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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나타난 거룩
2017. 3. 19(주일낮예배) 레위기 19:1-10
어쩌다 어른에 고려대 사회심리학자인 허태균교수님이 출현하였다. 그 강의에서 허태균교수님은 한국사람들이 왜 행복하지 못한가? 하는 주제로 강의를 하였다. 대한민국은 현재 세계수출 7위, 무역규모 9위, 국민1인당 소득(GDP) 2만 8천 달러(한화 약 3천 200만원)로 세계 11위이다. 그러므로 한국국민은 대한민국에서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사는 것으로 고생하지 않을 수 있고, 또 문화적인 혜택도 많이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중에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자살율은 부동의 1위이고, 국민의 56%가 스스로 나는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헬조선, 7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집마련, 희망, 꿈)라는 말을 한다.
왜 대한민국은 우울증으로 고통하고, 또 지옥같은 나라라는 헬조선이 되었겠는가? 허태균교수는 그 이유를 대한민국 국민의 국민성으로 해석한다. 한국사람과 미국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사진찍는 모습은 많은 차이를 나타낸다. 미국사람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디즈니랜드를 갔다가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가 걸어가는 것을 보면 아이들에게 저기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가 지나가고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을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를 보고 좋아라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그때 미국부모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준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난 후에 그때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를 기억하느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웃으면서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를 따라다닌 재미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한국부모는 다르다. 한국사람이 미국 디즈니랜드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다가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가 지나간다. 그러면 한국사람은 아이들을 불러서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 앞에 서라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보라고 하고 구도를 맞추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때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를 기억하느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기억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본 것은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기 아니라, 아빠의 카메라 랜즈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부모와 미국부모의 차이이다. 미국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진도 추억할 수 있도록 찍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추억이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거기에 있었느냐? 하는 존재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인증샷을 찍고 사람들이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주면 그것으로 행복해 하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했으면 그 일에 대한 인정을 받아야 만족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주남이가 교환학생으로 가기 위하여 토플시험을 쳤다. 단기선교가 있어서 고작 한달 공부하고 시험을 쳤는데, 그때 주남이 목표점수는 80점이었다. 80점이면 주남이가 가고 싶은 학교에 원서를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80점을 목표로 하여 공부를 했는데, 성적은 83점이 나왔다. 한 달 공부해서 83점의 점수를 획득했다는 것에 저와 아내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남이 참 대견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제가 주남이가 원서를 넣을 수 있는 학교를 검색하다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주남이가 원서를 넣는 학교의 작년 성적을 보니 토플점수가 주로 95점대의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주남이가 하나도 대견해 보이지 않았다. 군 제대한 지 일년도 되지 않았고, 또 고작 한 달공부해서 그 점수를 받았다는 것이 정말 대단해 보였는데, 95점대 학생들이 많이 있다는 정보를 듣는 순간 주남이 성적은 성적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이다. 존재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사람들은 열심히 일한 댓가에 대하여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인터넷과 SNS가 발달된 오늘날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내 주위에 있는 몇 명의 사람과만 비교를 하였지만, 지금은 지구촌 75억의 인구 중에 뛰어난 사람들 이야기가 인터넷과 SNS에 다 올라와 있기 때문에 주눅은 들 수 있지만,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허태균교수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해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허태균교수님은 우리가 정말 행복한 삶은 살고 싶으면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칭찬하고 격려해 줄 때 작지만 행복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고 권면해 주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허태균선생님의 이 방법에 동의하는가?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 예수님은 허태균교수님이 제안하는 것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예수님이 잡혀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한 계집아이가 이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이다고 말할 때 깜짝 놀라며 나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고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이 사람도 예수님의 도당이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아니다고 부인하였다. 그리고 한시간쯤 지난 후에 또 한 사람이 장담하며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하였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장담하며 예수님을 부인하였다. 그 순간 예수님이 고개를 들어 베드로를 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11명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로 가버렸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으면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했는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그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이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을 보면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랑을 물었을 때 베드로는 사랑한다고 말했구나! 하고 이해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랑은 아가페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대답한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 필레오였다. 아가페는 조건없이 주는 사랑을 말한다. 주로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한다. 그런데 필레오는 우정이라고 해석하면 이해하기가 좀 쉬울 것이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는 감히 예수님을 아가페적인 사랑을 한다고 말할 수 없어서 필레오로 대답을 한 것이다.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다시 아가페의 사랑을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로 대답을 한다. 아마 그때 예수님을 정말 아가페로 사랑하고 싶지만, 그렇게 사랑하지 못했던 베드로는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실 때 그 사랑은 필레오이다. 그러면 베드로야 너는 나를 필레오적인 사랑은 할 수 있겠니? 하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그 물음에 베드로는 근심하며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필레오의 사랑으로 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하여 떠난 제자를 찾아가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는 사랑은 아가페이지만, 그 사랑에 미치지 못하는 베드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부족한 사랑을 인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feed my Lamb), 내 양을 치라(feed my sheep), 내 양을 먹이라(feed my sheep)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너 같이 배신하고, 또 내가 원하는 사랑을 하지 못하는 너는 내 양이나 치고 살아! 하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배신자이고, 또 예수님이 원하는 사랑을 채우지 못하는 베드로이지만,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소중히 여기는 어린양에서부터 큰 양까지 모두를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이 여기가 처음인가? 저는 바깥에서 사람들이 많을 때는 아내 자랑을 많이 하고, 또 아내를 잘 섬긴다. 그래서 나는 아내밖에 없다는 말도 쉽게 하고, 또 아내와 함께 식사할 때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건네주기도 한다. 저는 정말 제 아내를 사랑하고, 또 아내에게 뭔가를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이러한 저의 모습을 보면서 윈도우 사랑이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저는 단 둘이 있을 때는 사랑한다는 말도 잘하지 않고, 또 그런 표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쇼윈도우 사랑을 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종종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랬던 예수님은 누가복음 23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까지 용서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저가 다른 사람은 구원하되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였다고 조롱하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그 부분을 읽어보기 바란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님은 죄악가운데 고통하는 사람들을 늘 긍휼히 여기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던 예수님은 그 죄악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분노하고 있을 때도 여전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한결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만약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내 주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허태균교수는 우리나라 사람은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그러므로 서로 인정하고 격려하며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나를 격려하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힘들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나를 격려할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아프게하고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아 햐겠는가? 태국 칸차나부리에서 사역하는 박정문선교사님의 페이스북에 감동적인 글이 올라왔다. 선교사님의 사역지에 선교팀이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 대원중에 70대의 권사님이 선교사님께 반지를 하나 내어 놓은 것이다. 목사님이 보시기에 많이 낡은 그 금반지는 권사님에게 굉장히 의미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받는 것을 거절하였는데, 권사님은 계속하여 받으라고 하여서 어쩔 수 없이 그 금반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선교팀이 태국을 떠나는 날 호텔에서 그 권사님은 선교사님의 손에 1천 5백바트(5만원)를 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봉투는 선교팀에서 점심식사비를 나누어 주었는데, 노령의 할머니가 그 돈으로 밥을 먹지 않고 아껴서 선교사님께 드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권사님에게 문제가 생겼다.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권사님은 한국에 들러서 한 달가량 체류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져 있었는데, 권사님의 카드에 문제가 생겨서 사용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카드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미국까지 가야하는데, 다리에 깁스를 하신 권사님은 한국에 돌아가면 다리 치료도 받아야 하고, 또 체류비도 많이 필요한데 카드가 사용되지 않으니 난감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때 박정문선교사님이 그 권사님의 손에 100불을 쥐어드렸다. 그 100불은 어떤 분이 교회 프린터기 구입을 위하여 주신 200불 중의 일부였다. 그 다음은 글을 그대로 읽어드리겠다.
이 금반지의 주인도 우리가 아닌게 분명하다. 학비를 호소하는 아이가 있다. 19일까지 등록을 해야 하는데 가정형편이 먹고 살기에도 급급하다. 꼬지가 각혈을 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병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룽이는 혈압이 200이 넘는다. 화요일에 병원갈 때 같이 가기로 했다. 극심한 가난을 호소하고, 일거리를 찾는 가정도 있다. 의사가 햇빛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야 한다. 기름값이라도 아껴야 하는 상황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박정문선교사님의 주위에는 어렵고 힘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 밖에 없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룩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행동강령을 3절부터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거룩을 명령하신 하나님이 그 다음 말씀하시는 행동강령에 우리는 의구심을 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3절), 헛된 신을 섬기지 말라(4절), 나를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5절)는 말씀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인 6-8절은 화목제물에 대한 명령이다. 화목제물은 이튿날까지 먹고 셋째날까지 남았거든 불살라 버리라고 하였다. 만약 그것을 남겨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끊어지다는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길을 걷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끊어지게 된다면 그 사람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절은 백성에게서 끊어진다는 말을 멸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화목제물을 삼일째까지 먹지 않는 자는 백성중에서 반드시 끊어질 것이니 반드시 먹어야 할 것이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틀동안 화목제물을 다 먹는 것이 거룩이다 말씀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화목제물을 이튿날까지 다 먹는 것을 거룩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화목제물은 하나님과 제사를 통하여 화목을 이루고, 또 그 음식으로 백성들 간에 교제하며 함께 그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욕심많은 사람이 자기 혼자 먹기 위하여 그 화목제물을 감추고 며칠동안 먹는 것은 악한 행동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자는 그 제물로 서로 찾아다니면서 함께 교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룩이다.
그리고 9-10절에서 하나님은 거룩은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하는 것이다고 명령하신다. 그 부분을 읽어보기 바란다.
(레 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곡식을 거둘 때 밭의 모퉁이까지 거두지 말고, 또 떨어진 이삭은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는 사람과 여행 중에 지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거룩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레위기 19장을 보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거룩의 행동강령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11-12절은 도둑질과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고 있고, 13-14절은 약자에 대하여 배려하라. 그리고 15절에는 공의로 재판하라고 명령하고 있으며, 16절은 험담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씀드리면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 거룩한 삶이고, 또 약자를 배려하고, 또 험담하지 않는 것이 거룩한 삶의 모습이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행동이 거룩이 되는가? 성전 안에서 하나님만 섬기고, 또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것은 아주 중요한 거룩의 모습이다. 그러나 정말 거룩한 자로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세상 가운데서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이 나를 통하여 나와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사는 것이 곧 거룩인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제 내일부터 우리교회는 예닮삶 2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한다. 목사로서 당부하기는 여러분 모두 20일동안 새벽기도에 완주하여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번 예닮삶은 여기서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자로서 이제 하나님의 명령에 순복하므로 말미암아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참된 거룩을 이루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세우고, 또 가난과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