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와 울타리를 같이 쓰는 초등학교가 있다. 나는 종종 아침에 그 학교의 둘레길을 산책하는데, 등교하는 모르는 아이로부터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받는 경우가 가끔 있다. 나도 웃음 지으며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그처럼 인사하는 아이는 틀림없이 3학년 이하의 아동이다. 아마도 4학년 이상이 되면 꽤나 세상물이 들어 낯선 사람을 더 이상 우호적인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경계의 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인사를 받으면 되게 반갑고 기분이 좋다. 아마도 내가 저 순수한 아이로부터 우호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것 같아 작은 감동이 드나 보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모두 다 기본적으로 ‘관종’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우호적인 관심을 바란다. 특히 늙어 갈수록 가깝거나 먼 사람들로부터의, 그리고 사회로부터의 무관심이 일종의 공포가 된다.
모든 인사말이 그렇듯이 우리의 대표적인 인사말인 ‘안녕!’에도 그 표현의 본래 의미가 거의 작용하지 않는다. 그건 단지 따뜻한 관심을 나타내는, 듣기에 즐거운 말일 뿐이다. ‘안녕’이라는 낱말은 울림소리여서 귀에도 즐겁다. 그 표현의 본래 의미는 아무 탈이나 걱정이 없이 편안하냐고 물어보면서 우호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영어에서의 ‘How are you?’도 비슷한 의도의 비슷한 표현이겠지만, 그래도 그건 안부安否—편안하게 잘 지내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약간 에둘러 묻는 방식인 것 같다. 그에 비해 ‘안녕하세요?’는 좀 더 직접적으로 편안한지를 묻는 듯하다. 우리말에서든 영어에서든 인간의 삶에 그만큼 탈이나 걱정이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일정 기간 동안 안녕하면, 즉 순조롭고 평안한 생활이 상당 기간 지속되면 따분하다고 느끼게 된다. 일상이 단조로운 반복이어서 하루하루가 헛바퀴 도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쾌감이나 즐거움이 없이, 즉 짜릿한 자극이 없이 지속되는 상태를 불행으로 느낀다. 하지만 그건 호강에 초친 소리다. 우리는 안녕하다는 게, 무고하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고 행복인지 그 상태가 조금이라도 깨지고 나면 너무도 크게 느끼게 된다.
밀턴의 『실낙원』에서 사탄은 하나님 군대에 대항해 싸운 첫 번째 날 전투에서 패하여 실의에 빠진 자기 도당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려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너무 천한 허울일 뿐인 자유만 받을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더욱 좋아하는 명예와 지배, 영광 그리고 명성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확신하지 못하는 전투에서 하루를 견뎠다. (그리고 하루를 견뎌냈다면 영원히 견디지 못할 게 뭔가?)”
사탄은 자기들이 벌이는 투쟁이 자신들에게 이념적 대의인 자유뿐만 아니라 보다 더 실질적 이득인 명예나 지배, 명성 등도 가져다 줄 거라고 말한다. 민주니 자유니 민생이니 하는 대의를 표방하고 쟁투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 보다 더 실질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적 욕망들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또한 그런 공적 활동에 극렬하게 동참하는 지지자들도 사실은 거기에서 사적이고 심리적인 어떤 만족감을 추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탄의 그 말을 듣고 그의 도당 중 한 명인 니스록이 이렇게 약간의 반론을 내세운다: “우리가 삶에서 쾌락의 느낌이 없이 지내는 건 당연하오. 그래서 불평하지 않고 만족하며 사는 게 말이오. 그리고 그게 가장 평온한 삶이오. 그에 반해 고통은 최악의 비참함이오. 악 중에 악이오, 그리고 그게 과하면 모든 인내심을 뒤엎어버리오.”
니스록의 말은 살아가면서 큰 기쁨이나 짜릿한 즐거움이 없더라도 그저 “평온한”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평온이 깨지면서 겪게 되는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를 절감하고 있었나 보다. 나도 일상이 따분하고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는 늘 니스록의 말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면 이 무고한 일상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또 다시 안녕이 한동안 지속되면, 삶이 좀 ‘빤해지면’ 마음이 들썩거리게 되고 그 안녕을 흩트릴 뭔가를 모색하게 된다.
첫댓글 무관심이 공포 맞는 것 같습니다.
'그날이 그날'이어서 참 다행입니다.
오늘 호미님의 선배이기도 한 박오복 샘을 만났는데, 나이가 들수록 '느조심'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느리게, 조심하며, 심심하게...^^
안녕하세요? ㅎ 루시드 폴의 '안녕' 노래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