 탈춤의 탈을 보는 듯, 일상의 우리 모습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밝은 기운에 나도 싸 안기는 듯한 찬란함이 뼛속까지 닿는 느낌, 그 느낌은 지금도 그대로 재현되는 듯합니다.
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던 건 절 뜰에 있는 풀들의 이야깁니다. 이렇게 생생한 풀들을 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생기, 영기 가득한 꽃들이 절 마당 끝에 몇 포기가 있었습니다. 땅기운이 좋다 할지, 瑞氣가 드리웠다 할지, 알 수 없는 생동감이 충만한 꽃들도 나한상들과 같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생기는 그 일대가 다 그러한 듯했습니다.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유심히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거조암 영산전 오백 나한
-윤동재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영천 청통 거조암 갔더니
영산전의 오백 나한이 모두 나와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했지요
모처럼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지요
그들 가운데서 인도의 아난존자
신라의 원광 원효 의상 자장
고려의 균여 지눌 경한 나옹
조선의 무학 서산 사명 진묵
근세의 경허 만공 청담 성철을 얼른 알아보았지요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은지
금방 고개를 숙였지요
그들 모두 온 힘을 다했지만
성불하지 못해서일까?
혹시라도 그들과 눈이 한 번 더 마주칠까 봐
딴 데로 눈길을 주면서
그들뿐 아니라 오백 나한 모두
이제는 더 이상 성불에 끄달리지 말고
부디 해탈하시라고 두 손 모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