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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와 교회 부흥
전도(傳道)와 교회 부흥(敎會復興)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전도를 통한 교회 부흥(敎會復興)이 바른 것이며, 주님의 뜻인 것이다. 부흥(復興)을 현대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교회 성장(敎會成長)’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교회에 반드시 필요한 부흥(성장)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1. 부흥에 관한 정의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합 3:2)라고 간구했다.
국어대사전에서 ‘부흥(復興)’이란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한번 쇠퇴한 것이 다시 성하여 일어남. 또는 일어나게 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웹스터 사전에서는 ‘부흥하다’(revive)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죽었거나 혹은 외견상(外見上)으로는 죽은 것이 틀림없는 상태에서 생명을 회복(回復)시키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익사한 사람을 회생(回生)시키는 것이 이와 같다.”
부흥이란 현재 죽었거나 또는 거의 죽은 것으로 보이는 것을 살리는 것이다. 부흥은 이제까지 전혀 생명을 가져 본 경험이 없는 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무기력(無氣力)한 상태로부터 활력을 되찾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기운(氣運)을 차린다는 표현이 여기에 해당된다.
부흥은 무감각하거나 무관심한 상태에 거룩한 충격을 가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명백(明白)하게 보여주시기를 호소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사 64:1-3).
“태만(怠慢)과 망각(芒角)과 몽매(蒙昧)함 또는 쇠퇴(衰退)의 상태로부터 회복되는 것으로서, 학문이나 학식을 습득하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부흥은 참된 것을 다시 일으키고 망각된 것에 대한 복종에 대해서 상기(想起)시킨다.
“신앙(信仰)에 대한 새롭고 적극적인 관심으로서, 예를 들면 영적 관심사에 대한 사람들의 각성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영적인 면에서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불가능했던 일을 ‘부흥’은 가능케 하며 이루어지게 한다. “영적인 침체를 극복(克復)하고 영적인 기세를 창출하는 데에는 ‘부훙’이 필수적이다.”
부흥이 시작되면 잠자던 교회가 전투하는 교회로 바뀐다. 웹스터 사전이 부흥에 관하여 제시하는 또 다른 의미들은 “정신력과 기억력을 새롭게 하는 것 또는 상기시키는 것” 그리고 “태만과 침체 상태로부터 회복되는 것” 그리고 “위로(慰勞)하는 것” 등이 있다.
시편 기자(記者)는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 하시겠나이까”(시 85:6)라고 기도했다.
부흥이란 소생(蘇生)시키며 신선하게 하며, 일깨우고 활기를 새롭게 불어 넣어주며, 죽어가고 있는 또는 죽은 존재에 생명을 회복시키는 것이며, 부흥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다시금 온전해지며 기뻐하게 된다.
부흥이란 단어의 의미와 상통하는 말로 성경에서는 ‘흥왕(興旺)’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국어대사전에서의 의미는 “흥하여 왕성함. 번창하고 세력이 왕성함”으로 나타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 12:24). 그리고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라고 부흥에 관해 말씀해 주고 있다.
또 다른 단어는 ‘왕성(旺盛)’인데, 사전적 의미는 “한참 성함. 아주 성함”으로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 6장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교회와 말씀의 부흥을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부흥을 원하시며, 그것을 위해 일하시고 계신다.
현대적(現代的) 교회 용어로 부흥을 ‘성장(成長)’이란 단어로 표현하는데, 사전에서는 그 의미를 “생물이 자라서 점점 커짐. 또는 성숙해짐. 그리고 생물체가 그 크기ㆍ무게ㆍ부피 등을 증가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회 성장’이라는 전도 운동이 복음주의(福音主義) 운동으로 나타나서 하나의 신학적인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교회 성장에 관한 연구는 미국인인 맥가브란(Donald McGavran) 박사로부터 비롯된다. 30년 동안 인도에서 3대째 선교사로 활동한 경험을 가졌던 맥가브란은 교회 성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1936년 처음으로 교회 성장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다. 교회 성장이란 전통적인 전도의 개념을 뜻한다.
교회사에서 말하는 전도의 의미는 세상을 향한 성부, 성자, 성령의 구원적(救援的)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유기적인 조직체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통한 복음 전도의 토대(土臺)에서 성장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변화, 성숙하는 과정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2. 부흥의 종류
a. 양적 부흥
사도행전 2장 41절에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리고, 사도행전 2장 47절에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리고, 사도행전 5장 14절에서는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라고 증거하고 있다.
양적(量的)부흥 곧 양적 성장은 하나님의 교회의 출석하는 숫자가 증가하는 것으로서 교회 성장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숫자적인 성장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생물학적 성장, 전이 성장, 회심 성장, 개척 성장, 교량 성장 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양적 부흥 곧 수(數)적인 증가를 원하시며, 그것을 위해 섭리하신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를 통한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은 믿는 신자의 숫자적 부흥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擴張)시키는 영혼 하나, 하나의 증가가 부흥의 기초이다.
b. 질적 부흥
성경은 질적 부흥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살후 1:3).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행 2:46-47).
질적(質的)인 부흥이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신앙적인 면에서의 내적인 부흥 곧 성장, 또는 ‘영적인 성장’을 말한다.
이 질적인 성장을 통해 신자들은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사랑하며, 열심히 기도하게 되고, 나아가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갈 5:22). 이 또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수적인 부흥 뿐 만 아니라, 신자 개개인의 질적인 성장도 함께 이루어지는 균형 잡힌 교회와 신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부흥의 특성
부흥은 대규모(大規模) 집회들이나 신앙적인 감동과 감격, 그리고 성도들의 활성화나 성령 충만 또는 대규모 구령(救靈)운동들보다 한층 더 뛰어난 것이다. 부흥 없이도 이것들 모두나 또는 그 중 하나를 논(論)할 수 있다. 그러나 부흥은 이것들 모두를 내포한다.
벤스 해브너(Vance Havner)는 부흥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靈)의 역사(役事)……소위 부흥이라고 일컫는 것은 순전히 신약 성경적인 기독교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정상(正常)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단지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엄청난 사건들의 현시(顯示) 그리고 특정 기간에 일정하게 발생하는 어떤 사건들이 부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진실로 성령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감당하도록 섭리하시는 지속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곧 부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두 가지 견해(見解), 모두가 타당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두 번째 견해의 진정한 모본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견해가 필요하다.
4. 부흥의 원리
사도행전 2장 47절에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리고, 하박국 3장 2절에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흥의 원리(原理)는 부흥시키는 주체가 사람이 아닌 주님이심을 인식하는데서 시작된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양적, 질적 부흥의 주체는 사람인 사도들이 아니라, 모든 상황과 환경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셨고, 그들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셨다. 그 분이 “날마다 구원 받은 사람을 더하게”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告白)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강력한 인식이 부흥의 원리이자 기초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고후 6:1).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고전 3:9)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신자가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함께 동역하지만, 모든 일을 이끄시는 주체는 성령님이시고, 전도자는 따라가면서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 5:24).에서 ‘동행’을 뜻하는 히브리어 ‘이트할레크’는 ‘걷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할라크’의 재귀동사로서, “자기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예속시켜서 뒤를 따라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동행’과 ‘동역’은 함께 가는 것은 물론이며,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철저(徹底)히 한 걸음씩 옮겨 놓는 것을 말한다. 우리 전도자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품고 복음 증거의 걸음을 걸어가야 한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 비유’의 내용인데, 가지가 열매를 맺는 원리는 오직 나무에 붙어있는 것 뿐이다(요 15:4).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지만,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맺을 수 없다.(요 15:5).
외모(外貌)로 보기엔 사람의 역사로 보이나,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부흥케 하시는(합 3:2) 성령님을 보아야 진정한 부흥이 가능하다.
5. 부흥의 현장
a. 초대(예루살렘)교회의 부흥
성경은 초대 교회의 부흥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 4: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행 5:14).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진정한 부흥의 증표(證票)는 교회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능력있고, 물 붓듯이 부어지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선자자 요엘에게 예언된 내용이 오순절 날에 사도들을 중심한 120명의 신자들에게 이루어지는 역사가 나타났다고 사도 베드로는 모인 사람들에게 소리 높여 외쳤다.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수양아들인 데이빗 브래이너드(David Brainerd)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부흥을 달라고 눈 속에서 그 눈이 녹을 때까지 기도했고, 폐결핵으로 고통하면서도 각혈(咯血)한 피로 전신이 더렵혀지기까지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다. 1745년에 이 부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일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마치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군중(群衆) 위로 내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엄청난 힘에 의해서 사람들은 압도당했다. 나는 군중 전체를 거의 예외 없이 사로잡은 영향력에 놀란 채로 서 있었다. 그 영향력은 강력한 격류(激流)의 불가항력적인 힘 외에는 달리 비유할 데가 없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엎드러졌으며 그 엄청난 과정의 충격을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4)라고 성경은 성령의 임재에 말씀해 주고 있다. 부흥은 성령이 임재하실 때에 일어나게 된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은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그리고 불 같이 임하신(행 2:2-3)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그 부흥의 불길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뿐 아니라 온 땅으로 번지게 되었다.
b. 역사 속에서의 부흥
1904년이었다. 웨일즈 지방이 온통 불타고 있었다. 온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영적인 상태는 정말 지극히 저하되어 있었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나라 구석구석에 온갖 죄가 가득 차 있었다. 갑자기 하나님의 영이 돌풍처럼 온 땅을 휩쓸었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초만원을 이루어 발도 들여놓지 못할 정도였다. 집회는 아침 열시에 시작하여 밤 열두 시까지 계속되었다. 매일 3회씩 예배를 드렸다. ‘이반 로버츠’가 인간 도구였는데, 설교는 별로 하지 않았다. 찬송, 간증, 기도가 집회의 주요 성격이었다.
웨일즈 지방에 그렇게 대단한 결과를 가져왔던 일은 이전에 없었다. 불량배들이 회심하고 술주정꾼과 절도범과 도박꾼들이 구원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변하여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곳저곳에서 죄를 참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극장에 가는 고객이 없어서 문을 닫게 되었다. 5주 동안에 20,000명이 교회로 찾아들었다.
1837년에, 잠잠했던 큰 불이 활활 타올랐다. 거의 모든 사람이 청중이 되었고 ‘타이터스 코언(Titus Coan)’은 15,000명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가 그들을 다 찾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고, 야외 집회는 2년이나 계속되었다. 낮과 밤을 막론하고 집회 종이 울릴 때 2,000명에서 6,000명 정도가 참석치 않았던 집회는 없었다.
통곡과 떨림이 있었고, 자비를 구하는 간구와 통성기도가 울려 퍼졌다. 싸움이 그치고, 술꾼들이 점잖은 사람이 되고, 간음자들이 회심하며, 살인범이 자수하고 용서를 받았다. 절도범들은 훔친 물건을 돌려주었다. 일생 동안 죄를 버리는 역사도 나타났다.
1821년, 해안선 건너 아담스(Adams)라는, 작은 마을의 한 젊은 변호사가 숲속 외진 곳으로 기도하러 가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놀랍게 변화하였으며, 곧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그 사람이 바로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였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깊은 관심을 갖게 되어, 모두 합의라도 한 듯이, 그 날 저녁 집회 장소에 모였다. 피니도 그 곳에 있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강하게 임하셔서 죄를 깨우치시자, 부흥이 시작되었다. 그 물결은 주변 지방에까지 파급되었고, 급기야는 동부의 여러 주(州)에까지 번져 강력한 각성 운동에 휩싸이게 되었다. 피니가 설교할 때마다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셨다. 종종 하나님께서 먼저 그보다 앞서 가셨기 때문에‘ 그가 집회 장소에 도착하면 벌써 사람들이 자비를 구하며 통곡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죄에 대한 깊은 깨우침으로 인하여 애통하는 회개의 통곡 소리 때문에, 그는 설교를 중단하고 안정되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교역자들과 교인들까지도 회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수천 명의 죄인들이 새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은혜의 큰 역사는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
1907년 1월 2일부터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겨울 남자 사경회’가 열렸다. 평양 사경회는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는 기도와 간구 속에서 시작되었다. 사경회는 관례에 따라 성경공부와 기도에 주력하였으며, 오후에는 평양 각지에 흩어져 전도하고, 매일 저녁 특별 전도 집회가 열렸다. 그 해 겨울 약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장대현 교회는 매일 저녁 은혜를 갈망하는 한국의 남자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찼다. 이렇게 시작된 저녁 집회 시간이 지나면서 영적인 힘으로 점점 더 달아올랐다.
1월 6일 주일 저녁 집회가 끝날 무렵, 처음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극심한 심령의 고통 가운데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일어났으며, 그 날로부터 그 곳에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성령의 임재의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비록 남자들만이 그 집회에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 기도 집회에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빈자리가 전혀 없었다.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놀라운 부흥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성령의 역사가 사경회가 끝난 후에도 중단되지 않고 장대현 교회에서, 여자 고등성경학교에서, 장대현 교회 남자학교에서, 여자 보통학교에서, 그리고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연일 매 순간 계속되었다. 장대현 교회에 임재하신 성령께서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다른 곳에서도 회개의 영을 물 붓듯이 부어주셨다. 장대현 교회에서 연속으로 놀랍게 오순절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평양 시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곧 평양의 다른 교회에서도 나타났고, 선교사들의 가정이나 남학교와 여학교, 성경학교, 신학교, 도시나 시골을 막론하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곳에는 어디서나 똑같은 성령의 역사가 재연되었다. 장대현 교회의 오순절 역사를 통해 성령의 충만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 성령의 불을 가지고 자신들의 고향 교회와 전국 교회로 흩어지면서 나라는 곧 성령의 불길에 휩싸였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인 능력과 경외스러운 신성(神性)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이처럼 역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개성들은 압도당하게 되며, 인간의 계획들은 무색해진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활동하시기 시작하며 사람은 따라가는 역할은 하게 된다. 신자들과 죄인들에게 비상(非常)한 능력으로 역사하기는 분은 주님 자신이시다.
에드윈 오르(J. Edwin Orr)는 부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흥으로 개인과 신자들의 단체와 회중과 도시와 나라와 그리고 마침내는 세계가 괄목할 만큼 변화될 것이며, 부흥을 통해서 교회가 소생될 것이며 군중은 각성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귀의(歸意)하는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숫자가 많건 적건, 이렇게 소생된 교회가 복음 전도와 교육과 그리고 사회적 활동에 투신하게 된다.”
토저(A. W. Tozer)는 부흥이 “사회의 도덕적 기풍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부흥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부흥은 심지어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부흥에 참여치 않은 사람들까지도 확연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는 거룩한 증거를 나타내 보인다. “부흥은 필수적으로 사회에 충격(衝擊)을 줄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이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과 부흥을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부흥은 무관심한 생활을 활기찬 자세로 변화시키며, 방종을 자기 부인(否認)으로 변화시킨다. 부흥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것을 열렬히 기대할 때,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준비할 때 올 것이다.
6. 전도와 교회 부흥과의 연관성
전도와 교회 부흥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교회 부흥에 대해 구별되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 번째는 부흥은 절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다. 준비 작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릎 꿇고 기도할 뿐이며,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자(主權者)이시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일을 원하시는 때에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방해(妨害)하거나 독촉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기도뿐이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견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부흥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일이 있다는 것으로서,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관점이다.
두 농부가 있다. 한 사람은 자기 밭을 보고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금년에는 큰 수확을 올려야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 일이 아니지. 내가 할 일은 없단 말이야.”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커다란 벽난로 앞에 앉아 풍년을 위해 기도한다. 그런데 또 한 농부는 생각이 다르다. “나도 금년에는 많이 수확을 해야겠다. 그러자면 할 일이 대단히 많겠구나. 내가 할 일만 최선을 다한다면 추수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밭으로 간다. 땅을 일구고 흙을 고르게 하여 씨를 뿌린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성실하게 다 마친 뒤에는 비와 햇빛을 주시기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수확의 날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 두 농부 가운데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두 번째 사람이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사실 그는 자기가 아는 일반적인 사실을 사용한 것뿐이다.
부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물론 부흥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지만, 부흥이 있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또 해야 될 일들이 상당히 많은 것이다.
시편 126편 6절에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말씀하시고, 마태복음 25장 26절에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찰스 피니는 그가 부여된 조건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어느 지역에서나 부흥을 볼 수 있음을 여러 번 증명하였다. 흔히 어느 마을에 가면 사람들이 황량(荒凉)하고 무관심하여 하나님의 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라도 어떤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 결과로,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던 마을에서 강력하게 휩쓰는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0장 1-3절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희망을 주신다.
사실 부흥은 언제나 영적 쇠퇴기(衰退期)에 온다. 가장 필요하다고 느끼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메말라 갈라지고 타는 땅에 물을 부으시는 것이다. 물이 가장 필요한 때가 바로 그 때이다. 요한 웨슬리가 그의 전도 사역을 수행했던 때만큼 영국 사회가 어두웠던 때도 없었지만, 바로 그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주신 것이다.
1859년의 아일랜드 부흥과 1904년 웨일즈 부흥도 이와 같은 연관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며, 우리에게 진정(眞正)으로 부흥이 필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다. 우리 신자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전도의 실천을 할 때, 교회의 부흥은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