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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산 대결
열왕기상 18:21, 37~39
I. 오늘도 갈멜산 대결은 일어나는가?
오래 전 한 목사님이 기도원에서 40일 기도를 마쳤습니다.
내려오기 전 마지막에 읽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갑자기 자기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기더랍 니다.
그래서 교회로 돌아가기 전에 한강으로 갔습니다.
믿습니다를 한 백번쯤 하니까 더 확실하게 믿음이 생기더랍니다.
그래서 한강에 발을 착 올려놓았습 니다. 베드로가 몇 발자국 물 위를 걸었듯이 한강 위를 저벅저벅 걸어갔으면 오죽이나 좋겠어요.
첫 발을 디디자마자 풍덩 빠져서 생쥐꼴을 하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물 위를 걸어간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오늘은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성도들에게는 아주 익숙하고 아주 자주 들 었던 흥미진진한 사건입니까?
오늘은 왜 목사들이 기도하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그래서 기독교만 참 종교인 것을 세상 모든사람들에게 알리는 이런 사건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흥미진진한 갈멜산 대결장면입니다.
구약 시대 가장 능력 많은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무려 850대 1의 대결에서 멋지게 승리하는 이야기입니다.
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 놓고 오직 기도로 하늘에서 불을 불러 태워야 하는 싸움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내 마음속에 재미있는 상상이 지나갔습니 다. 내가 엘리야시대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이 멋진 장면을 볼 수만 있었다면 얼마 나 근사했을까?
우리는 이 사건을 읽을 때마다 우리 머릿속에 지나가는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① 오늘도 내가 기도하면 아니면 적어도 목사님이 기도하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야 하 는 것인가?
② 지금도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대고 국제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목사님 정도면 휴전선에 탁 나타나서 인터넷으로 세계에 중계를 하면서 선전포고를 하는 겁니다. “내 말이 떨어지지 않으면 북녘 땅에 다시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 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집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년 동안 북한 땅에 비가 오지 않 아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이 될 수 있었을까요?
③ 오늘날도 한경직목사님 정도되면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승천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한국교회사에 남아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전도해 볼만 하지 않겠습니 까?
④ 우리는 지금도 엘리야에게 주셨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인가?
예배 시간마다 아니 적어도 부활주일만큼이라도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이런 사건이 일 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짓궂은 상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워 이긴 이 사건 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오늘 이 시간에는 “갈멜산 대결”이라 는 제목으로 오늘 우리시대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이토록 싫어하시는 바알신앙이 없는지? 정말 하나 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위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내 속에 번영신학, 성공신학, 물질주의, 쾌락주의, 나 중심의 신앙은 없는가?
엘리야 시대처럼 우리의 예배재단이 허물어지지는 않았는가?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데 이 예배가 정말 성경적으로 제대로 세워진 예배인지, 예배정신이 다 허물 어진, 진정한 예배가 사라진 그런 예배는 아닌지? 살펴보는 겁니다.
그리하여 엘리야의 신앙이 무엇인지, 엘리야의 기도가 무엇인지, 엘리야의 예배가 무엇인지 살 펴보고 회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II. 오늘도 바알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엘리야는 북왕국 아합왕 때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아합은 국 외교술에 능하고 인격적으로 원만한 왕이었습니다.
그 런데 성경은 그를 역사상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합은 정치, 외교 적으로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부강하게 하기 위해 주변 강대국들과 국교를 맺습니다.
특히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삼습니다.
시돈 왕은 시돈 왕 대로 딸을 시집보내는 음흉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시돈의 바알 신, 바알 사상을 이스라 엘에 심기 위해서였습니다. 아합은 바로 이 영적 함정에 빠져 이스라엘을 타락시키 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왕국이 아니 라 바알의 나라로 만든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대선정국에서도 샤마니즘, 무속, 역술인 등 과의 관계로 어수선합니다. 건전한 종교가 정치의 영적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것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이때 우리는 건전한 종교가 무엇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사상적으로 건전하고 정서적으로 평안을 주고 사회적 윤리적 차원에서 건강해야 합니다. 지,정,의가 올바르게 통합되어 있는 종교가 건전한 종교 입니다. 또한 건전한 종교는 역사적으로 검증이 되고 윤리적으로 올바른 기준이 있 어야 합니다. 건전한 종교는 공적으로 매일같이 검증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건전한 종교라고 하더라도 종교가 정치권과 손을 잡을 때는 합리적, 공적, 과 학적인 프로세스를 통해서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미신으로 일컬어 지는 샤마니즘과 무속, 역술이 숨겨진 비선라인 역할을 하거나 사당적 성격을 띠게 되면 정권과 나라가 불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이 모든 정책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것입니 다. 사당적 샤먼은 공적인 결정 위에서 자기 멋대로 길을 제시하고 최종 판단과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미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차제에 남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 기독교도 위복주의 신앙, 성공주의, 물질주의, 나 중심주의가 남아 있지 않는 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무관심하고 개인적인 번영만 가르치지 않았는지 위복 주의, 샤머니즘이 우리 예배에, 기독교 안에 남아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정치권과 샤만과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선거 때가 되면 정치인들의 발길이 엉뚱한 곳으로 분주해집니다.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러겠습니까 만 그럴수록 우리는 진리 앞에 바로 서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하도 장사가 안돼서 저 소도시에 사는 한 집사님이 점쟁이를 찾아 갔대요. 이러쿵 이러쿵 해서 도무지 살 길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점쟁이 하는 말 “집안에 감나무 있지?” “감나무 없는데요.” “거봐 그럴 줄 알았어. 감나무 한 그 루 심어. 복이 그리로 흘러들어올 거야.” 그래서 감나무 한 그루 심고 기대에 부풀어 일년 동안 장사하는 사이에 쫄딱 망했습니다. 한 번 더 그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지난 일년 동안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 랬더니 대뜸하는 얘기가 “집안에 감나무 있지?”“네. 감나무 한 그루 심었죠.” “그것 싹 베어버려 모든 우환이 그리로 들어오는 거야.” 그러자 이 사람이 벌 떡 일어서서 뺨을 한 대 내리치고 “이 못된 놈아, 네가 일 년 전에 감나무 심 으라고 해서 심었다가 쫄딱 망했어. 또 감나무 베라고?” 복채를 빼앗아 달려 나왔다는 얘기입니다. 차제에 다시는 정치가 샤만, 무속과 연관되지 않도록 정말 깨끗하게 정리되어야 합니 다. 정치계가 정화되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하셔야 할 것입니다. 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한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들 하셔야 한다 는 겁니다.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은 샤마니즘의 풍요의 신, 성공과 번영의 신이었습니다. 당시 농사를 잘되게 하여 부를 가져준다는 물질의 신이었습니다. 쾌락의 신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신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성공신에 한발 한발 빠져들 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아예 버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서 예배 합니다. 제사합니다. 제사하는데 기도하는데 예배하는데 그 내용이 바알 중심입니 다. 자기 번영, 자기 성공 외에 관심이 없습니다. 마침내 바알 제사를 가나안의 문 화 정도로 생각하고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도 기도하고 바알에게 가서도 기도합니다. 이게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최근 부실공사로 공기를 단축하여 이문을 남기려다 무너진 광주 아파트는 성공주 의, 물질주의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사건입니다. III. 갈멜산 대결 갈멜산 위에서 펼쳐지는 세기의 대결을 살펴보십시다. 이 대결의 이름은 “참 신 가리기, 참 하나님 가리기”입니다. 흥미진진한 이 소식이 백성들에게 알려지 자 백성들은 갈멜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대결의 규칙이 정해집니다. ① 양측에서 각각 송아지 한 마리씩을 제물로 준비한 다. ② 그 제물을 제단에 올려 놓고 불을 사용하지 않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야 한다. ③ 그 불로 제물을 태워 받으시는 신이 참 신이시다는 겁니다. 선공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팔백오십 명이 했습니다. 그들의 우선 숫자상으로 자신감을 가진 것 같습니다. 성공이 제물을 선택하고 장소를 선택하고 시간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바알은 번개의 신, 불의 신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늘에 서 번개불이 내려서 재물을 태울 것이라고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팔백오십 명이 하루종일 뛰고 춤추고 자기들 몸을 상하게 하며 바알이여! 바알 이여! 외쳐댔지만 불은 커녕 찬바람만 스산히 불어왔습니다. 바알 제사에는 아무 일 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원래 우상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눈이 있어도 보더 냐. 입이 있다고 말을 하더냐. 귀가 있다고 듣더냐. 손이 있고 발이 있다고 무슨 행 함이 있더냐. 이번에는 엘리야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초저녁입니다. 경건한 백성들이 저녁예배를 드리는 시간, 소제를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구경꾼으로 서 있는 백성들 에게 말합니다. 어느 때까지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겠느냐. “가까이 오라”(왕상 18:30) 여기 가까이 오라는 얘기는 몸이 발이 가까이 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니 가까이 오라는 것입니다. 너희 예배가, 너희 기도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멀어졌으니 하나님 가까이 오라고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허물어진 제단을 수축하자고 말합니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왕상 18:30) 바알 제단을 향하는 길에는 얼마나 들락거렸던지 길이 반들 반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예배는 먼지가 끼고 제단은 무너져 허물어져 있었습니 다. 여기 “제단을 수축하자”는 이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제단을 수축한다는 얘기는 건축 행위입니다. 그러면 건축과 관련된 용어를 쓰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 “수축 한다”는 이 말에 “라파”히브리말을 쓰고 있습니다. 내 몸이 병들었으니 고친다는 “라 파”입니다. 내 마음이 상처를 받아서, 상처가 내 심령을 찢고 있을 때 그 마음을 고 친다는 “라파”입니다. 내 신앙, 내 가치관, 내 영혼이 병들어 있을 때에 그걸 고친다 는 야훼 라파! “라파” 무너진 제단을 치료하라, 고치라는 것입니다. 이게 갈멜산 제 단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병들어 있느냐? 네 신앙은 제대로 수축되어 있느냐? 네 기도는 제대로 서 있느냐? 네 영혼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수축되어 있느냐? 야 훼 라파! 병든 몸을 고치듯이 고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의 예배 가, 삶이, 기도가 약 한톨 먹고 고칠만큼 조그마한 병이 들어 있습니까? 아니면 근 본적으로 수술을 해야 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워져야 될 중병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고치라. 너희 제단을 수축하라. 이것이 엘리야의 외침입니다.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물 한 방울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물 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왕상18:33) 산꼭대기에 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물 네 통을 모읍니다. 이 물이 어 디서 났을까?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다까지 달려가서 길러왔을까? 제가 상상해보니까 사람들이 갈멜산 제단에 오르면서 요즘으로 말하면 물병 하나씩 들고 온 것 같아요. 그 나라 사람들은 어디에 가든지 물병을 들고 다니니까 자기가 마실 물입니다. 물 한 방울 구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생명과 같은 물입니다. 그걸 백성들이 모으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 넷 통을 제물에 부었다는 것은 생명을 그 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내가 마실 물 하나님 앞에서 쏟아 부은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오직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을 이 백성이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이때 하늘 문이 열리고 폭포수처럼 불이 쏟아져 제물을 태웁니다. 도랑에 부었던 물 들이 바싹 마르면서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 모두 피바다를 이루며 처단됩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어지럽게 백성들 은 속인 죄값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 주 말씀이 선포되 고... 예배가 회복되네. IV. 엘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지금도 우리 눈에 보이게끔 한라산 꼭대기나 남산 꼭대기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불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불이 쏴악 내려서 한밤 중에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불꽃놀이 보듯이 볼 수 있으면 좋겠 는데 왜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지금은 왜 갈멜산 대결같이 불이 내 리고 거짓 종교를 불사르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기억하세요. 오늘 본문에 엘리야는 여러분 한분 한분 성도들을 예표하는 인물이 아닙 니다. 오늘 목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표하는 그림자가 아닙니다. 엘리야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의 구원사역을 증거하는 사건이 갈멜산 대결입니다. 모든 성경은 특별히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말라 기까지 모든 성경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손가락 끝을 따라가 면 한 곳에 집중되어지는데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할렐루야.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왕상18:24) 구원 의 길은 오직 참신 하나님의 이름 안에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 으리라. 본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만이 참된 구원의 길임을 보여주는 사건 입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바알이 가르쳐주는 번영과 성공만을 위한 이 세상에 회복과 치유만을 위한 소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 기 독교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2:21, 롬10:13) 이게 갈멜산 사건입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멈추었습니다. 다시 기도하자 비가 쏟 아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삼년 육개월 동안 자연을 꾸짖고 명령 합니다. 바람아 잠잠하라. 풍랑아 멈추어라.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들어가 기름과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축복합니 다. 예수님은 도시락 하나로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 가나 혼인잔치 집에 떨어진 포도 주를 넘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립니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립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합니다. 부 활하신 예수님 구름을 타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온 땅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거짓 선지자 팔백오십 명을 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단의 머리 를 부수시고 우리의 죄짐을 담당하고 지옥의 문을 닫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갈멜산은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던 것 입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 나 그 모든 것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담겨져 있는 능력입니다. 본문의 방점은 참 신이 누구냐? 네가 믿는 그 믿음의 대상이 누구냐? 네가 섬기는 그 하나님 에 대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갈멜산의 대결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매일같이 싸워야 할 싸움입니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의 싸움입니다. 오늘 드리는 이 한 번의 예배에도 가인의 제사가 있고 아벨의 제사가 있습니다. 불신의 제사도 있고 믿 음의 예배도 있는 것입니다. 바알의 제사 나의 성공을 위한 예배도 있고, 엘리야의 제사 참 신 하나님을 부르는 예배도 있는 것입니다. 갈멜산 위에서 드려진 한 마리 송아지는 갈보리산 위에서 희생된 어린 양 예수 그 리스도입니다. 갈멜산에 불이 내려졌듯이 신약시대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의 불이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했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없는 예배 거짓된 예배입니다. 예수 님의 이름이 높여지지 않는 설교 거짓된 설교입니다. 예수를 만날 수 없는 설교는 잘못된 설교 잘못된 예배인 것입니다. V. 오늘의 갈멜산 :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어디에선가 바알과 엘리야의 한판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곳으로 가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참된 신과 거짓된 신 이 갈라지고, 참된 예배와 거짓된 예배가 갈라지는 현장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엘리야는 오늘날 목사나 성도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예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가 있는 갈멜산 언덕으로 안내해 드립니다. 오늘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그 예배를 받으시는 모든 제물을 받으시는 그 현장으로 여러분을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갈멜산 언덕은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오늘의 갈멜산입니다. 신구약 66권 성경이 완성된 이후 이제는 엘리야를 통해 참신을 보여주지 않아도 됩 니다. 참 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 성경 안에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여기가 불 떨어지는 갈멜산 언덕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보여주는 곳 성경입니다. 구 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곳 성경입니다. 구원 계시가 완성되어 기록된 것 바로 그것이 성경입니다. 이방 선지자, 바알 선지자의 목숨을 우리가 거두지 않아도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예수님 바알의 권세를 부수셨습니다. 그 승리를 믿기만 하면 됩 니다.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갈멜산 대결은 더 이상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물 위를 걷고 풍랑 을 꾸짖는 일은 이 땅에서 없을 것입니다. 한강 걷겠다고 추운데 뛰어다니지 마십시 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걷고 싶으면 성경 위를 걸으시길 바랍니다. 이미 신구약 성경에서 온 땅 을 지으신 분,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님, 이 땅과 하나님 나라에 왕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을 갈멜산 언덕으로 인도해 드 립니다. 이 한 해 동안 성경으로 달려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