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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용/KBS 아나운서: (노란 튜립을 손에 들고 향기를 맡으면서) 아~아~ 튜립의 나라~ 아~ 꽃 예쁘다~ 풍차의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기적을 일으켰던 누구? 히딩크 감독의 나라! 바로 네델란드죠. 제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다음으로 좋아하는 축구팀이 바로 네딜란드 대표팀입니다. 네델란드 축구 대표팀을 우리가 뭐라고 부릅니까?-------------
일동: 오랜지 군단!
이광용: 그렇습니다. 오랜지 군단! 그런데 오랜지 유니폼을 그냥 입는 걸까요?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여러분! 네델란드가 한 때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네델란드는 독립을 위해서 80여년 간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것도 무적함대로 불렸던 스페인을 상대로 해서 말이죠. 이 독립전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가문의 이름이 오라녀(Oranje)公, 영어로는 Orange였고 그 가문을 기리기 위해서 네델란드는 국가 대항전에서 오랜지색 유니폼을 입고 맹활약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시원/배우: 그런 뜻이 있었구나.
이광용: 그런데 네델란드가 한창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치르던 그 시기가 대항해 시기였습니다. 17세기 네델란드는 스페인과 맞서기 위한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서 대항해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대항해 후발주자로 네델란드는 과연 바다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요?
최원정/KBS 아나운서: 338번재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그 동안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이끈 대항해 시대를 얘기해 봤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나라가 등판했습니다. 네델란드!
이시원: 먼 나라 이웃 나라하면 떠오르는 게 네델란드예요. 히딩크의 나라 그리고 박지성이 떳던 나라 첫 유럽진출팀 PSV 에인트 호번의 나라 굉장히 친근하잖아요. 그런데 거기다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고 하니까 더 친근한 것 같애요.
최원정: 핍박과 억압을 극복한 민족! 동질감이 느껴지네요.
김동환/대안금융 경제연구소 소장: 네델란드에 유명한 기업들 이름, 혹시 허준씨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허준/방송인: 맥주회사~
일동: 네델란드하면 하이네켄~
김동환: 네델란드 회사죠. 그리고 예전에 LG와 합작했던 필립스, 그리고 유니XX라고 하죠. 여성분들 생필품~ 그리고 사실은 잘 안 알려진 회사 중에 ASML이라는 회사가 있어요. 이 ASML에서 만드는 장비가 없으면 전세계 고품위 반도체는 단 하나도 안나와요 (ASML-네델란드의 반도체 장비회사 반도체 제작에 필수적인 극자외선 노광장비 독점 생산기업). 그래서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그거 중국 주지 말라고 했구요. 삼성의 이재용 회장이 직접 가서 저희 먼저 주면 안돼요 할 정도로~
허준: 주변을 보면 엄청 강대국들이 있는데 이걸 이겨내고 결국은 강소국 기업을 만들었잖아요 우리도 반도체 조선 LNG 다 중소강국 우리나라와 비슷해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네델란드 하면 굉장히 유명한 얘기가 있잖아요. 옛날에 어린 소년이 제방에 구멍이 났어요. 이걸 가만 놔두면 점점 커져서 제방물이 넘칠 것 같은 불안감에 밤새워가지고 주먹으로 막았다는 유명한 이야기의 배경이 바로 네델란드잖아요.
이시원: 많이 들은 거 같애요. 아무리 거대한 제방의 구멍을 소년의 주먹만으로 막았다고 하는데 둑이 무너지는데 어린 손으로 막는다고 가능할까요?
최태성: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고요. 이게 네델란드를 배경으로한 미국 동화에 나옵니다. 네델란드는 습지가 많죠.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곳이기 때문에 홍수도 잦고 농사짓기도 어렵고 척박한 환경이잖아요. 그렇게 살기 어려운 환경에서 지금의 강한 네델란드를 만들었다는 출발이 바로 오늘의 이야기 대항해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시원: 17세기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전쟁 중이던 네델란드, 대항해 시대로 나갈만한 여유가 없었을텐데~
김대륜/대구경북 과학기술원 기초학부 교수: 단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후추 때문입니다. 후추를 구하러 가야 되겠다 라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인데 네델란드는 원래 무역을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포르투갈이 아시아에서 들여온 후추를 유럽 여러나라에 중개무역을 통해서 이익을 취해왔는데 포르투갈이 후추를 직접 유럽 시장에 팔겠다 라고 하면서 네델란드를 배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긴 거죠. 오랫동안 이걸 취했던 중요한 무역의 원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네델란드 사람들이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상인들이 그러면 우리도 직접 후추를 구하러 가봐야겠다 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구요. 그러면서 대항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시원: 그런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짭짤하게 수익을 올리고 있는데 밥그릇 뺏기고 싶지않찮아요.
김동환: 사실 대한민국과 네델란드가 흡사해요. 영토나 나라의 성격을 애기를 했는데 사실 대항해시대의 후발주자가 네델란드죠. 우리나라는 어떻게 보면 산업화 공업화의 후발주자인데 세계사에서 산업화 공업화를 단기간에 해낸 나라의 유례를 찾기 어렵게 빨리 성장을 했습니다.
최태성: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김동환: 빨리 성장할 때 어쩔 수 없이 편법도 좀 있었다고 해요. 예를 들면 반도체만 하더라도 1980년대 해외시찰, 견학, 파견이 있지 않겠어요. 한국 엔지니어들이 너는 이거 배워 나는 이거 배울게 해 가지고 기숙사나 호텔방에 와서 그걸 다 조합해 가지고 설계도를 만들어서 그것도 공항에서 걸릴까봐 다 분할해서 가져오고 그렇게 우리나라 반도체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네델란드 입장에선 항로죠.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개척한 대항해 시대의 항로를 네델란드 사람들도 틈틈이 가서 베껴오기로 한 거예요.
최태성: 옛날 조선시대에도 똑 같았습니다.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중국에 보내서 중국의 자격루를 눈으로 스캔해 갖고 와라.
최원정: 우리 민족이 눈썰미가 좋아요.
허준: 뭐냐하면 다 보고나서 형님~ 한 잔 하러 가시죠? 한 참 마시다가~ 형님이 너무 존경스러워~ 이거 어떻게 만든거야~술김에 주요 기술을 술술~
해설: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열고 동방의 과실을 독차지해 온 포르투갈, 아시아로의 바닷길은 가장 중요한 국가기밀이었다. 후발주자 네델란드는 그 정보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1582년 마침내 그 길이 보였다. 포르투갈에 잠입한 한 네델란드 지도 제작자가 항로 정보를 빼내는데 성공한 것, 브라질까지 서진후 희망봉으로 가는 아시아로의 바닷길~ 대항해 시대의 후발주자였던 네델란드의 대역전극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최원정: 항로를 알아내는 스파이네요.
이시원: 스파이지 솔직히 말해서 네델란드 입장에서는 네델란드의 문익점 같은 사람이 아닌가요?
최원정: 그러네요.
허준: 아니 네델란드가 왜 그렇게 스파이로 유명해요. 마타하리 있죠? (마타하리(1876~1917)-네델란드 출신 무용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스파이로 맹활약). 1차 세계대전에서 유명한 스파이 마타하리가 네델란드 사람이에요.
최원정: 진짜예요? 완전히 첩보강국이네~
김동환: 후발주자 입장에서는 선발주자를 따라잡는 승기를 잡을려면 두가지 전략이 있어야죠. 하나는 빨리 가서 베껴오든가 전혀 없다면 새로운 전략 기술을 선택을 해야 되는데 사실 네델란드 입장에서 후자를 선택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거예요. 전자 베끼자 전략을 택한 거죠.
이시원: fast follower
최원정: 이건 베낀 게 아니라 그냥 훔쳐온 건데~ 훔쳐온 거잖아요.
허준: 조상님들의 말이 있잖아요. 溫故知新~오래 된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더 하는 거예요.
최태성: 그 사람을 통해서 항로를 빼냈는데 사실은 이게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만약에 걸리면 바로 사형이구요. 이게 또 국제문제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 짓을 네델란드가 한 겁니다.
허준: 이거 하나 성공하면 이건 百年大計네! 앞으로 엄청난 소출이 들어올텐데 해야죠.
김대륜: 방법이야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네델란드의 처지에서는 일종의 효율을 택한 거라고 볼 수가 있죠. 포르투갈이 아시아 항로를 개척하는데 80년이 걸렸으니까 지금 스페인과 싸우고 있는 엄중한 상황에서 80년 동안 그런 일을 반복할 수는 없고요 그러니까 빨리 어떤 새로운 지식을 획득을 해서 어떻게든 바다로 나가야겠다 라는 마음이 절박했던 것이었죠.
이시원: 그러면 이제 네델란드가 후추를 얻게 되는 건가요?
김동환: 불행이도 네델란드가 후추를 대량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는데 그 시기 서유럽에 후추가 굉장히 많이 보급이 되었어요.
일동: 아이고~
김동환: 그러니까 fast follower로서 엄청 쫓아갔는데 선발주자가 다른 곳으로 도망간 버린거죠.
최원정: 주식으로 치면 상투를 잡은 거네~ 이 정도되면 레드오션(치열한 시장)이잖아요. 불루오션(새로운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은데~
김동환: 그래서 이제 두번째 전략으로 방향을 바꾸죠. 다른 나라가 안 하는 뭔가를 발굴을 해야되겠다. Fast follower가 아니라 뭔가 내가 치고 나가겠다는 전략을 국가경영에 도입을 하는 거죠.
---------------이광용: 17세기 후추공급이 늘어나면서 희소성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유럽 사람들은 후추보다 더 강렬한 이 맛에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그 맛의 정체는 바로 이 분이 공개하겠습니다-------향신료의 길을 따라 온 세상을 누빈 PD, 후추를 대신할 새로운 주인공은? 이욱정 PD의 스파이스 로드~----------------
이욱정/요리하는 PD: 2011년 CNN에서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서 무려 2위를 한 음식을 오늘 가지고 나왔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나시고랭(Nasi Goreng)입니다.
이시원: 1위가 뭐예요?
이광용: (광용 버럭) 이런 사람이 있어! 진짜 1등만 기억하는 잔인한 세상~ 하지만 역사저널 그날은 2위에 주목하려 합니다.
이욱정: 나시(Nasi)는 인도네시아어로 밥 그리고 고렝(Goreng)은 볶음이에요 그러니까 볶음밥이죠. 근데 겉보기에도 평범한 볶음밥이 어떻게 세계에 그것도 두번째 맛 있는 음식이 됐을까요?
최태성: 볶음밥이 맛 있긴 맛있지만 굳이 세계 2위까지 올라갈 음식은 아닌데~
이시원: 우리나라 김치 볶음밥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이광용: (볶음밥을 보여 주면서) 보세요~
이욱정: 사실은 이 안에 비밀의 재료가 숨겨져 있어요. 이광용 아나운서 미식가로서 어느 정도 자격이 있는지 맛 보시죠~
이광용: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대신 먹어보겠습니다.
최태성: 왜 혼자 먹어~
이시원: 스튜디오에 퍼지는 의문의 향기~ 어떤가요?
이광용: 씹으면 씹을수록 입에서 감기고 매운 맛도 느껴지고요. 뭔가 확 꼬집어서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맛이 막판에 느껴지는 데요.
이욱정: 나시고렝의 숨은 독특한 향의 정체는 바로 이거예요. 자~ 이겁니다. (나무접시에 담겨있는 것) 육두구(肉荳䓻)입니다. 영어로는 넛맥 Nutmeg 이라고 하는데 요게 호두처럼 생겼죠. 근데 이것이 씨앗이에요. 육두구 열매의 씨앗이고 이거를 건조해서 그라인더로 갑니다.
이광용 육두구란 이름이 낯설지 않아요?
최태성: 처음 들어보는데~
이욱정: 근데 실은 우리가 아주 즐겨 마시는 음료 그리고 음식에 육두구가 들어가 있어요. 요즘 핫한 음식이죠. 마라탕~ 마라탕에 육두구가 들어가 있고 또 하나 있죠. 소화 안될 때 부채표 모양의 이 소화제에도 육두구가 들어가 있어요.
이광용: 소화제에 자~ 이게 육두구 가루거든요. 이것두 어떤 느낌인지 제가 먹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태성: 같이 좀 먹지~ 내가 맛을 봐야
이광용: 아니 이 맛(활명수)이 여기에~이건 요리 재료라기 보다는 한약제 느낌인데~ 이걸 먹어봤을 때는 약인가 쉽지만 요리에 들어가면 풍미를 더 해주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죠.
이욱정: 중세 유럽에 이 시대에는 육두구 한 줌이 황소 7마리 가격과 맞먹는다는 그래요. 그 이유가 육두구 자체가 가지는 약리 효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귀족들의 재력 과시를 위한 목적도 컸다고 하네요.
최태성: 후추 플렉스(flex)가 아니고 육두구 플렉스네요.
이욱정: 후추가 문을 연 대항해 시대, 육두구를 통해서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강하고 자극적인 맛과 향기를 찾아 떠났던 스파이스 로드~ 인류문화의 뿌리를 음식을 통해서 찾아가는 이욱정 PD였습니다.
일동: (박수) 감사합니다.
이광용: 여러분, 유럽의 새로운 욕망, 육두구의 최대 산지는 인도네시아였습니다. 네델란드는 육두구를 얻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대항해 해 떠나기 시작합니다.
최원정: 냄새 너무 좋습니다.
이시원: 돼지고기에 넣으면 비린내가 싹 사라져요.
최태성: 육두구 맛만 볼게요. 육두구의 맛이 이 맛이구나.
최원정: 네델란드가 찾는 새로운 아이템은 바로 육두구였습니다.
이시원: 한 때는 유럽에서 후추가 과시의 용품이었다면 이제는 육두구가 과시의 수단이 되었네요.
김대륜: 당시 후추가 1이면 육두구가 10배 비쌌다고 그래요. 굉장히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있지요 실제로 귀족들과 여성들의 장신구 중에 포맨더 라는 함이 있어요 (포맨더 (Pomander)-과거 유럽에서 쓰인 휴대용 향료 케이스). 이걸 매달고 다니기도 하고 금속으로 만들기도 하고 자기로 만들기도 하는데 여기다가 육두구 열매를 넣고 다녔죠.
이시원: 교체 향수처럼~
김대륜: 향수처럼 방향제 처럼 쓰이기도 한 거죠.
----------------육두구룰 주머니에 1년 내내 넣고 다니면 절대 뼈가 부러지지 않는다-힐데가르트 폰 빙엔/중세 독일의 천재 수녀------------일반적으로 만병 통치약 비슷하게 생각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육두구 향기를 풍기고 나면 그만큼 부유하다는 걸 알려주는 거죠.
허준: 육두구가 지나가면 흠~ 있는 집안 냄새네~
이시원’ 나 육두구 있는 여자야~ 지금도 유럽에서는 향신료(Spice)하면 고급스럽게 이국적인 이미지이잖아요. 이런 노래도 있잖아요. If you wanna be my lover~ 스파이스 걸스~
김동환: 후추 때문에 대항해 시대에 여러 나라들이 위험을 무릎쓰고 아시아로 아시아로 갔던 거잖아요. 근데 이 육두구의 유행은 후추의 보편화에서부터 시작하죠. 그래서 보편의 반대말은 희소성이거든요. 이걸 빨리 캡쳐하는게 비즈니스 감각인데~ 네델란드 사람들이 이거다 이게 우리나라의 상품이다 그래서 육두구 재배를 가장 많이 하는 인도네시아로 항로를 개척해 나갑니다.
최태성: 이제서야 퍼즐이 맞추어지네요. 바로 육두구였어요. 후추의 시대는 가고~ 육두구야
이시원: 육두구를 구하기 힘드니까요 왜 연인관계에서도 쉽게 쟁취하면은 별로 매력이 없잖아요. 근데 가질 수 없을 때 더 매력적인거 그게 바로 육두구 아닌가요?
최태성: 배도 준비됐고 항로도 준비됐고 이제 아이템 육두구도 확인했고~ 이제 다음은~
이시원: 머니~ 머니~ 해도 Money~
최태성: 그렇죠,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제일 중요할 거 아녜요. 돈을 확보해야 떠날텐데~ 여기서 네델란드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자금을 모웁니다. 바로 회사를 세웠어요. 그 회사 이름이 바로 유명한 동인도회사~(네델란드 동인도회사-아시아 진출을 목적으로 1602년에 세운 무역회사).
허준: 인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왜 동인도 회사예요?
최태성: 좋은 질문이에요. 이 당시 인도 기준으로 동인도로 가면 동쪽에 있는 나라들은 다 그대로 동인도로 본 거예요. 심지어는 아메리카도 아프리카도 서안 쪽에 그쪽도 인도, 서인도~ 이런 식으로~
이시원: 인도를 중심으로 동 서로 나누어서 그렇게 한 거네요.
최원정: 인도가 세상의 중심이었군요.
최태성: 유럽의 관심은 인도에 꽂혀 있기 때문에 다들 인도야~
김동환: 동인도 회사가 경제 금융사적으로 중요한 회사인데 이 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다.
일동: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김동환: 최초로 자본금을 모아서 비즈니스에 쓰고 그 비즈니스의 성공을 주주들에게 돌려주었죠. 그 회사가 이 동인도 회사입니다.
이시원: 원거리 항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잖아요. 그걸 조달 방법은 투자자들한테서 돈을 모아서~
김동환: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애요. 프로젝트 하나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돈을 조달할 수가 있겠죠. 프로젝트가 끝나면 또 조달해야 되잖아요. 끝나면 또 조달해야 되고 그러니까 동인도 회사의 간부들이 아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애요. 야~ 그럴 필요가 없네. 10년 동안 계속해서 우리는 육두구를 찾아서 갈 테니까 우리한테 10년 정도 맡기면 매년 얼마씩 배당해 줄게요 이렇게 하면 동인도 회사는 돈을 계속 조달하려 안 다녀도 돼잖아요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투자유치 방법-장기간 (약 10년) 투자금 유치).
최태성: 간단하네, 자본주의 시장의 판을 깔았네~
최원정: 돈을 굴릴 줄 아는 나라 그렇게 봐야 되네요.
이시원: 지금이야 주식을 많이 하시까 익숙하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낯설었을 것 같애요.
최태성: 보이는 게 있으니까 들어가는 거죠. 1599년에 아시아에 갔다 왔던 네델란드 선박의 수익이 어마어마하게 났어요.
이시원: 어느 정도?
최태성: 어떻게 되었느냐면 무려 399%~
일동: 무려 4배의 수익이라고요
최태성: 100만원 넣어놓으면 400만원을 번 거예요.
이시원: 와~ 대박이다 무조건 투자해야죠.
최태성: 어마 어마하죠. 참여하지 않으실 거예요?
허준: 4배는 무조건 넣어야죠. 일단 집을 팔죠!
최태성: 이 당시도 난리가 난 가예요. 그 당시에 금방 돈이 모였는데~ 당시 몰린 자본금이 650만 길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40억 달러 정도가 순식간에 모인 거예요 이렇게 돈이 팍팍 모이니까 네델란드는 공격적으로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거죠.
허준: 아니 잠깐만요. 그렇다면 아까~ 얘기하신 것이 주식회사 형태라고 했는데 이 얘기는 이익을 보면 나누어준다는 얘기거든요. 이익을 못 내면 못나누어 주잖아요. 그런데 요 때 당시에 나갔던 배들이 돌아오는 확률이 절반도 안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두 대 나가면 한 대는 못 돌아오는데 그러면 내가 투자한 배가 갔는데 설마 저희 배 못 보셨어요? (말하지 않아도 알죠?) 이러면 투자한 돈은 하나도 못 받는거잖아요.
김대륜: 특정한 하나의 배에 투자한 것이 아니죠. 회사에다 투자를 하는 거니까 회사는 여러 배를 운영할 거구 그 중에 몇 대가 나가서 한 대만 돌아와도 회수를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김동환: 1680년 쯤에 동인도 회사가 배당을 한 기록을 보니까요. 연평균 원금의 45% 정도였어요. 그야말로 대박이죠.
이시원: 그 정도면 무조건 사야 되는 거 아네요.
허준: 배당금이 45%면 원금은 남아있는 거예요.
이시원: 당연히 그렇죠.
허준: 2년이면 따블, 4년이면 8배, 16배, 10년이면 60배 인가요?
최태성: 진정하세요.
이시원; 요즘 배당 수익률이 1%가 안 되잖아요.
김대륜: 네델란드 같은 경우는 오랫동안 바다에서 뭔가를 했던 경험이 있어요. 네델란드의 가장 중요한 산업 기간산업이 뭐냐 하면 청어잡이였거든요 지금도 네델란드 가시면은 절인 청어를 즐기는데 (우리로서는 당황스럽기는 한데~) 청어잡이를 하면서 네델란드가 조선업에서 기술적인 혁신을 이뤄요. 네델란드 선박은 빠르고 기동력이 좋고 적은 수의 인원으로도 운영이 가능해요.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네델란드의 선박들이 가장 효율적이었다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래서 동인도 회사라는 강력한 조직이 만들어지고 이 조직에서 국가가 독점권을 부여를 했거든요. 개척하는 땅을 다스릴 수 있고 외교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일종의 국가가 하는 일을 회사가 대신 할 수 있다. 이런 특전을 베푸니까 이제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여기에 투자할만하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신분의 차별 없이 투자를 하게 돼죠. 귀족 뿐만 아니라 상인, 전문직 종사자 하녀들까지 투자를 하는 거에요.
최원정: 개미 투자의 시초네요.
김대륜: 그렇죠, 흥미롭게도 이때 투자를 열심히 했는데 투자자는 어떤 사람들이냐면 남편을 일찍 잃어버린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인들이었죠,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없었죠. 그리고 여성이 일을 한다는 건 내 처지가 빈한하다 가난하다 라는 걸 얘기해주는 일이기 때문에 체면상 일을 할 수가 없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아이들도 키우고 물려주기도 해야 하고 이런 여러가지 일들을 재정적으로 처리를 하려면 안정적인 투자처가 필요한데 주식에 밀어 넣는거죠.
이시원: 너도 나도 다 넣었구나
최태성: 동인도회사 주식거래 명세서표를 보면은 하인이 일년치 월급을 몰빵을 했나봐요. 결과가 어떻게 되었냐하면 원금의 30% 이상 수익을 달성합니다. 이런 거 30% 수익들어봤어요?
허준: 꿈의 수익률인데요. 주식투자할 때 30%만 수익을 내면 정말 좋겠다 하고~
이시원: 3%만 올라도~
최원정: 그래 3%~
허준: 시원씨 거짓말 말고 나는 3%가 아니고 본전만 찾아도~
이시원: 지금까지 항해시대 하면 귀족 왕족들의 전유물이었거든요. 근데 이제는 대항해 시대가 아니라 다 함께 부흥의 시대 같애요. 진짜 너도 나도 신분 상관 없이~
최원정: 그걸 이끈 게 동인도회사 라는 거 아녜요? 어마 어마한 기업으로 성장을 했겠네요.
김대륜: 투자가 이렇게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수익을 많이 올리다 보니까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의 규모가 굉장히 커지게 돼죠. 그래서 1700년쯤 가게되면 지금가치로 환산하면 기업가치가 7조9천억 달러라고 얘기 하거든요.
최원정: 달러요?
김대륜: 네, 7조 9천역 달러면 지금 여기 보시는 애플이니 마이크로소프트니 아마존이니 이런 기업들보다 큰 거예요. 심지어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일본하고 독일이 총생산으로 따지면 세계 3, 4위 정도되는 나라거든요. 이 두 나라의 국내 총생산을 합하면 동인도 회사의 기업가치가 돼죠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일본+독일 GDP).
최태성: 어마 어마한 규모예요.
김대륜: 맞습니다.
이시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땅도 조그맣고 별거아닌 약소국이었잖아요. 주변 나라에서 볼 때는 얘가 걔야 이럴 것 같애요.
김동환: 회사의 가치는 어디서 나오냐면 하나는 수익가치~ 또 하나는 자산가치예요. 그러니까 동인도 회사가 육두구를 비롯해서 해외시장을 개척하면서 캐쉬프로우라고하죠. 돈을 벌어서 배당을 주니까 그 회사의 가치가 굉장히 좋아진거고 또 하나는 아마 네델란드 정부에서 계속 지원을 해가지고 해외시장의 어떤 자산을 계속 사들이거나 점령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거예요. 재무제표에 손익계산서와 대차대조표가 다 좋아지는 거죠.
최원정: 도전정신과 혁신이 한 나라를 부국으로 세운 거에요.
김대륜: 도전정신과 혁신의 기운 플러스 정부지원을 받은 폭력적인 성향 두개가 맞물려지면서 포르투갈은 아시아로 갔지만 아시아의 일부 지역만을 점거를 해요. 어떤 몇몇 항구 요런 지점들만 지키는 판국이었다면 네델란드는 향료가 나는 원산지를 점령해요. 향료는 모든 데서 다 나는 게 아니거든요. 육두구는 인도네시아의 어떤 특정 지역에서만 생산이 되거든요. 그 지역을 점령을 해버리고 거기서 독점하는 거죠.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네델란드의 동인도 회사----------그들이 발견한 것은 바로 육두구-----------육두구를 독차지 하기 위해 자행된 폭정---------------반항하는 원주민은 노예로 팔거나 처형-------------높은 가격을 유지하려고 수확한 육두구를 불태우기도-------------
최원정: 동인도 회사도 대단하고 네델란드 자체가 어마 어마하게~
-----------------저놈 잡아라-----------갑자기 스튜디오에 난입한 사무라이!-------------일본인과 네델란드 군인 총들고 나타남-------------도와 주세요--------------네델란드 군인이 일본 사무라이를 잡아서 밧줄로 묶음--------------
최원정: 아니~ 사무라이가 여기서 왜 나와요? 우리 스튜디오를 잘못 찾아 온 거 아니죠. 저걸 구해줘야 하는 거 아녜요?
김대륜: 여기 사무라이를 지키고 있는 저 사람은 네델란드 군인이 아니고요 동인도회사에 소속된 군대예요. 회사가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거죠. 네델란드가 암보이나에 무역거점을 만들 때 일본인 무사를 용병으로 고용을 했던 것이죠.
최태성; 일본 사무라이 라고 있는데 당시 네델란드 대항해 과정에 일본의 임진왜란 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일본은 전국을 통일한 후에 무사들이 할일이 없는거라. 그래서 용병으로 나간 거든요. 왜냐면 충성심 강하고 인건비 싸고 앞에 그런 얘기가 나와야 했는데~
김대륜: 지금 일본인 무사가 음모를 꾸몄다는 얘기예요. 어떤 음모냐 하면 인도네시아에 있는 네델란드 총독을 죽이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허준: 실제 있었던 사건 이라는 거예요?
이시원: 일본인 무사는 충성심이 강하다고 그랬는데 왜 갑자기 그런 배신을 한 거죠?
김대륜: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사람들은 일본인 무사가 독자적으로 움직인 게 아니고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 라고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 배후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인도네시아에 같이 진출해서 각축을 벌이고 있던 영국 동인도 회사 사람들이 음모를 꾸며 가지고 인도네시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세력다툼을 하고 있는 가운데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죠.
이시원: 갑자기 영국이 나타나네요.
최태성: 문제는 이때 심문과정에서 영국인과 일본인 있잖아요. 어마 어마하게 고문을 한 거예요. (생존 영국인의 증언-네델란드인의 끔찍한 고문자행). 겨드랑이에다 초를 지지고 물고문 당연하고 이런~ 결국은 자백했을 거 아녜요.
김대륜: 자백 후에는 관련자 20여 명 다 참수시켜 버립니다. 사실 암살시도를 한 건지 영국 배후혐의를 알 수가 없죠. 결론은 뭐냐하면 어쨌건 간에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은 인도네시아에서 손을 뗐습니다.
이시원: 영국 입장에서는 네델란드가 올챙이 적 모른다고 갑자기 선을 긋고 육두구 무역을 독점할려고 하니까 굉장히 괘씸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애요.
최원정: 뭔가 큰 보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애요.
김대륜: 영국은 17세기 전반기가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거든요. 왕과 의회가 계속해서 다툼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왕당파(1642~1651)와 의회로 나뉘어서 나라가 쪼개집니다. 그러다가 그 뒤로 집권한 사람이 올리버 크롬웰인데요. 크롬웰이 호국경이라는 이름을 달고 독재정치를 해요 (올리버 크롬웰(1599~1658)-영국의 정치가, 군인, 상업과 무역을 중시한 중상주의 추진). 독재정치를 하면서 나라를 정비하기 시작해요. 정비하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나라가 네델란드예요. 이 네델란드의 중개무역에서 차지하는 엄청난 우위를 어떻게 처리하지 않으면 영국이라는 나라의 국력은 키울 수가 없다 라는 생각을 하죠. 근데 지도를 보시면 네델란드가 가장 빠르게 대서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도버 해협을 통과하는 길이거든요. 안 그러면 위쪽으로 스코틀랜드를 돌아서 대서양으로 나가야 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길이니까 네델란드로서는 중요한 길인데 영국은 이 길을 막아버릴려고 해요. 네델란드가 이 길을 이용하는 것을 막고 그 다음에 네델란드를 겨냥한 항해법을 만들게 됩니다.
영국 항해법(1651년)
1.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물건은 모두 먼저 잉글랜드로 들어와야 한다
2. 배에는 잉글랜드인이 3분의 2 이상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3. 담배, 설탕, 직물은 오직 잉글랜드로만 팔 수 있다
4. 식민지로 물건을 향할땐 잉글랜드를 거쳐야 하며 이때 반드시 수입관세를 내야 한다
최태성: 딱 보면 특정국가가 명시되지 않았지만 누가봐도 영국해협을 왔다 갔다 하는 나라는 네델란드 이거든요. 이건 네델란드를 겨냥한 거예요.
이시원: 이건 네델란드 한테 너희는 나 빼고 무역하지 마 이런 선전포고 수준이네요
김동환: 항해법 4가지를 보니까 용의주도한 법이네 라는 생각이 드는게 보시면 1번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물건은 모두 먼저 잉글랜드로 들어와야 한다 물류를 장악한다 라는 뜻이죠. 그 다음에 2번 배에는 잉글랜드인이 3분의 2 이상 포함되어야 한다 이건 고용 일자리를 챙기는 거죠. 그 다음에 4번 식민지로 물건을 향할 땐 잉글랜드를 거쳐야 하며 반드시 수입관세 이건 재정을 챙긴 거죠. 그러니까 고용 물류 재정 이런 거를 다 챙기는 법이네요.
이시원: 솔직히 네델란드 입장에서는 갑자기 이렇게 아예 하지마 무조건 영국 통해야 돼 네델란드가 이걸 하겠어요. 걱정되는 것은 도버해협을 막아버리면 대항해 시대는 끝나는 건가요?
최원정: 그래서 드디어 바다에서 영국과 네델란드가 격돌을 합니다.
해설: 항해법을 만들어 네델란드의 바닷길을 막아버린 영국, 그러나 네델란드는 영국의 위협 속에서도 아시아로에의 항해를 감행한다. 그러자 영국은 도버 해협을 지나는 네델란드 무역선을 공격하고 나포한다. 네델란드가 반격에 나섰다. 20여년 이나 이어진 영란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발사! 일진일퇴 공방~ 그것은 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승자를 가리기 위한 처절한 사투였다.
최원정: 영국과 네델란드의 전쟁을 英蘭戰爭이라고 하죠. 영란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이시원: 배 크기를 보면 네델란드의 배가 작더라구요. 싸움이 될까요.
최태성: 영국 해군은 잘 아시겠지만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깬 엄청난 해군이거든요. 영국 해군하고 붙는다. 이건 영란전쟁에서 초기에 네델란드의 패배가 예상되는~
최원정: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잖아요.
이시원: 영국 입장에서는 우리나라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도 이겼는데~ 어디서~ 청어나 잡던 아이들이 감히~ 이럴 수가 있어요.
허준: 여기서 사실 힌트도 있잖아요. 20년간 지속된 영란전쟁~이건 뭔가 네델란드도 한 방이 있는 거 아냐
최원정: 네델란드에 이순신 같은 존재가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해설: 프랑스까지 영국 편에 가담한 3차 영란전쟁, 이때 위기에 몰린 네델란드를 구한 건 네델란드의 제독 로이테르 (Ruyter)였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네델란드 조선 실력으로 작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배들을 보강한다. 그리고 1673년 영국과 네델란드의 최후 결전~
로이테르 제독: 어리석은 놈들이 죽으려고 작정했어
영국 제독: 적장은 누구인가?
영국 수병: 미힐 드 로이테르 제독입니다
해설: 그런데 갑자기 퇴각을 지시하는 로이테르 제독,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얕은 네델란드 연안에서 좌초되기 시작한 영국의 대형 함선들, 네델란드가 대항해 시대에 향신료 시장에 마지막 주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일동: 한국에는 이순신이 네델란드에는 로이테르가~
최원정: 느낌이 오는데~
허준: 마지막에 웃으면서 나오는데~ 느낌이~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개선하는 것처럼 보이는~
최태성: 실제로 로이테르가 1665년 실제로 13척의 배를 가지고, 숫자도 비슷해~ 명량대첩에서도 13척이잖아요. 영국배를 무너뜨린 경력이 있어요.
최원정: 소름이 너무 끼친다.
최태성: 네델란드 역사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 이 인물 덕에 정말 20년 동안 승기를 영국에 내주지 않았던 거예요.
이시원: 영국 대형함선들 얕은 해안으로 유인을 해서 좌초하게 만들고 굉장히 머리가 좋았던 것 같애요. 이 정도로 영화 대사에~ 전하~아직 네델란드에는 로이테르가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써야 되는 거 아녜요. 네델란드 입장에서는 로이테르~!
김대륜: 사실 승자가 있다고 하기에는 힘든 전쟁이예요. 어느 한편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보였다 라고 얘기하기에는 어려운 전쟁이기 때문에 네델란드나 영국 모두 타격을 입게되고 결국에는 타협을 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를 하게 돼죠. 그래서 네델란드도 다시 도버 해협을 통과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구요.
최원정: 결국 이 모든 것이 육두구 때문이었는데 그러면 네델란드가 육두구를 다 차지하는 건가요?
김동환: 네델란드와 영국 사이에 일종의 협상이 진행되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네델란드가 인도네시아의 육두구를 확보하는 대신 네델란드는 뭘 줬냐 자신들이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의 New Armsterdam (뉴 암스테르담)을 영국에 넘겨주는데 이게 지금 뉴욕입니다.
최원정: 잠깐만요 뉴욕이 육두구만 못했단 말이야
일동: 뉴욕????
김동환: 뉴암스테르담이 뉴욕으로 바뀐거죠.
최원정: 지금 보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일인데~
이시원: 어떻게 보면 영국은 그 당시의 뉴 암스테르담이 지금의 뉴욕이 아니잖아요. 그 당시에는 별거 아닌 땅이고 그러면 솔직히 육두구도 못얻잖아요. 영국 입장에서는 나보다 약할 줄 알았던 네델란드한테 겨우 뭔지 모르는 땅 하나 얻고 육두구도 못얻고 좀 아쉬울 수도 있었을 것 같애요.
허준: 결국 중요한 건 영국은 peace & chips에 육두구룰 못뿌려 먹었다는 얘기네요.
최원정: 다 육두구 때문이네~ 육두구 전쟁에서 완전히 밀린 영국, 그래서 인도로 새 항로를 개척하게 됩니다.
-------이광용: 18세기 프랑스 패션을 선도했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가 1783년 초상화에서 입고 있던 ‘이옷’ 때문에 프랑스 사회가 발칵 뒤집힙니다. 왜냐~ 겉으로 보기엔 소박하고 평범한 드레스로 보이죠. 그런데 사실 이 드레스는 인도산 면직물로 만든 면드레스였습니다. 프랑스 왕비가 자국의 드레스 옷감인 비단 옷을 입지 않고 수입 면직물 드레스를 입었다. 대중들의 큰 질타가 이어졌구요.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단 드레스를 입고 다시 한번 같은 자세로 초상화를 그려야 했습니다. 과연 이 인도산 면직 드레스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박소영/인도섬유 디자이너: 우리나라에서는 인도직물이라고 하면 인도의 이미지를 생각하여 저렴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없다는 인식들이 있는데요. 유럽에서는 인도 직물 이라고 하면 장인들이 한땀 한땀 공을 드려서 만들었다고 생각해서 인식도 되게 좋고 고급직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도 직물이 유럽에 소개가 된 건 대항해 첫 주자로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던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산 면직물을 캘리코 라고 부르면서 영국에 소개되기 시작합니다.
최태성: 캘리컷에 도착해서 캘리코~
이광용: 캘리코 라는 이 옷감의 명칭이 캘리컷 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건데 그러면 당시의 사람들이 왜 캘리코에 열광을 했던 걸까요?
박소영: 당시 유럽에서는 모직물을 사용했는데 모직물은 세탁이 용이하지도 않고 찍찍하고 여기 프린팅이나 나염을 하기에는 굉장히 힘들었죠.
이광용: 무엇보다 뻣뻣하고 무거워요. 그런데 인도산 옷감은 딱~ 펴볼게요. 질감 자체가 보들보들하고 하늘하늘 하고~
최원정: 저걸 바람이 짠 직물이라고 부르기도
박소영: 캘리코는 통기성이 좋고 세탁을 하면 빨리 건조가 돼서 입을 수가 있으니까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캘리코는 색감이나 프린팅을 원하는 대로 그릴 수가 있습니다. 원래 처음에는 매염이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우드 블록에 원하는 그림을 카빙을 합니다. 칼빙을 해서 찍어서 기계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약식으로 간단하게~짝~짝~ (무늬 선명하게) 이런 식으로 장인들은 이걸 계속 이어서 질감을 만들어 갑니다. 기계로 찍은 원단은 정확하고 빈틈이 없지만 사람의 손은 인간미가 넘치는 패브릭이 되기 때문에 영국인들이 이걸 보고 굉장히 좋아했어요.
이광용: 일단 간이로 찍은 거기 때문에 그걸 감안하고 본다면 제대로 공방에서 찍는다고 할 때 정말 화려하고 선명한 무늬가 옷감에 찍히는 거네요.
박소영: 지금 우드 블록 프린팅으로 이용해서 만든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보여 드릴게요.
일동: 너무 예쁘다 (모델 등장).
이시원: 이게 면직물 이라고요?
허준: (패션모델 걷기) 화려하고 가벼워 보여요.
최태성: 찰랑 찰랑 느낌이 오네~
이광용: 경매 시작하겠습니다!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최원정: 저 옷 갖고 싶다.
이시원: 저도 이런 옷 입고 싶어요.
이광용: 17세기 유럽은 이 캘리코에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캘리코의 무역권을 손에 쥔 나라는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최원정: 지금은 면이 흔하디 흔하지만 당시는 획기적인 옷감이었어요. 그러니까 마치 나이론이 발명되었을 때의 그런 느낌이랄까.
김동환: 굉장히 매력적인 게 가격이 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반 노동자도 2주간 일을 하면 2주의 급여로 캘리코 한 필을 살 수 있었어요.
이시원: 이게 진짜 좋을 것 같은게 비단 옷을 한번 입어 보았는데 예쁘긴 한데 움직이기가 너무 힘들더라구요. 캘리코는 가벼우니까 너무 활동하기가 편해서 서민들의 사용에도 마음에 쏙 들었을 거예요.
최원정: 문익점의 목화씨에서 애민정신을 느끼듯이 서민들에게 보편화될 수 있는~
이시원: 육두구가 귀족들의 전유물이지만 캘리코는 서민들도 구매가 가능하잖아요. 그만큼 수요도 엄청컸다는 데 그러면 그 만큼 시장도 크지 않았을까요?
김대륜: 그렇죠, 이게 단지 옷에만 사용되는게 아니고 여러분들 주변에 둘러보시면 아시겠지만 면으로 만든 온갖 제품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커튼도 있을 수 있고 손수건 식탁보 쿠션 커버 침구류 온갖 캘리코가 활용이 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17세기 후반에 가면 캘리코 광풍(Calico Craze) 이란 얘기를 하거든요. 캘리코가 정말 사람들을 미칠 정도로 열광케 하는 그런 제품이었다고 얘기를 하고 그래서 우리가 아까 암보니아 사건을 얘기하면서 결국에 영란전쟁으로 이어지고 결말로 영국은 인도네시아 향신료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영국은 어쩔 수 없이 인도로 가게 되었는데 인도에서 예상 못한 캘리코 잭팟을 터뜨렸다.
최원정: 밀린 게 잘 된 거네요. 轉禍爲福
김대륜: 영국은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서 캘리코를 들여오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동인도 회사의 무역에 거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면직물이 중요시 되었죠.
이시원: 후추도 결국 가격이 떨어졌잖아요. 육두구도 결국은 떨어지게 되어 있거든요. 그때 뭐 욱두구 못 얻었다고 울었을 텐데 새로운 캘리코가 나타난 거죠.
최원정: 향신료 설탕에서 인간의 욕망이 면직물로 향한 느낌을 받지 않아요.
최태성: 영국 같은 경우는 다른 방식인데요. 아까 후추나 육두구는 희소성이라는 데서 엄청 돈을 벌었다면 (후추-육두구의 가치=희소성) 캘리코는 박리다매 쪽으로 가면서 (캘리코의 가치=보편성) 일상 생활을 다 바꾸어 버리는 식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김동환: 그래서 후추나 육두구가 영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캘리코가 미치는 영향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요 (후추-육두구 VS 캘리코). 왜냐면 말씀하신 것처럼 일반 국민들이 다 대중적으로 캘리코를 쓰게 되니까 수입품이 영국에서 기존에 쓰던 무언가 (영국전통산업)를 대체해 버린 거죠. 그게 모직산업이에요. 그러니까 캘리코는 더 좋고 더 저렴한데 모직물은 비쌌거든요. 그 당시 모직산업이 기간산업이에요. 지금 한국으로 치면 반도체나 자동차 산업이란 말예요. 이게 캘리코 때문에 기존산업 생태계가 일시에 붕괴가 되어 버린 거죠. 예를 들면 양치기 소년이 직업을 잃죠. 목초 재배 농부가 실직돼죠. 직조공-방적공이 실직합니다. 그래서 영국경제에 굉장한 위험인자가 캘리코와 함께 같이 들어온 거죠.
이시원; 이게 영국의 아이러니다 어떻게 보면 대항해 시대의 승자의 깃발을 잡긴 했는데 캘리코 하나 때문에 영국경제가 흔들리는 거예요.
김대륜: 격렬하게 대치를 해요. 모직물을 제조하는 사람들이나 비단을 수입하거나 비단을 가공하는 사람들이 전부 반대를 해요. 그래서 캘리코가 들어오지 못하게 캘리코를 입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는 청원들을 계속 의회에 지속적으로 넣고 모직물 직조공들은 폭동을 일으켜요. 그래서 실제로 1719년는 여름이 되면 당연히 면직물이 시원하고 좋겠지요. 통기성이 좋고 땀을 잘 흡수를 해서 좋을텐데 모직물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면직물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여자들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 라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격렬하게 대립이 일어납니다.
최태성: 내수산업이 위협받지 사회적 갈등이 생기지 이러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고민하다가 결론은 그러면 우리가 안에서 이걸 직접 만들자 그러면서 방직기술이 발전하고 그 발전과정속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면직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면직물이 조선과 강화조약 체결하고 일본과 조선까지 와요.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캘리코가 가져온 나비효과가 산업혁명을 가져옵니다.
이시원: 소름 돋았어요. 이렇게 연결이 되네요.
허준: 후추 후추 후추~아메리카 아메리카 아메리카~ 노예 노예 노예~육두구 육두구 육두구~ 면직물 면직물 면직물 ~산업혁명 절대 안 잊어버릴 것 같애요.
최원정: 큰 이름을 짓고 있네. 알면 알수록 놀라운 역사의 거대한 흐름
이시원: 영국은 대항해 시대의 후발주자였잖아요. 그 영국이 승자의 깃발을 잡고 산업혁명을 일으킨 나라가 됐다 라고 한 게 신기하고 대단해요.
김대륜: 영국이 네델란드와 다른 점이 있죠. 영국은 대항해 시대에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게 돼요. 해가지지 않는 제국이란 말은 18세기 후반 쯤에 가면 그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돼요. 그러니까 넓은 땅에 영국인들이 정착할 수 있는 식민지를 만들었고 그 식민지에서 많은 상품들을 담배니 설탕이니 염료니 이런 제품들을 들여오게 돼죠. 인도도 똑 같은 운명에 빠지게 됩니다. 1757년 경쟁자 프랑스에 승리하며 인도를 독점하게 된 영국~ 식민지 인도의 목화를 헐값에 수입~ 대량생산 면직물 인도에 역수출 1784년 80만 파운드 인도 면직물 수출액~인도 면산업 고사 목적으로 기술자들의 손가락까지 절단~ 이렇게 하면서 대항해 시대가 이제 제국주의 시대로 서서히 넘어가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최원정: 아시아에 사는 우리로서는 씁쓸한 여운이 남는 역사의 한 장면들이네요. 대항해 시대를 처음에 발견의 시대, 신항로 개척 이라고 표현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저희가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새롭게 대항해 시대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허준: 저희가 어렸을 적에 저기 돈이다! 하면 옆에 친구를 탁 치면서 주우면 임자! 이런 얘기를 했잖아요. 있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건 아닌데 이때 당시에 그들은 내가 힘이 있다면 발견했어? 내 꺼야 (스페인 영국 네델란드). 그래서 저는 인류가 이제 앞으로 발전을 더 하면 이 시대를 개척했다 발견했다가 아니라 점유이탈물 횡령의 시대 라고~
최태성: 오늘 아침에 제가 일어나 가지고 밥을 먹었는데 후추를 뿌렸네 설탕을 먹었네 뉴스에 주식 소식이 나오고 있었네 옷을 면제품 옷을 입고 온 거예요. 대항해의 엄청난 사건이 오늘 아침에 나도 이제 공부하러 가야지 하는 욕망까지 모든 것들이 오늘 아침 그 순간에 다 함축되어 있더라구요. 저는 그래서 대항해 시대는 오늘 아침, 당신의 시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최원정: 대항해 시대 5부작 하면서 김대륜 교수님이 애써 주셨어요. 감사드리면서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대륜: 이 시대는 유럽이 세계의 변방에 있다가 중심으로 나오는 시기잖아요. 그 역사가 오랫동안 이어져 와서 우리는 유럽과 혹은 서양 문명에 대해서 오랫동안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진보라고 얘기하는 것들이 유럽에서 비롯했다 라고 생각해왔죠. 그런데 이번에 역사저널 그날에서 5번에 걸쳐서 여러 에피소드들을 살펴보면서 한가지 깨닫게 된 점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게 문명의 진짜 과정이라기 보다는 야만적인 폭력이 곳곳에 개입되어 있고 인간성에 반하는 행위들이 그 과정에 깊이 연루 되어 있다 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묘하게도 문명과 야만이 아주 기묘하게 얽혀 들어가는 복잡한 시대였고 그 유산을 되돌아보고 어떤 면에서는 극복할 만한 의지나 희망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최원정: 대항해 시대 막을 내립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38회 대항해 시대 [제5편] 후발주자의 헝거게임 네델란드 VS 영국에서 정리).
① 네델란드는 독립을 위해서 스페인과 80여년 간 치열하게 싸웠다. 그때 독립전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가문의 이름이 오라녀(Oranje)公, 영어로는 Orange였다. 그 가문을 기리기 위해서 네델란드는 국가 대항전에서 오랜지색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네델란드가 한창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치르던 그 시기가 대항해 시기였다. 17세기 네델란드는 스페인과 맞서기 위한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서 대항해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대항해 후발주자로 네델란드는 과연 바다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델란드 회사로 ASML이라는 회사가 있다. ASML는 네델란드의 반도체 독점 생산기업체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그거 중국 주지 말라고 했고 삼성의 이재용 회장이 직접 가서 저희 먼저 주면 안돼요 할 정도다. 네델란드는 습지가 많고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곳이기 때문에 홍수도 잦고 농사짓기도 어렵고 척박한 환경이다. 살기 어려운 환경에서 지금의 강한 네델란드를 만들었다는 출발이 바로 대항해 시대였다. 네델란드는 원래 무역을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포르투갈이 아시아에서 들여온 후추를 유럽 여러나라에 중개무역을 통해서 이익을 취해왔는데 포르투갈이 직접 유럽 시장에 팔겠다 라고 하면서 네델란드를 배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도 직접 후추를 구하러 가야겠다 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네델란드의 대항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② 네델란드 입장에선 항로가 없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개척한 대항해 시대의 항로를 네델란드 사람들도 틈틈이 가서 베껴오기로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세종대왕은 장영실을 중국에 보내서 중국의 자격루를 눈 스캔해 갖고 왔다.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열고 동방의 과실을 독차지해 온 포르투갈, 아시아로의 바닷길은 가장 중요한 국가기밀이었다. 후발주자 네델란드는 그 정보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1582년 마침내 그 길이 보였다. 포르투갈에 잠입한 한 네델란드 지도 제작자가 항로 정보를 빼내는데 성공하였다, 브라질까지 서진후 희망봉으로 가는 아시아로의 바닷길~ 대항해 시대의 후발주자였던 네델란드의 대역전극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후발주자 입장에서 선발주자를 따라잡을려면 두가지 전략이 있어야한다. 하나는 빨리 가서 베껴오든가 아니면 새로운 전략 기술을 개발해야 되는데 네델란드는 전자를 택하였다. 포르투갈이 아시아 항로를 개척하는데 80년이 걸렸는데 지금 스페인과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80년 동안 그런 일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빨리 새로운 지식을 획득해 어떻게든 바다로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절박했다. 그런데 불행이도 네델란드가 후추를 대량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는데 그 시기 서유럽에 후추가 많이 보급이 되었다. 이제 두번째 전략으로 다른 나라가 안 하는 뭔가를 발굴해야되겠다. 17세기 후추공급이 늘어나면서 유럽 사람들은 후추보다 더 강렬한 맛에 주목하였다.
③ 육두구(肉荳䓻)였다. 영어로는 넛맥 Nutmeg 이라고 하는데 이게 호두처럼 생겼다. 육두구 열매는 씨앗이고 이거를 건조해서 그라인더로 간다. 중세 유럽 이 시대에 육두구 한 줌이 황소 7마리 가격과 맞먹었다. 그 이유가 육두구 자체가 가지는 약리 효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귀족들의 재력 과시를 위한 목적도 컸다. 후추가 문을 연 대항해 시대, 육두구를 통해서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였다. 육두구는 강하고 자극적인 맛과 향기의 향신료였다. 유럽의 새로운 욕망, 육두구의 최대 산지는 인도네시아였다. 네델란드는 육두구를 얻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향해 떠났다. 이제는 육두구가 과시의 수단이 되었다. 당시 후추가 1이면 육두구가 10배 비쌌다. 실제로 귀족들과 여성들의 포맨더 라는 장신구에 육두구 열매를 넣고 다녔다.
④ 육두구의 유행은 후추의 보편화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보편의 반대말은 희소성이다. 배도 준비됐고 항로도 준비됐고 아이템 육두구도 확인했고 이제 자금확보가 문제였다. 여기서 네델란드는 독특한 자금조달 방법을 생각해냈다. 바로 회사를 세웠다. 그 회사 이름이 1602년에 세운 동인도 무역회사다. 최초의 주식회사다. 프로젝트 하나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또 조달해야 되고 끝나면 또 조달해야 되고 아마 동인도 회사 간부들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럴 필요가 없이 우리가 10년 동안 계속해서 육두구를 찾아서 갈 테니까 우리한테 10년 정도 맡기면 매년 얼마씩 배당해 주겠다 이러면 동인도 회사는 돈을 계속 조달할 필요가 없다.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낯설었을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건 1599년에 아시아에 갔다 왔던 네델란드 선박의 수익이 399%였다. 무려 4배의 수익이었다. 100만원 투자에 400만원을 벌었다.
⑤ 이 당시도 난리가 났다고 한다. 당시 자본금 650만 길더(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40억 달러)를 순식간에 모았다고 한다. 네델란드는 공격적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1680년 쯤에 동인도 회사 기록을 보면 연평균 원금의 45% 정도 배당을 하였다. 그야말로 대박이다. 네델란드의 기간산업은 청어잡이였다 네델란드인들은 절인 청어를 즐긴다고 한다. 청어잡이를 하면서 네델란드는 조선업에서 기술적인 혁신을 이루었다. 그래서 네델란드 선박은 빠르고 기동력이 좋고 적은 수의 인원으로도 운영이 가능했다. 당시 기준으로 네델란드의 선박들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동인도 회사라는 강력한 조직이 만들어졌고 국가가 회사에다 독점권을 부여했다. 개척하는 땅을 다스릴 수 있고 외교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일종의 국가가 하는 일을 회사가 대신 할 수 있었다. 이런 특전을 베푸니까 네델란드 사람들이 회사를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에 너도 나도 신분의 차별 없이 투자를 하였다. 개미 투자의 시초다. 남편을 일찍 잃어버린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진 부인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당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여성이 일을 한다는 건 내 처지가 가난하다 라는 걸 얘기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키우고 재산도 물려줄려면 안정적인 투자처가 필요하였다. 동인도회사 주식거래 명세서표를 보면은 하인이 일년치 월급을 몰빵했다. 결과는 원금의 30% 이상 수익을 달성했다. 동인도회사는 어마 어마한 성장을 했다. 1700년쯤 되면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기업가치가 7조9천억 달러였다고 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일본하고 독일의 총생산이 세계 3, 4위 정도되는데 이 두 나라의 국내 총생산을 합하면 동인도 회사의 기업가치가 되었다. 어마 어마한 규모였다.
⑥ 회사의 가치는 하나는 수익가치 다른 하나는 자산가치다. 동인도 회사가 육두구를 비롯해서 해외시장을 개척하면서 돈을 벌어서 배당을 주니까 그 회사의 가치가 좋아진 거였다. 또 하나는 아마 네델란드 정부에서 지원을 해가지고 해외시장의 어떤 자산을 계속 사들이거나 점령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재무제표에 손익계산서와 대차대조표가 다 좋아졌다. 이건 도전정신과 혁신에서 나온다. 도전정신과 혁신의 기운 플러스 정부지원을 받은 두개가 맞물려졌다. 포르투갈은 아시아로 갔지만 아시아의 일부 지역만을 점거했지만 네델란드는 향료가 나는 원산지를 점령하였다. 향료는 모든 데서 다 나는 게 아니다. 육두구는 인도네시아의 어떤 특정 지역에서만 생산이 된다. 그 지역을 점령하고 독점하였다. 영국도 육두구를 얻기 위해 갑자기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여 네델란드와 각축 세력다툼을 벌였으나 20여명 자국민의 희생만 당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손을 뗐다. 네델란드가 육두구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영국의 큰 보복이 예상된다. 영국은 17세기 전반기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다. 왕과 의회가 계속해서 다툼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왕당파(1642~1651)와 의회로 나라가 쪼개졌다. 그 뒤로 집권한 사람이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호국경이라는 이름을 달고 독재정치를 하였다. 독재정치를 하면서 나라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정비하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나라가 네델란드였다. 네델란드가 중개무역에서 차지하는 엄청난 우위를 영국이 처리하지 않으면 영국이라는 나라의 국력은 키울 수가 없다. 그래서 영국은 네델란드가 대서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 도버 해협을 막아버렸다. 그 다음에 네델란드를 겨냥한 항해법을 만들었다.
⑦ 영국 항해법(1651년)
1.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물건은 모두 먼저 잉글랜드로 들어와야 한다
2. 배에는 잉글랜드인이 3분의 2 이상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3. 담배, 설탕, 직물은 오직 잉글랜드로만 팔 수 있다
4. 식민지로 물건을 향할땐 잉글랜드를 거쳐야 하며 이때 반드시 수입관세를 내야 한다
누가 봐도 네델란드를 겨냥한 것이다. 네델란드 한테 선전포고다. 항해법은 용의주도하였다. 1번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물건은 모두 먼저 잉글랜드로 들어와야 한다 물류를 장악한다 라는 뜻이다. 2번 배에는 잉글랜드인이 3분의 2 이상 포함되어야 한다 이건 고용 일자리를 챙기는 거다. 그리고 4번 식민지로 물건을 향할 땐 잉글랜드를 거쳐야 하며 반드시 수입관세 이건 재정을 챙긴 거다. 그러니까 고용 물류 재정을 다 챙기는 법이다. 항해법을 만들어 네델란드의 바닷길을 막아버린 영국, 그러나 네델란드는 영국의 위협 속에서도 아시아로에의 항해를 감행했다. 영국은 도버 해협을 지나는 네델란드 무역선을 공격하고 나포한다. 네델란드가 반격에 나섰다. 20여년 이나 이어진 英蘭戰爭은 그렇게 시작됐다. 일진일퇴 공방, 그것은 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승자를 가리기 위한 처절한 사투였다. 배 크기를 보면 네델란드의 배는 작다. 영국 해군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깬 엄청난 해군이다. 초기에 네델란드의 패배가 예상되는 전쟁이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그러나 네델란드도 한 방이 있었다. 인물이다. 네델란드에 이순신 같은 존재가 있었다. 프랑스까지 영국 편에 가담한 3차 영란전쟁 때 위기에 몰린 네델란드를 구한 건 네델란드의 제독 로이테르 (Ruyter)였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네델란드 조선 실력으로 작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배들을 보강하였다. 그리고 1673년 영국과 네델란드의 최후 결전~ 갑자기 퇴각을 지시하는 로이테르 제독,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얕은 네델란드 연안에서 좌초되기 시작한 영국의 대형 함선들, 네델란드가 대항해 시대에 향신료 시장에 마지막 주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⑧ 실제로 로이테르는 1665년 13척의 배를 가지고 영국배를 무너뜨린 경력이 있다. 네델란드 역사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 이 인물 덕에 20년 동안 영국에 승기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승자가 있다고 하기에는 힘든 전쟁이었다. 어느 한편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보였다 라고 얘기하기에는 어려운 전쟁이었다. 네델란드나 영국 모두 타격을 입었고 결국 타협을 하였다. 네델란드는 자유롭게 다시 도버 해협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네델란드와 영국 사이에 일종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네델란드가 인도네시아의 육두구를 확보하는 대신 자신들이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의 New Armsterdam (현재 뉴욕)을 영국에 넘겨주었다. 육두구 전쟁에서 밀린 영국은 인도로 새 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도에는 저렴하고 고급스러운 직물이 있었다. 인도 직물이 유럽에 소개가 된 건 대항해 첫 주자로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던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산 면직물을 캘리코 라고 부르면서 영국에 소개하였다. 캘리코 라는 옷감의 명칭은 캘리컷 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왜 캘리코에 열광을 했을까. 당시 유럽에서는 모직물을 사용했는데 모직물은 세탁이 용이하지도 않고 찍찍하고 프린팅이나 나염을 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런데 인도산 직물은 질감 자체가 보들보들하고 하늘하늘 하고 통기성이 좋고 세탁을 하면 빨리 건조가 돼서 입을 수가 있었다. 캘리코는 색감이나 프린팅을 원하는 대로 그릴 수가 있다. 기계로 찍은 원단은 정확하고 빈틈이 없지만 사람의 손은 인간미가 넘치는 패브릭이 되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여기에 열광하였다.
⑨ 17세기 캘리코의 무역권을 손에 쥔 나라는 바로 영국이었다. 캘리코가 매력적인 게 가격이 쌌다. 일반 노동자도 2주간의 급여로 캘리코 한 필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비단 옷은 예쁘긴 한데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캘리코는 가벼우니까 활동하기가 편해서 서민들의 마음에 쏙 들었다. 육두구가 귀족들의 전유물이지만 캘리코는 서민들이 엄청 구매를 많이 하였다. 우리 주변에 면으로 만든 온갖 제품들 커튼 손수건 식탁보 쿠션 커버 침구류 온갖 캘리코가 활용이 되기 시작하고 17세기 후반에 가면 캘리코 광풍(Calico Craze)이 불었다. 캘리코가 사람들을 미칠 정도로 열광케 하는 제품이었다. 영국은 인도에서 예상 못한 캘리코 잭팟을 터뜨렸다. 영국은 동인도 회사의 무역에 거의 70% 이상을 차지하였다. 인간의 욕망이 향신료 설탕에서 면직물로 향하였다.
후추나 육두구는 희소성이라는 데서 엄청 돈을 벌었다면 캘리코는 박리다매로 가면서 일상 생활을 바꾸어 버렸다. 후추나 육두구가 영국 경제에 미친 영향과 캘리코가 미친 영향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왜냐면 일반 국민들이 대중적으로 캘리코를 쓰게 되니까 영국 전통산업 모직물을 대체해 버리게 되었다. 캘리코는 더 좋고 더 저렴한데 모직물은 비쌌다. 캘리코 때문에 기존산업 생태계가 일시에 붕괴 되어버렸다. 양치기 소년, 목초 재배 농부, 직조공-방적공이 실직하게 되어 영국경제에 위험인자가 되었다. 이게 영국의 아이러니다. 모직물을 제조하는 사람들이나 비단을 수입하여 가공하는 사람들이 전부 캘리코를 반대하였다. 캘리코가 들어오지 못하게 캘리코를 입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는 청원들을 의회에 지속적으로 보냈다. 모직물 직조공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실제로 1719년 여름에 모직물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면직물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여자들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 라는 일화가 있다.
⑩ 영국은 내수산업이 위협받고 사회적 갈등이 생기니까 문제해결을 고민하다가 결론은 그러면 우리가 캘리코를 직접 만들자였다. 그러면서 방직기술이 발전하고 그 발전과정 속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면직물을 대량 생산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면직물이 조선까지 오게 되었다. 캘리코가 가져온 나비효과는 산업혁명을 가져왔다. 후추 후추 후추~ 아메리카 아메리카 아메리카~ 노예 노예 노예~ 육두구 육두구 육두구~ 면직물 면직물 면직물~ 산업혁명, 대항해 시대를 알면 알수록 놀라운 역사의 거대한 흐름, 대항해 시대의 후발주자였던 그 영국이 승자의 깃발을 잡고 산업혁명을 일으킨 나라가 됐다. 영국이 네델란드와 다른 점은 영국은 대항해 시대에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게 된다. 해가지지 않는 제국이란 말은 18세기 후반 쯤에 나온다. 영국은 넓은 식민지 땅에 자국민들이 정착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 식민지에서 많은 상품들을 들여오게 되었다. 1757년 경쟁자 프랑스에 승리하며 인도를 독점하게 된 영국~ 식민지 인도의 목화를 헐값에 수입~ 대량생산 면직물 인도에 역수출 1784년 80만 파운드 인도 면직물 수출액~ 인도 면산업 고사 목적으로 기술자들의 손가락까지 절단~ 이렇게 하면서 대항해 시대가 이제 제국주의 시대로 서서히 넘어가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시아에 사는 우리로서는 씁쓸한 여운이 남는 역사의 장면들이다. 대항해 시대를 처음에 발견의 시대, 신항로 개척 이라고 표현하였다. 대항해 시대는 우리의 일상 생활 시간에 다 녹아있다. 대항해 시대는 유럽이 세계의 변방에 있다가 중심으로 나오는 시기였다. 그 역사가 오랫동안 이어져 와서 우리는 유럽과 서양 문명에 대해서 오랫동안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항해 시대에 한가지 깨닫게 된 점은 문명의 진보과정에서 야만적인 폭력이 곳곳에 개입되어 있고 인간성에 반하는 행위들이 그 과정에 깊이 연루 되어 있었다 라는 점이다. 묘하게도 문명과 야만이 기묘하게 얽혀 들어가는 복잡한 시대였고 그 유산을 되돌아보고 어떤 면에서 반성하고 극복할 만한 의지나 희망을 갖는 것이 중요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