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사로 살아가며 많은 문제에 부딪칩니다. 어떤 때에는 그 어려움이 너무 크고 단단해서, 내가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마주한 문제를 피해 가거나, 때로는 그 앞에서 그저 주저 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어찌어찌 지나간 그 시간들이 지나면 이제는 좀 괜찮아진 줄 알았지만, 비슷한 어려움이 때때로 되돌아와 나를 다시 괴롭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모든 교사들이 겪는 각각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저는 파커 J. 파머가 쓴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찾았습니다.
"당신이 교직을 그토록 사랑한다면(사실 많은 교사들이 그러하다)
문제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문제를 좀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우리가 교직의 문제를 빠져 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문제를 좀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우리는 교직의 문제를 피할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들어 가야 한다."
그가 그토록 여러 번 강조해서 말하는 것은 피하려 하지 말고 담대히 그 속으로 나아가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저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어떤 문제를 피하려할수록, 그 문제가 나 자신을 점점 어렵게 하는 경험을 종종해왔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해결할 엄두가 안 나는 높은 산처럼 보이던 문제들은 한걸음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것이 안개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문제가 밖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제 안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될 때도 많았고요.
저는 아이들이 제 수업을 잘 듣지 않고, 제 지도에 따르지 않을 때마다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쩔줄 모르곤 했습니다. 아이들에 대할 때에도 명확한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끌려다닐 때도 있었고요.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된 진짜 문제가 무엇일까?', '그렇다면, 다시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이번 일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같은 바른 질문으로 나아간 생각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이들 간의 갈등이 있을 때, 이건 그냥 아이들끼리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들은 아이들끼리 그것을 해결할 힘이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저에게는 아이들 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힘도 없다고 단정지었던 것 같아요. '회복적 생활교육'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접하고, 학급 안에서 있었던 학교폭력의 문제를 전문가를 모셔서 해결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옆에서 어떻세 서클을 운영하고 아이들과 대화하는지를 보았었어요. 회복적 생활교육의 개념과 방법이 보편화되기 한참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가 서클을 통해 아이들 간의 다툼을 해결해보려고 시도했던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잘된 적도 있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끝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데, 잘 안되었던 경험들을 생각하면, 아이들 간의 문제(정확히 말하면, 여학생들간의 관계 문제)를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나 방법이 없음에 대해 무력함을 느꼈었습니다. 그때는 사실 그게 어떤 감정인지, 그래서 얼마나 저를 무능하다고 느끼게 하는지를 잘 파악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간의 갈등에 대해 저 스스로 몸을 사렸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는 제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고, 결국 문제는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저는 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시기가 길었습니다. 그것말고도 일단 부닥쳐보아야 할 때,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후회될 때가 종종 있어요.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교사들은 '교사의 생존'이라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공동체적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교육을 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참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교사들이 하나가 되어 이 문제를 피하지 않고 깊이 파고들며 해결하려고 모였다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다양한 방법과 모양으로 목소리를 내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하고 있기에 좀더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만났을 때 분노, 불안, 안타까움, 흥분, 혼란과 같은 우리의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 것부터가 시작이지만, 결국 우리의 '생각'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무엇이 정말 문제일까?'를 생각하며 가려진 것들을 찾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멋집니다.
이런 공동체적 문제가 아니라 교육에서 가장 무서운 일들은 자신이 가진 생각이 견고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야이고, 때로는 오랜 시간 가까이에서 봐왔던 일이니 자연스럽게 내가 맞고 다른 이들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 이후부터는 나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나에게서 벽을 보기 시작합니다.
'이건 이렇게 해야 맞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업은 나답게, 생활지도는 학생을 존중하면서, 학교의 운영은 민주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많이 보고 듣고 배웠으니, 이것이 맞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돌아보니 놓쳤던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딱 잘라 판단하고 생각의 문을 닫는 순간도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단정적으로 생각한 것을 깨닫게 되면, 저를 돌아보며 점검해보는 질문합니다. '너무 쉽게 판단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사람의 모습이 나에게는 없을까?' 같은 질문입니다. 내가 너무 단단해져서, 또 나에게도 있는 그림자라서 그 분에게 있는 단점도 더 잘 보이고, 때문에 내가 더 힘들어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무엇인가에 가까이 가는 사람을 우리는 전문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대상을 멀리에서 보고, 밑에서 올려다보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옆에서 곁눈질로도 보고, 시간을 두고 여러 번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야는 좁아지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