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것이 개혁신앙이다>의 성경 읽기라는 제목으로 성경 해석 원리를 밝힌 바 있다. 하나님 측면과 인간 측면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자기 해석에 빠져 적용하면, 이단 아르미니우스파에 이른다. 아르미니우스파와 개혁신앙인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전자는 이단이고, 후자는 정통이다. 전자는 대다수이고, 후자는 너무나 적은 수이다. 전자는 대세이고, 후자는 찾아보기 드물다. 나는 개혁신앙인이기에 정통신지이고, 선택된 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멈춰 선 안된다. 끊임없이 달리고 또 변해야 한다. 그것의 지침은 성경이지 시대의 흐름과 대세도 아니고 문화와 세속화도 아니다. 성경의 지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언제든 그릇된 길로 흐르거나 미끄러진다. 그 지침은 특이한 계시나 알약과 같은 것으로 가질 수 없다. 언제든 학습과정을 통해야 한다. 구원의 진리나 구속 사역의 적용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당사자가 그것의 진의 여부를 파악하는 확신은 학습과 실천에서 이뤄진다. 그렇다고 조건은 아니다.
학습은 몇 단계로 발전한다. 먼저, 듣는 것(to hear), 읽는 것(to read), 배우는 것(to taught), 공부하는 것(to study), 그리고 연구하는 것(to research)이다. 이것에 임하는 자를 각각 듣는 자(listener), 읽는 자(reader), 배우는 자(learner), 공부하는 자(student)와 연구자(researcher)로 불린다. 이 학습 과정을 무시하고 배웠다거나 가르치게 되면 자기 당착에 빠진다. 가르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가르치는 것이 모두 부정적이지 않고, 가르치면서 자신이 터득하는 예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자는 배우는 자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배우는 자세나 공부하는 자가 아니면서 가르치게 되면 삶에서 엇박자를 산출해 낸다. 더욱이 연구자는 스스로 공부하고, 무슨 주제든 던져주면 그것의 내용을 학문적, 역사적, 성경적, 논리적으로 발췌해 낸다.
이런 자세에 임할 때 성경의 진리를 해석하고, 분석할 수 있다. 분석되지 않으면 적용할 수 없다. 이 과정을 밟는다고 해서 실천하거나 실행하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 실천이나 실행은 진정한 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특이한 계시와 같은 은사에 절대 나오지 않는다. 먼저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의해, 말씀의 진리에 따른 순종과 열정에 따른 것이지만 실제는 선택된 자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말씀의 학습 과정을 밟으려는 이유는 자신의 선택 확신을 위한 것이다. 이 확신 없이 진리의 순종은 늘 위험과 유혹이 숨어 있다.
성경 해석은 전문가만 이뤄지지만 그 해석은 특이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적용은 개인적이다. 착각해선 안된다. 해석은 일치돼야 하고 적용은 형편에 따라 다르다. 그렇다고 제멋대로 형편에 적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해석의 중심이 그리스도인 것처럼 적용 역시 그리스도로 향한다. 그분을 향하지 않으면 그분에 관해 알지 못한다. 그분의 행동이나 행적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 관해 배우려고 할 때 그분에 관한 교훈에 큰 관심을 둔다. 그분을 닮으려 한다. 그분과 함께 하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 없이는 이러한 논리나 설명은 아무련 의미가 없다. 그 확신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심으실 때 가능하고 그 가능성은 회개로 드러나고 학습으로 진행한다.
하나님 측면과 인간 측면이란 추상적일 수 있다. 전자는 영원이고, 후자는 시간이다. 전자는 불가시적이고 비경험적이고, 후자는 가시적이고 경험적이다. 아무리 하나님 측면에 선다고 하더라도 어렵다. 그렇더라도 분명한 관점은 명시되는데 전자가 후자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언제는 후자를 지배하고, 후자는 파악하려면 전자의 반영에서 이뤄져야 한다. 전자는 후자에게 종석 되지만 인과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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