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진짜가 되려면 / 박혜연
결혼하고 만 3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사실 3년 후에 아이가 생길 것이라고 알고 있었더다면 그 시간을 그리 힘들게 보내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아서, 그냥 매달 시험 보고 불합격 통지서를 받는 수험생처럼 힘들었다. 용기 내어 찾아간 병원에서 한 번의 인공수정과 시험관 시술을 실패하고 나서는 정말 마음이 너덜너덜해져서 괜찮아질 것 같지 않았다.
처음엔 가까운 일반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산부인과의 특성상 진료실 앞에 산모 수첩을 들고 앉아 있는 산모가 대부분인데 그 사이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편했다. 새로 옮긴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이 본인도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졌다며 나에게도 불임 전문 산부인과에서 시술을 받아볼 것을 권했다. 그렇게 남의 이야기 같았던 인공수정과 시험관 시술을 받게 되었다. 임신을 시도하는 시술을 받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받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준비하는 기간이 길고 전문 병원이라는 기대, 수정란 같은 임신의 과정을 일부나마 시각적으로 보게 되니까 더 그런 것 같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시험을 보는 것처럼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좋다는 것, 의사가 하라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해냈다. 병원에서 받는 그 많은 검사와 집에서 계속 맞아야 하는 주사, 시술하는 과정 자체가 힘들었다기보다는 그 수정란을 왜 난 착상을 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컸다. 그동안 고생한 것이 헛수고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허탈함도 있었고, 무엇보다 어쩌면 우리에게 아이가 계속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두렵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그때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가장 중요한 ‘마음 편하게 하기’를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은 결혼한 지 꽤 되었는데도 왜 아이가 없는지를 물었고, 난 또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했고,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위로를 들어야만 했다. "괜찮아. 내가 아는 사람은 아이가 십 년 만에 생겼어" 부터 시작해서, "안 되면 입양을 해도 되지 뭐." 까지, 때로는 합격 여부를 확인하듯 계속 임신 여부를 물어오는 문자 속에서 나는 '과연 이 사람들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긴 한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위로가 있다. 그 선생님은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우리는 퇴근길에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걸어오곤 했다. 하루는 이런 저런 내 사정을 들으시고 그냥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셨다. 그 눈길 속에서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나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맘 아파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선생님은 "내가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어떻게 선생님 마음을 다 알 수가 있겠어." 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그 말에서 이 다른 사람이 하는 여러 마디 말보다 훨씬 많은 위로를 받았다. 선생님의 그런 반응에 내 몸의 어딘가 굳어 있던 것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은 말이 많거나,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다.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그냥 그렇구나.” 시험관 결과가 좋지 않다고 전화가 왔을 때도 “그냥 괜찮아.”그럴 뿐이었다. 한번은 남편이 담담하게 "나는 아이가 없어도 괜찮아. 아니 혹시 나 때문에 그렇게 애쓰는 거라면 나는 괜찮다고."라고도 했다. 시댁에서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이유가 남편 때문이라는 것도, 병원에서도 나는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나는 그 상황에서 나만 위로의 대상이었다고 착각했었다. 그것이 남편이 나를 위로하는 한 방법이었다는 것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학부모 상담을 할 때였다. 한 어머니가 교실에 들어설 때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들어오셨다. 아이가 작년에 아팠고 큰 수술을 했고, 지금도 이런 후유증이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거라는 말씀을 하시며 계속 우셨다. 학부모님이기도 했지만, 전에 잠깐 같이 근무도 했었던 그 선생님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선생님의 눈은 너무 슬펐고 말씀하시는 목소리는 아팠다. 내가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내가 어떻게 해도 공감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실 것 같았다. "정말 힘드셨겠네요" 같은 말들이 너무 가볍게 느껴져서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를 못했다.
그날 집에 돌아온 나는 그분을 위해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던 나를 좀 탓했었다. 누군가 내게 너무 큰 고민을 털어놓을 때 느껴지는 나의 감정은 '미안함'과 '불편함'이다. 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에게 걸맞은 위로를 해주지 못할 것 같아서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옆 반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해주셨다. "선생님 그분이 선생님한테 그런 말을 할 때는 그 어떤 말을 들으려고 하신 건 아닐거예요. 그냥 잘 들어주기만 해도 되는거 아닐까요?"
'위로'. 쉽고도 어렵다. 내가 위로를 받았다고 느꼈을 때는 거창한 해결책이나 과한 감정표현을 들었을 때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해 본 것일 뿐 그 마음을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 마음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도 그렇게 말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때로 나쁜 마음이 아니었다 해도 진심 없는 위로가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위로까지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라고 포장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위로해야만 한다는 나의 감정에 더 충실했던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위로는 그냥 그 사람과의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진심이면 되는 것 같다. 그것이 말이나 눈빛이나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몸짓으로 어떻게 표현되든 그것이 진심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글쓰기 반에 들어온 것을 환영합니다.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이 쉽지 않는데 용기를 내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함께 글 쓰게 돼서 기쁘네요.
선생님, 환영해요.
용기 내 주셔서 고맙구요.
쭉 함께해 보시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