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9/25
장소 : 온라인으로 만남
참여자 : 임동현, 최현서, 남상우 (전원 참석)
학습 목표 : 장영실의 생애를 알아본다.
활동내용 :
장영실의 신분 : 《세종실록》에선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蘇州, 쑤저우)·항주(杭州, 항저우)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습니다. 장영실은 기술이 뛰어나 세종 임금이 필히 아끼었다고 설명합니다.생몰 연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1385년경에서 1390년(우왕 11년~공양왕 2년)경이다. 또한 장성휘는 시조 장서의 8세손으로 고려 말 전서(典書)였으며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조선 관노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장영실의 영자는 종친회에서 주장하는 부친 장성휘의 성자 항렬의 다음 세대의 항렬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의 자제라면 고대 중국식으로 외자로 이름을 짓고 자나 호를 짓거나, 아니면 평범한 이름으로 짓지, 당시의 아산 장씨 집안의 항렬에 맞게 짓고 족보에 올린다는 것은 유교적 정서에서 힘들기 때문입니다.[1] 그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하며 사촌여동생이 당대의 천문학자 김담에게 시집갔다고 한다.[2]장영실은 어머니의 신분이 천민(기생)이라서 그 신분을 이어 받아 천민이었습니다.
장영실의 노년 :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하다가 나이 약 53세였던 1442년 3월(세종24년),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이천을 다녀오던 중 기술자로서 정3품 상호군(上護軍) 장영실이 책임을 지고 있던 세종대왕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4][5]이 일어났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 형벌을 2등을 감해 주었다고 합니다. 장영실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6] 후세에도 그의 공교한 솜씨가 간혹 회자되었습니다.
활동소감 : 나는 오늘 친구들과 함께 온라인으로 모두 같이 모여서 장영실에 생애를 알아보았다. 우리는 하면서 그때 당시에 세종대왕이 엄청 아끼고 좋은 대우를 해주어 과거 시험에 합격해 우수한 과학자가 되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장영실이 원래 출신이 노비 였다는게 매우 놀라웠다. 나 혼자 했으면 크게 놀랐을 것 같지는 않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더 흥미로웠고 놀라웠다.
다음계획 : 장영실이 만든 기구를 토대로 토론을 가질 것이다.
지금까지 문제적 보이즈 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