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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한용운
(1879. 8. 29- 1944. 6.29)
구한말과 일제침탈기의 사상가였고 열혈 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연설가였다. 문학에 전력하는 삶이 아니었음에도 강철 같은 곧은 지조와 타고난 천재성으로 일제의 폭정에 정면으로 항거하며 걸출한 시와 소설을 쏟아내었다. 1925년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 안동서관에서 발행한 『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 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특정의 뜻을 시적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등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어냈다,
1. 탄생과 성장
고종16년인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 정방골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 방씨(방숙영)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유천裕天이고 자는 정옥貞玉이며 용운은 출가하여 받은 법명이다. 만해의 호적상 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며 그의 형제로 한윤경이 있었다. 몰락한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몹시 가난했으며 아버지는 홍성군 관아에 하급관리로 있었다. 한용운은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14세 때 지주집의 딸 전정숙과 결혼하고 아들 한보국을 두었으나, 가장으로써 가정에는 몹시 소홀하여 후일 출가하였을 때 찾아 온 아들조차 만나주지 않았다 한다. 그의 아들 한보국은 아버지의 버림을 받은 뒤 공산주의에 빠져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고야 만다.
만해는 16세인 1884년 가출하여 동학 농민운동에 가담하였고, 이를 방어하는 아버지와 서로를 공격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고향 홍성을 떠나 인제군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간 불교서적을 읽었다. 동학 농민운동이 실패한 후에는 관군의 추적을 피하여 설악산 오세암으로 은신하여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한다. 18세인 1896년 하산한 만해는 더 큰 세상을 배우고자 시베리아 여행을 결심 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을 고비만 극적으로 넘기고 19살인 1897년 고향 홍성으로 귀향 하였다. 갈 곳이 없었던 만해는 이후의 2년여를 처갓집에 은신하다가 가출한 후 다시 출가를 한다.
2. 사회활동과 문학
1905년 을사조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아버지 한병준은 이때 의병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해 무작정 가출한 한용운은 백담사에서 김연곡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득도한 다음 계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쉼 없는 노력으로 불교와 근대 사상에 대해 많은 서적을 다양하게 탐구한 후 자신의 것으로 접목한 한용운은, 1908년 명진학교 (지금의 동국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08년 조선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종종무원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불교문화시찰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문명을 접하는 귀한 경험을 한다. 이듬해인 1909년 12월에 귀국한 한용운은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조선불교 유신론》을 저술하기에 이른다.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 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뛰어난 학식과 천재성으로 불교의 전파에 앞장섰던 시인은 1913년 불교학원과 명진학교 (현재의 동국대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활약했고, 1914년에는 《불교 대전》을 저술하였다. 그는 대승불교의 반야 사상에 입각하여 도탄에 빠진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며 방관하는 종래의 무능한 불교계의 각성과 개혁을 요구하였고,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승려의 결혼허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불교 포교의 보편화와 대중화를 선언하며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였고 이에 대한 강령을 직접 만들었다. 이를 보면 첫째는 정교분리, 둘째는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셋째는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을 독려함이 핵심이었다. 새로운 한국불교의 정신으로 ‘승려에서 대중에게로’, ‘산간에서 길가로’를 내걸었던 혁신 사상가였던 한용운은 쉼 없이 학문탐구에 매진하여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등을 비롯한 불교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 했고 1918년 제자 춘성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사회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들을 소개, 발표하였다.
사회적으로는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 전국적 만세운동을 준비하였고, 손병희 등의 천도교 지도자와 이상재 등의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화합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으로 구국을 위해 활동하였다. 3·1 독립선언문 작성에도 최 일선에서 참여 했으나 한용운의 주장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해 내부에서의 마찰을 빗기도 했다. 최남선 등 여러 민족대표자들의 협의 하에, 그가 제시한 문장 중 독립선언문의 말미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라는 문구만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 발표했다. 애초에 민족대표자들은 평화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가 갈수록 격화되어 들불처럼 번졌고, 이러한 상황에서 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했다. 그러나 자수 직전 민족대표 중 일부가 고문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한용운은 화장실에서 인분을 가져와 그들의 머리에 끼얹었다고 한다. 3·1 만세 후 일경에 의해 체포된 만해는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져 징역 3년을 받고 복역하였다. 옥중에서도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하며 수감생활을 하는 등 강철 같은 절개와 의지를 보였다. 감옥 에서도 ‘조선 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원본을 빼앗겼지만, 작은 종이에 몰래 옮겨 적은 글이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춘성스님에 의해 상해 임시정부까지 전달되었다.
1922년 5월 출옥 후에는 언론에 다양한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폭넓게 참여하는 등 투쟁가이며 사상가로 활동을 이었다. 1925년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 안동서관에서 발행한 《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 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특정의 뜻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이루어냈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 『흑풍』, 『후회』, 『박명』을 저술했고 단편소설 『죽음』등을 저술하였다. 1931년 주변의 권유로 53세의 나이에 단성사 옆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로 일하던 21살 연하의 유숙원과 재혼했고, 이듬해 딸 영숙이 태어났다. 1933년 자택 심우장尋牛藏을 지은 뒤 1944년 임종 시까지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며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후회》를 연재하였다. 1937년 항일단체인 ‘민당사건’의 배후자로 검거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 다시 투옥 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임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바기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님의 침묵」 전문
3. 아쉬운 이별과 문학사적 의의
한용운은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창씨개명 반대운동,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하며 강철처럼 저항하였다. 말년에 심한 중풍으로 쓰러져 고생하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다했다. 생활도 몹시 어려웠으나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이 간간이 생활비를 도왔다. 중풍과 영양실조가 심해졌으나 한계에 이르자 병원진료를 거부하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다음 날인 1944년 6월 29일 자택인 심우장尋牛藏에서 운명하며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열반에 들었다. 만해의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미아리 사설화장장에서 다비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후일 그 옆에는 부인 유숙원여사의 묘소가 오른편에 매장되었다. 대한민국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만해는 백범 김구선생이 평소 가장 존경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한용운의 시는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산문시의 전형이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와 정형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등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 크나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에 유행하던 퇴폐적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믿을 수 없는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였다. 식민지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날 그 날을 위한 노력을 작품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던 것이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십현담주해』, 『불교와 고려제왕』등이 있다.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는 죽음인가요
인생은 잠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칼을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꽃을 꺾던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의 속에서 정사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우주는 죽음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라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 「고적한 밤」 전문
4. 남겨진 이야기
가.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에 관하여서는 1937년 자신에게 최남선을 언급한 김홍선에게 “아직 살아있소?”라고 하는가 하면,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인사를 하자, 처음에는 알은체도 하지 않다가 최남선이 자신을 못 알아보겠냐면서 계속 이름을 말하자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었소.”라며 차갑게 대했다.
나. 그는 문학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님에 대한 그리움과 곧은 지조를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해방 후에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1967년 그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탑골공원에는 후에 승려 운허에 의해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龍雲堂 萬海 大禪師碑가 세워졌다.
다.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고 홍성읍내 장터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생가지는 1989년 12월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라. 1991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되었고,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만해문화박물관이 건립되었다. 그밖에 만해기념관, 만해사상선양회 등이 건립되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나를 흙발로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 「나룻배와 행인」 전문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 「복종」 전문
【참고문헌】
1. 두산위키백과.
2. 만해 한용운 전집(6권), (1973, 신구문화사)
3. 님의 침묵, (2005, 하서출판사)
4.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5. 만해기념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로.
글쓴이; 이희국 시인 (월간문예사조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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