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조대 河趙臺
여말 선초의 문신 하륜과 조준이 놀았다는 고사가 있는 정자이다. 지금 정자는 1998년 새로 지은 것이지만, 얽힌 사연은 간단하지 않다. 내력은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해 풍광 만큼이나 깊고 아름답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동해바다의 파도가 조선 건국기 격변의 삶을 살다 간 조준과 하륜의 고민을 담고 있는 거 같다.
1. 방문지 대강
명칭 : 하조대 河趙臺
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조준길 99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4.2.28.
2. 둘러보기
2-1. 소개
소개1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에 있는 암석해안으로 양양8경 중 하나다. 135,000㎡에 이르는 암석해안은 짙푸른 동해에 솟은 기암괴석과 바위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변 송림과 어우러져 경관이 빼어나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고려 말, 이곳에서 은둔하며 혁명을 도모하여 두 사람의 성을 따 ‘하조대’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해안절벽 위에 같은 이름의 정자가 자리한다. 조선 정종 때 처음 건립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번 중수를 거듭했고, 지금의 정자는 1998년에 양양군이 굴도리 양식의 육각정으로 복원한 것이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특히 기암절벽 위 우뚝 솟은 노송은 과거 애국가 방송에 등장해 ‘애국송’이라고도 불린다. 하조대 정자에서 내려와 덱을 따라가면 흰색 무인 등대에 갈 수 있고, 인근의 하조대 둘레길과 하조대 전망대를 연계 관광할 수 있다. 하조대에서 북서쪽으로 1km 떨어진 거리에 하조대 해수욕장이 조성되어 있다. 수심이 1.5m 내외로 얕은 해수욕장이라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이 물놀이를 하기에 좋다.(대한민국 구석구석)
2) 소개2
일대는 암석해안으로 온갖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루어져 주위의 울창한 송림과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고려말 하륜과 조준이 이곳에 은둔하며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혁명을 꾀했고 그것이 이루어져 뒷날 그들의 성을 따서 하조대라 했다는 설과, 하씨 집안 총각과 조씨 집안 두 처녀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연으로 인해 명명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 정종 때 정자를 세웠으나 현재는 바위에 새긴 하조대라는 글자만 남아 있으며, 근래에 와서 육각정이 건립되었다. 하조대해수욕장은 수려한 경치를 배경으로 약 4㎞에 걸쳐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여 해수욕장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조대 앞에는 등대가 있어 그 일대 항해에 불을 밝혀주고 있으며, 바다낚시터로도 유명하다. (다음백과)
3) 소개3
하조대라는 정자가 있으며 주변은 하조대해수욕장을 비롯하여 여러 해수욕장이 해안을 수놓은듯이 줄지어 있다. 예로부터 이곳을 한번 거친 이는 저절로 딴사람이 되고 10년이 지나도 그 얼굴에 산수자연의 기상이 서려 있게 된다고 기록될 정도로 경치가 수려한 지역이다.
하조대해수욕장은 수심이 깊지 않고 경사가 완만하며 울창한 송림을 배경으로 약 4㎞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또한, 담수가 곳곳에 흐르며 남쪽으로는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절경을 이룬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소개 4
조준(趙浚)
조준은 고려말 개혁파 신진사대부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조선왕조의 개창과 문물제도의 정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에게 중용되었다. 철저한 제도개혁과 체제정비를 통해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전제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하고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했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했다. 1390년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경제육전>을 편찬하는 등 신왕조의 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세자책봉과 요동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방원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고,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했다. (다음백과)
하륜(河崙)
정도전과 대립하며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한 조선 초의 문신. 자는 대림, 호는 호정이며 공민왕 9년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했으며 1388년 최영의 요동정벌계획을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에 유배당했다.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했다. 이색, 정몽주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으나 정치적 변신을 해 경기좌도도관찰출척사가 됐다.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됐을 때 명나라와의 표전시비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이에 정도전의 미움을 사게 돼 계림부윤으로 좌천됐다. 이후 이방원과 급속히 가까워져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태종 즉위 후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능침을 순심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사망했다.(다음백과 전재)
2-2. 직접 보기
어우집(於于集) 後集 卷一
關東紀行二百韻 【《關東錄》○庚寅】
趙子才圭璧,河公器棟樑。【河趙臺】
조자의 재주는 벽옥과 같고, 하공의 기량은 동량이로다. 조자와 하공은 각각 조준과 하륜을 말한다. 이곳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에서 어우 유몽인은 이와같이 노래하였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조씨와 하씨 남녀 사랑의 사연이 얽힌 정자가 아닌 건국기의 고민과 웅지를 담은 두 사람의 기상을 표상하는 정자로 읽은 거 같다. 두 문신의 고민과 달리 지역 백성들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싶어하지 않았다. 중앙과 지방의 정서 충돌이 이중의 설화로 나타난 거 같다.
하여튼 오늘의 파도도 그 이중성을 담고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한 포부를 담은 동해 바다의 위상이 정자에서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소나무는 관민의 나무이지만, 관의 역할을 더 여실히 보여주는 나무이기도 하다. 바다속의 바위를 뻗어나간 소나무 또한 그 이중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나무에 와서 관민의 이중 시각이 결합하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우면서도 생각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정자다. 사진은 속초에서 내려오며 눈덮인 설악을 바라보던 노정을 그대로 담았다.
하조대에서 내려다 보는 동해
하조대
하조대 아래의 보호수 소나무
다시 설악을 바라보며 속초로 올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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