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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 소작농으로 남의 땅이나 부쳐먹으며 식구들 입에 간신히 풀칠을 하는 봉식은 아편중독자가 되어 사경을 헤매는 딱한 처지다.
마을의 대 지주인 성부자 영감에게 잘 보이지 못한 탓으로 그동안 얻어 부치던 땅뙈기 마저 빼앗긴 봉식은 딸 언년을 넘보는 성영감의 탐욕에 분을 삭이다가 무능한 봉식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딸 언년이 스스로 성영감의 후처로 들어가자 그 덕으로 괜찮은 땅뙈기를 얻어 그럭저럭 연명을 하지만 끈질긴 아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책하다가 세상을 뜨고 만다.
봉식이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봉식의 처도 성영감의 노리개가 된 딸의 처지를 비관해 병을 얻어 눕게 되고 언년에게 하루라도 빨리 지옥 같은 이곳을 떠나라는 유언을 남긴 채 생을 마감한다.
언년을 후처로 맞아들인 성영감이 언년에게 집칸을 내어주고 언년 사이에 아들까지 얻었지만 언년은 성영감 처의 모진 구박에 시달린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던 머슴 수삼이 언년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고 바쁜 농번기를 틈타 언년에게 몰래 마련한 패물을 쥐어주며 도망을 가라고 한다.
수삼이 쥐어준 패물을 들고 도망을 친 언년이 타관 함바집에서 날일을 하며 지내다 공사판 인부인 태석의 눈에 들어 살림을 차리고 딸 은교를 낳지만 의처증에 술로 세월을 보내던 태석이 광산 매몰 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학교 소풍을 갔던 은교마저 사고로 잃게 된다.
객지에서 얻은 인연을 모두 잃어버린 언년은 낙담하지만 두고 온 아들 학기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분식집을 차려 재기를 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을 객지로 보내준 수삼을 만나게 된다.
오랜 세월 수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언년은 버리고 간 아들이 고향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수삼을 앞세워 살았던 마을에 찾아가지만 멀리서 바라본 아들이 불구의 몸이 된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언년은 아들과의 만남을 위해 절치부심 돈 버는 일에 매달린다.
분식집에서 출발한 언년의 영업은 악착같은 언년의 노력으로 번듯한 식당을 차리게 되고 돈을 버는 대로 아들 학기를 위해 땅에 투자하여 살림을 늘려나간다.
불어난 자본을 바탕으로 큰 요릿집을 낸 언년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근방은 물론 먼 곳까지 소문이 나고 그 일대의 요식업소로 자리를 잡지만 여러 성격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언년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간다.
자신의 요릿집에서 잔일을 하는 영순을 아들 학기의 짝으로 점찍은 언년이 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는 것을 눈치챈 수삼은 영순이가 투전판을 기웃대는 이장 아들의 사촌 누이라는 것을 알고 판돈을 빌려주며 환심을 사게 되고 마침내 영순의 부친과 상견례를 하게 되지만 영순을 낳고 버린 부친은 혼사를 하려면 언년 재산의 반을 나누어 달라는 조건을 내민다.
영순과 학기의 혼사 존건으로 상당액의 금전을 편취한 영순 아비는 혼사를 허락하면서 혼례 전 영순을 불러 혼례를 치르더라도 합방을 하지 말며, 어쩔 수 없이 합방을 하게 되더라도 후사를 두지 말라고 협박하지만 영순은 자신의 삶이니 따를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혼례일이 다가오자 보통의 혼사와 다르게 돼지를 대 여섯 마리를 잡고 관공서와 이웃동네를 초정하는 등 언년의 큰 손 덕분에 마을이 축제 분위기로 변한다.
세월을 거슬러
성영감의 또 다른 후처로 들어갔던 영순의 에미 용미댁이 글줄깨나 읽었다는 서당 훈장에게 붙었다가 아이를 밴 뒤 매몰차게 쫓겨난 후 날품팔이로 전전하다 출산을 앞두고 사경을 헤매고 있을 무렵, 동네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는 홀아비 고씨가 나서서 용미댁을 극진히 간호하며 접근한다.
고씨가 여러 여인을 거치며 난 아이들이 넷이나 됐지만 자신의 처지도 한심하다는 생각에 망설이던 용미댁은 정성을 다하는 고씨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어린 영순을 데리고 고씨와 합가를 하지만 밀월이 끝나기 무섭게 돌변하는 고씨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 만났던 모습과 달리 고지식하고 완고한 고씨의 언행에 깊은 상처를 입은 용미댁은 고씨의 아들이 목을 매 자살을 한 후, 흉흉하게 떠도는 소문에 갈등하다 소문을 퍼뜨린 푸실레와 한바탕 몸싸움을 벌인 뒤 이를 등한시하는 고씨에게 실망하여 영순을 데리고 타지로 도망을 간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살 곳을 마련하여 어린 영순을 기르며 근근이 살아가는 용미댁 앞에 이번엔 동네 양조장 사장인 배 씨가 접근한다.
용미댁의 반반한 외모를 탐한 배사장은 시도 때도 없이 금력과 완력으로 용미댁에게 구애를 하지만 이미 수차례 상처를 입은 용미댁은 사력을 다해 이를 뿌리치다가 견디지 못하고 영순을 데리고 다시 타관으로 도망을 친다.
몇 해 동안 타관 객지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용미댁에게 고씨 아들이 고씨의 유산을 들고 찾아오는 행운이 다가온다.
뜻밖의 돈을 얻게 된 용미댁의 살림이 좀 펴지자 동네 계주인 성여사가 다가와 일수와 계를 맡아서 해 보라고 유혹한다.
망설이던 용미댁이 날품팔이를 접고 성여사가 쥐여주는 일수와 계를 시작하면서 용미댁의 처신이 점점 나아지지만 중학생이 된 영순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용미댁에게 뜻밖의 상황이 밀어닥친다.
용미댁에게 일수와 계돈 관리를 맡긴 계주 성여사가 계원들의 돈을 가로채 도주를 하자 돈을 떼인 계원들이 영문도 모르는 용미댁을 닦달하게 되고 이에 시달리던 용미댁은 마침내 계주 성여사를 만나지만 궁지에 몰린 성여사의 계략에 말려 어린 영순과 함께 절벽에서 떠밀려 강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죽는 순간까지 딸을 강 밖으로 밀어낸 용미댁의 투혼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영순은 경찰서로 찾아가 신고를 하게 되고 성여사가 범인으로 잡히지만 갈 곳을 잃은 영순은 자신을 구해줬다는 낯 선 노인의 추근거림에 시달리다가 노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주하다 바닷가 어느 어촌으로 숨어들게 된다.
정 노인의 도움으로 바닷가에서 날품을 팔던 영순이 그곳에서 인기를 얻게 되고 차츰 안정을 찾게되자 중단된 학업을 위해 그곳을 떠나려 하지만 몰래 영순을 짝사랑하던 동네 총각 성수의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아침 이슬처럼 핀 플라타너스 잎에 5월의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지만 병원으로 향하는 영순의 마음은 잿빛이었다.
머리가 산발이 된 정노인은 벌써부터 영순의 손목을 잡은채 알아듣지 못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포장길을 내닫는 버스의 굉음이 귀를 가려준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평범한 일상을 싣고 달리는 버스안에도 무지개가 살고 있었다.
오르고 내리는 사람마다 따라 다니는 일곱 빛깔 무지개.
자신이 내리는 곳마다 볕이 잘 들어 따스하기를 바라는 범인들의 무지개는 어두운 주머니를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표정이 들킬세라 꽁꽁 감추고 있었지만 그 중 일부는 졸고 있었고 몇몇은 쿨럭쿨럭 기침을 하고 있었다.
일상의 삶은 때로 토악질을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밋밋한 강물로 흐르는데 이제 열여섯 해를 살아낸 영순은 자신의 가슴에 세 들어 사는 무지개가 너무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때가 있다지만 아직 핏기를 다 가셔내지 못한 자신의 몸뚱이에 분칠을 하는 사람들이 무섭고 원망스러웠다.
정노인은 처음과 다른 얼굴이었다.
그동안 자신을 믿어주고 보듬어주었던 인자했던 모습은 아들로 밝혀진 노총각 성수의 자살미수 사건으로 그믐달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농약을 마신 자신의 외간 아들에 대한 죄책감이었는지 그동안 영순을 돌봐준 인연을 수 없이 들먹이며 마치 빚을 받으러 온 채권자처럼 매달렸다.
"어쩠겠누.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고 내 소원을 들어주시게."
"말씀은 알겠지만 저는 학교에 가야 해요. 제 사정을 다 아시잖아요.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성수 저놈이 저지경이 됐는데도 소리를 지르고 자네를 찾아 싸니 낸들 어쩠겠는가. 쏙는 셈 치고 한 번 가서 얼굴이라도 뵈케 주시게."
영순은 손바닥 뒤집듯 변해버린 정 노인이 뱀처럼 징그럽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을 대할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든 다시 도망을 가리라 마음먹었지만 막상 산소마스크를 쓰고 널브러져 있는 성수를 보자 맥이 풀렸다.
성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람의 인연도 분명 눈과 귀가 있어서 앉을 때와 설 때가 있다는데 그 기운이 선명하지 못해 손끝에 닿아 스치고 가면 그만일 것을 자신이 우유부단하여 이런 곳까지 떠밀려 왔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침대를 붙들고 매달리던 정노인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간호실을 찾은 영순이 성수의 상태를 물었다.
관계가 어떻게 되냐며 위아래를 훑어보던 간호사가 짧게 말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어느 정도인가요?"
"자세한 건 담당의에게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럼 얼마나.."
"글쎄요. 지금으로선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네요."
병실로 돌아오자 정 노인이 다시 큰 소리로 울며 매달렸다.
노인을 부축하여 병실 복도에 나와 앉은 영순이 정 노인의 손을 잡았다.
"저 당분간 어디로 안 가요. 걱정 마세요."
영순을 끌어안은 정노인이 다시 울음을 터뜨리자 간호사가 다가와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며 밖으로 나가라고 손짓을 했지만 정노인의 울음은 쉬 그치지 않았다.
그해 가을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목숨부지를 한 성수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앞마당을 나서는 게 전부인 성수를 바라보는 정 노인의 한숨이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성수를 부축하여 양지에 앉히고 씹기에 부담이 없는 음식을 입에 넣어주는 영순의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이 혀를 찼다.
"아니, 무슨 맡아놓은 씨며느리도 아니고 영순이 쟈가 무슨 생고생이야. 아주 웃기는 할마씨지.영순이 쟈도 그래. 하루라도 빨리 토껴야지. 언제까지 저 등신옆에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을 건데.허허 그것 참."
비록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도 힘에 부쳤지만 영순을 바라보는 성수의 눈길은 봄바람 같았다.
의사 표현을 하기는 했으나 목구멍에 호스를 뚫어 호흡을 하고 죽을 받아먹었던 탓에 어쩌다 내뱉는 목소리는 마치 쇠가 갈리는 듯한 소리로 들렸다.
영순이 분명하게 알아들은 건 어디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 표정이 하도 애절하여 영순은 그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바라보는 영순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 모습을 본 성수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팔순 중반이 넘은 정 노인은 두 사람을 위해 밤낮으로 쫓아다니며 일에 매달렸다.
"제가 나가서 일을 할 테니까 좀 쉬세요."
"그건 아니지. 그런 걱정 말고 성수 옆에만 잘 있어줘. 그게 내가 바라는 게야."
"몸도 성찮으신데 언제까지.."
"아직 견딜 만 하구만. 성수 쟈가 밖에 나가서 지 밥벌이를 할 때까지만이라도 해야지 어쩌겠누."
그러나 정노인의 품팔이만으로는 세 식구의 입을 지탱하기가 힘에 부쳤다.
무엇보다 성수의 약값이 급했다.
주기적으로 병원도 다녀야 했으므로 제법 큰돈이 나가는 날이 심심찮았다.
영순이 다시 부둣가 일을 나간 건 이듬해 봄이었다.
열일곱 살이 된 영순은 어느새 처녀가 되어 있었다.
비록 겨우내 성수의 뒷바라지에 매달리느라 수척해지긴 했지만 한창 피어나는 몸매를 감출 수는 없었다.
부둣가에 나가자 전에 일을 하던 사람들이 대놓고 떠들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네.다시 만난 건 반갑지만 이렇게 이쁜 샥시가 이런데 다시 오면 안 되지.안 그려요?"
"그럼, 노인네가 미쳤지.누가 농약을 먹으란 것도 아니구 영순이가 멕인 것두 아닌데 뭣 때문에 영순 씨가 개고생을 혀?"
"에고, 이 사람아 그렇게 대놓고 씨부리면 어떡해.영순 씨 듣잖아."
"내가 뭐 틀린 말 했나,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일을 하다가 손을 놓은 사람들이 웅성 거렸다.
영순이 말없이 쭈그려 앉아 그물에서 고기를 따자 왈가닥 성주네가 영순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이건 아니지. 아무리 잡일이나 하면서 살지만 영순이가 무슨 죄야. 여기서 어물대다간 딱 내 짝 나지. 지금이라도 얼른 도망가."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그럴 수는 없어요."
"나중에? 나중에가 어딨어. 그런 건 오지 않는다니까."
성주댁에게 붙들려 일어났던 영순이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지금의 처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의 신이 있다면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도 만들어 주리리 믿고 싶었다.
영순이 계속 일을 나가자 사람들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농담 좋아하는 사내들의 걸쭉한 입담들이 영순의 주변을 어슬렁 댈수록 영순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감나무에 매달린 잘 익은 홍시처럼 달착지근하게 변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몇 십 년을 이 짓거리 하며 묵고 살았는데 영순이 쟈처럼 제대로 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어.한 마디로 여기서 일 할 여자가 아니란 말이지."
"그럼, 영순이 쟈 말고 여기서 일하는 여자들은 모두 논두렁 호박이라는 거야? 무슨 말 뻑따구가 고렇게 싹수가 없는가."
"이거 봐.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싹수가 없는 게 아니고 고따구로 말하는 자네 입정머리 때문에 고렇게 들리는 게야."
"아이고, 귀신들은 이런 영감탱이들을 안 잡아가고 뭐 하고 자빠졌는지 몰라."
어촌 계장이 현장에 자주 들르는 것도 모두 영순이 때문이라고 했다.
올 때마다 들고 오는 튀김 통닭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내사 얻어 묵기는 하지만 본시 저 인간이 누군한테 마른 멸치대가리 한 마리도 안 주던 노랭이여.그놈 쌍판때기를 좀 보라고,나도 개살구지만 그 상판에 어디 복이 한 점이라도 붙었어?"
"알 게 뭐야. 영순이 갸 때문에 잘 얻어먹으면 그만이지. 아뭇소리 말고 주면 주는 대로 떠끔떠 끔 받아먹자고요. 몸 보신 하고 좋찮아."
"저 놈,이제 슬슬 발톱을 드러 낼 거야. 세상에 공짜가 어딨 누?"
영순이 일을 나가고 여름이 되자 성수의 걸음걸이가 제법 부드러워졌다.
정 노인은 이 모든 일들이 영순 덕분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영순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이제 가을이 오면 이곳에서 훌쩍 날아 가리라.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를 잃고 무작정 집을 나선 내 처지를 알아보고 보듬어 주었던 정 노인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기에 영순은 괴로움이 밀려들 때마다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잃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영순의 시련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어촌 계장이 일터를 찾아와 영순을 불러내는 일이 잦아지자 일을 시키는 업주와 마찰이 생기고 그 일로 인해 원치 않는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그는 영순을 데려다 사무실 보조로 쓰겠다고 했지만 영순이 이를 거절하자 그의 분노와 트집으로 인한 불똥이 엉뚱한 결과를 낳고 있었다. 처음과 달리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영순에게 사무실로 가는 게 어떻겠느며 은근히 권유를 했다.
"저 놈 속을 훤히 알지만 모두 먹고살아야 하니 영순 씨가 가는 게 어떨까 싶네. 하긴 정식은 아니겠지만 여기보다는 돈도 더 받을 테고 편치.모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데잖아."
처음엔 못 들은 체 했지만 계속되는 권유를 더 이상 뿌리칠 수 없었던 영순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일터에 나가지 않았다.
영순이 일을 나가지 않자 저녁 무렵에 어촌계장이 집으로 찾아왔다.
성수와 노인이 있었으므로 그의 시선을 피해 집을 나왔지만 그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왜 이러세요. 따라오지 마세요."
"사람집에 사람이 찾아왔는데 이거 너무 하네. 뭘 그렇게 딱딱거리나."
대꾸를 하지 않은 영순이 다시 집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어촌계장이 영순의 손목을 낚아채었다.
"왜 이래요. 이거 놓으세요."
영순이 손목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옆으로 넘어지자 이를 바라보던 성수가 괴음을 내 질렀다.
성수가 내지른 괴음에 부엌에 있던 정 노인이 부지깽이를 들고 쫓아 나왔다
."어떤 놈이 남의 집에 와서 지랄을 떠는 거야. 너 이 놈, 네가 어촌계장이라는 놈이지? 니 놈이 우리 집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남 처자한테 수작질이여?"
노인이 고함을 지르자 어촌계장이 움켜 잡았던 영순의 손목을 놓았다.
"이놈아,이 처자가 누군지 알고 와서 행패여. 네놈이 뭔데?"
담배를 피워 문 계장이 정노인에게 손가락을 겨누며 가래침을 뱉았다.
"이놈 이놈 하지 마시요. 선무당도 아니고 나이를 먹었으면 좀 점잖아야지.나이 잔뜩 처먹은 노친네를 그간 벌어먹도록 봐 줬더니 이렇게 밖에 못하요?"
"니 놈 하는 지뚱머리가 욕 처먹게 생겼어."
"어허, 좋은 말로 안 되겠네. 상관 말고 저리 비키소."
"어르신한테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영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촌 계장이 주먹을 내 보였다.
"어르신이고 뭐고 오늘부로 이 집구석은 끝이야.앞으로 일 나올 생각 아예 말라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수가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들어 보이며 객객 소리를 질렀다.
"하이고야, 꼬락서니 하고는, 이것 봐 영순 씨, 이런 허접대기 집구석에서 왜 이러고 살어?내가 좋은 일자리 해 준대잖아. 오늘은 그냥 가니까 생각 바뀌면 찾아오라고."
씩씩대던 어촌 계장이 싸리문을 박차고 나가자 정노인이 소금을 뿌렸다.
"훠어이, 천하에 더러운 놈, 다시는 이 집에 얼씬도 말거라."
하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했으므로 정 노인과 영순의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농가에 나가 품을 팔기도 했지만 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생계에 큰 보탬이 되지 않았다.
생계가 어렵다는 말을 들었는지 전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이고, 영순 씨가 고생이 많네. 그러기에 그냥 어촌계장 말을 듣지 그랬어.성질은 지랄이지만 지금보다는 낫잖아."
"그런 소리 말아요. 그놈이 개 수작질을 할게 뻔한데 잘한 거지."
"그러면 뭐 해.지금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데."
영순이 배시시 웃자 성주댁이 영순의 손목을 잡으며 껄껄 웃었다.
"그려,이렇게 웃고 살아야지.그래야 복이 들어오는 겨. 오늘 온 건 일자리 하나 알려주려고 그려."
영순의 눈이 반짝거리자 정노인이 코를 벌름거리며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또 무슨 수작을 벌릴라고 그래? 안 굶어 죽어.댁들이 왜 나서 감 놔라 배 놔라야."
성주댁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정 노인을 밀쳤다.
"멀쩡한 처녀 데려다가 개고생 시키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앞길도 막겠다고? 할머니,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양심이란 걸 좀 가져 봐요. 언제까지 영순이를 부려 먹으려고 그래."
"누가 부려먹어. 그건 너네들이 참견할 일이 아니야.썩 나가지 못해?"
정노인이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성주댁이 영순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저기 읍내에 이불집에서 사람을 구하는데 영순이가 가면 아주 제격일 것 같아. 내가 좋은 사람 있다고 귀띔은 해 놨으니까 딴 사람 구하기 전에 얼른 잡으라고."
"정말요?"
"그럼, 내가 영순이 한테 익은 밥 먹고 헛소리를 왜 하겠어. 일자리 잡히면 눈치 보다가 얼른 도망 가.뭣 때문에 여기 붙들려 있는 거야. 여기 어물대다간 인생 종 친다고."
성주댁의 권고에 영순이 눈물을 흘렸다.
"아니 아니, 눈물은 취직이 되고 나서 흘리고 다른 사람 오기 전에 빨리 가 봐. 시간이 없다니까."
읍내 이불점에 영순을 데리고 간 성주네가 있는 말 없는 말 이야기를 하자 이불점 주인이 입을 함지막만 하게 벌렸다.
"아이고, 성주댁이 사람 보는 눈이 대단하네 그려. 눈 또랑또랑하고 얼굴 이쁘고 아주 쓸 만 하이.내사 한턱내겠네."
영순을 부탁한 성주네가 무언가 잔뜩 든 보따리를 건네받고 돌아가자 이불점 주인은 아주 흐뭇한 표정이었다.
"자, 여기가 내 집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해 봐요.아주 잘할 거 같구먼."
당장 그날부터 일을 시작한 영순이 이틀 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성노인이 읍내로 득달같이 쫓아왔다.
영순을 보기 바쁘게 영순의 손목을 잡고 매달렸다.
"누가 너보고 이런 데서 일하라고 했냐.이런데서 일 안 해도 굶어 죽지 않으니 얼렁 집으로 가자."
곁눈질로 이불점 주인의 눈치를 살피던 영순이 노인을 붙잡고 부리나케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걱정 마세요. 여기 괜찮은 곳이고 안 그래도 내일쯤 집으로 가려고 했어요.가끔 집에 갈 테니까 걱정 마세요."
"이런데 한 번 박히면 뺄 수가 없어? 네가 여기 살면 우리 성수는 죽어. 성수가 죽어도 좋다는 말이냐?"
"죽기는 왜 죽어요. 돈을 벌어야 성수오빠 약값도 하고 쌀도 사잖아요. 돈 벌려고 왔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불점 주인이 쫓아 나왔으므로 당황한 영순이 얼른 가게로 돌아갔다.
이상하다 여겼는지 이불점 주인이 성 노인을 얄궂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누구신데 일하는 애를 불러 내는 거요? 모친 같지는 않고 이불을 사러 왔으면 가게로 와야지. 그게 아니면 얼른 가시오."
어떻게 할 수 없었던지 씩씩대던 정노인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훔쳤다.
영순이 이불점에서 일을 한지 달포가 지나 정노인의 집으로 찾아오자 정 노인은 병석에 누워 있었다.
노인어도 억세게 산 탓으로 말이나 행동이 남달라 병이 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영순은 병으로 누워있는 정 노인이 낯설게 다가왔다.
"어디 아프세요? 아프면 저한테 연락을 하시지 그랬어요."
억지로 몸을 일으킨 정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영순의 손을 잡았다.
"바쁜 사람한테 연락은 무슨... 안 그래도 자네가 오면 해 줄 말이 있었는데 잘 왔어."
쿨럭쿨럭 기침을 내 뱉던 정노인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머리맡에 약봉지가 있기는 했으나 약은 없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윗목엔 채 마르지 않은 걸래와 깁다 만 옷가지가 헝클어져 있었다.
이미 늦가을이었으므로 온기가 사라진 바깥은 물론 방바닥에도 냉기가 배어 나왔다.
"성수 오빠는요?"
"몰라, 아까 어디로 기어 나가던데 기척도 없네, 자네가 이불점으로 가고 여태 눈물을 짜다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뒤란 앵두나무 고야나무가 누런 잎을 부리고 있었다.
눈에 찰 것도 없는 살림살이와 입을 벌리고 있는 해진 이불, 양조장에서 얻어온 술지게미를 소금에 버무려 담근 같잖은 장이 여전히 담겨 있을 엉성한 장독대에 짙은 가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 집에 온 지도 벌써 3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벌써 3년이라는 생각이 들자 영순은 오줌을 누고 부르르 몸을 떠는 아이처럼 몸을 떨었다.
지는 가을은 분명한 색을 내보이며 떠남을 알리는데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이곳을 떠나야 하나.
단 한순간도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내보이지 못한 지난날들이 꾸역꾸역 영순의 품으로 안기고 있었다.
푹 꺼진 정지로 들어가 몇 개 안 되는 그릇을 닦아 채반에 얹고 아궁이에 솔가지를 때어 물을 덥히고 나니 돌아갈 시간이었다.
헤진 행주에 손을 닦고 나가자 언제 돌아왔는지 성수가 서 있었다.
묘하게 일그러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영순아.. 왜 이제 왔어."
분명한 발음이었다.
놀란 영순이 성수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오빠,이제 괜찮아? 말할 수 있어? 다시 한 번 불러 봐."
영순이 울음을 터뜨리자 성수의 가느다란 팔이 영순의 어깨를 감쌌다.
"영순아 어디 가지 마. 가면 안 돼."
그사이 누워있던 성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 있었고 성수는 영순의 얼굴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계속 비비고 있었다.
쇳소리를 내던 성수의 목소리가 저렇게 바뀌다니, 놀랍게 변한 성수의 목소리가 지나간 원망들을 모두 내쫓고 있었다.
"오빠 고마워. 너무 고맙고 행복해."
성노인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영순은 성수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 탓이었을까.
파르르 떨리던 성수의 팔이 영순의 허리를 안았다.
영순은 피하지 않았고 성수의 입술도 거절하지 않았다.
한 두 번 헛기침을 했으나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성노인의 얼굴은 양지에 핀 개나리 같았다.
"그러니까 얼마를 주겠다는 거요?"
"일당 다섯 배면 후하지 않나. 더 욕심 내지 말고 "
몇몇 사내들이 담배를 피워댔으므로 사무실은 마치 안개가 잔뜩 낀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큰 다리 아래까지만 데리고 오라고. 그러면 바로 입금해 줄 테니까."
"보통이 아니라던데 오라고 하면 오겠어요? 더구나 읍내 이불집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돈을 준대잖아. 내 말 모르겠어?"
"형님은 갸를 데려다 뭘 하려고 그러는 거요?"
"아따, 이 사람들이.. 그건 알 거 없고 할 거야 말 거야."
"뭐, 돈 생기는 일인데 해야지요. 단 무슨 일 생기면 우리는 모르는 거요.그것만 책임져 준다면."
"걱정 붙들어 매고,내일 저녁까지 다리 아래로만 데려오면 자네들 임무는 끝이야."
다 피운 담배꽁초를 발로 짓 이기던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형님 같은 사람이 그깟 계집애한테 왜 그리 매달리는 거요? 내가 보기엔 그저 그렇더구먼."
"시끄러워,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총각딱지를 못 벗는 거야."
"그럼, 착수금조로 반의 반이라도 좀 주쇼."
"이놈들이 너구리 굴 보고 피돈 내 쓸 놈들이네."
돈을 받아 든 사내들이 사무실을 나가자 입을 가리고 있던 경리가 소리를 질렀다.
"인간이 아니고 그냥 굴뚝이야 굴뚝, 내가 못 살아 정말."
건장한 사내들이 읍내 이불점을 찾아왔을 때 이불점 주인은 출타를 하고 영순이 혼자 있었다.
이불점에 손님이 몇 사람 있었으므로 사내들이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이불을 사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한 영순은 별다른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이불을 구매한 사람들이 나가고 난 뒤에도 계속 앉아있자 신경이 쓰였다.
"이불을 사러 오셨나요?"
사내들 중 한 사람이 이불 몇 가지를 가리키며 얼마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마침 여성 손님이 들어오다가 사내들이 서있자 가게 안을 한 번 살핀 뒤 얼른 나갔다.
"저기, 손님 이불을 사실 건가요?"
" 아, 이불은 나중에 사고 부탁을 받고 왔는데."
"네? 저한테 말인가요?"
"아가씨가 성노인이랑 같이 살았지? 그 노친네가 지금 다 죽어 가는데 여기 아러고 있을게 아니라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며칠 전에도 갔다 왔는데. 얼마나 안 좋은가요?"
"우리는 읍내 가는 길에 알려주라고 해서 온 거지 다른 건 물라."
"그 동네에 사시는 분들인가요?"
"그럼,우리가 어떻게 그 노친네를 알아.일단 알렸으니까 가고 말고는 아가씨가 알아서 하라고."
성노인이 위독하다는 말에 놀란 영순이 허겁지겁 채비를 하자 사내들이 가게를 나가며 지나는 투로 말했다.
"마침 우리가 트럭을 타고 왔는데 같이 가면 더 좋고."
하지만 가게를 비우고 나갈 수는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영순에게 사내들이 소리를 질렀다.
"갈 거야 말 거야. 우리들도 시간이 없다고."
영순이 가게문을 닫고 나가자 산판에서 목재를 실어 나르는 낡은 트럭이 서 있었다.
영순이 조수석에 탔으므로 일행 두 명은 화물칸에 올랐다.
연탄을 날랐는지 트럭 안은 검은 가루들이 잔뜩 묻어있는 데다 심한 악취까지 풍겼다.
시동이 제대로 걸리 않자 사내가 욕지거리를 해 댔다.
"에이, 이놈의 똥차. 엿장사한테 팔던가 해야지."
조수석에 타고 있던 영순은 좌불안석이었다.
시동이 걸리지 않아 툴툴대고 있는데 귀가하던 이불가게 주인이 이를 보았는지 쫓아왔다.
" 영순이 니는 가게는 어떻게 하고 왜 여기에 있는 거냐? 그리고 당신들은 누구요?"
"아저씨, 이분들은 제가 사는 동네분들이고요. 할머니가 위독하시다고 해서 급하게 나왔어요."
"그래? 그런데 사람들이 여럿이네.잘 아는 분들이냐?"
" 그건 아니고 할머니를 잘 아는 걸 보니까 동네사람들 맞는 거 같아요. 죄송해요. 얼른 다녀올게요."
운전대를 잡은 사내가 투덜거렸다.
"안 잡아먹을 테니 신경 끄쇼.무슨 순경도 아니고."
끙끙거리던 트럭이 푸시시 시동이 걸리고 뭐라고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멀어지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이불가게 주인은 부리나케 가게로 뛰어갔다.
영순이 도착한 곳은 할머니 집에서 제법 떨어진 좁은 다리 밑이었다.
성노인이 위독하다는 말이 급했던 탓으로 무작정 오긴 했지만 도착한 곳이 엉뚱한 곳이라 당황한 영순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어디예요? 할머니가 여기 계실리 없는데 왜 이런 곳으로 오시나요?"
벌겋게 상기된 영순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화물칸에 타고 있던 사내들이 내려 차문을 막았다.
"여기 있으면 할머니가 온다고 했으니까 가만 앉아 있으라고."
"위독하신 할머니가 여기를 어떻게 와요? 저한테 왜 이래요?"
"허, 이 아가씨 말 더럽게 많네. 온다고 했으니까 잔말 말고 앉아 있어."
내려 달라고 한참 동안 울부짖던 영순이 순간 조용해지자 담배를 피워 문 사내가 밖에 서있던 사내들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빨리 내려."
"그럼, 저 이제 가도 돼요?"
"내려 줄 테니까 가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트럭에서 내린 영순이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지만 사내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다리밑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영순은 다리밑을 흐르는 개울가에 주저앉았다.
저 사람들이 나를 왜 이곳으로 데려 왔을까.
맥을 놓고 한동안 주저앉았던 영순이 개울물에 얼굴을 씻고 있는데 개울물에 사람의 그림자가 언듯 비쳤다.
소스라치게 놀란 영순이 뒤를 돌아보자 어촌계장이 팔짱을 끼고 영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깜짝놀란 영순이 뒤로 주저앉자 어촌계장이 손을 내밀었다.
"뭘 그렇게 놀래. 내가 무슨 귀신이라도 되나?"
"아니, 계장님이 여기 왜 있어요?"
침착하려고 했지만 영순은 덜덜 떨고 있었다.
개울가로 주저앉는 바람에 옷이 젖었지만 순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영순은 어촌 계장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그래,그래야지. 사람이 사람을 보고 그렇게 놀라는 건 아니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영순은 주변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담배를 피우는 어촌계장의 눈빛이 마치 숫돌에 잘 갈아낸 예리한 칼처럼 보였다.
저 사람이 이곳에 올 까닭이 없다는 걸 눈치챈 영순은 침착해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이리로 오라고 했어."
"무슨?"
다시 담배를 피워 문 어촌계장의 팔이 영순의 어깨를 감쌌다.
"하실 말씀이 있다니까 그 말 들을 테니 이러지 마세요."
팔을 뿌리친 영순이 몇 발짝 떨어져 앉자 어촌계장의 입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까탈스럽기는 여전하네. 거두절미하고 내일부터 내 사무실로 나오라고."
영순이 대답이 없자 어촌 계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월급도 많이 줘, 일도 편해, 왜 싫다는 거야? 니가 뭐가 잘났다고 이렇게 도도해?"
영순이 벌떡 일어나 물에 젖은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저는 관심이 없으니까 그만 가 볼래요."
순식간이었다.
영순의 머리채를 잡고 뺨을 몇 차례 친 어촌계장의 날랜 행동은 마치 물을 차고 나르는 제비 같았다.
다리밑 외진 구석으로 끌려가는 영순이 비명을 질렀지만 워낙 후미진 장소라 아무도 듣는 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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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인과 성수가 258번 수의를 입은 영순의 면회를 온 것은 새해가 밝은 정월이었다.
푸석해진 머리와 수척해진 얼굴을 본 성노인은 영순을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
걸음걸이와 말이 더욱 또렷해진 성수는 통곡을 하는 성노인 옆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침침하던 하늘이 굵은 함박눈을 쏟았고 구치소 벽에 도열한 미루나무들이 검은 하늘에 대들듯이 서 있었다.
창살을 마주하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영순이 앉아있는 세상은 다시는 봄이 올 것 같지 않은 동토의 땅처럼 느껴졌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연탄난로 위에 얹은 작은 주전자가 내뿜는 허연 입김이 몇 발짝 공중으로 날다가 푸시시 사라졌다.
"내사 어떻게든 너를 여기서 구해 낼 거다. 쫌만 참그라."
영순이 고개를 들어 잠시 성노인을 바라 봤지만 그게 끝이었다.
"다시는 오지 마세요."
들릴 듯 말 듯 한마디 내뱉은 영순이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사라지자 성노인은 다시 통곡을 했다.
두 주먹을 쥐고 몸을 떨던 성수는 아까부터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놈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두고 봐."
9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