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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으로서 명성이 높다. 실제 임란을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다. 국립박물관으로서 전문적 주제를 가지고 전시를 하고 있는 최초의 전문 박물관으로 전시 롤모델로서도 의미가 있다. 임란의 현장인 진주성 안에 자리잡고 있어 현장성도 함께 갖추고 있다. 외국의 박물관 전문가들도 높이 평가하는 곳이다.
1. 박물관 대강
명칭 : 국립진주박물관
위치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169-17
개관 : 1984년 11월
입장료 : 진주성입장료 2,000원?
방문일 : 2022.11.29.
2. 둘러보기
1)소개
진주박물관은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를 상징하는 탑의 선을 우리의 고건축 양식으로 조화시킨 현대식 건물이다. 연건평 1,497평, 지상 2층이며, 전시실은 상설 전시실(임진왜란실)과 기획 전시실(두암실)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 활동 외에 거창 말흘리 고분군(1985), 진주성내 선화당터(1997) 등 20여 건의 유적을 발굴하고, 1998년까지 거창 말흘리 등 10책의 조사 결과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유물은 현자총통(玄字銃筒, 보물 제885호)을 비롯한 3,5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46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임진왜란 관련 무기류, 전적 및 서화류, 도자류 등은 국내·외 여러 곳에 분산 소장되어 있는 많은 유물들을 한곳에 모아 다양하게 전시함으로써 임진왜란 연구자 및 일반 관람자들에게 임진왜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두암실(김용두실)은 재일동포 김용두가 1997년부터 3차례에 걸쳐 179점을 기증하였고 그 중에 1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 유물 중에는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등의 회화와 분청사기, 청화백자 등 도자류를 비롯하여, 금속·목제품 등은 조선시대 미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물이다.
국립 박물관 중 최초의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진주박물관은 종전의 가야 박물관으로서의 지역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 박물관에서, 역사의 한 주제를 폭넓게 전시하는 전문 박물관으로 특성화되었다. 임진왜란에 관련된 학술 연구·조사 및 특별 기획전을 활성화함으로써 지역 문화 창달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전재)
2) 박물관 이전에 대한 우려
진주성안에 있어 한꺼번에 여러 유물유적을 관람할 수 있어 좋다. 남강을 끼고 있어 도시의 전체 풍모도 한꺼번에 보고 즐길 수 있다. 진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역사적 함의가 풍부한지 진주성에 오면 진주박물관에 오면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다만 23년 올해부터 이전 계획에 착수하여 26년이면 옛진주역 부지로 이전을 할 예정이라는 것이 아쉽다. 성 안에 이렇게 역사문화적 축적이 공간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주변 경관도 수려하다. 이전으로 임란 전문 박물관으로서의 전문성과 현장성의 엄청난 의미가 약화될까 우려된다. 전문성과 현장성, 주변 경관을 다 갖춘 국립박물관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거의 없어서 외국 박물관 큐레이터들도 최고의 박물관으로 꼽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디 새 이전 박물관이 현장성은 약화되더라도 전문성만은 더 강화되길 간절히 바란다.
박물관 관람은 진주성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름다운 남강 전망을 덤으로 누리면서 박물관으로 이동한다.
여기까지 아름다운 박물관 외부. 이제 내부 전시품 관람을 시작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1598년 그가 죽으면서 임란은 끝이 났다. 그의 사후 에도시대 초기까지 다이묘나 절 신사에서 많은 초상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이 초상화는 1600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진 순절도
조선후기 화가 변박이 1760년 임란 첫 전투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왼쪽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이 바다에서 상륙하여 부산지니성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 오른쪽에는 성병 위에서 부산진첨절제사 정발을 중심으로 군사들이 일본군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부산진성은 경상도 해안에 설치된 수군첨절제사의 4개 진영 중 제 1의 해상관문이었다.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군의 함선이 보인다. 이 전토에서 정발 장군은 순절하였다.
동래부 순절도.
'조선 후기의 화가 변박이 1760년 동래성 전투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아래쪽에는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있고, 가운데 성문 위에 동래 부사 송상현을 중심으로 병사들이 일본군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이미 성이 함락되어 북동쪽으로 일본군이 들어온 상황을 묘사하였다.
일본이 명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는 팻말이 보인다. 지붕의 기와를 뜯어서 일본군에게 던지는 백성들의 모습도 보인다. 담을 넘어서 도망가는 여인도 있다. 관복을 입고 북쪽에 있는 국왕을 향하여 두 번 절하는 동래부사 송상현의 모습도 있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이 도망하는 장면도 있다. 이 전투에서 송상현은 순절하였다.'
히젠 나고야성도 병풍
의병장 권응수 초상.
권응수(權應銖, 1546~1608)
「권응수장군영정」은 선조(宣祖)가 하사한 초상으로 17세기 초의 대표적인 공신초상화이다. 크기는 세로 202㎝, 가로 104㎝이다. 경상북도 영천 백운재서원(白雲齋書院)에 봉안하였다가 현재는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은 전신상[全身交倚坐像]이다. 공수(拱手 :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포개어 잡음)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양쪽으로 벌린 발 아래로 낮은 족좌대(足座臺)가 놓여 있다.
그가 입은 단령은 단호흉배(單虎胸背 : 한 마리의 호랑이를 수놓은 흉배로 당하관의 무관이 사용)에 삽금대(鈒金帶 : 황금 띠돈을 단 허리띠)를 두른 것으로, 흉배와 각대로 미루어 보아 이 초상화가 선무공신상임을 알 수 있다. 부분적으로 탈락되고 손상되었다. 그러나 보존 상태가 좋으며 세부 묘사와 전체적인 안정감을 잃지 않은 수작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전재)
박물관 설명에서는 17세기 공신 초상화의 양식이나 호랑이 흉배가 다르고 옷주름에 강한 음영이 있다 하여 후대의 이모본으로 보고 있다.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경주와 울산성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전쟁 후에는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2. 권응수 장군이 왜군에게 빼앗은 칼 3.곽재우의칼
류성룡의 갑옷과 투구
이원익(1547~1634) 초상. 이여송과 합세해평양 탈환의 공로로 숭정대부에 가자되었다. 초상에서는 모란과 공작 그림의 흉배를 부착한 흑색 운문단 단령을 입고 있다. 왼쪽 얼굴을 중심으로 교의에 앉은 '좌안칠분면전신교의좌상'이며 종이 바탕에 그려진 초본 형식이다. 이외에도 소수서원, 충현박물관 등에 초상이 더 있다.
징비록
아래 선조 서신
'1592년 12월 14일 선조가 평양 부근에서 도체찰사로 임무를 수행하던 류성룡에게 내린 명령이다. 선조는 류성룡에게 대장으로서 왕명을 받아 지방에 있을 때에는 스스로 판단하여 일을 처리하고 자세하게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당부하였다.'
임진왜란 시 평양성 탈환 모습 그림
'조·명 연합군이 1593년 1월 일본에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군은 왼쪽 끝에 단 5명만이 그려져 있다. 평양성 안에는 성을 점령한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고를 받는 모습과 일본군들이 명군을 향해 조총을 쏘고 칼과 창을 휘두르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명군은 이여송, 양원, 장세작 등의 장수를 앞세우고 말을 타며 활기차게 나아가고 있다. 또한 화포부대를 이끌었다고 알려진 낙상지는 한 손에 화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일본군을 매달고 가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명 제독 마귀 초상. '정유재란 때 파견 장수.명나라가 망하고 증손 마순상이 조선에 귀의하여 상곡 마씨의 시조가 되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임진왜란 관련 명나라 장수나 관련 인물들을 상당수가 그 후손이 조선에 귀화하였다. 마귀가 그렇고, 이여송이 그렇고, 아래 석성이 그렇다. 이여송의 후손은 귀화하여 성주 이씨가 되었다.
임란은 문화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일본에서 투항하여 귀화한 수많은 항왜까지 본다면 혈연이 교류한 전쟁이기도 하다. 투쟁 이상의 화합을 이루어낸 면도 있는 것이다.
마귀의 증손 마순상의 검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 초상. 61세 모습
석성(石星, 생년 미상 ~ 1599) 명나라의 문신.
석성은 1559년 진사(進士)가 되고, 이과급사중(吏科給事中)에 발탁되었다. 만력(萬曆) 초에 재기하여 예부시랑, 병부상서(兵部尙書) 등을 지냈다.
예부시랑 당시에는 자신의 부인 류씨를 구해준 역관 홍순언과의 인연으로 조선의 종계변무도 해결해 주었으며 조선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후 홍순언이 구원병을 청하여 석성은 만력제에게 조선으로의 출병을 청하였다.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달래는 것으로서 일본국왕에 봉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하였으나 실패한 뒤 삭탈관직 및 하옥되어 1599년 옥사하였다.(위키백과 전재)
그의 장남 석담은 석성이 감옥에 간 후 조선에 망명했다. 조선에 대한 석성의 도움이 지대했던 만큼, 석담을 수양군에 봉하고 편히 살게 했다. 현재 해주 석씨가 바로 석성의 후손으로 이후 조선에서 꽤 괜찮은 가문이 되었다. 차남 석천도 1597년에 성주로 내려와서 성주 석씨의 원류가 되었다.(나무 위키 전재)
조주 석씨라고도 한다.
『대명회전』에 "이인임의 아들 단(이성계)이 사왕(四王,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을 시해했다"라고 잘못 기록된 것이 역관 홍순언의 노력으로 수정됐다. 홍순언은 명나라 홍루에서 만난 중국 여인에게서 부모를 여의고 몸을 팔게 된 사연을 듣고는 가진 돈을 털어 여인을 꺼내 주고 부모의 장례 비용까지 대 주었다. 여인은 훗날 명나라 예부상서 석성의 부인이 돼 『대명회전』의 기록을 "이성계는 전주의 혈통을 물려받았다"라고 바로잡을 수 있도록 힘을 써 주었다. 이를 왕의 가계를 바로잡았다고 해 '종계변무'라고 부른다.(세계사와 함께하는 타임라인 한국사 3 전재)
홍순언이 석성의 후처에게 은혜를 베풀어 종계변무를 하게 되었다는 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홍순언 설화는 『성호사설』, 『열하일기』, 『청구야담』, 『이향견문록』 등의 주요 문헌에도 널리 소개되어 있고, 구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석성은 조선 출병을 적극 요청한 인물로 종계변무 못지 않은 공적을 세운 인물로 조선의 은인이다. 그의 후손이 한국에 와서 살게 되어 인연을 이어온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대문궤
'임진왜란(1592년)부터 광해군 즉위년(1608년)까지 명과의 외교 문서를 모아 1619년(광해군 11)에 편찬한 책이다. 임진왜란 때의 원병을 요청한 내용, 명이 일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내용, 일본의 정세를 정탐하여 명에 알리는 문서, 매년 보낸 정기 사행 관련 문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한중일 삼국 간의 외교적 정황을 살펴볼 수 있는 1차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도요토미의 정유재란 명령서. 전라도를 철저히 공략하고 거점성을 지을 장소 논의를 당부하며 명을 기필코 공략할 것을 밝히고 있다.
조명 연합군과 일본인 전투 장면 그림
갑옷. 두정갑. 실전에서 입었던 장수의 갑옷. 두루마기 안에 철이나 가죽으로 만든 미늘을 쇠못으로 받아 만든 갑옷. 겉면에는 쇠못의 머리만 보여 두정갑이라 불렸다.
왼쪽은 임란 당시 동래성 전투 때 조선병사가 사용한 투구. 오른쪽은 조선시대 투구 중 가장 보편적인 간주형 투구
일본군의 갑옷과 투구
정유재란 당시 명군이 일본군을 정벌한 장면을 그린 그림
역사문화홀
임진왜란 기록물. 용사일기(이로), 송암선생실기(김면), 매헌실기(정기룡), 운천집(김용), 임진록 등등. 조선은 책의 나라, 기록의 나라다.
<에혼 다디코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다룬 일본 소설, 오카다 고쿠잔의 글, 호쿄 고쿠잔의 그림으로 되어 있다.
학봉집
논개 초상. 김은호 작품. 화가의 친일 전력과 당대의 복색 고증 문제로 표준영정에서 제외되었다. 춘향 영정과 흡사하게 그려진 것도 논란이 되었다.
논개 초상. 윤여환 작품. 16세기 복색 고증에 따라 제작된 작품으로 2007년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김은호의 영정이 문제가 되어 다시 제작된 것이다.
<어우야담> 유몽인의 설화집
이마리 자기. 일본 규슈 아리타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 아리타는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이 마을을 이루고 산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에서 조선의 사기장들은 17세기 중반 색회자기를 개발하였고, 1651년부터는 유럽으로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색회자기는 화려한 색으로 그림을 그려넣은 자기를 말한다.
퇴계집. 에도시대에 일본 활자로 간행되어 일본 근세 유학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관우의 그림과 그의 일생을 그림과 함께 해설한 책
포로쇄환 유고문
1617년 제2차 통신사가 일본으로 가서 전달한 문서. 321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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