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Ⅵ. 타락한 지도자들
종교개혁이 일어난 원인을 돌이켜 보면 외적인 문제보다 내적인 원인이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바로 사제의 타락이다 중세 천년의 시간이 가장 슬픈 것은 사제들의 처참한 타락에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의 도덕적이고, 물욕적이고 권력적인 탐욕은 교회를 부끄럽게 만들었으며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분노를 사게 하였다.
사제들의 타락은 곧 성도들의 타락을 가져왔으면 공동체 전체의 타락을 부추겼다. 중세의 사제들의 모습이 불신에 이르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며 영적인 자신이 없기에 독재를 통하여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중세 교회와 사제들의 모습에서 이러한 어둠의 그림자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윌리엄 캐논에 의하면 “약 60년 동안 교황권은 여성들의 앞치마에서 놀아났다. 교태와 유혹을 통해 매춘부 작은 데오드라와 마로지아는 로마를 지배했을 뿐 아니라 서방 교회를 흔들어 놓았다”고 하였다. 타락한 교황의 모습은 12살에 교황에 오른 베네딕트 9세는 교황직을 최고의 값으로 존 그라티안에게 팔았다. 그리고 1378년에서1417년까지는 교황이 3명이나 존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존 23세, 그레고리 12세, 베네딕트 13세이다. 이러한 교황들은 정치권력과 결탁하였고 교황직도 돈을 사고파는 추악한 일들이 일어났다.
특별히 당시의 재벌인 메디치 가문은 교황청을 자신의 입맛에 따라 움직였다. 로마의 또 다른 교황 이노센트 8세는 공개적으로 16명의 사생아들 둔 아버지로 알려졌다. 이노센트8세가 죽자 로드리고 볼기아는 추기경들에게 뇌물을 먹여서 자신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그는 14명의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한 1510년에 출판된 윌리엄 멜톤의 설교에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 퍼져 있는 심히 비통한 악이 생겨나고, 온 마을과 국가 전체에 멍청하고 촌티 나는 사제들이 득실거리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야비하고 비굴한 일에 몰두하고 나머지는 주막에 처박혀 술을 폭음하게 된 것은 무지의 어두움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어떤 이들은 매춘부 없이 살 수 없으며, 나머지는 하루 종일 하찮은 것에 매달리고 놀음하면서 주사위를 던진다.”
사제들의 추악함과 타락함은 바로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탐욕은 부를 늘리는 일에 온갖 추악한 일을 하였다. 추기경들은 교황칙령을 위조해서 팔아먹는 기업을 운영하였다. 또한 매장세를 걷기 위하여 온갖 못된 짓을 하였다. 자신들의 수입원을 늘리기 위해서 감독교구를 늘렸다. 그리고 성직매매와 성직 세습도 자행되었다. 토마스 울시는 교회적 사생아들에게 여러 교회의 수입원을 넘겨주었다.
성직자들의 타락은 성도들의 무지를 이용한 사악한 일이었다.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였던 사제들은 성도들에게 온갖 거짓을 말하였고 자신의 부와 권력 그리고 쾌락을 즐긴 것이다. 성경을 알지 못하였던 성도들은 사제들의 사기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시대는 점점 어두워진 것이다. 종교개혁의 전야는 이렇게 사제들의 타락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제들이 소명 없이 직업으로 참여하였을 때 교회는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물질의 탐욕만이 아니라 세습을 통한 권력의 탐욕과 성의 탐욕은 교회를 근간에서부터 무너지게 한다. 우리 주변에서 들려오는 성적인 타락과 권력의 중독은 결국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게 한다. 세습은 성직매매와 함께 합니다. 소명 없는 자식을 목사로 만들어서 사업체를 넘겨주는 일을 한다면 그는 하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 개혁 전야에 활동하였던 위클리프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위클리프는 [목회직분에 관하여(1378년)]라는 책에서 사제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모든 도덕적 잘못들을 청상하고 그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양떼들을 먹이라” 그러면서 위클리프는 사제는 단순하고 검소하게 살아야 하며 전적으로 지역(교회)의 후원에만 의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수입을 벌기 위한 말씀선포에 대하여 아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교황을 향하여 말하기를 단순함과 가난으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공포하였다.
1. 헨리8세
헨리 8세는 영국 튜더 왕가의 혈통으로 부왕인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헨리는 이미 유년기부터 부왕의 자리가 확고부동하지 않음을 인지하며 자라왔다. 헨리 8세는 복잡한 여성 편력과 여섯 번의 결혼으로 유명하다. 헨리 8세는 재위 기간 중 종교 개혁, 영국 국교회 수립, 정치적 중앙집권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헨리 8세 집권기에 영국은 늘어나는 왕실의 비용과 과도한 화폐 발행 등으로 심각한 인플레이션 현상을 겪었고, 공유지의 사유재산화로 농민에 대한 수탈이 극심하였으며 런던 인구가 크게 증가하여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이혼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대립하다가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를 설립했다. 헨리 왕자는 형인 아서 왕자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할 당시 10살 소년이었다. 당시 헨리 7세는 강력히 부상하던 에스파냐의 아라곤 왕국과 국교를 공고히 할 필요성을 느꼈고, 장남인 아서 왕자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2세와 카스틸의 이사벨라 1세의 딸인 캐서린과 혼인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캐서린을 영국으로 호위해 오도록 했고, 공주의 수행 행렬에는 10살의 소년이었던 헨리 왕자도 있었다. 그러므로 헨리 왕자는 형수가 될 캐서린을 형보다 먼저 옆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한 이듬해에 아서 왕자는 몇 달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캐서린은 양측 부왕의 뜻에 따라 이전 혼인을 무효화하고 다시 미성년인 헨리 왕자와 약혼했다. 헨리 7세의 사망 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즉각 캐서린과 결혼을 감행했다. 결혼 후 몇 년간 그들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다양한 연회를 함께 즐겼던 것으로 보아, 헨리 8세는 처음 만났던 당시부터 캐서린에게 좋은 감정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1527년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을 하려고 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거부했다. 대법관으로 새로 부임한 토머스 크롬웰은 1532년 영국 교회와 로마의 교회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1533년 헨리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승낙하였다.
이후 새로운 대주교가 된 크롬웰은 헨리의 첫 번째 결혼이 무효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일로 헨리는 결국 로마와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며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헨리는 왕권을 강화시키며 강력한 전제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크롬웰, 모어 등과 같은 친구이자 공신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반역죄로 처형하면서 민심을 잃어갔다.
2. 율리우스2세
예술을 가장 크게 후원한 교황으로서 당대의 강력한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군사력을 가지고 프랑스의 이탈리아 지배를 막은 업적도 세웠으나, 중요한 것은 미켈란젤로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브라만테와 라파엘로를 포함한 그 외 예술가들을 후원했다는 점이다. 미켈란젤로에게 '모세'와 시스티나 부속예배당에 있는 그림들을 그리게 했고, 라파엘로에게는 바티칸 궁에 있는 프레스코들을 그리게 했다.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유일한 형제이자 가난한 라파엘로 델라 로베레의 아들로 태어나, 1468년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가입했고, 1471년 식스투스 4세에게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1503년 보르자가의 교황이 죽자 10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로마로 돌아왔으며 피우스 3세의 짧은 교황재위 기간이 끝난 뒤 제멋대로 성직을 매매하여 1503년 10월 율리우스 2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보르자가 교황들이 폐허로 만든 교황령을 회복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보았다. 교황은 성직자다운 면모는 하나도 갖추고 있지 않았으나 말년에는 오직 교회의 위엄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는 교황보다는 교황령 군주로서 위대해지고자 했으며, 이탈리아에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했다.
율리우스는 매우 난폭한 기질을 갖고 있었고 자제력을 잃을 때가 많았으며, 무례하고 때로는 상스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 자신과 교황직, 그 시대의 탐욕과 부패를 제쳐놓고 볼 때 그는 비겁하거나 복수심에 흔들리지 않았고, 밀고자들과 아첨꾼들을 경멸했다. 따라서 아무도 그의 결정과정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위대해지고 싶어 했고 비굴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생각을 너무 감출 줄 모르고 성격을 다스리지 못했다.
3. 레오10세
레오 10세는 로마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 교황권을 유럽의 중요한 정치권력으로 끌어올렸던 인물이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사치스러웠던 것으로 손꼽히는 그는 교황청 재산을 탕진하고 당시 진전되고 있던 종교개혁에 맞서 통일된 서방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마르틴 루터를 파문했다.
1513년 2월 21일 율리우스 2세가 죽자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율리우스 2세가 시작해놓은 성 베드로 성당 건축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임 교황 때의 모금방법이었던 면죄부를 재 승인했다. 이에 대해 마르틴 루터는 공개적으로 교황에 반대했고 1521년 그는 파문을 선포했다. 그는 후대의 역사에 의해 정당성이 입증된 루터파 운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레오 10세는 계속 돈이 드는 사업을 펼쳤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수입원을 만들어야만 했다. 프랑스와 치른 전쟁들, 예술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 성 베드로 성당 건축, 그리고 투르크에 대한 십자군원정 계획 등이 교황청의 재정을 압박했다. 한 가지 중요한 수입원은 오랫동안 시행해온 면죄부 판매였다. 율리우스 2세 때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모금방법으로 면죄부 판매를 공식화했는데 이 건축 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레오는 교황이 된 직후 면죄부를 재 승인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면죄부가 인기를 끌지 못했다. 따라서 1517년 초에 비로소 도미니쿠스 수도회 탁발 수사들이 마인츠와 마크데부르크 대주교구에서 면죄부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설교를 반박하는 95개조 격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다.
1518년 루터의 사상이 로마에까지 알려지게 되자 레오는 루터가 소속해 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총회장에게 말썽거리 수사인 루터를 징계하라고 명령했다. 이 일이 실패하자 레오는 작센의 군주 프리드리히를 통해서 루터의 징계를 다시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519년 여름에 라이프치히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가톨릭 신학자 요한 에크(1486~1543)는 루터가 3가지 이유에서 이단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만들려고 했다. 1520년 6월 15일, 레오는 41가지 이유를 들어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문서를 발행하고 그에게 60일 이내에 로마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으면 파문당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때 독일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루터는 공개적으로 교황에 반대했다. 별다른 대안이 없게 된 레오는 1521년 1월 3일 파문을 선포하는 파문 교서를 발행했다.
레오 10세는 후대의 역사에 의해 정당성이 입증된 루터파 운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영국의 개혁가 존 위클리프, 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에도 그 당시에는 잘 버티고 있었다.
레오는 루터를 단순히 일부 신자들을 잘못 인도하는 이단자 정도로 보았으며, 때가 되면 참 신앙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독일의 정치 분위기는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을 강력히 규제하기에 유리하지도 못했다. 이로써 새로운 운동은 비교적 교황권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 북부에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1521년 12월 레오 10세는 이탈리아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북유럽 전역에 번져가던 종교적 동요를 남겨두고 갑자기 죽었다.
4. 토마스 울시
토머스 울시는 입스위치(Ipswich)라는 영국의 시골에서 정육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다. 능력 있는 서민들을 관직에 앉히려 했던 헨리 7세의 정책에 힘입어 왕실에 입성하였다. 그 후 승승장구해 헨리 8세 때가 되서는 추기경, 대주교와 대법관을 겸한 사람이 된 울시는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던 헨리 대신 나랏일을 주무르다시피 했기에 ‘또 하나의 왕(alter rex)’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직위가 오르고 권세가 커지면서 허영과 사치에 맛을 들여 햄튼 코트에서 호화롭게 살며 한번 행차할 때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뒤를 따르게 했던 울시는 많은 악폐를 저질렀고 재정 관리를 소홀히 했으며 부정한 아들까지 낳아 사방에 적을 만들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록 왕의 이혼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이 그의 파멸을 불렀다.
앤 볼린의 미움을 사 결국 관직에서 밀려난 울시는 교황과 짜고 앤을 추방하려다가 발각되어 런던으로 끌려가는 중에 병사하였다. 죽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하나님을 왕만큼 열심히 섬겼으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백발이 희끗희끗할 때에 나를 버리지 않으셨으리라.” 이 말은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5. 로드리고 볼기아
율리오 2세에서부터 레오 10세로 이어지는 괴물 교황들의 시작점이 되는 인물이다.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으로 유명하며 뇌물, 돈세탁, 공직 매점매석, 친인척 비리 조장, 밀실 정치 등 정치판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부정부패와 패악을 저지른 인물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뛰어난 정치수완을 가졌고, 대세를 보는 능력이 워낙 탁월하여 업적도 많은 편인 복합적인 인물. 현대 역사학자인 새러 브래드퍼드의 평에 따르자면 “지혜, 정신적 활력, 건강, 국제적 행정 경험, 당당한 풍채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회장에게 요구되는 그런 자질들을 모두 갖추었다.” 라고 하였다. 그런 양반이 왜 교황을 했냐면, 그때 종교는 다국적 기업이나 다를 게 없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적 시각, 그것도 지극히 현대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르네상스 시절의 교회라는 조직을 해석한 관점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볼 수도 있다'라고 참고나 해 두자. 당장 이 사람 바로 다음 시대에 터진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가톨릭교회의 악행을 지탄하면서 써 먹은 떡밥의 많은 단골 레퍼토리를 제공한 양반이니 제대로 된 종교사적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재평가니 뭐니 할 여지가 없다.
교황령이라는 세속 국가의 군주에다가 당시 교회 조직의 특성상 정치적 능력 또한 교황들에게 요구되었다는 여건도 있지만[1], 애초에 정치적 수완의 기본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지적하듯 구렸지만 겉으로는 깨끗하게 보이게 하는 능력이지 대놓고 손가락질 받는 능력이 아니다. 가톨릭 교황 사상 최악의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1위로 손꼽히는 인물이지만, 종교인이 아닌 세속 군주로 보면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가진 군주라고 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6. 인노첸시오8세
1484년 8월 12일에 교황 식스토 4세가 서거한 후 로마에서는 소요가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교황 선거는 1484년 8월 26일에 시작되었다. 8월 29일에 추기경 조반니(Giovanni Battista Cibo)가 인노첸시오 8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는 1432년 제노바에서 출생하였으며 35세의 나이로 사보나의 주교로 재임하였고 5년 뒤에는 몰페타(Molfetta)의 주교로 재임하였다. 1473년 그는 사제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인노첸시오 8세의 교황 선거는 성직 매매로 얼룩졌다. 인노첸시오 8세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였던 추기경 줄리아노(Giuliano della Rovere)의 덕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추기경 줄리아노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재임 기간 동안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대 터키 항전 문제와 관련해서는 매우 우유부단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관계 개선에는 관심을 보였다. 1484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종교 재판과 마녀 화형을 정당화시키는 칙서를 반포하기도 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교황권이 실추된 시기를 거친 후 1492년 7월 25일 서거하였다.
성직 매매와 세습의 대표적인 실례는 교황 이노첸시오 8세였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 두 명의 부인을 두고 세 명의 자녀를 둔 사람이었다. 그는 세속 정치에 깊이 관여하면서 정치 자금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는 성직매매를 공공연히 하여 자금을 끌어 모았다. 그가 임명한 추기경들 중에는 그의 형의 서자 출신도 있었고 플로렌스 왕 로렌조 데 메디치 아들도 있었는데 그는 아직 13세도 채 되지 않은 어린나이였다.
이노첸시오 8세가 교황으로 재직하는 동안 로마 사제계급은 그야말로 부패의 온상으로 지탄 받았다. 사제 자리를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사제들은 출발부터 빚을 안고 교구를 담당하였다. 말하자면 사제가 되려면 경제적인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따라서 사제들은 사제가 된 이후 이 빚을 갚기 위해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금을 끌어 모았다.
7. 중세의 콘크라베
교황이 죽었다. 그러면 바티칸의 담당 시종이 교황의 이름을 부르며 은 망치로 머리를 두들긴다. 망치로 머리를 두들긴다는 말이 묘한 분위길 자아내지만 사실은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살짝 건드려 본다는 것이다. 이때 반응이 없으면 일단 죽은 걸로 간주하고 교황이 끼고 있는 반지를 빼서 부숴 버린다. 온 로마에 교황의 서거 소식을 종으로 알리고 추기경들은 죽은 교황의 발에 입맞춤을 한다. 장례식이 끝나면 당연히 들어가는 길은 교황선출이다. 이 교황선출은 오늘날에 콘크라베(Konklave)로 한국에도 원어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의 교황선출은 오늘날처럼 평화롭게 성사된 것은 아니고 말 많고 탈 많은 콘크라베도 더러 있었다. 1179년부터는 새 교황이 당선되기 위해서는 3분의2가 찬성 해야만 했다. 이 정족수에 못 미치면 교황자리는 늘 빈 채 있었다. 이런 공위(空位)기간은 일주일에서부터 한 달, 어떤 때는 몇 년까지 갈 때도 있었다.
1241년 8월 22일 그레고르 9세 (1227~1241)가 서거했으니 추기경들이 당연히 새 교황을 뽑아야 했다. 당시의 교황권은 로마의 원로원 손아귀에 있었다. 당시 득세하던 오르시니 귀족 가문이 특히 날 뛰었다. 이 오르시니가 새 교황을 뽑기 위해 10명의 추기경들을 소집했다. 당시를 묘사한 피셔 박사의 자료를 보면 오르시니는 한 추기경을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치는가 하면, 어떤 추기경들은 그에게 맞기까지 했다. 그 이유는 적혀 있지 않다. 짐작하건데 아마도 추기경들이 오르시니에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기경들을 모았던 곳도 세프티쪼니움(Septizonium)인데 203년경에 지은 허름하게 기울어져가는 건물로 한때는 감옥으로 사용하다가 다시 수녀원의 일부로 흡수 되었던 곳이다. 오르시니는 투표권이 있는 추기경들을 여기에 감금 시키고 갖은 푸대접을 일삼는다. 일부러 지붕을 뚫어 빗물이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지붕 위의 지킴이들이 급하게 쏟아 내는 오줌까지 합해지는 날은 지린내 풍기는 빗물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반대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날씨도 문제다. 쉽게 전염병이 돌다 보니 추기경들이 병이 들기도 했다. 일단 옆방으로 옮기지만 치료목적이 아니다. 이들의 생사는 오직 운명에 맡긴다면서 모퉁이 방에 그냥 모셔 버린다.
이들 중 한 명이 거의 죽음 문턱에 다다랐다. 감시인들이 작은 공간으로 이 추기경을 끌고 가서는 침까지 탁 뱉고선 석궁으로 된 곤봉으로 때리기까지 했다고 피셔 박사는 밝혔다. 더 심한 짓은 이들이 죽을 때 성사 받는 것까지도 허용 하지 않고 외면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톨레도 출신의 요한이라는 추기경은 이런 처사에 대해 한마디 던지길 ‘이럴 바에야 차라리 성령이 지붕을 타고 내려와 교황을 선택함이 나으리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1241년 10월 말에 드디어 교황이 뽑혔는데 바로 쾰레스틴 4세(Cloelestin; 1241 10.25~11.10)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귀족들로부터 갖은 무시를 다 당하면서 선거를 치렀던 추기경들은 새 교황이 선출 되자마자 만세를 부르며 이곳을 떠났다. 근데 새 교황 쾰레스틴4세가 그만 죽어버렸다. 그것도 17일 만에! 이번에도 오르시니가 새 교황선출을 위해 추기경들에게 다시 소집장을 보냈지만 추기경들은 그 곳에 다시 들어가기를 무지 꺼리면서 거부했다. 그 결과로 당시는 거의 2년간 교황이 없이 지내는 시기가 도래했다. 그 다음 교황인 이노센트 4세(Innozenz)가 1243년 6월 25일 선출되었던 것을 보면 공위(空位) 기간이 2년이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증명된다.
13세기의 교황권은 바닥에서 기는 시기였다. 모든 권한은 로마 귀족들이 장악했다.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귀족가문들이 서로들 자기편의 교황을 뽑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시기였다. 당시 오르시니와 적대 관계에 놓인 가문은 콜론나(Colonna)였는데 이 두 가문이 자기들이 원하는 교황을 배출 하겠다고 권력싸움을 일삼았다.
니콜라우스 4세(1288~1292)가 죽고 나서 새 교황을 뽑는데 두 가문이 싸움질만 하다가 2년 만에 새 교황 쾰레스틴 5세(1294~1294.12)가 1294년에 뽑혔다. 하지만 그는 7개월 재직하고선 죽었다. 이들은 다시 자기가문이 원하는 교황을 뽑기 위해서 싸움질에 들어가고, 지붕을 뜯어내는 처사나, 추기경들에 대한 모독은 각자 ‘가문이 원하는 교황을 뽑아라! 그리고 빨리 뽑아라!’라는 암묵적인 지시가 내포 된 것이다.
클레멘스 4세(1265-1268)가 죽었을 때도 새 교황을 뽑지 못했는데 이번엔 로마귀족들의 간섭 때문이 아니라, 한 장소에 모인 19명의 추기경들이 교황선출을 두고 서로 간에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다시 3년간 교황 없이 지냈던 공위 시대가 온다. 1271년 9월1일 드디어 그레고르 10세가 새 교황으로 뽑혔다. 이런 문제점에 직면했던 그레고르 10세는 보다 엄격한 콘크라베를 1274년 6월7일 반포했다. 콘크라베는(Konklave) ’열쇠 하나를 가지고’의 뜻으로 외부의 영향을 전연 받지 않고! 오직 각자 소신대로! 새 교황을 뽑는다는 의미다.
그레고르 10세가 내린 규정은 교황이 죽으면 10일 후에는 그것도 교황이 죽었던 장소에서 닫혀 진 공간에서 교황선출을 해야 한다. 이 공간에서 들어선 이는 교황 선출이 확정 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떠날 수도 없고, 들어 올 수도 없다는 규칙이다. 이를 어긴 자는 당장 파문당하게 된다. 또 여기 모인 추기경들이 5일 이내에 새 교황 뽑지 못할 경우는 단지 두 끼 음식만을 공급받는다. 만약에 8일이 지났는데도 새 교황 결정을 못 내리면 추기경들은 빵과 물만 공급받는 신세가 된다.
1353년에 이르러 콘크라베 규정이 보충 된다. 여기 집결한 추기경들의 시종은 3명으로 허락했다. 특이한 점은 이들이 머무는 공간엔 온통 검 붉은색과 그린으로 치장 되었다. 죽은 교황의 덕을 입고 있다는 의미 표징으로 이들이 사용하는 침대, 방석, 수건, 등, 심지어 요강까지도 이 색으로 덮였다. 누군가가 우연히 들여다보았다면 혹 젊은이들의 방이 아닐까 연상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시종들도 바티칸 직원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색을 입고 다녔다.
콘크라베에 참석한 추기경들도 일단은 먹어야 한다. 추기경들은 자기 종들이 가져온 음식만 먹었다. 혹시나 음식에 독이 들어 있을까 의심해서이다. 아주 엄중한 컨트롤하기 위해 4명의 주교가 문 앞에 서서 가져온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혹은 음식에 비밀스런 소식이라도 넣었는지를 검사한다. 투명하지 않는 병이나 단지 사용은 절대 금물이다. 특별히 금지된 음식은 닭요리였는데 아마 닭 안에는 많은 것을 넣을 수 있었기에 그랬다. 그래도 그릇 가장 밑바닥에 뾰족한 것으로 새긴 암호를 음식과 함께 들여보내기도 했다. 음식을 다 먹고 나면 그릇 밑바닥에 새긴 글씨를 당연히 볼 수 있었다.
이런 엄한 규정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물렁해져 버린다. 이젠 각 귀족들이 보낸 첩자들과 감시인들까지 버젓이 등장했다. 추기경들은 규정을 어기고 세 사람의 수행원보다 더 많이 데리고 들어왔다. 호기심을 가진 귀족들도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추기경들이 동행한 인원이 많아지다 보니 콘크라베 장소에 400명의 인원이 모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더 기이한 것은 규정 같은 것은 아예 내동댕이치고선 벽에다가 구멍까지 내어 바깥과 교통했다. 편지를 이리저리 전달해 주기도 했는데, 이때 사용한 것은 가방이 아니라 장화였다. 전해 줄 편지를 장화에 가득 넣은 채 뒤뚱거리며 걷기도 했다. 이렇게 산만하고 어지러운 콘크라베를 마치 잔칫집 분위기로 표현한 기록도 있다.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하러 들어가고 나면 바깥에선 무성한 소문이 난무한다. 기오반 마리아 델 몬테라는 추기경은 후에 율리우스 3세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이 되자마자 사랑하는 사람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바로 17살 남자인데 그가 데리고 있었던 원숭이트레이너이다. 젊었을 때 그는 10명이 아닌 100명이 넘은 아이들을 여인들을 통해서 생산했다는 자료도 남아 있다. 죽음에 임박한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제발 착하게 살라고 유언하자 그는 죽어가는 엄마 앞에 무릎을 꿇고 앞으로 바르게 살겠노라고 맹세한다. 그의 맹세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젠 여성들과 연애하지 않고 소년들과만 연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 추기경이 된 그는 이 약속을 철저하게 잘 지켰다. 그는 더 이상 여자들과 사귀지 않고 소년 애인들을 수두룩하게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니콜라우스 3세(1277~1280)는 11명의 부엌 일꾼들을 두었다. 주방장을 중심으로 스프 요리사들과 소스 요리사들을 따로 두었고 일반 빵 굽는 이 따로 달콤한 빵 굽는 이 따로 웨이터와 교황이 먹을 음식을 먼저 시식해보는 자들이다. 보니파츠 8세(1294~1303)는 1303년 9월에 3일간 감옥에 갇혔는데 이때 그는 밖에서 제공되었던 음식은 다 거부하고 오직 계란만 먹었다. 일반 음식을 받아먹다가 독살될까 걱정을 해서 그렇다. 알렉산더 7세(1655~1667)는 늘 해골을 그려 넣은 은컵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피우스 6세(1775~1799)는 그의 유언장에 요리사들을 언급할 정도로 요리사들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당시는 요리사가 꽤나 높은 관직이 아니었을까 하는 유추를 후세 학자들은 한다.
파울 2세(1464~1471)는 일상적으로 세 끼 먹는 방식이 좀 별났다. 그는 해가 지고 난 뒤 점심을 먹었는가 하면 새벽이 되어야 저녁을 먹는 버릇을 가졌다고 한다. 레오 10세(1513~1521)는 바티칸의 재산을 탕진할 정도로 많은 연회를 열었다. 1518년 4월 30일 날 연 한 연회에선 자그마치 1인당 80소이디(Seudi) 넘었다. 옛 화폐인 소이디의 가치를 잘 모른다. 이렇게 흥청망청 누렸던 이 교황은 전임자 교황이 남긴 재산은 물론 후임자 교황에게 물려줄 바티칸 재산까지 다 바닥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