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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항목명 | 계권 |
한자항목명 | 契券 |
유형 | 개념/제도 |
한국 시대 | 고려 |
<요약>
문서의 한 종류.
<설명문>
‘문권(文券)’과 ‘문계(文契)’를 결합한 용어이다. 문권(文券), 문계(文契), 문서(文書) 등의 용어와 함께 고려조 이래 우리나라에서 계약 혹은 어떤 사실을 징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 즉 증명서 또는 계약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계동(季冬)
한글항목명 | 계동 |
한자항목명 | 季冬 |
유형 | 개념 |
<요약>
음력 섣달 또는 늦겨울.
<설명문>
①음력 섣달을 달리 이르는 말. ②‘늦겨울’을 달리 이르는 말.
계모(繼母)
한글항목명 | 계모 |
한자항목명 | 繼母 |
유형 | 개념 |
이칭 | 계실(繼室) |
<요약>
아버지의 새 배우자.
<설명문>
친모가 사망했거나 쫓겨난 후 아버지의 배우자가 된 후처. 계실(繼室)이라고도 한다.
계선성성(繼善成性)
한글항목명 | 계선성성 |
한자항목명 | 繼善成性 |
유형 | 개념 |
출전 | 『주역(周易)』 「계사상(繫辭上)」 |
<요약>
음양(陰陽)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실천결과를 나타낸 말.
<설명문>
이것은 『주역(周易)』 「계사상(繫辭上)」의 “한 번 양하고 한 번 음하는 것이 도이니 이것을 계승하는 것이 선이고 이것을 이루는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에서 유래한다.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한다는 것은 그 변화를 말한 것으로 변화는 도의 작용에 의해 일어난다. 천도의 변화는 만물을 생장시키므로 천도를 인간이 계승함에 따라 인덕(仁德)이 발현되고 따라서 자연히 선(善)하다고 말한다. 또한 이루는 것[成之]은 선을 성취하여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으로 인간의 가치(價値)의 문제로 전환하게 된다. 계선성성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천도의 관념이 인간의 가치문제을 전환되기 위한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수양(修養)의 당위성을 제시하였고 본원상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여 성리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참조항목>
건도, 선, 인도, 천도
계왕개래(繼往開來)
한글항목명 | 계왕개래 |
한자항목명 | 繼往開來 |
유형 | 개념 |
이칭 | 계왕성 개래학(繼往聖 開來學) |
출전 | 『중용장구(中庸章句)』서(序) |
<요약>
선왕(先王)의 도(道)를 계승(繼承)하고 그것을 후세에 전승(傳承)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
<설명문>
『중용(中庸)』서문(序文)에서 주희(朱熹)가 공자를 기리면서 한 말로 원문에는 ‘계왕성 개래학(繼往聖 開來學)’, 즉 “전대의 성인을 잇고 후세의 학자를 열어준다.”고 되어 있다. 공자가 전대의 성인인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주공(周公)의 도(道)를 집대성하여 후대의 학자인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에게 전하여 도통(道統)이 끊이지 않게 한 것을 기린 말이다
계천입극(繼天立極)
한글항목명 | 계천입극 |
한자항목명 | 繼天立極 |
유형 | 개념 |
출전 |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序文) |
<요약>
본체론(本體論)과 인성론(人性論)의 실천문제와 인성론으로 변환하는 당위성을 설명한 말.
<설명문>
천도(天道)를 잇고 인도(人道)의 극(極)을 세운다는 의미로서 이것은 『중용(中庸)』 서문(序文)에서, “옛부터 성신(聖神)이 ‘계천입극’하여 도통(道統)의 전함이 있었다. (蓋自上古聖神, 繼天立極, 而道統之傳, 有自來矣. )”라고 한 주희(朱熹)의 말에서 비롯한다.
<참조항목>
도심, 순, 요, 우, 인도, 인심, 중, 천도
계추(季秋)
한글항목명 | 계추 |
한자항목명 | 季秋 |
유형 | 개념 |
<요약>
음력 9월 또는 늦가을.
<설명문>
①음력(陰曆) 구월을 달리 이르는 말. ②늦가을
계춘(季春)
한글항목명 | 계춘 |
한자항목명 | 季春 |
유형 | 개념 |
<요약>
음력 3월 또는 늦봄.
<설명문>
①음력(陰曆) 3월을 달리 이르는 말. ②늦봄.
고(誥)
한글항목명 | 고 |
한자항목명 | 誥 |
유형 | 개념/제도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 |
<요약>
왕자(王者)가 아랫사람에게 고(告)하는 글.
<설명문>
『문체명변(文體名辨)』에서는 “고(誥)는 고(告)하는 것이다. 위[上]에 고하는 것을 고(告)라 하고, 아래[下]에 발(發)하는 것을 고(誥)라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주대(周代)에서는 이에 대한 상하의 구분이 없었다고 한다. 『서경(書經)』의 「대고(大誥)」 「낙고(洛誥)」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발한 것인 데 비해 「소고(召誥)」 「중훼지고(仲虺之誥)」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고한 것이다. 진대(秦代)에는 고(誥)를 폐하여 제소(制詔)라고 칭하였고, 한대(漢代)에는 다시 고로 청하였다. 또 당대(唐代)에는 제(制), 송대(宋代)에는 고라고 하였고, 명대(明代)에는 처음에 칙(勅)이라고 하였다가 1393년(洪武26)부터는 오품(五品) 이상의 임명에는 고, 육품 이하에는 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서경』의 전(典)‧모(謨) 이외 8편, 즉 훈(訓)‧고‧서(誓)‧명(命)‧가(歌)‧공(貢)‧정(征)‧범(範)의 통칭을 고라고도 한다.
고괘(蠱卦)
한글항목명 | 고괘 |
한자항목명 | 蠱卦 |
유형 | 개념 |
<요약>
『주역(周易)』의 18번째 괘.
<설명문>
내괘(內卦)는 손(巽 : 風)이고 외괘(外卦)는 간(艮 : 山)이기 때문에 산풍고(山風蠱)라고 하며, 바람이 산 위로부터 불어와서 나무를 쓰러지게 하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손은 장녀(長女), 간은 소남(少男)의 상이므로 이 괘에는 장녀가 소남을 유혹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이 괘를 고괘라고 한다. ‘고’는 그릇[皿]을 벌레가 파먹는 형상을 나타낸 글자로 ‘파괴되다’, 혹은 ‘유혹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괘에서는 부패하고 혼란된 상황을 극복하고 성세(盛世)를 회복하는 도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괘사(卦辭)는 “크게 형통하다. 큰 냇물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 갑일(甲日)보다 삼일 앞선 날과 갑일보다 삼일 뒤진 날이다.(元亨 利涉大川 先甲三日 後甲三日)”이다. 파괴가 극에 달하면 부흥의 때가 도래하기 때문에 난관을 극복할 용기만 있다면 형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선갑삼일’은 신일(辛日)을 가리키고 ‘후갑삼일’은 정일(丁日)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辛)’은 ‘신(新)’과 통하고 ‘정’은 정녕(丁寧)의 뜻을 갖기 때문에 이 구절에는 파괴하는 일이 끝나고 새롭게 일을 도모할 때는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고려유학(高麗儒學)
한글항목명 | 고려유학 |
한자항목명 | 高麗儒學 |
유형 | 개념 |
<요약>
한국 유학사의 흐름에 있어서, 제도를 통해서 점차 정치 이념으로 전개된 유학의 수용과 발전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로 이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설명문>
종교‧사상 등의 분야에서는 여전히 불교사상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정치와 사회 윤리의 분야에서는 유학의 현실‧경세(經世)적 성격이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고려 중기의 무신란을 겪은 뒤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의 수입으로 인한 배불론(排佛論)까지 등장하게 되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성리학 중심의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고려 초기의 유학사상은 유교적 정치사상과 이념의 현실 적용이란 특성 아래 유교적인 교양이 지식인 사이에 일반화되었고 또 익숙해진 상태였으나, 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치중했기 때문에 아직 학문적‧체계적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健)의 혁명 사업은 유교적인 천명‧민본사상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고, 이것은 고려의 건국과 기초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함과 아울러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태조는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에 학교를 창설하여 유교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태조의 「정계(政戒)」‧「계백료서(戒百寮書)」 및 최응(崔凝)과의 문답 내용은 신하의 도리로서의 유교적 충효(忠孝) 관념을 나타낸 것이며, 「훈요십조(訓要十條)」는 혁명으로 창업한 왕조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남긴 것인데 5조에 걸쳐 유교적 정치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
제4대 광종(光宗)은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로 유교 교과목 중심의 과거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인재 등용의 정도(正道)를 열었고, 이 과거제도는 유교의 민간에의 전파에 큰 역할을 했다.
고려 전기의 유학은 제6대 성종(成宗)조에 이르러 유교적 정치 이념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와 중세 봉건 국가의 터전을 확립했는데,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이 최승로(崔承老)의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과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이다. 즉 최승로는 태조의 창업 이후 약 60년 동안의 정치적 득실을 「오조정적평」에서 역설했는데, 그 반성의 기준과 미래의 바람직한 정치 방향을 유교적 정치 이념에서 찾음으로써 수성(守成)이라는 유교적 역사 의식을 표출하였다. 「시무이십팔조」는 유교의 대상적(對象的) 상황윤리인 시중론(時中論)으로서, 그 주된 내용은 군주의 수덕(修德), 국체 확립, 유교의 예제(禮制) 문화에 근거한 사회 질서의 확립, 국가 발전의 터전으로서의 민생의 안정 등을 강조한 것으로 요약된다.
성종은 한당(漢唐)의 선진(先進) 제도와 문화를 수입하고 최승로의 시무론을 정책에 반영하여 왕도(王道)와 유치(儒治) 실현의 구체적 제도화로서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고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두고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인재를 양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회를 교화(敎化)하는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다. 성종은 또 중앙 집권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정교(政敎)에 있어서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현인을 등용하는 유교적 이상주의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인륜의 가장 본질적 내용인 효(孝)를 강조함으로써 사회적인 덕목이나 윤리적 가치관을 정립‧완성시켰다.
이와 같이 고려는 성종대를 거치면서 인재 교육과 과거 제도에 의한 관료체제의 확립과 유교 윤리에 의한 의식 개혁, 유교통치 윤리와 가족 윤리 등의 실현을 통해서 문치정비(文治整備)와 윤리 교화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초기의 원전(原典) 자체에 대한 초보적 이해와 수용의 단계를 넘어 경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상당한 정도로 확산‧심화되었다. 또 정치의 실제적인 요청의 증대 외에도 한당유학의 내용이 다른 학문‧사회의 측면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이양(李陽)의 「봉사(封事)」 가운데 『예기』 「월령(月令)」 편에 근거한 무농사상(務農思想)이나 한대 역학(易學)의 하나인 『경방역(京房易)』에 대한 언급 등이 그것이다. 원래 유학은 농본주의적 사회를 바탕으로 확립되었기 때문에, 흥학(興學)과 함께 무농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무농사상은 특히 『서경』에 많이 보이는데, 그 속에는 한대 유학의 천인상응설(天人相應說)‧재이론(災異論)의 내용과 천문오행설(天文五行說) 등의 특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현학(玄學)사상의 영향도 고려 중기에 이르러 보이기 시작하는데, 특히 무신집권기에는 상당히 유포되었다.
제왕의 통치 이념의 부각을 중심으로 전개된 고려 초기와는 달리 중기에 와서는 관료와 귀족계층의 정교 이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대표적 예로서는 우선 교육적인 측면에서 문종(文宗)대에 일어난 유교적인 교양과 과거의 교과를 교육하는 최충(崔冲) 등의 사학(私學)의 발전과 뒤이어 예종(睿宗)과 인종(仁宗) 대에 발달한 문신(文臣)들의 군주에 대한 강경(講經)제도 등을 들 수 있다. 강경제도는, 군주에게는 유학적 교양의 배양과 통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문신들에게는 부화(浮華)의 방지와 국가 경륜의 연마 및 군주에의 직언(直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 예종은 국자감의 부흥에 힘써 문무칠재(文武七齋)와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유학생(儒學生) 60명과 무학생(武學生) 17명을 양성하는 등 날로 유학풍이 높았다.
고려 초기에 이미 춘추관(春秋館)이 있었지만, 숙종(肅宗)‧예종대의 활발한 수찬(修撰) 사업의 흐름 위에서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을 넘어서 유학적인 역사 의식과 역사 서술의 원칙 및 체계를 갖춘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로 전해진다.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 보이는 춘추대의론(春秋大義論)과 유교적인 역사 의식 및 비판 정신 등은 당시의 유학 발전의 깊이를 알려준다.
그러나 관학의 흥기와 강경제도의 발달은 일면으로는 유교의 실천 윤리로부터의 일탈을 야기시키게 되었다. 특히 예종 때부터는 문사(文士) 우대의 경향이 극도로 심해져 문벌 귀족의 전횡이 노골화되었다. 의종(毅宗)대에 이르러서는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무신통치시대에 접어들어서는 현실 도피적이고 고답적인 현학풍(玄學風)의 사상적 흐름이 생겨났는데, 그 사상은 도가 외에 유‧불도 나름대로 수용한 측면이 있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유학자들은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그 반성으로서 유교 윤리의 회복과 도의화(道義化)에 힘쓰면서 원(元)과의 교류를 통해 성리학을 수입하였다. 안향(安珦)은 여말의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는 한편 국자감을 통해 성리학을 소개하고 배우게 하였으며, 양현고를 부흥시키고 공자와 제자들의 상(像) 및 제기(祭器)‧악기(樂器) 등을 구해 오는 등 유학 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 후 백이정(白頤正)의 성리학 연구와 우탁(禹倬)의 『역전(易傳)』 연구 및 강의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된 성리학은 권부(權溥)에 의한 『사서집주(四書集註)』의 간행과 더불어 새로운 유학으로 정착되어 갔다. 이러한 학풍은 정몽주(鄭夢周), 이제현(李齊賢)과 이곡(李穀) 등에게 전승되고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에 이르면서 고려 유학은 완비된 성리학적 면모를 갖추었다.
정몽주는 당시 상제(喪制)의 문란을 개탄하고 3년상을 행하였으며, 처음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해 가묘(家廟)를 세워 조상을 받들도록 하였다. 그는 또 5부학당‧향교를 설치하여 유학을 진흥시키기도 하였고 경학‧성리학 외에 역학(易學)에도 뛰어났다. 이제현도 유학을 진흥시키는 방법으로서, 학교를 넓히고 육예(六藝)를 존중하고 오륜(五倫)을 밝혀 선왕(朱王)의 도를 천명(闡明)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이색은 성리학적인 안목에서 우탁‧이제현‧이곡으로 이어진 역학 연구의 계통을 계승하여 학문적 심화에 기여했다. 이색의 뒤를 이은 이숭인(李崇仁)은 성리학 외에도 문학과 경학에도 뛰어났으며, 길재(吉再)는 권근(權近)의 학통을 이었으나 이념적으로는 정몽주를 계승하여 조선 초기 사림파(士林派)의 학통을 열었다.
고려 초기 이래 현실적 정치 이념으로 경세적인 특성을 가졌던 유학은, 성리학의 수용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현실적인 이념과 불교‧도교를 압도하는 철학적 논리를 지닌 새로운 시대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져 조선의 유교입국(儒敎立國)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고려 말기의 성리학은 역사적 전변기(轉變期)라는 상황에서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정몽주를 대표로 하는 온건한 개혁론인 강상파와, 정도전(鄭道傳)‧권근을 주축으로 하는 급격한 개혁론인 혁명파가 그것이다. 이 두 파의 분열은 후에 조선조의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라는 두 갈래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정신사(精神史)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고려 초‧중기에 있어서 유‧불‧도 3교는 서로의 영역을 유지하고 상호 교섭하면서 갈등의 양상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사상계에 있어서는 불교가 그 주류를 형성하고 크게 융성하였지만, 후기에 이를수록 사회적으로는 여러 불폐(佛弊)가 생겨났다. 초기에 유‧불의 기능적인 차이점을 지적한 최승로의 「척불상서(斥佛上書)」, 문종의 교서(敎書) 등 불교에 대한 약간의 지적이 있었지만, 불교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었다. 성리학의 수용 이후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은 배불론을 전개하였는데, 안향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천륜(天倫)에 어긋난 이적(夷狄)의 유(類)라 비판하였다. 또 이제현‧이곡‧이색 등은 불교도의 폐해를 지적하고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새로 세우는 사원을 철거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정몽주는 불교의 수도(修道)를 위한 출가(出家)의 비윤리성을 반윤리(反倫理)라 지적하여 불교를 비판하였다. 이들은 모두 불교의 교리와 대등한 입장에서 유교의 교리를 제시하는 온건한 배불론자들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 「불씨잡변(佛氏雜辨)」‧「심기리편(心氣理篇)」 등을 지어 철학 이론적으로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고 유교의 의리(義理)의 정도(正道)를 논한 정도전과 권근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관료는, 송대 성리학의 벽불론(闢佛論)적인 이론과 도통론(道統論)을 수용함으로써 강력한 배불론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불교를 반문명(反文明)적인 이념으로 규정하고 유교로써 정교(正敎)를 통일하는 한편,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성리학을 조선의 지상이념(至上理念)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金日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