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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현대문명은, 잠재적인 3개의 파멸적 위기를 배고 있다.
(1) 사회적 붕괴의 위기
자세하게 말하면 빈곤, 노숙자, 범죄, 폭력, 소외, 마약이나 알코올의 남용, 사회적 고립, 정치에의 무관심, 인간성의 상실, 자조·상호 부조적인 커뮤니티 구조의 쇠퇴 등이 진행되고 있는 것.
(2)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위기
모든 생명이 의존하고 있는 섬세한 생태계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는 것.
(3) 대량 살륙 병기가 확산하는 위기
특히 핵병기의 확산이 진행되고 있는 것.
미디어의 주류를 이루는 논조나, 경제의 전문가·정치가등의 전통적인 의견에서는, 「이러한 위기는, 각각 개별의 요인을 가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다른 문제와는 구별해 각각 대처하면 좋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 전통적인 방법이 잘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문제는 지금도 자꾸자꾸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속히 적절한 대처를 하지 않으면 파멸적인 전쟁, 생태 환경의 궤멸, 도시의 붕괴 등의 대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아나키즘은 이러한 위기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들에 공통되는 근본 원인을 찾으면 되 것이다. 이 근본 원인은자본주의나 공산주의를 막론하고 문명사회의 주된 조직 모두가 가지는 hierarchy 권력에 있다. 따라서 무정부주의자의 분석은 「현대의 주된 사회조직은, 모두 hierarchy의 형태이다」라고 하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회사·관청·군·정당·종교 단체·대학 등은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에 권력이 집중하도록 조직되고 있다. 이러한, hierarchy에 내재 하는 권력 관계가 개인이나 사회·문화에 대해서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는가를 지금부터말하고자 한다. 이 FAQ의 전반(섹션 A-E)에서는 hierarchy적인 권력과 그 해독에 대해 무정부주의자에 의한 상세한 분석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아나키즘은 단순한 부정적·파괴적인 현대문명비판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아나키즘은 자유로운 사회를 제안하고 있다. 에마 골드맨은 「무정부주의자의 과제」에서 불러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얼마나 자기 자신이 되는가 하는 것, 전인류라는 공감을 깊게 느끼면서, 게다가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고 유지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라고 하는 것이다. 」[Red Emma Speaks, pp. 158-159]
바꿔 말하면, '타인을 희생하지 않고 개인의 잠재적인 개성을 개화시키는 것 같은 사회는 어떻게 하면 창조할 수 있는지' 라고 하는 것이다. 탑 다운에 의해 지배되는 중앙집권적 hierarchy 구조에서는 이것을 실현할 수 없다. 벤저민 탁카를 인용하면 인간성에 관련되는 문제는 개인이나 개인의 자발적 연합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구상해야 하는 것이다. [Ben Tucker, Anarchist Reader, p. 149].
FAQ의 후반(섹션 I, J)에서는 이와 같이 「보텀 업」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아나키즘의 적극적인 제안에 대해 말한다. 아나키즘의 건설적인 진수에 대해서는 FAQ의 전반에 있어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우익 「리버타리아니즘」은 사회 문제에 대한 잘못된 해결책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한 해결책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로부터의 비판(각각 섹션 F와 섹션 H)에서 아나키즘의 건설적인 핵심을 볼 수가 있다.
크리포드 하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은 생각은 항상 심플하지만 아나키즘도 제대로 생각하면 매우 심플하다. 인간은 명령되어 사는 것보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을 때가 베스트다. 」[Anarchy: A Graphic Guide, p.vii]
개성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해, 즉 사회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서 무정부주의자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 같은 모든 조직」의 해체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무정부주의자는 자유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성의 성장 앞에서 강압적인 정치 조직·사회조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사회인 것이다. [Rudolf Rocker, Anarcho-Syndicalism, p. 16]
조직의 억압적인 성격은 그 hierarchy 구조에 유래한다고 하는 것을 지금부터 살펴보자.
아나키즘은 사회·경제·정치의 이론인 것이지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이론은 「당신이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당신이 생각에 소유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하나의 결정된 사상이다. 그러나, 항상 진화·유동하는 정황에 대해서 유연하며 새로운 데이터에 비추어 유연하게 수정이나 변경이 된다. 사회가 발전하거나 변화하거나 하면, 아나키즘도 또 발전해 변화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도그마에 신앙하고 있는 경직된 일련의 사상이며, 언제나 현실을 무시하거나 올바르다고 여기도록 강요한다. 이데올로기에 맞도록「현실」을 바꾸거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침대의 크기에 무리하게 사람의 신장을 맞추는 것 같은 경직성이 압제나 모순의 근원이다. 이것은 레닌주의에서도, 오브젝티즘에서도, 「리버타리아니즘」에서도,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에서라도 모두 같다. 독트린의 이름 아래 진정한 개인을 파괴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 엘리트의 이익에는 대체로 부응하게 되어 있다. 미하일 바쿠닌은 말한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에서는 많은 궁핍한 사람들이 냉혹한 추상 개념의 이름 아래에서 희생되어 왔다. 즉, 신·국가 권력·민족의 영광·역사적 권리·사법권·정치적 자유·공공의 복지 등이 그래서 있다. [God and the State, p. 59]
도그마는 경직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죽어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종교적인 도그마에서도 비종교적인 도그마에서도, 그것들은 대체로, 죽은 「예언자」의 실적이지만, 제자들이 우상에 제사 지내는 돌처럼 불변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무정부주의자는,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을 매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가 있다. 죽은 사람의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이 결정해야 하며 그 역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비판적인 생각에 대한 네메시스(복수의 여신)이다.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해 주는 것인양 「정답」이나, 법칙·원칙으로 이루어진 한 권의 경전을 준다.
이 FAQ를 만들어「정답」이나 새로운 「경전」을 주려는 의도는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아나키즘에 대해 설명할 것이며 그 현재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어 지금 왜 우리가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할 뿐(만큼)이다. 이 FAQ는 당신 자신 스스가 분석하고 생각해 주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찾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아나키즘은 당신에게 적합하지 않다.
무정부주의자가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해도 「전문가」나 「권위」가 「올바르다」라고 말하면, 그것을 무비판에 받아들여 버린다. 그러면 언제까지나 노예인 채다. 바쿠닌은 쓰고 있다.
사람은 자기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깊은 확신으로부터 행동하며 이야기할 때가 가장 강하다. 따라서 주위의 상황이 어떻더라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며 무엇을 이루어야할 것인가를 알고 있다. 비록 넘어지는 일이 있어도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주장을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Albert Meltzer, I couldn't Paint Golden Angels, p. 2로 인용]
바쿠닌이 말하고 있는 것은 독립한 정신의 강인함 즉 자유가 주는 강함이다. 우리는 타인이 말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생각해 자기 자신으로 행동하는 것을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이것이 아나키즘의 모두는 아니다. 여기에 씌어 있는 것에 동의 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자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독자가 스스로 생각해 주기를 기대하고 쓴 것이다. 우리는 아나키즘의 기본적인 생각이나 그 생각을 응용해 우리가 분석한 것을 나타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데 지나지 않다. 그렇지만, 응용의 방법에 대해 여기저기 동의 할 수 없는 곳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표명하고 있는 생각의 핵심은 모든 무정부주의자가 찬동 해 주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A. 1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아나키즘이란, 무정부 상태, 즉 「지배자나 군주의 없는 상태」를 목표로 하는 정치사상 [P-J Proudhon, What is Property, p. 264], 바꿔 말하면, 「개인이 평등한 입장에서 자유롭게 협력하는 사회」의 창조를 목표로 하는 정치사상이다. 아나키즘은, 국가에 의한 지배든 자본가에 의한 지배든, hierarchy 지배의 모든 형태에 반대한다. 그것은 불필요할 뿐(만큼)은 아니고, 개인이나 개성에 있어 유해하다.
무정부주의자, L=수잔=브라운의 말:
아나키즘은, 일반적으로는 「폭력적인 반국가 운동」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단순한 「정부 권력에의 반대」라고 하는 의미를 넘은 깊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에는 권력이나 지배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생각에 반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에 협동적이며 반hierarchy적인 사회·경제·정치의 조직 형태를 제창하는 것이다. [The Politics of Individualism, p106]
그러나 「아나키즘」이나 「무정부 상태」가 가장 오해 받고 있는 정치사상인 것은 틀림없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말은 카오스나 무질서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그 때문에 당연히 무정부주의자도 카오스나 「약육강식의 법칙」에의 회귀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오해의 프로세스는, 역사적으로도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한사람에 의한 지배(전제 지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고 있었던 시대나 나라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공화 주의」나 「민주주의」라고 하는 말이 확실히 「무정부 상태」라고 하는 말과 같이 「무질서」나 「혼란」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용되어 왔다. 기득권이 있어 현상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은 「현재의 시스템에 반대해도 잘되는 것은 없다. 새로운 사회의 형태는 카오스가 되게 되어 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붙여 엔리코=마라테스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정부의 지배는 필요하고 무정부상태는 무질서와 혼란을 끌어 일으킬 뿐이다' 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으니까 무정부를 의미하는 무정부 상태가 무질서하게 들리는 것은 당연하며 무리가 없는 것이다. [Anarchy, p12]
무정부주의자들은 「무정부 상태」에 대한 이러한 상식을 바꾸고 싶어 한다. 사람들에게 정부나 hierarchy적인 사회 관계가 유해하고 불필요한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한 것이다.
생각을 바꾸자. 정부의 통치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매우 유해하다라고 말하는 것, 무정부 상태라는 말은 무정부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누구에 있어서도 가치가 있는 말이 된다고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자. 그것은, 자연스러운 질서, 개인의 필요와 전원의 이익의 일치, 완전한 단결 속에서의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상게서, pp. 12-13]
이 FAQ는, 무정부 상태의 의미나 아나키즘에 대해 일반적으로 보급되어 있는 잘못한 생각을 바꾸는 프로세스의 일부인 것이다.
A. 1.1 「무정부 상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정부 상태」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어」로 「not」나 「without」를 의미하는 접두사 'a', 「지배자」 「지도자」 「장」 「책임자」 「지휘관」을 의미하는 「archos」를 합성한 말이다. 표토르 크로포트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정부 상태는 「권력에 반대한다」라고 하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 [Anarchism, p. 284]
그리스어로 anarchos와 anarchia는 「정부를 가지지 않는 것」혹은 「정부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받아 들여지는 것이 많다. 아나키즘의 엄밀한 원래의 의미는, 단지 「정부가 없다」라고 하는 것 만이 아니다. An-archy는 「지배자가 없다」혹은 좀 더 일반적으로 「권력이 없다」라고 하는 의미이며, 이 의미로 무정부주의자는 이 말을 계속 사용해 왔다. 예를 들면,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은 「자본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권력의 기반인 법률·권력·국가를 공격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상게서, p. 150]. 무정부주의자에게 있어서 무정부 상태는 「반드시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 같은 질서가 없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고 지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Benjamin Tucker, Instead of a Book, p. 13]. 데이비드 웨이크는 다음과 같이 능숙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모든 권력·군주·지배·hierarchy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해소하려고 하는 사회·정치사상을 집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무정부주의자의 비판은 확실히 정부(국가)에의 비판이 중심이 되지만 단순한 반국가주의는 아닌 것이다. [Reinventing Anarchy, p. 139]
따라서 아나키즘은 단순한 반정부나 반국가의 운동이라고 하는 것보다, 주로 hierarchy에 반대하는 운동인 것이다. 왜냐하면 hierarchy가 권력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조직 형태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hierarchy의 최고 형태이니까 무정부주의자가 반국가인 것은 당연하지만, 반국가만으로는 아나키즘의 정의로서는 불충분하다. 이것은 진정한 무정부주의자는 국가 만이 아니고 hierarchy의 모든 형태에 반대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브라이언 모리스를 인용하자.
무정부 상태라는 말은 희랍어에 유래해 본질적으로는 「지배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정부주의자는 모든 정부 형태나 강제적 권력, 모든 hierarchy나 지배의 형태를 거절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멕시코의 무정부주의자 흐로레스 메이곤은 국가·자본·교회의 「사악한 삼위일체」라고 부른 것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정부주의자는 자본주의와 국가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권력 형태에도 반대인 것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는 동시에 여러가지 수단을 사용해 무정부 상태 상태를 확립하려 하기도 하고 늘어뜨리려고 하기도 한다. 무정부 상태 상태란 억압적 제제도가 없는 분권형 사회, 자발적 관계의 연합을 통해서 조직된 사회인 것이다. ["Anthropology and Anarchism," pp. 35-41, Anarchy: A Journal of Desire Armed, no. 45, p. 38]
이러한 문맥으로 「hierarchy」에 언급하는 것은 최근의 경향이다. 푸르동·바쿠닌·크로포트킨등의 고전적 무정부주의자들은 이 말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다.(그들은 대부분 「권력」(Authority)이라는 말을 이용했지만, 이것은 「권력주의·권위주의」(Authoritarian)를 단축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hierarchy에 반대해 힘의 불평등이나 개인의 특권에 반대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저작물을 읽으면 곧바로 알 수 있다. 바쿠닌은 「공」권력을 공격해 「자연스러운 영향」을 옹호했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료를 억압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렇다면 분명하게 아무도 권력(power)을 가져서는 안된다. [The Political Philosophy of Bakunin: Scientific Anarchism, p. 271]
제프 드라한(Jeff Draughn)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반hierarchy라고 하는 광범위한 개념은 지금까지 혁명 운동(project)에서는 항상 겉에는 나오지 않았다. 최근에야 처음으로 자세하게 연구되되고 사용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어의 「무정부 상태」의 어원에도 이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 [Between Anarchism and Libertarianism: Defining a New Movement]
'무정부주의자는 hierarchy에 반대하지만 국가나 정부는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강조하고 싶다. hierarchy에는 정치적 관계만이 아니고, 권력적인 경제 관계나 사회 관계, 특히 사유재산과 임금노동에 관계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것은 푸르동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도 볼 수 있다.
「자본은 정치 분야에 있어서의 정부와 닮아 있다. 자본주의의 경제사상·정부나 권력의 정책·교회의 신학 사상은 완전히 같은 사상이며, 여러가지 형태로 연결되고 있다. 그 어느 하나를 공격하는 것은 그것들 모두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자본이 노동에 대해서 실시하는 것·국가가 자유롭게 대하고 하는 것·교회가 영혼에 대해서 실시하는 것, 이 절대주의의 삼위일체는 철학적으로 뿐만이 아니고 실천적으로도 유해하다. 민중을 억압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은 민중의 육체·의사·이성을 동시에 노예화하는 것이다. 」 [Max Nettlau에 의한 인용, A Short History of Anarchism, pp. 43-44]
에마=골드 맨은 다음과 같이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팔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즉 「그 사람의 의향과 판단은 주인의 의사에 종속된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Red Emma Speaks, p. 50].
40년전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논하며 같은 것을 지적하고 있다.
현행 시스템하에서는 자본가에 의해 「노동자는 자기의 인격과 자유를 일정시간 매각하고 있다. 」 [상게서, p. 187]
따라서 「무정부 상태」는 단순한 「무정부」 만이 아니고 모든 형태의 권력적 조직이나 hierarchy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의 말을 들어보자.
「사회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기원은 hierarchy 조직이나 권위주의적 사회 개념에의 비판, 그리고, 인류의 진보 운동으로 보여지는 제경향의 분석에 있다. 」 [Kropotokin's Revolutionary Pamphlets, p. 158]
마라테스타에 있어서 아나키즘은 「사회적 불공정에 대한 도덕적 반항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사회적 병리의 원인」은, 「자본주의적 재산과 국가」라고 생각된다. 억압되고 있는 사람들이 「국가와 재산 쌍방을 전복하려고 했다」라며「아나키즘은 그 때에 태어났던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Errico Malatesta: His Life and Ideas, p. 19]
즉, '무정부 상태는 순수하게 반국가이다'라는 주장은 아나키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이언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고전적 무정부주의자의 저작을 음미하면 완전히 명백하게 되지만 '단지 국가에 반대한다' 라는 주장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권력·착취에 항상 도전해 국가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고 자본주의와 종교에도 똑같이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 [상게서, p. 40]
무정부 상태는 카오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무정부주의자는 카오스나 무질서를 희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 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고,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자발적인 협력에 근거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권력으로부터의 탑 다운에 의해 지게하는 무질서하지 않고, 보텀 업에 의한 질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A. 1.2 「아나키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크로포트킨을 인용하면 아나키즘은 「정부가 없는 사회주의 시스템」이다. [Kropotokin's Revolutionary Pamphlets, p. 46]. 바꿔 말하면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와 억압의 폐지, 즉 사유재산(자본주의)과 정부의 폐절이다. 」[Errico Malatesta, "Towards Anarchism," p. 75]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hierarchy가 없는 사회의 창조를 목표로 하는 정치사상이다. 지배자가 없는 「무정부 상태」는 실현 가능하고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사회의 평등」을 최대로 하는 사회시스템이다.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골은 「서로 서로 자립하는 것 」이라고 무정부주의자는 생각하고 있다. 또, 바쿠닌의 유명한 금언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이며 불공정하다. 또 자유로운 사회주의는 노예 제도와 폭정이다. [The Political Philosophy of Bakunin, p. 269]
인간 사회의 역사가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평등한 자유는 강한 사람만의 자유이고 자유로운 평등은, 노예 제도를 정당화 하는 구실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한마디로 아나키즘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여러가지 타입이 있지만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으로부터 공산주의적 아나키즘까지, 섹션 A. 3에 상술) 그 핵심에는 2개의 공통점이 있다. 정부에의 반대와 자본주의에의 반대가 그것이다.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자 벤저민 탁카는 말한다. 무정부주의자는 「국가의 폐지와 부당한 이득의 폐지를 주장한다. 사람에 따라 다른 사람의 지배도, 사람에 따라 다른 사람의 착취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 」 [Eunice Schuster, Native American Anarchism, p. 140으로 인용] 무정부주의자는 모두, 이윤·이자·지가 집세를 부당한 이득(즉 착취)으로 간주하고 있어 정부나 국가처럼 그것을 만들어 내는 상황에 반대하고 있다.
L 수잔 브라운은 보다 넓은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나키즘 안에 있는 연대의 정신은 hierarchy와 지배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며, 개인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싸우는 의지의 현상이다. 」 [The Politics of Individualism, p. 108]
국가나 자본가의 권력에 복종 당하고 있어서는, 사람은 결코 자유롭게는 될 수 없으면 무정부주의자는 생각하고 있다. 보르테린 데 쿠라이아는 이하와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다음과 같은 사회의 가능성을 가르쳐 준다. 생활필수품이 만약에 만명에게 줄 수 있다면 정신과 육체의 완전한 발달의 기회가 만명에게 줄 수 있는 상태가 계속되는 사회이다. 현재는 부의 생산과 분배의 조직이 불평등하게 되어 있지만, 이것은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으면 안되며, 개개인에게 노동의 자유를 보증하는 시스템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의 자유는 노동의 산물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헌상하게 되는 한 없다. 노동의 자유는 생산 자원과 생산수단으로 자유롭게 접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맹목적 복종을 멈추고 불만을 말하자. 무의식의 불만을 멈추고 의식적으로 불만을 가지자. 아나키즘은 억압의 의식을 눈에 띄게 드러내 보다 좋은 사회를 요구하는 소망을 야기하여 자본주의와 국가에 대해 끝없 전쟁이 필요하다고 하는 감각을 분기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Anarchy! An Anthology of Emma Goldman's Mother Earth, pp. 23-4]
따라서 아나키즘은 무정부 상태, 즉 「지배자가 없다」라고 하는 원칙에 근거한 사회의 건설을 제창하는 정치사상인 것이다. 그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같이 무정부주의자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토지·자본·기계의 사적 소유의 시대는 끝났다. 사적 소유는 사라지는 운명에 있다. 생산에 필요한 수단은 사회의 공유재산이 되어 생산자의 손에 의해 운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의 기능은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것이 사회의 정치 조직으로서 바람직한 본연의 자세이다. 사회의 최종 목적은 정부의 기능을 제로로 가지고 가는 것, 즉 정부가 없는 사회, 무정부 상태까지 가는 것이다. 」[Peter Kropotokin, 상게서, p. 46]
따라서 아나키즘은 현재의 사회를 분석·비판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젼, 현재의 사회를 부정하여 인간의 욕구를 최대한 보증하는 사회 비젼의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자유·평등·연대이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섹션 A. 2로 논한다.
아나키즘은 비판적인 분석을 한다. 바쿠닌은 「파괴에의 충동은 창조에의 충동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금의 사회의 나쁜 점을 이해하지 않고 보다 좋은 사회의 건설은 할 수 없는 것이다.
A. 1.3 아나키즘은 왜 리버타리안 사회주의라고도 불리는지?
「아나키즘」이라고 하는 말에는 네가티브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많은 무정부주의자가 다른 말을 이용해 왔다.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 「자유 사회주의」 「자유 공산주의」 「리버타리안 사회주의」 「리버타리안 공산주의」였다. 아나키즘과 리버타리안 사회주의·리버타리안 공산주의는 무정부주의자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같은 의미이다.
「아메리칸 헤리테이지 사전」을 살펴보자.
리버타리안: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믿는 사람, 자유로운 의지를 믿는 사람.
사회주의 : 생산자가 정치 권력과 생산·유통 수단의 양쪽 모두를 소유하는 사회시스템.
위의 2개의 정의를 합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리버타리안 사회주의: 사고와 행동의 자유·자유로운 의지를 믿어 생산자가 정치 권력과 생산·유통 수단의 양쪽 모두를 소유하는 사회시스템.
(사전은 정치사상에는 무지하다라는 평소의 코멘트를 해야 하겠지만, 여기에서는 사전을 사용해, 「리바타리안」은 「자유시장」자본주의를 의미하지 않고 「사회주의」는 국가 소유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다. 다른 사전에서는 다른 정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사전에 의한 정의에 대해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말들은 여기서 할 생각은 없다. 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말하시라. )
그런데 , 미국에서 「자유주의당」이 만들어진 이래, 「리버타리안 사회주의」라고 하는 말은 모순되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다. 많은 자유주의 당원들은 무정부주의자는 「자유주의 사상」에 「사회주의」라고 하는 「반자유론자」사상을 묶어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이고 쉽게 하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무정부주의자가 「정당한 소유자」로부터 「리버타리안」의 간판을 훔치려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공연한 트집은 아닌 것 같다. 무정부주의자는 스스로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1850년대부터 「리버타리안」이라고 하는 말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1858년부터 1861년까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죠셉 데잔크는 뉴욕에서 「르 리베르테이르, 사회운동 저널」을 발행하고 있었다. 한편 「리버타리안 공산주의」라고 하는 말의 사용은 1880년 11월에 프랑스의 무정부주의자 회의가 이 말을 채용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다. [Max Nettlau, A Short History of Anarchism, p. 75 and p. 145].
「리바타리안」이라고 하는 말이 한층 더 자주 사용되게 된 것은 반무정부주의자의 법률을 회피하기 위해, 그리고 「무정부 상태」라고 하는 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서 1890년대의 프랑스에서 사용되고 나서부터이다(예를 들면 1895년에 세바스찬 폴과 르이즈 밋시르는 프랑스에서 르 리베르테르지를 발간했다). 그 이후로, 특히 미국 이외에서는 리바타리안은 무정부주의자의 사상이나 행동과 항상 연결시켜 사용되었다. 최근의 미국의 예를 들면, 1954년 7월에 아나르코 신디칼리즘을 견지하는 리바타리안 연맹이 결성되어 1965년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자유주의」당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초두이며 그것은 무정부주의자가 자신의 정치사상을 말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그 말을 사용하고 나서 100년 이상 후( 「리버타리안 공산주의」가 채용되고 나서 90년 정도 후 )이다. 말을 「훔쳤다」 것은 무정부주의자는 아니고 그쪽의 당의 일부이다. 다음 섹션 B에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고 하는 사상이 얼마나 모순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섹션 I에서는 「리버타리안 사회주의」의 소유 시스템만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로 하는 것을 설명한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현재 「사회주의」라고 불리고 있는 국가 소유는 무정부주의자에게 있어서는 사회주의의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섹션 H에서 다루는 국가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일변종이며,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조금도 가지지 않는 대용품인 것을 자세하게 말하고자 한다.
「리버타리안」이라고 하는 말이 아나키즘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사상과 대부분 공유하는 부분이 없는 이데올로기에 이 말을 도둑맞아 기뻐하고 있는 무정부주의자는 대부분 없다. 미국에서는 머레이 북친이 말하고 있듯이 「 「리버타리안」이라고 하는 말 그 자체는 확실히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순수 자본주의」나 「자유 무역」이라는 전투적 운동을 수반하는 반권력주의 이데올로기와 외관상 같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운동이 이 말을 만든 것은 아니다. 19 세기의 아나키즘 운동으로부터 훔쳤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반권력주의자에 의해 재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반권력주의자는 돈벌이와 자유를 동일시 하고 있는 개인적 이기주의자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되고 있는 사람들 전체를 대변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미국의 무정부주의자는 자유시장과 우익에 의해 변질된 전통을 취해서는 안된다.[The Modern Crisis, pp. 154-5]. 그래서 우리는 자신들의 사상을 리버타리안 사회주의라고 계속 부르는 것이다.
A. 1.4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주의자인가?
그렇다. 어떤 종류의 아나키즘도 모두 자본주의에 반대이다. 자본주의가 「지배와 착취」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섹션 B, C참조). 「인간은 노예주가 없으면 일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에 무정부주의자는 반대한다. 무정부주의자의 사회에서는 「실제의 노동자는 자신들의 규율을 가져 사물은 언제·어디서·어떻게 되어야할 것인가를 결정된다」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있어서의 심한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Voltairine de Cleyre, Anarchism, p. 32 and p. 34]
(여기서 강조하건대 무정부주의자는 봉건주의·소비에트형「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좋지만--·노예 제도라고 하는 지배와 착취에 근거한 모든 경제 형태에 반대이다. 여기서 자본주의를 집중적으로 논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
푸르동·바쿠닌등의 사회적 무정부주의자와 같이 벤저민 탁카와 같은 개인주의자들도 '우리들은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고전적 에세이「근대 과학과 아나키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폭넓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를 폐절 하는 시도'라고 이해되고 있던 때에 무정부주의자는 그 시대의 사회주의자와 함께 손을 잡고 행진하고 있었다. 」[Evolution and Environment, p. 81]
탁카의 말을 인용하면, '사회주의의 근저에는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소유하는 입장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2개의 사회주의 학파, 즉 국가 사회주의도 아나키즘도」어느쪽이나 이 주장을 인정하고 있다. [The Anarchist Reader, p. 144] 즉, 「사회주의자」라고 하는 말의 원래의 의미에는, 「자신이 만든 것은 자신의 물건이다, 라고 하는 개인의 권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Lance Klafta, "Ayn Rand and Perversion of Libertarianism," in Anarchy: A Journal of Desire Armed, no. 34] 착취(나 고리대금)에 대한 반대는 진정한 무정부주의자라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어서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주의의 깃발 아래에 몸을 두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주의자에 있어 「자신의 노동의 과실을 확실히 도둑맞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의 수단을 소유하는 것이다. 」[Peter Kropotkin, The Conquest of Bread, p. 145] 그 이유는 예를 들면 푸르동은 노동자 협동조합을 지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협동조합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사업의 소유물을 전면적으로 공유한다. 」왜냐하면, 「경영에 참가한다」일로 「집단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즉, 잉여)이 소수 경영자의 이익의 원천이 되지 않게 된다. 전노동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The General Idea of the Revolution, p. 222 and p. 223] 즉,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를 끝내는 것을 바랄 뿐만 아니라,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해 관리하는(강조하지만 이것은 서비스 제공을 하고 있는 직장도 포함된다) 사회를 바라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자와 다른 사회주의 집단과는, 생산자가 이것을 실시하는 수단에 대해 견해가 차이가 나지만, 이 소망은 공통이다. 무정부주의자는 관리는 노동자가 직접 행하며 소유는 노동자 협회나 컴뮨의 어느 쪽인지가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아나키즘의 종류에 대해서는, 섹션 A. 3을 참조).
한편 무정부주의자는 자본주의를 착취적임과 동시에 권위주의라고 해서 거절한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는 생산 과정 안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통치하고 있지 않고, 자신의 노동의 산물에 대한 관리도 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정황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고 자유로운 기초를 두지 않으며 비착취적으로 될 가능성도 없다. 그래서 무정부주의자는 반대하는 것이다. 이 관점은 푸르동(탁카와 바쿠닌을 자극했다)의 저작에서 잘 볼 수가 있다.
그는 아나키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아나키즘에서는 「모든 장소에서 자본주의와 소유(proprietary)에 의한 착취가 끝나 임금 시스템이 폐절 된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단지 고용되는지, 참가할것인지 어느 쪽 하나이다. 처음의 경우 노동자는 예속되어 착취당한다. 복종적인 사회에서 지위가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2의 경우 노동자는 인간·시민으로서의 자신의 존엄을 회복해 생산 조직을 결성한다. 노동자는 이전에는 노예 이외의 누구도 아니었다. 주저 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선택사항 같은 건 없는 것이다. 노동자 사이에 「조직」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노동자는 지배되는 쪽으로 관계가 계속되어 주인과 임금 노동자라고 하는 2개의 카스트를 보증하게 된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 있어 이 카스트는 불쾌하다. 」[상게서, p. 233 and pp. 215-216]
따라서, 무정부주의자는 모두 반자본주의자이다( 「노동이 낳는 부를 노동이 소유한다면 자본주의는 없어질 것이다」 [Alexander Berkman, What is Anarchism?, p. 44]). 예를 들면, 가장 자유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무정부주의자 벤저민 탁카는 자신의 사상을 「아나키스틱 사회주의」라고 불러 자본주의를 「고리대금, 이자·집세·이윤의 수취인」에 근거한 시스템이라고 비난한다. 자본주의가 아닌 아나키즘 사회에서는 「노동이 자연스러운 임금과 모든 생산물을 획득하므로」자본가는 불필요한 귀찮은 존재가 된다고 탁카는 생각했다. 그 경제는 소비조합·직공·농민 사이의 생산물의 자유 교환과 인민 상호은행을 기초로 하고 있다. 에고이스트의 제일인자 막스슈티르너조차 자본주의와 그 「유령들(spooks)」를 경멸하고 있다. 슈티르너에 의하면, 사유재산·경쟁·노동의 분업 등의 관념은 유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정부주의자는 자신들을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자, 리바타리안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자 죠셉 A 라버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탁카와 바크닌도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는 아니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실수이다. 아나키즘은 자유의지에 근거하는 사회주의(Voluntary Socialism) 인 것인다. 사회주의에는 2 종류가 있다. 강권적(archistic) 사회주의와 무강권적(anarchistic) 사회주의, 권력주의적 사회주의와 리바타리안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와 자유 사회주의이다. 어떤 사회 개량에 대한 제안도 개인에 대한 압력이나 외부 의지의 힘을 늘릴까 줄일까의 어딘가에 있게 된다. 늘리는 것이 강권적(archistic), 줄이는 것이 무강권적(anarchistic)이다. [Anarchism: What It Is and It Is Not]
라버디는 몇번이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주의자이지만, 모든 사회주의자가 무정부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다니엘 게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실제로 사회주의와 동의어다. 무정부주의자는 가장 먼저 사회주의자이며, 그 목적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폐절하는 것이다. 」[Anarchism, p. 12]
이 코멘트는 사회파이든 개인주의파이든 아나키즘 운동사를 통해서 몇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실제 헤이 마켓의 희생자 아돌프 피셔도 라버디와 대부분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 같은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주의자이지만 모든 사회주의자는 반드시 무정부주의자는 아니다. 」동시에 아나키즘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운동은 「2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있다.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자와 푸르동이나 중산계급의 무정부주의자이다. 」[The Autobiographies of the Haymarket Martyrs, p. 81]
사회적 무정부주의자와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자 사이에서는 많은 문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유시장(free market)이 자유(lieberty)를 최대로 확보해주는 최고의 수단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반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사회에서는 임금 노동을 부정하는 협동 노동(associated labour)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협동 노동만이 노동 시간 중의 개인에 대한 압력이나 외부 의지의 힘을 줄인다. 그러한 노동의 자주 관리가 진정한 사회주의의 이상의 모습인 것이다. 이 관점은 죠셉 라버디가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음에서도 볼 수가 있다. 노동조합은 「조직을 만드는 것으로 자유를 획득하는 좋은 예이다. 」그리고, 「조합이 없으면 노동자는 조합이 있을 때보다 쉽게 고용주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Different Phases of the Labour Question]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말은 변화한다. 오늘 「사회주의」라고 말하면 자유와 「본래의 사회주의의 이상」을 부정하는 국가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놈 촘스키가 이 문제에 대해 하는 말에 무정부주의자라면 누구나가 동감일 것이다.
만약 좌익이 Bolsheviki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면 나는 좌익과는 단호히 결별하겠다. Lenin은 사회주의의 최대의 적의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Marxism, Anarchism, and Alternative Futures, p. 779]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주의·사회민주주의·레닌주의에 계속 반대해 왔다. Lenin가 권력을 잡는 것보다 아득한 이전에, 바쿠닌은 「붉은 관료 정치」의 위험에 대해 마르크스의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만약 마르크스의 국가적 사회주의 사상이 실현되다면 그것은 「모든 전제 정부 중에서 최악의 것」이 될 것이다 라고.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는(기본적으로는) 사회주의자이므로 마르크스주의와 공통의 생각도 몇 개가 있다. (레닌주의와 공통된 것은 전혀 없다) 바쿠닌과 탁카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비판이나 노동 가치설을 인정하고 있다. (섹션 C참조) 마르크스 자신은 막스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 소유>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국가의 사회주의에 대한 훌륭한 비판이 그 책에는 쓰여져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의 운동안에도 사회적 무정부주의자의 견해(그 중에서도 특히 아나르코신디칼리스트)와 닮은 요소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안톤 파네크크, 로자 룩셈부르크, 폴 마틱 등은, Lenin과는 완전히 이질이다. 컬 코르슈 등은 스페인의 아나키즘 혁명에 대해 쓰고 있다. 마르크스로부터 Lenin까지 많은 연속되는 연결이 있지만 마르크스로부터 리버타리안적인 마르크스주의자에게로의 연속적 연결도 있다. 이러한 리버타리안적 마르크스주의자는 Lenin과 볼셰비즘을 어렵게 비판하고 있어 그 사상은 평등자의 자유 연합을 요구한 아나키즘의 소망에 가까운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이다. 다만 오늘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사회주의」(즉 국가 통제의 사회주의)과는 정면으로부터 대립하는 사회주의인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라고 하는 말에 관련시키고 있는 「계획경제」대신에, 개인·노동 현장·공동체간의 연합과 협력을 제창해 국가 자본주의의 변종인 「국가」사회주의에 반대한다. 국가 사회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임금 수급자가 되며 국가만이 임금 지불자가 된다. 」[Benjamin Tucker, The Individualist Anarchists, p. 81]
따라서 무정부주의자는 "거대한 사회당내의 사회민주주의 당파가 현재 사회주의를 자본가로서의 국가라고 하는 생각에 환원시키려고 하고 있다"며 마르크스주의를 거절하는 것이다. [Peter Kropotkin, The Great French Revolution, vol. 1, p. 31]. 마르크스주의가 「중앙 지령형 경제」·국가 사회주의나 국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와 동일시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무정부주의자의 반론은, 섹션 H로 논한다.
국가 사회주의자와의 이러한 차이 때문에, 그리고 혼란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무정부주의자는 자신을 단지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자가 사회주의자인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이른바 「자유주의자」우익의 출현과 함께 자본주의 찬동자 중에 자기 자신을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게 된 사람들이 있다. 이 때문에, 여기서 이 점을 자세하게 논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아나키즘은 반자본주의 즉 사회주의인 것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이것은 모든 무정부주의자가 동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왜 「아나르코」자본주의가 아나키즘이 아닌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섹션 F를 참조해 주었으면 한다).
A. 1.5 아나키즘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아나키즘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거기에 대답하려면 , 러시아 혁명(섹션 A. 5.4 참조)에서 마흐노주의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만든 「리버타리안 공산주의자의 조직강령」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노동자의 노예화가 낳은 계급 투쟁, 그리고 노동자의 자유에의 열망. 이것들이 아나키즘 사상을 낳았다. 아나키즘은, 계급 원리와 국가 원리에 근거하는 사회시스템을 모두 부정해, 그 시스템을 노동자가 자주 관리하는 자유로운 비국가주의 사회로 옮겨놓는 사상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지식인이나 철학자의 추상적 생각으로부터는 태어난 것은 아니다. 노동자에 의한 자본주의와의 직접 투쟁으로부터, 노동자의 요구와 필요물로부터, 자유와 평등에의 열망으로부터 태어났던 것이다. 노동자 대중의 생활과 투쟁이 영웅적인 시대에, 이 열망은 특히 생기에 넘쳤다.
걸출한 아나키즘 사상가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아나키즘 사상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중 가운데서 아나키즘 사상을 찾아 자신의 장점인 사고와 지식을 사용해 그 사상을 적 넓히는 도움을 준 것 뿐이다. [pp. 15-16]
무정부주의자 운동 일반이 그렇지만 마흐노주의자도 노동자 계급의 대중운동이며 1917년부터 1921년간 우크라이나에서 적군(공산당)과 백군(짜리즘/자본주의) 쌍방의 권위주의 세력에 저항했다. 「전통적으로, 아나키즘의 주된 지지자는 노동자·농민이었다」라고 피터 마셜은 쓰고 있다. [Demanding the Impossible, p. 652]
아나키즘은 자유를 요구해 투쟁하는 가운데, 그리고, 그 투쟁에 의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크로포트킨에 있어 「아나키즘은 일상 투쟁에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무엇인가 큰 실천적 교훈으로 영향을 받을 때에 아나키즘 운동은 새로워졌다. 아나키즘의 기원은 생활 그 자체의 가르침에 있었던 것이다. 」[Evolution and Environment, p. 58 and p. 57]
푸르동에 있어, 그 상호주의 사상은 "여러가지 노동자 조직의 현재의 실천, 혁명적 실천에 있어 「이러한 조직은 파리와 리용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어 크레디트 조직과 노동 조직이 완전히 같은 의미다"라고 표현되고 있다.[No Gods, No Masters, vol. 1, pp. 59-60]
실제, 어느 역사가가 가리키고 있는 「푸르동의 연합적 이상과 리용의 상호주의자의 프로그램과는 매우 잘 닮았으며」에 있어서 「(사상에) 현저한 일치」를 볼 수 있다. 「프르돈이 자신의 건설적 프로그램을 정합성을 가져 명언할 수가 있던 것은, 리용의 실크 노동자의 실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가 지지한 사회주의의 이상은 이미 이러한 노동자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현실의 것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K. Steven Vincent, Pierre-Joseph Proudhon and the Rise of French Republican Socialism, p. 164]
즉, 아나키즘은 자유를 요구한 투쟁과 인간적 생활, 살고·사랑하며·즐기는 시간이 있는 생활을 보내고 싶다고 하는 소망 등에서 생기는 것이다. 생활로부터 동떨어져 사회를 내려다 보는 상아탑에서 자신의 선악 개념에 근거해 판단을 내리는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권위·억압·착취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저항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알버트 메르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나키즘 그 자체의 이론가같은 건 없었다. 아나키즘이, 아나키즘 철학의 여러가지 측면을 논하는 많은 이론가를 낳았던 것이다. 아나키즘은 행동 안에서 성립하는 신조로 지속된다. 지적 사상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주 있는 것이지만, 부르조아 작가는 노동자와 농민이 이미 실천으로 완수하고 있는 것에 참가해 기록한다. 그리고, 부르조아 역사가는 이 작가를 지도자라고 본다. 게다가 그 후의 부르조아 저술가들이, (이 부르조아 역사가를 인용해) 이것은 노동자 계급은 부르조아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실례라고 하고 있다. [Anarchism: Arguments for and against, p. 18]
크로포트킨의 눈에는, 「아나키즘은 그 기원을, 대중의 창조적·건설적 활동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과거 인간의 모든 사회 기관안에 실현되고 있던 것 것과 같은 것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가지 사회적 기관의 외부에서, 세력의 대표자들에 대한 반역안에서 실현되고 있던 것 것과 같다. 외부 세력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기관에 손을 걸어 자신들에게 형편이 좋게 이용했기 때문이다. 」 좀 더 최근에는, 「사회주의 일반을 낳은 것과 같은 비판적·혁명적 항의 행동이 무정부 상태를 낳았다. 」아나키즘은, 타형태의 사회주의와는 달라 「그 모독의 팔을 자본주의로만 주지 않고, 자본주의의 지주인 법률·권위·국가에 대해서도 주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자 저작자가 가진 것은 사회 일반이 가지는 여러가지 진화 경향의 분석 뿐만이 아니라, 투쟁을 실시하고 있는 노동자 계급의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아나키즘) 원리의 일반적 표현과 그 교의의 이론적·과학적 기반을 성립시킨다」것이었다. [상게서, p. 19 and p. 57]
하지만, 사회에 있어서의 여러가지 아나키즘적 경향과 조직이란, 푸르동이 1840년에 펜을 들어 자신은 무정부주의자라고 선언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특정의 정치 이론으로서의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태어났다(아나키즘은 「18 세기 말에 자본과 국가를 전복한다고 하는 이중의 도전에 착수했다」[Peter Marshall, 상게서, p. 4]). 그러나, 무정부주의자 저작자는 여러가지 리버타리안 경향에 관해서 역사를 분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크로포트킨은 「어느시대라도, 무정부주의자와 국가주의자가 있었다」라고 논하고 있는 [상게서, p. 16]. 「상호부조론 Mutual Aid」과 그 외의 저작에서 크로포트킨은 지금까지의 여러가지 사회가 가지고 있던 리바타리안적 측면을 분석해, 아나키즘 조직이나 아나키즘의 측면을 (어느 정도까지) 능숙하게 실천하고 있던 사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공식의」아나키즘 운동이 창조되기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여러가지 실례가 아나키즘적 사상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과 같이 논했다.
석기시대라고 하는 최고의 시대부터 인간은 동료 가운데 몇사람이 사적 권한을 획득할 수 있게 되면 여러가지 폐해가 생기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원시적 씨족·촌락 커뮤니티·중세 길드·최종적으로는 중세의 자유 도시 안에 여러가지 제도를 만들어 내고 자신들을 정복하러 온 타관 사람이나 같은 일족 중에서 사적 권력을 확립하려는 사람들이 생활과 재산을 침해했을 경우에 저항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Anarchism, pp. 158-9]
크로포트킨은, 노동자 계급 민중의 투쟁을 이러한 옛 민중 조직 형태와 같다고 보았다. 「노동자의 단결은 소수자의 권력이 증가하는 것에 맞서는 민중 저항의 결과였다. 이 경우는 자본가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씨족·촌락 커뮤니티등도 그렇고, 1793년의 「프랑스 혁명중의 파리 「지구」·모든 대도시·많은 소규모 「컴뮨」에서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연합한 활동」도 그랬다. [상게서, p. 159]
정치 이론으로서의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활동의 표현이지만, 아나키즘 사상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 행동안에 표현되어 왔다. 예를 들면, 북미 등에 있는 많은 원주민족은, 특정의 정치 이론으로서의 아나키즘이 존재하지 않는 수천 년 전부터 아나키즘을 실천해 왔다. 아나키즘적인 여러가지 경향과 조직은 모두 대혁명에 존재하고 있었다. 몇개의 구체적인 예를 들면, 미국 혁명중의 뉴잉글랜드 지방의 타운 미팅·프랑스 혁명의 파리 「지구」·러시아 혁명의 노동자 평의회와 공장 위원회가 그것이다(자세하게는, 머레이 북친, The Third Revolution 를 참조). 이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미 논한 것처럼, 아나키즘이 권위에 대한 저항의 산물이라고 하면, 권위를 가지는 사회는 어떠한 것이든 권위에 대한 저항을 일으켜 여러가지 아나키즘적 경향을 낳는다.(그리고 물론, 권위가 없는 사회는 아나키즘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아나키즘은, 억압과 착취에 대한 투쟁의 표현이며, 현행 시스템의 잘못에 관한 노동자의 경험과 분석의 일반화이며, 보다 좋은 미래를 향한 희망과 꿈의 표현인 것이다. 이 투쟁은, 그것이 아나키즘으로 불리게 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역사적인 아나키즘 운동(즉, 자신들의 사상을 아나키즘이라고 불러, 아나키즘 사회를 목표로 하는 그룹)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와 국가에 반대해, 억압과 착취에 반대해, 자유롭고 평등한 개개인으로부터 되는 자유 사회를 요구한 노동자 계급 투쟁의 산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