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야생고양이가 먹이 부족으로 수난을 겪고 있다. 천혜의 고양이 먹이인 쥐가 인위적인 쥐약으로 줄어들고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통 먹이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쓰레기 분리수거에 의하여 음식 찌꺼기는 따로 통에 담아서 버리기 때문에 고양이 접근이 어려워진 일이다. 전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고양이 먹을거리가 흔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주위에 고양이가 새끼를 다섯 마리나 데리고 다니며 먹이를 구하지 못해 비실거린다. 보다못해 먹던 고기를 나누어 주면 처음에는 겁을 집어먹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조심조심 먹는 걸 보면 불쌍하다. 바싹 마른 몸을 느릿거리며 먹이 찾는 모양이 그렇다. 이러다가 야생 고양이가 멸종되어도 안 되는 일이다. 생태계 균형이 맞아야 사람에게도 유익한 일이기 마련이다.
서울 아들 집에서 지날 때는 아파트 단지 주변 공원에 산책하다 보면 야생 고양이 먹이를 주는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다. 아주머니는 쇠고기를 삶아서 고양이에게 늘 나누어 준단다. 아주머니가 걷는 주변에는 고양이 7마리나 따라다닌다. 보기도 귀여운 고양이 모양에 넋을 잃은 듯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착한 아주머니가 참 아름다워 보인다. 그 아름다운 마음이 겉으로 나타나 이야기 나누는 아주머니 모습이 천사처럼 느껴졌다. 고양이들이 젖먹이가 어미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그런 현상으로 보였다. 저런 고운 마음 때문에 이곳 고양이는 굶어 죽지 않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착한 마음씨를 나누는 아주머니 덕택이다.
시골의 우리 집에도 야생고양이 새끼 다섯 마리를 거느리고 먹이 찾아 헤맨다. 야생고양이 먹이를 주다가 느낀 일인데 고양이 새끼들은 먹이를 가지고 다투지 않는 일이다. 간혹 먹이를 제각기 많이 먹으려고 고기를 먼저 물고 거리를 두고 달아나기는 하지만 강아지 형제처럼 으르렁거리는 습관은 볼 수 없다. 고양이 새끼들 동일 피의 가족이라 그런지는 모르겠다. 개는 형제끼리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다툼이 심하다. 이빨을 드러내고 제 형제라도 물듯이 악을 쓴다. 어떤 때는 이빨에 물려서 치명적인 상처도 입게 된다. 먹이 상대가 형제라도 위협을 강하게 주며 힘자랑을 한다. 약한 강아지는 힘과 기세에 눌려 물러나기도 한다. 잡식성인 개도 이렇게 사나운 먹이 경쟁을 하는데 육식동물인 고양이가 먹이 가지고 싸우는 일이 없음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본래 육식 동물은 사납기로 소문났고 먹이 경쟁도 심하다고 우리는 선입견을 품고 있다. 고양이는 사자나 호랑이처럼 육식동물이면서도 형제끼리 먹이 경쟁을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인간 사회보다도 한 수 위의 행위를 갖는 동물이다. 사람도 자기 형과 아우보다 더 가지려고 심한 싸움을 하는데 말이다. 서로 싸우지 않고 먹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써야 할 사람이 오히려 배울 일이다.
언제부터 고양이는 음식물을 가지고 싸움을 하지 않은지 매우 궁금했다. 아마도 고양이는 먹이를 가지고 으르릉거리며 형제끼리 싸우지 않는 본능을 타고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전에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도 서로 먹이로 싸우는 일은 보지 못했다. 고양이의 날랜 성격 하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은 사나운 무기다. 만약 고양이 식구끼리 싸운다면 날카로운 무기로 인하여 치명상이 생길 일은 틀림없다. 고양이 발톱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가는 당해본 사람들은 잘 아는 사실이다. 오래전에 벌통 덮은 짚단을 만지다가 볏짚 속에 숨은 고양이 발톱이 공격해 나와서 손가락을 할퀴었는데 손가락이 반으로 쪼개진 듯했다. 볏짚 속에 새끼를 낳아 품고 있다가 내가 공격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저지른 행위다. 이런 무기로 인하여 치명상이 생길 일을 스스로 예방하기 위해 유전형질로 전해진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생존경쟁에도 살아남기 위한 유전자를 특별히 배려한 일인 것 같이 느껴진다. 매일 먹는 먹이로 이런 위험한 싸움을 없애려고 사전에 예방되는 보호적인 일인 듯한 짐작이다. 마치 핵무기를 가진 인간이 전쟁하면 멸종하는 이치다. 이를 벗어나는 고양이는 혈족끼리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넷째딸이 사내아이 둘을 낳아 키우고 있었다. 지금 고등학생으로 클 때까지 한 번도 싸운 일이 없다. 이 손주가 2살 차이로 다툼이 잦을 것 같았으나 우애가 남다르게 사이가 아주 좋았다. 형제가 절대로 싸우는 일이 없는 가족이라 그 원인을 살펴보았다. 아빠가 목사 신분이고 가족이 기독교를 믿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 형제간의 우애가 좋다는 원인의 설명이 부족하다. 기독교인도 가족인 형제간의 다툼이 있기에 말이다. 내가 딸에게 어떤 교육 방법 적용으로 아들 둘이 서로 싸우지 않고 인정 있게 지내냐고 조용히 물어보았다. 막내딸은 그냥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하며 웃기만 한다. 그저 남들과 다름없이 그렇게 키웠다고 말한다.
옛사람들이 쌍둥이를 키우면서 쌍둥이 아들 두 사람을 똑같은 대우로 키우는 일을 다시 생각나게 된다. 처음부터 옷도 꼭 같은 색상과 모양을 해서 입힌다. 음식도 마찬가지로 틀리지 않게 똑같이 둘로 나누어 먹게 한다. 부모가 모든 대우를 똑같게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일이다. 잘못했다고 벌도 똑같이 차별 없는 벌을 준다. 밥그릇 모양도 같고 숟가락 모양도 같다. 신발도 같아야 하고 머리 기르는 모습도 똑같아야만 한다. 이는 사회통념으로 불문율에 속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전통 생활에 미신처럼 이행되어온 일이다. 이런 대우로 키운 쌍둥이 형제는 절대로 서로 싸움이 없었다. 아마도 우리 막내딸이 자식을 쌍둥이 대우처럼 키우고 가족애로 특별히 보살핀 원인으로 생각되었다. 누구에게도 의심의 눈으로 보일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의 공평을 실천했다는 결과다.
국민들이 정부를 비난하고 반항의 극치로 데모와 극렬투쟁을 벌이는 원인도 공평과 진실의 숨김없는 통치능력의 훼손 때문이다. 분노하는 국민의 눈에 진실과 거짓이 뒤바뀌고 모든 대우가 불공평에 이르면 터지는 울분이다. 이런 국민들 마음은 쌍둥이처럼 대우하지 않은 곳에서 그 원인이 발견된다. 통치수단에 공평과 정직과 신뢰를 하도록 다스릴 수 없는가 다시 되돌아볼 일이다. 법을 지키지 않는 곳에서 불평이 생긴다. 법의 적용이 공정하지 못하면 분노가 일어난다. 쌍둥이 키우듯 진실한 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는 마음 씀이 필요하다. 누구를 탓하지 말고 자신을 먼저 탓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섬기면 정부를 비난하는 국민들이 절대로 없을 일이다. 피를 나눈 민족의 마음에 사랑의 복음이 담기면 서로 미워하지 않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다시 되새겨진다. 고양이 보다 못한 개는 되지 말자. 정직하고 공평하게 국민을 대하는 위정자가 바람직하다. ( 글 : 박용 2019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