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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말씀 / 출 20:1-17, 고전 1:18-25
언젠가 서울에서 집회가 끝난 후 전주로 내러오는 길이었다. 관광차가 남산을 통과할 때 서울의 밤을 보게 되었다. 밤거리가 온통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로 뒤덮여 있었다. 교회는 늘어나고 장소가 부족하다보니 심한 경우에는 한 건물에 4-5개의 교회가 층마다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주일이 되면 교인들이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다가 다른 교회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어서, ‘김 집사님, 그건 우리 교회가 아니요.’ 하며 고함을 지르는 웃지 못할 촌극도 가끔 벌어진다고 한다. 몇 년 전인가 우리나라 술집과 교회 수가 같았다는 말이 있었다. 다행이다. 십자가 대신 술집으로 가득했던 로마는 멸망했고, 십자가를 다 떼어버리고 교회 건물을 강제로 빼앗아 국가의 공공건물로 사용하던 소련이나 동구의 공산권 국가들이 몰락해가는 것을 보면, 그래도 십자가로 뒤덮인 우리나라는 아직도 희망이 남아있다고 보아도 되겠다.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의 산 증거요 상징이다. 그리고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믿는 성도들이 십자가의 이미를 모르거나 그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면, 그들의 삶은 결국 땅에 짓밟히는 맛잃은 소금이 되고 만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이 중요한 십자가의 이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복음이 참으로 혼미해 지고, 교인들이 갈팡질팡하는 때도 일찍이 없었기에 더욱 그렇다. 기독교의 원리와 신학의 기초를 바로 닦은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기 신앙의 전부로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면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유대교가 제일이요, 유대교 외에는 다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박해하며 다 없애버리려고 하던 그가 예수를 만난 뒤에는 십자가를 이처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쓴 많은 서신에 이 ‘십자가의 도’(공동번역 - 십자가의 이치, 새번역 - 십자가의 말씀)를 자세히 설명하며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기독교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외에는 없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생긴 종교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주님이 지신 이 십자가를 통하여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독교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첫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많은 회의와 질문들을 했다. 그들은 ‘의인이 왜 고난을 받아야 하며, 반대로 악인들은 왜 풍요한 생활을 하는가? 그리고 왜 악인들은 부자가 되어 잘 사느냐?’라며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있느냐고 따진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자처하는 자기들을 보호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도 않는다고 불평한다. 이런 사상을 특히 시편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회의를 품으면서 이 문제를 죽은 후에 오게 될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 대표적인 기도문이 바로 시 73편이다. 그후에 유대교의 랍비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의 억울함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지옥과 천국 곧 내세의 상벌이라는 새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에서 특히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새롭게 취급되는 것을 보게 된다. 창세 이래 모든 인간들의 쌓인 죄악을 탕감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구약에 보면 인간들이 죄악을 용서받기 위하여 양이나 다른 짐승의 피를 드리는 제사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제사제도는 장차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실 어린양 예수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다. 히브리서를 보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우리의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 1:11-12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미 6:7절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그래도 기뻐하지 않겠다. 이 모든 구약의 제사제도는 속죄양의 원형인 예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모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운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하여 구약시대 사람들이 수수께끼로 여기던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바울은 롬 3:21-26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서 과거 구약시대에 죄를 심판하지 않은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 현재와 장래의 죄에 대한 심판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그(예수)는 새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들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보이셨다는 뜻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창조 이래 쌓인 인류의 죄악을 속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인 아담 하와와 맺었던 영원한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언약에 절대 복종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불순종하여 결국 범죄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인간에게는 저주가 임했고, 죄와 죽음의 종이 되는 신세가 되었다. 영원히 살 수 있었던 인간이 죽어야만 하게 되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그러므로 죄의 값으로 죽어야 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양을 비롯한 무죄한 짐승들을 죽여 ‘피흘림이 없으면 용서함이 없다’는 율법적 요구를 총죽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짐승의 피로써 도저히 다 속죄할 수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독자이신 예수를 보내셔서 죽게 하심으로써 에덴동산에서 맺었던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속죄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옛날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다. 그 나라는 부패가 점점 널리 퍼졌고, 특히 음행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모든 백성들은 범죄와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왕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엄격한 명령을 발표했다. 누구든지 음행을 하는 사람은 대중이 보는 앞에서 두 눈을 뽑아버리겠다는 것이다. 이 새 법이 전국에 선포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일 먼저 이 법을 어겨 체포된 사람은 바로 왕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왕은 곤경에 빠졌다. 장차 나라의 왕위를 계승해야 할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세운 법을 어길 수도 없었다. 그는 결국 하나의 묘안을 생각해 냈다. 형이 집행되는 날 많은 군중들이 모였다. 왕은 아들의 두 눈을 빼야 했다. 왕은 집행관에게 자기의 한 눈과 아들의 한 눈을 빼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눈을 뽑도록 된 법을 왕 자신이 준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제정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독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함으로써 피흘림을 통해서만 용서받는 율법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어기는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모세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강조했다. 예수님의 개인적인 율법에 대한 복종이 우리를 저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중적인 충족이엇다. 하나님의 율법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은 예수의 일생을 통한 순종과 십자가의 형벌로 다 이루어지게 된 셈이다. 곧 십자가는 하나님의 불변의 공의와 율법을 완성시키는 대사건이다. 한가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요 공의의 바탕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는 그 율법을 더욱 완전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법을 충실하게 진심으로 순종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주님의 십자가는 불법과 범죄로 희미해진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건을 가장 잘 나타낸 사건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울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한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으로 선포한다. 사랑의 선물에 대한 평가는 그 선물을 위하여 얼마의 값을 치루었느냐로 측정할 수가 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선물할 때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구약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그와 결혼하기 위하여 7년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머슴살이를 한다. 그러나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동안 라반에게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라고 성서는 말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이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깊이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표현한다. 곧 하나님은 자기의 원수요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셨던 것이다. 사랑의 크기가 그가 치루는 값으로 측정된다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독생자를 주실만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리학자이면서 신학자인 윌리암 파커 박사는 ‘하나님은 당신의 이 놀라운 사랑을 희미하게나마 인간이 느끼고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정한 어머니의 젖가슴을 어린아이들에게 주셨다’고 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나마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딸 앨리수 공주가 있었다. 그 공주에게는 4살된 어린 아들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ㄱ그 린 아들이 당시에 불치의 병이요 위험한 전염병으로 알려진 블랙 디프테리아라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공주의 주치의는 공주에게 절대로 아들 곁에 가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거기다 앨리스 공주의 체질은 유난히도 약했다고 한다. 앨리스 공주는 할 수 없이 아들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넓은 방 한 구석에 서서 멀찌감치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들을 간호하던 간호원이 침대 곁에 갔을 때 멀리 서 있는 엄마를 보며 간호원에게 어린 아들은 말했다. ‘왜 우리 엄마는 더 이상 나에게 가까이 와서 입맞춰 주지 않나요?’ 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구석에 서서 듣던 엄마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듯이 단숨에 달려가 ‘미안해, 내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어린 아들을 꼭 껴안았다. 의사의 경고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깊은 모성애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엄마 앨리스는 그 위험한 전염병에 걸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들과 함께 나란히 땅에 묻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어머니는 죽음의 키스를 통하여 어머니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을 보이고 죽은 것이다. 사랑은 꼭 귀한 값을 치러야만 한다. 앨리스의 죽음은 예수께서 죽으시면서 값을 치른 그 엄청나고 고귀한 사랑의 한 희미한 표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신앙고백인가? 이처럼 십자가는 언제 보아도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상징이다.
셋째,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고난에 동참하심을 상징하는 표이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서 인간 속에 계셔서 인간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알고 친히 그 고통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고통이 곧 십자가라는 것이다. 많은 인간들은 고난을 만나면 하나님을 향하여 온갖 불평을 한다. 그는 하늘 높은 곳에 홀로 계셔서, 아무런 느낌도 감각도 없이 안락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존재라고 평하기도 한다. 시편기자들은 하나님의 냉담하심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외면하시고 듣지 아니하시며 주무시며 잊어버렸다고 크게 원망한다. 욥도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고 탄식한다. 그러나 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이처럼 무감각하거나 무표정하거나 냉혈동물처럼 인간의 고통을 전적으로 외면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고 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은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라고 말한다. 이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심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육신에서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예수는 박해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굶주린 사람들, 외로운 나그네들, 헐벗은 고아나 거지들, 병들어 고생하는 환자들, 심지어는 옥에 갇힌 죄수들의 고통까지도 당신의 고통으로 이기셨으며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은 멀리 숨어 있거나 졸며 주무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과 함께 아파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던 요셉이나 욥 또는 아브라함이나 노아와 함께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셨다. 그리고 포로가 되었어도 하나님의 법도를 잘 순종하며 죽도록 충성했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던짐을 당한 풀부불 속에서도 함께 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주님은 당신을 배반하며 저주한 베드로의 고통에도 동참했으며, 간사하고 교활했던 야곱이나 흉측한 범죄를 저질렀던 다윗의 고통에도 동참하셨다. 해와 비를 선인이나 악인에게 골고루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마음에 맞는 성도이든 그렇지 못한 성도이든 구별없이 항상 우리의 고통을 함께 당하시고 계신다. 우리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친히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신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인간의 고난을 당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상징하는 귀중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귀중한 의미를 갖고 있는 십자가를 바로 인식함으로 십자가가 재일 자랑스럽고 그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한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이 찬송처럼 우리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십자가만을 붙들고 살려고 다짐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