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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회심 / 사 43:14-21, 빌 3:7-16
컴퓨터 회사로 유명한 IBM사가 있다. IBM사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단기적인 이익만을 계속 추구하여 미국에서 추락하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우리들도 우리의 삶에서 대차대조표를 만들어서 손익계산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학교를 지으면서 인생 손익계산서를 잘 정리해 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100년전 미국 하버드대학교 총장이었던 사람 중의 한 분이다.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가 그 학교 철학관 건물을 지을 때였다. 철학관을 지을 때 이사회에서 100항목이 넘는 사항을 점검해서 가한가, 가하지 않은가를 O,X로 표시해 달라고 했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그 시방서와 계획서에 총장은 계속 생각하면서 O표를 했다. 그런데 딱 하나에 X표를 했다. 그것은 현관에 붙여 놓을 글이었다. 거기는 철학관이었기에 위대한 경구를 써붙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런 말이 써 있었다. ‘사람은 만물의 척도다.’ 그는 여기에 X표를 했다. 그리고 시 8:4절을 써 넣었다. 시 8:4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래서 지금도 그 학교의 첫관문인 건물 안 현관에는 시 8:4절이 쓰여져 있다. 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을 본 것이다. 인생의 관점에서 학생들을 키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물로 학생들을 키우기로 이 총장은 결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인생 손익계산서를 내 놓은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는 30년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의 도전을 받고, 이제까지 자기가 살았던 삶의 손해와 이익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이렇게 만들었다. 5절에서 그는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했고, 보배롭게 생각했고, 자랑할 만한 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첫째로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할례도 여러 형태로 받는다. 가령 모슬렘들은 이스마엘의 규례를 따라서 13살에 할례를 받는다. 이삭이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을 때 이스마엘의 나이가 13살이었다. 그래서 13살에 받는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가하면 디모데는 다 큰 다음에 일부러 율법주의자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성년이 되었을 때에 할례를 거행했다고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다. 바울은 ‘나는 8일만에 할레를 받았다. 성서가 말한 그 시간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다. 태어나자 마자 흠잡을데 없는 인생으로 출발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둘째로 ‘이스라엘 족속이요’ 할례를 받은 많은 사람 가운데 어떤 경우에는 유대교로 개종한 다음 자기 자녀들을 낳았을 경우에 난지 8일만에 할례를 주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개종해서가 아니고, 우리 부모가 유대교의 정통 가계를 이어받은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로 ‘베냐민 지파요’ 이 베냐민은 야곱이 12아들 가운데 특수한 두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는 다른 아들들은 모두 이방에서 낳았지만 그 아들만은 가나안 복지에서 출생했다. 또 그 아들을 낳다가 그처럼 야곱이 사랑하던 라헬이 죽었다. 야곱은 막내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그런가하면 이스라엘 초대 임금인 사울이 바로 베냐민 지파였다. 이 사도 바울이 회심 전의 이름이 사울이었는데, 이 사울처럼 위대한 지도자가 되라고 부모가 붙여준 이름일 것이다. 또한 베냐민 지파는 남북이 갈렸을 때, 북쪽 이스라엘로 전 이스라엘의 지파가 합세했을 때였다. 이 베냐민 지파는 다윗의 가계 때문에 망한 지파였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기뻐하신는 것을 알았던 그들은 신앙적 결단을 한다. 감정적인 결단을 하지 않고 신앙적 결단을 해서 끝까지 남쪽 유대 왕국의 일원으로 쓰임을 받았다. 그러니까 자랑할만한 결정을 한 것이다. 그후에 포로로 된다. 전 민족이 죽음의 결정이 난 그때,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만의 그 괘계를 뒤집는다. 민족의 구국의 일을 이룬 사람들이 바로 베냐민 지파였다. 그렇기에 자랑할 만한 지파였다. 그는 태어날 때도 가장 좋은 출발을 했다. 그는 자랄 때에도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여기까지 였다.
넷째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이 말은 히브리말을 모국어로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이다. 가령 헬라파 유대인하면 헬라어를 모국어로 쓰는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로마파 유대인은 로마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그것이 자랑할 만한 것은 그는 이스라엘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문화 속에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자기 모국어를 말할 수 있었고, 자기 모국어로 생각할 수 있는 골수 히브리인이라고 표현한다.
다섯째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그가 조금 자랐을 때에 바리새파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바리새인하면 우리는 나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카비라는 사람이 세속주의에 물들었던 자기 나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 고통받았던 민중 속의 몇 사람과 독립운동을 일으켜서 잠시 독립을 이룬 적이 있었다. 후에 거대한 세력 앞에 무너졌지만 그 마카비를 사랑하고, 그 마카비의 뜻을 존중해서 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과 구별되었다. 성별되었다. 세속과 분리되었다는 의미로 분리주의자라고 한다.
이 사랍들은 율법들을 잘 지켰다.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이것이 율법일까 아닐까, 하나님의 뜻일까 아닐까를 1,500가지 규례로 만들어서 율법을 지킨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바리새파 사람들은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좋을까, 이런 논란을 하다가 심지어 노동에 관한 규례까지 정했는데, 무화과 열매보다 더 무거운 것을 들고 가면 노동, 곧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무화과 열매가 아주 작은고로 무엇을 들고 다녀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또 안식일에 알마만큼 치료해야 하는가? 솜을 상처에 붙이는 것은 괜챦다. 그러나 약을 묻혀서 상처에 바르면 치료하는 것이다. 이런 자질구레한 규례를 1,500가지나 만들어서 지킨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그 규례를 보면서 바리새인이 되겠다고 생각하면 많은 희생을 해야 했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 옳게 살고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살든 관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여기 성서를 보니까 열심히 교회를 박해했다고 말한다. 자기가 보니 예수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생겼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고, 그분이 하나님이라는데 분개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가장 치욕스럽게 죽은 사람이 우리의 하나님이고, 우리의 메시야란 말인가? 믿을 수 없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을 박멸해야 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고 눈을 부릅뜨고 다녔던 사람이다. 스데반이 처음 순교할 때에도 그는 스데반의 옷을 들고 죽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이스라엘 뿐아니라 이웃나라 다메섹까지 쫓아갔다. 믿는 자들을 죽이려 달려갔던 열심있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거기에 그는 자기들이 만든 바리새파법, 1,500개의 규범에 흠 하나 없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정말 자랑할 만한 일이다. 정말 높일만한 이름이다. 신뢰할 만한 이름이다. 그는 출생도 좋았고, 그리고 자기가 받은 것을 잘 발전시켜서 최대치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얻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세속적인 출세를 바라지 않았다. ‘하나님이여!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옵소서. 내가 그것을 위하여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내가 세상 부귀공명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시면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것을 위하여 좇아가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추구했던 삶이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믿는 자들을 죽이려고 가다가 큰 광채에 휩싸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는 찬란한 빛 가운데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 그때 그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다. 자기가 그처럼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해도 완성하지 못했던 그 의를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주께서 완성하신 은혜를 내게 주신 놀라운 사건을 그는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의 생애가 뒤집혔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놀라운 하나님의 의를 붙잡게 된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고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마치 밤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다가 동쪽에서 태양이 뜰 때 그처럼 반짝이던 별들이 종적을 감추는 것처럼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의의 태양이신 그 분이 그의 생애에 떠오르자 그의 모든 자랑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다 해로 여겼다고 말한다. 7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해로 여겼다고 말한다. 이 말은 손해로 여겼다는 말이다. 그런데 8절을 보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이라고 말한다. 30년 전의 것도 해로 여겼는데, 30년이 지나서 많은 사건이 있은 다음에도 해로 여긴다는 말이다. 해일 뿐아니라 빠져나가야 될, 내게서 진짜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빠져나가야 될 배설물이라고 말한다. 쓰레기라는 말이다. 내가 그처럼 붙잡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이처럼 허무하게 그리스도 앞에서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고상한 지식이 그의 생애를 새롭게 붙잡게 되었다. 주께서 완성하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게 되었다. 아무도 송사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신 그 의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었다. 이제까지 추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익을 바라보면서 달리게 되었다.
1. 그는 예수 안에 있기를 열망했다.
9절상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삶이다. 우리는 여러 관계 속에서 인생을 산다. 저는 전주갈보리교회 목사이다. 제 아내에게는 남편이고, 자녀들에게는 아빠이다. 또 친구들에게는 동료이고 마을에서는 주민으로 살아간다. 이런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지만 내 삶의 1번지는 그 어떤 것도 아닌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고 있는가라는 말이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 그 생각이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는 말이다. 그냥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말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내 행동이 있고 내 언어가 있고, 내 계획이 있고 내 인생의 이정표가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공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인간적인 성공도 실패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진정한 자랑이고, 진정한 가치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쏟아버려야 될 배설물이고, 그것이 내 인생을 손해나게 하는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다.
2.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기 원했다.
사도 바울은 일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싶다’고 10절에서 말했다. 당시 로마시대에는 큰 권능이 있었다. 그것은 황제의 권능이었다. 로마 황실과 2주간을 버틴 세력이 없었다고 한다. 그 권세는 대단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보다 더 큰 권세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권세인가? 죽음의 권세이다. 죽음은 왕후장상도 이길 수 있다. 그처럼 온 세상을 간단하게 밀어붙인 정복자인 로마의 황실을 이겨 버린다. 간단하게 이긴다. 그 권능을 그는 보고 있다. 그런데 그는 또 다른 권능을 본다. 그 죽음을 이긴 부활의 권능을 본다. 그 죄의 무서운 세력을 이긴 부활의 권능이다. 그 권능 안에 내 생애가 있음을 실감하기를 원한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고 싶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싶다고 찬양했다. 그 부활의 권능이 내 삶 속에 얼마나 크게 역사하는가를 내 생애가 증명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냥 ‘아, 예수 부활했구나’ 그것이 아니라 그 부활의 권능이 우리를 죽음 앞에서 어떤 승리의 삶을 살게 만드느냐는 말이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죄의 유혹에서 그 부활의 권능이 어떻게 죄를 끊어버리고, 부활의 영광을 삶으로 누리게 되는가?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이익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3.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했다.
고난과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말이 같이 연결되어 나왔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말은 빌립보서에서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빌 2: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께서 십자가의 치욕의 죽음을 순종하신 그 순종을 본받아 사는 삶이 되기를 소원한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인생의 채점표가 있었다. 주의 말씀을 순종했으면 그 손종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고통일지라도 바른 것이며, 주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얻어지는 소득은 해라고 여겼다. 자기인생의 채점을 양쪽으로 나눠가면서 그는 엄밀하게 검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