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찰이라는 표현이 이미 고어가 되어버려서 그 말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계실까봐, 표준국어대사전에 ‘해찰’은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함’이라고 되어 있다. 나의 아내에게 여행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고, 나에게 그것은 해찰로 여겨진다. 아내는 마음속으로 늘 여행을 원하는 것 같고 나는 심드렁한 편이다. 나에게 여행은 천리행군이고 고난이지만, 아내에게는 신나는 소풍이다. 여행 가기로 일단 합의가 되면 아내는 ‘백배 즐기기’나 ‘렛츠 고’ 등의 책자를 사서 탐독하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탐구한다. 그리고 출발부터 귀환까지 전 일정표를 세세한 디테일로 작성한다.
우리는 흔히 여행의 목적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얻게 되는 새로운 경험이나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인식되는 자아, 불안정한 상황에서 즐기는 스릴과 모험 등을 꼽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여행을 갈망하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가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서 뭔가 다른 공기를 숨 쉬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거기에 덧붙여서 다른 사람들이 다들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는 강박, 그래야 그럴듯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여행 전과 후에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질하는 즐거움 등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하튼 여행의 근본 동기는 일상 탈출이고 건전한 일탈이며, 재미있는 해찰이다. 우리는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고, 의무적인 일의 압박에서 잠시 벗어나 해찰하고 싶다.
일상의 굴레로부터의 해방, 하루 일과로부터의 탈출이 그것이다. 무한 반복해서 차려야 하는 삼시세끼, 매일 대하는 꼴배기 싫은 직장 동료나 상사의 얼굴을 향해 지어야 하는 억지 미소, 날마다 되풀이 되는 기계적인 업무, 하루 두 번씩 꼭꼭 타거나 운전하는 똑같은 자동차, 똑같은 간판들이 늘어선 거리, 매번 빈자리 찾아 집어넣는 똑같은 주차장, 그런 다음 들어서는 똑같은 홈 스위트 홈, 그런 생활이 일 년 이 년 계속되면 머릿속인지 가슴속인지에 압력밥솥 속처럼 압력이 최고조에 이른다. 솥뚜껑에 달린 밤톨만한 배출구로 쉭쉭 소리를 내며 고압 수증기를 적당한 때 빼내주어야 폭발하지 않는다. 여행이란 그런 압력 배출 효과가 있다.
우리는 여행 전에는 설레고 여행 중에는 신나며 여행 후에는 마음이 놓인다. 말 그대로 들려 있던 마음이 그제야 놓인다. 여행의 최고봉은 계획과 준비이고, 여행의 꽃은 출발이다. 공항 패션들로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캐리어를 끌고 출국장에서 출국수속을 하며 왔다갔다 하는 동안 발걸음뿐만 아니라 마음도 들떠 돌아다닌다. 탑승교를 지나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면 들려오는 경쾌한 클래식 음악은 곧 하늘을 날아갈 거라는 기대감을 부풀린다. 목적지 나라의 공항에 도착하면 눈과 코와 귀가 활성화된다. 다른 나라의 번화가를 걸으며 다른 생김새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또 그들이 나를 바라본다. 주택가 거리에서 창밖 플라워 박스에 피어 있는 피튜니아나 제라늄을 보면서 우리나라는 저렇게 하지 않고 모두 유리창 안쪽에 화분을 두는데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에 없는 트롤리도 타고 전차도 타고 곤돌라도 탄다. 때론 뮤직홀에 들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를 관람하기도 한다. 케이블카나 산악기차를 타고 높은 산 전망대에 올라 파노라마를 바라보며 감동하기도 하며, 또 때론 비치를 걸으며 부러운 눈길로 주변을 바라보기도 한다. 화산이나 노천온천, 거대한 폭포나 신비스러운 계곡 등 특이한 자연 현상을 구경하기도 한다. 모든 장소에서 인증샷은 필수다. 맛집 식당을 찾아가 그 나라 고유 음식을 맛보기도 한다. 그 음식 사진도 필수다. 또한 현대나 기아 엠블럼이 붙은 자동차가 이 나라의 거리에 몇 대나 굴러다니는지 세어본다. 많으면 많을수록 뿌듯하다.
그러나 여행의 실제 과정은 예상보다, 일상보다 훨씬 힘들다. 여행에서 우리가 주로 하는 구경—갤러리나 궁전, 유명 광장 구경—은 다리 아픈 천리 행군이다. 유럽은 비슷비슷한 성당 천지다. 감탄도 한두 번이다. 잠시 들러 아픈 다리를 좀 쉬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곳곳에 필요한가 보다. 지친 몸으로 저녁에 호텔에 돌아오면, 나처럼 쓸데없이 예민한 사람에게는, 밤잠이 오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새벽 세 시에 창밖 거리를 내다보며 이 나라 사람들은 한밤중에도 교통신호를 얼마나 잘 지키나 관찰한다. 일본이나 미국, 유럽은 차들이 한밤중에도 빨간 신호등에 미련스럽게 정지한다. 우리는 눈치껏 요령껏 잘도 가는데.
미국의 현대소설가 돈 들릴로는 관광 여행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가졌다. 그는 사람들이 기를 쓰고 꼭 찾아가 구경하고 싶은 인생 필수 관광 아이템으로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진이 찍힌 헛간”을 선택한다고 비꼰다. 그곳을 방문해야만 하는 이유가 그곳이 가장 많이 사진이 찍힌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이미지에 이미 익숙해진 상태에서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간다. 사실 오늘날 유명 관광지라는 곳이 다 그렇지 않은가? 그곳을 찾아가기 전에 우리는 TV나 인터넷, 관광 책자나 잡지 등에서 그곳 사진을 수도 없이 보았고 그리고는 그곳에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뉴욕의 자유여신상이나 파리의 에펠탑이 그렇고 루브르박물관도 그렇고 영국의 빅벤도 그렇고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도 그렇다. 그것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실제로 몸소 찾아가서 ‘아 정말 그렇구나, 영상하고 똑같구나’ 하고 생각하며 인증샷을 찍고 돌아와 그 인증샷을 SNS에 퍼뜨린다. 오늘날 우리는 사진이나 영상으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을 찾아가는 일이 거의 없다. 오히려 영상에서 닳도록 보고 나서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가서 실물을 확인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옛날에는 동네 사람들 중 아무도 서울 가본 사람이 없었는데 박서방이 서울 구경을 하고 와서는 “남대문 문턱이 대추나무로 되어 있더라” 하고 말해주면, 동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며 흥미진진해했다. 동네 사람들은 남대문 실물은 물론 그 사진도 본 적이 없었으니 박서방이 들려준 말이 너무도 신기했을 것이다.
내 친구나 친척, 지인들은 거의 모두 각자 자신의 해외여행 경력을 인생 성공의 징표 중 하나로 여긴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내 친구 중에는 세계 여행을 몇 달씩 몇 번씩 돌아다녔던 사람이 있다. 가기 전에 전화로 계획을 나에게 알리고 갔다 와서 또 경험담을 전했다. 어찌나 비행기를 많이 탔던지 적립된 마일리지로 또 다시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왔다고 자랑했다. 나도 질세라 여기저기 좀 돌아다니려고 했지만 여행에 대한 열정이 그다지 크지 않았는지, 나의 해외여행 경력은 빈약하다. 그나마 그걸 될수록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다. 그런데도 아닌 척하면서 빈약한 내용이나마 조금 자랑질을 하긴 했다.
나의 어머니께서 “사람 사는 건 어디가나 다 똑같아야”라고 하신 말씀이 자꾸만 떠오른다. 나의 어머니는 평생 해외는 나가신 적이 없었으며 국내도 여행도 하신 적이 거의 없었다. 여행은 내적 경험이라기보다는 오감을 통한 외적 자극이다. 그리고 여행이 인생에서 필수적인 경험은 아니다. 고향 마을을 떠난 적이 거의 없이 평생을 살았지만 누구보다 풍요로운 내적 세계를 경험했던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여행 자체는 인간의 내적 성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행을 많이 한다고 해서 더 지혜로워지거나 내적으로 더 풍요로워지는 것 같지는 않다. 젊은이가 고생을 무릅쓰고 하는 모험적인 여행은 안목을 넓히거나 세상 적응력을 기르는 데는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 관광 여행은 편견이나 자기 확신만 강화할 뿐인 것 같다. 게다가 요즘은 수많은 유튜브 크리에이터 여행가들이 세계 곳곳을 갈기고 다니며 영상을 올려, 그 조회수로 꽤 큰돈을 벌기도 한다. 암만 미화하려 해도 먹방이 변태적 욕구이듯 여행 유튜브 크리에이터의 맹활약도 변태적 욕구이다.
결국 우리는 여행에서 뭔가 의미 있는 경험을 했다는 뿌듯한 마음이라기보다는 단지 신체적으로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안도하며 휴식을 취한다. 그럼에도 돈 있고 시간 있고 체력이 남아돌면 여행은 또다시 하고 싶다. 일상에서 벗어나서 고생하다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면 유격 훈련을 받고 귀대할 때나 비슷한, 일시적인 자신감이 생겨난다. 따분한 일상에서 생성되어 정신을 짓누르고 있던 스트레스를 태풍이 바닷물을 뒤섞어 버리듯 휘저어버리고 뭔가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런 일탈이고 해찰이다. 인생이 날마다의 똑같은 것을 보고 듣고 먹고 일하는 일상으로만 이루어진다면 인생 전체의 경험이 단 하루치의 경험으로 요약될 것이다. 인생에서 남는 것이 하루치 경험뿐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뭔가 다른 자극을 원한다. 단지 다르기만 하면 되지만 더 특이할수록 더 좋다. 인간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 때문에 여행도 하고 지구 반대편이나 지구 끝으로 이주하기도 한다. 머잖아 우주로도 여행을 하는 시대가 온다고 한다.
첫댓글 ㅎㅎ 공감 가는 데가 많은 글입니다. 미술관에 가면 아는 화가, 아는 그림에만 눈길이 쏠려요. ^^
해외관광은 여행이 아니다라는 말씀이신듯합니다.
많이 내향형이신가봐요. ^^ 밤 늦은시간에 교통신호 잘지키나 보신다는 곳에서 빵 터졌습니다.
여행을 유격훈련으로 생각하셨군요. 맞는 말씀인 것도 같아요. 여행에서 돌아와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오늘 밤 잘 곳은 검색하지 않아도 된다, 는 주택 소유자의 정체성이 가장 먼저 돌아옵니다!!
쓸데없이 예민하시다고요. 흠, 그렇군요. 동지 혹은 동료를 만난 느낌입니다. 저도 참 정말 쓸데없이 예민한 사람이라서요.
해찰한다는 표현 어렸을때 들어본 말 ㅎㅎ오랜만에 들으니까 정감가고 웃음이 납니다.^^
역시 집이 제일이야, 여행 갔다 돌아와 하는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