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 최미숙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인 3월 첫날,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밤새 동물 울음소리를 연상할 만큼 강한 바람이 불더니 아침이 되자 잦아든다. 그동안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이어진 탓에 잠깐의 추위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지만 자연의 이치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겨우내 빈 가지와 바싹 마른 풀만이 가득했던 삭막한 들판에 서서히 봄기운이 돈다. 땅바닥에 이파리를 붙이고 추위를 견디던 민들레가 기운을 차리고, 말라비틀어진 누런 잎 사이사이에서 풀과 쑥도 힘을 받아 연한 새잎을 내민다. 천변에 축 늘어진 갈색 수양버들 가지에도 어느새 노란색으로 물이 올라 새잎 틔울 준비를 마쳤다.
2024년 2월 29일, 42년 몸담았던 교직 생활을 끝내고 6년 동안 정보를 주고받았던 교사 단체 카톡 방에서 나왔다. 방학하고 한 달을 쉬다 새 학년 준비 기간(2. 19.~2. 21.) 첫날인 2월 19일 새로 온 후배 수석교사에게 인수인계도 하고 몇 개 남겨 놓은 짐도 챙길 겸 출근 준비를 하는데 가슴이 설렌다. 이제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돼서 홀가분하다고 좋아했는데 이게 무슨 감정인지 어이가 없고 당혹스러웠다.
2월은 퇴임 축하한다며 여기저기서 불러 쫓아다니느라 바빴지만 많은 사람의 격려에 가슴 벅차고 뿌듯했다. 도 교육청에서 퇴직 교원에게 주는 훈‧포상식에 참석해 황조근조훈장도 목에 걸어 봤고, 지역 교육청에서는 교육장님이 점심을 사준다고 해 다녀왔다. 전남수석교사회에서도 거창하게 식을 해 줬고, 친한 선 후배가 건네준 꽃다발 덕에 한 달 내내 꽃향기에 취해 지냈다.
3월 7일, 오늘로 직장을 떠나 집에서 쉰 지 사흘이 지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섯 시 40분, 서두를 필요가 없어 다시 잠을 청한다. 일곱 시쯤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준비한다. 남편은 삶은 달걀, 고구마와 사과 한 개, 나는 커피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고 방으로 들어가 그동안 사서 쟁여두었던 책을 읽는다. 요즘은 넉넉한 시간 덕분에 최근 시작한 유시민 작가와 조수진 변호사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 북스〉와 김어준의〈겸손은 힘들다〉도 챙겨 본다. 점심 먹고 만 보 걷다 오면 세시가 넘는다. 겨울방학이 되자 시작한 걷기는 웬만하면 거르지 않고 지금껏 계속하고 있다. 이러다 보면 하루가 소리 없이 후딱 간다. 이런 여유가 아직은 낯설다. 하기야 그 긴 세월을 시간에 쫓기며 사는 게 몸에 배었는데 생활이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익숙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직장에 다니면서는 바쁜 생활에도 손에 잡히는 성과가 있었는데 의미 없이 보내는 것 같아 불안해진다. 겨울방학 두 달 동안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고 동화도 마찬가지로 미루고 미루다 손도 대지 못한 채 수업 날이 돼버렸다. 자책하고 있는데 때맞춰 최 교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복지시설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로 했는데 인천에서 사업을 총괄하는 선생님이 내려온단다. 먼저 함평 복지원에 들러 일을 마치고 오후에 순천으로 넘어온다고 했다. ‘순천 에스오에스(SOS) 어린이 마을’에서 교육 지원 담당자와 같이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순천 에스오에스(SOS) 어린이 마을 ’은 친부모 양육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독립적인 대안 가정을 제공하고, 연령대가 다른 다섯 명 안팎의 아이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대표적인 아동복지시설이다.
자동차 앞 유리로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멈추고를 반복한다. 어릴적 친구들과 자주 수영하러 다녔던 익숙한 곳이다. 도착하니 아담한 집들이 여러 채 있었고 생각보다 시설이 좋았다. 원장님과 에스오에스 어머니,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 정보를 공유했다. 수업할 날과 시간만 정했다. 3월 14일부터 월, 목요일 세 시간씩 아이들과 만나기로 하고 돌아왔다. 저녁에 복지사 선생님이 아이들 특성을 자세히 정리해 보내왔다. 다들 에이디에이치디(ADHD) 약을 먹고 있으며, 그 외 다른 문제도 있었다. 생각이 많아진다.
날마다 똑같은 날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작게나마 하루하루 마주치는 일이 다르다. 움직임이 없던 식물도 달라진 게 눈에 띈다. 아파트 옆 천에서 겨울을 나던 청둥오리 떼도 다른 곳으로 떠났는지 어제부터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퇴직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내게도 또 다른 도전이자 변화가 생겼다. 다음 주부터 시설에 사는 아이들을 만난다. 앞으로의 생활이 어떻게 펼쳐질지 걱정도 되지만 최선을 다해 볼 작정이다.
첫댓글 새로운 시작을 여셨네요. 기대됩니다.
벌써 또 다른 시작을 하셨네요. 응원합니다.
정년퇴임을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날씨며 배경 묘사가 너무 감성적이예요. 새로운 시작이 기대됩니다. 이전보다 여유롭고 더 행복하시길요.
퇴직 후에도 보람차게 사시네요. 건강도 챙기면서 좋은 글도 많이 써 주세요.
새로운 변화와 도전 축하합니다. 선생님의 노력이 아이들과 함께 영글어 열매가 맺을 날을 기다려봅니다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지내시네요. 많이 부끄럽습니다.
그 열정을 만나게 되는 아이들은 행복할 것 같습니다.
응원합니다.
선생님 글 좋아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응원할게요!
또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시라니, 못 말립니다. 자랑스러운 정년퇴직,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같은 분은 아이들 곁에 조금 더 머물러도 될 터인데, 세월이 야속합니다.
선배님을 만나는 에스오에스 어린이 마을 아이들이 올해는 복이 있는 거네요.
제2의 멋진 인생, 미리 응원합니다.
글에서도 선생님의 여유가 느껴져 편안하게 잘 읽었습니다. 새로운 일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