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移籍) / 김석수
태풍이 지나간 뒤로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다. 아침 수영하러 가면서 긴팔 셔츠를 입고 나간다. 직장에 다닐 때는 사택 근처 담빛 수영장에 차로 갔다. 지금은 걸어서 간다. 집 가까이 있는 수영장이 코로나로 2년 동안 문을 닫았다가 지난 주 목요일부터 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차로 예전에 다니던 수영장에 나가려고 했다. 수영한 뒤 동호인과 카페에서 수다도 떨고 가꺼운 활터에서 운동하다 집에 오려고 했다. 활쏘기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처음 활을 배운 곳에서 좀 더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아내가 집 가까이 활터 근처 수영장이 9월부터 문을 연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활만 쏘러 30여분을 차로 매일 오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 새로운 활터 형편을 알아보려고 ㅁ 정에 갔다. 나이들어 보이는 사람들이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활을 쏘고 있다. 사범을 만나 사정을 말했더니 그는 “집 가까운 곳에서 운동하는 것이 좋지요. 우리 정으로 ‘이적(移籍)’해 주라고 하세요.”라고 하면서 서류를 작성해 놓고 가라고 한다. 정을 잠깐 둘러보니 시설은 좋지 않았지만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다음 날 오후 활쏘기를 처음 배웠던 ㅊ 정에 가서 내게 활을 가르쳐 주었던 사람(부사범)에게 이적할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그는 낯빛을 바꾸면서 안 그래도 이미 들었다면서 “다른 정에 가서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정에서 상의했어야죠.”라고 볼멘소리했다. 내가 아직 대회도 안 나갔고 대한궁도협회에 등록이 안됐으니 여기서 탈퇴하고 그곳에서 다시 입회하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동안 빌려주었던 깍지(활을 쏠 때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것)와 활을 꼭 반납하고 가라고 못마땅한 듯이 말한다. 나는 남의 물건을 가져가려는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 내심 불쾌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ㅁ 정 사범이 ㅊ 정에 전화로 내 이야기를 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곳 사정을 알아보고 이곳에서 상의하려고 했는데 일이 어그러진 느낌이다.
ㅊ 정 총무에게 사정이 생겨서 이적해야 한다고 했더니 부사범이 하던 말을 똑 같이 했다. 그 말을 듣고 ㅁ 정 사범에게 이적 서류를 못 받을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처음부터 시작하면 입회비도 다시 내야하고 초사례(처음 화살을 맞히면 간단하게 간식을 돌리는 것)나 삼중례(5발 중 3발을 맞히면 예를 표하는 것)를 다시 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전저런 고민하다 몰기상사(5발을 쏘아 모두 맞히면 정 전체 대회를 개최하는 것)를 치루고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삼일 지난 후 ㅊ 정 총무한테서 연락이 왔다. 사두(정을 대표하는 사람)님이 내가 입회비와 월회비를 완납했으니 이적 처리를 해 주라고 했단다. 그녀는 서류를 작성해 놨으니 정에 와서 가져 가라고 한다.
이적 서류를 갖고 ㅁ 정으로 다시 같더니 사범이 내게 전남과 광주 궁도협회 직인(도장)을 받아오라고 한다. 전남궁도협회에 전화했더니 우편으로 보내면 처리해서 광주 ㅁ 정으로 보내겠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업무 처리한다.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짜증이 났다. 며칠 지나 ㅁ 정에 도착한 서류를 들고 변두리 산기슭에 있는 광주궁도협회 사무실로 갔다. 들어가는 곳 찾기 어려워서 길을 찾으면서 헤맸다.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없어서 활을 쏘던 사람에게 전달해 주라고 휴게실 탁자에 서류를 놓고 왔다. 얼마 후 광주궁도협회 이사가 내 이적 처리가 됐다고 연락해 주었다.
새 사범은 내게 화살과 궁대(활을 쏠 때 허리에 둘러메는 띠)를 주문해 주고 깍지를 맞추는 곳을 알려 주었다. 깍지 공방이 집에서 멀지 않는 곳이라 쉽게 찾았다. 처음 활을 쏠 때 깍지가 손에 맞지 않아 엄지손가락 마디에 물집이 생겨 고생했다. 깍지를 만드는 사람은 국궁 4단 보유자로 목공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검정색 테두리 안경을 낀 건장한 50대 남자다. 지하에 작업실을 차려 놓고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든다. 취미로 하다가 직업이 됐단다. 그는 아프리카에 수입해 온 흑단 나무로 깍지를 만든다. 내 손을 잡고 이러 저리 맞추어서 구멍의 크기를 조정했다.
새로운 곳에서 활을 다시 시작하니 잘 맞지 않았다. 활터마다 풍습이 조금씩 다르다. 예전에 운동했던 ㅊ 정은 예법이 조금 까다롭다. 정에 들어오면 이전에 정을 대표했던 사두 사진이 걸려있는 곳에 인사(목례)를 하도록 한다. 신사(처음 활을 배우는 사람)가 활을 쏘면 선배들이 자세를 바로 잡고 하라고 가끔 훈수를 든다. 활을 쏜 뒤 화살을 주우러 가면 함께 내 것 네 것 할 것 없이 줍는다. 하지만 이곳은 자유스런 분위기다. 다른 사람에 관심도 없고 간섭도 하지 않는 것 같다. 화살을 주우러 가서 자기 것만 주워서 온다. 대도시라 사람들이 각자도생(各自圖生)에 더 익숙해져 있다는 느낌이다.
퇴직하고 보니 일상의 모든 것을 이적한 것 같다. 물이 다른 수영장에 들어가 적응하고 있는 느낌이다. 아침에 수영을 마치고 길거리에 나와보니 직장인과 학생들이 목을 움츠리고 종종걸음 치면서 시내버스를 타러간다. 나도 얼마 전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그들과 같았다. 이제 느릿느릿 걸으면서 옆도 보고 하늘도 쳐다 볼 수 있어서 좋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오랜만에 하늘을 쳐다보니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맑다.
첫댓글 원장님 인생 이모작 첫걸음이 쉽지만은 않네요. 그래도 열정적인 분이라 금방 이겨낼거라 믿습니다.
격려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저도 선생님들의 글을 보며 은퇴 후를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진솔한 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느릿느릿 걸으면서 옆도 보고 하늘도 쳐다 보시면서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환쏘기 예법이 이토록 까다롭군요.
기득권이 만만치가 않네요.
그래도 원장님은 능히 하실 겁니다.
인생 이모작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분량이 많아요. 2쪽 반이 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줄여도 내용을 전달하는 데는 문제는 없을 것 같고 시간도 있으니 1쪽 반으로 고쳐 보세요.
교수님, 분량을 1/3정도 줄여서 고쳤습니다.
정말 생소한 활쏘기 예법이네요. 그 어렵고 까다로운 과정을 잘 견디시고 멋진 이모작 경영을 잘 하시길 바랍니다.
항상 부지런하게 사시네요. 늦게나마 영광스런 퇴임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정년 퇴임 축하드립니다. 글을 통해 보게 될 퇴임 후의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