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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은 허구여서 흔히 ‘픽션’이라 한다. 그럼에도 사실 이상의 주목을 받는 것은 허구 속에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보다 더 진실한 이야기’가 소설이라고 한다. 진실이란 진리와 다르다. 진리란 불변의 이치를 말하지만 진실은 바람직한 가치를 말한다. 따라서 소설은 불변의 이치보다 바람직한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담고 있기 일쑤이다. 소설에서 추구하는 그러한 가치를 흔히 주제라고 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무엇보다 주제가 분명한 작품이다. 주인공 이명준이 중립국으로 향한 배를 타고 가는 처음 상황에서부터,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가치를 선명하게 나타낸다. 한국인이 남북을 버리고 굳이 제3의 중립국으로 간다는 것은 남한도 북한도 선택할 만한 체제가 아니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러한 체제의 한계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모순으로 드러내지 않고 ‘광장’과 ‘밀실’이란 말로 드러낸다. 남한은 밀실만 있고 광장이 없는 사회라면, 북한은 광장만 있고 밀실이 없는 사회여서 둘 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보기에, 남한은 개인의 자유는 있으나 공동체의 목표가 없는 까닭에, 개인의 밀실만 있고 공동체의 광장이 없는 사회이다. 따라서 부패한 정치와 방종의 자유가 넘쳐나는 곳이 남한이다. 달리 말하면, 공동체의 대의가 실종된 ‘타락한 밀실’이 남한이라는 것이다. 주인공 이명준이 남한에 대해 “개인은 있고 국민은 없습니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고 한 것처럼, 광장이 없는 남한에 깊은 환멸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명준은, 월북한 아버지 탓에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일을 계기로, 남한을 떠나 아버지가 있는 북한으로 밀항을 한다.
“때묻지 않은 광장”인 줄 알고 북한으로 간 주인공은 더 큰 절망에 빠진다. 아버지는 혁명가로서 열정을 잃고 평범한 관료가 되어 있었으며, 북한 사회는 당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도구화된 인민만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명준은 북한에 대해서 “일이면 일마다 저는 느꼈습니다. 제가 주인공이 아니고 ‘당’이 주인공이란 걸, ‘당’만 흥분하고 도취합니다. 우리는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고 비판한다. 북한은 개인의 사유에 따른 자유로운 의사 표현조차 허용되지 않고 당에서 일방적으로 표방하는 혁명 구호만 난무하는 사회이다. 북한은 일사불란한 광장만 있고 개인의 밀실이 없는 까닭에 주인공은 전체주의적 압박에 숨 막힐 듯한 고통을 받는다. 그러므로 기회만 주어지면 탈북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상황인식에 이른다.
2. 개인의 자유와 내면의 평화가 보장되는 사적인 공간이 밀실이라면, 사회적 소통과 공동체의 이념이 실현되는 공적인 공간이 광장이다. 작가는 인간 사회에서 광장과 밀실을 대등하게 중요시 여긴다. 따라서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이처럼 광장과 밀실이 함께 보장되어야 온전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작가는 이 둘의 유기적 관계를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라고 나타낸다. 따라서 어느 한 곳에 치우칠 수 없다. 광장이 밀실이고 밀실이 광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밀실과 광장이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만 바람직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단순한 분단 상황의 비극을 그린 것이 아니다. 남과 북 어느 쪽도 진정한 인간성을 담아내지 못했던 시대적 비극을, 중립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죽음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주인공은 남과 북의 유혹을 모두 뿌리치고 꿋꿋하게 중립국을 선택했지만, 항해 도중 목적지 인도에 이르지 않은 채 중로에서 바다에 투신하고 만다. 왜냐하면 남북한을 벗어나긴 했으나 대안이 되는 중립국이자, 광장과 밀실이 조화로운 이상사회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공의 투신은 이분법적 이데올로기 체제 어디에도 안주할 수 없는 ‘실존적 조난’의 비극을 나타낸다. 현실의 어느 체제도 주인공 이명준의 실존적 갈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작가의 비판적 메시지를 비극적 결말로 극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의 투신 상황은 드넓은 푸른 바다와, 끊임없이 따라오는 갈매기 두 마리에 제각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바다는 더 이상 남북의 경계와 장벽이 없는, 모든 가치가 하나로 수렴되어 역동적으로 어우러지는 ‘푸른 광장’이자 주인공이 추구하는 ‘진정한 광장’을 상징한다. 선상의 공중을 떠도는 두 마리의 갈매기를 두고, 주인공은 연인 은혜와 딸로 인식함으로써 이데올로기에 지친 인간이 결국 도달하는 곳은 '사랑'과 ‘혈연’ 곧 ‘가족애’라는 원초적 가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비극적 결말은, 공적으로 진정한 광장의 추구와 사적으로 간절한 사랑을 역설적으로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이 월북을 감행한 것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그 믿는 구석이란 곧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북한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월북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남한에서는 그 사실이 큰 위협이자 고통이지만, 북한에서는 따뜻한 가족 상봉일 수 있다. 물론 북한에서 만난 아버지는 상상 속의 아버지와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그렸던 아버지는 열렬한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장에 관한 동경은 곧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기도 한 것이다.
주인공은 광장의 주체로 우뚝 선 혁명가 아버지를 상상하며 부자간의 만남을 동경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히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 월북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까닭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이념과 체제를 넘어서는 육친의 정이다. 따라서 주인공의 월북 또한 혈연 가치로서 가족애를 추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는 사회적 이념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혈연의 정에 대한 간절함도 내재되어 있다고 하겠다.
3. 소설이 다른 문학 갈래에 견주어 흥미로운 것은 허구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서사로서 이야기는 으레 흥미롭게 구성되기 마련이다. 소설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이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대로 있는 사실보다 더 있을 법한 사건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으므로 매우 흥미진진하게 엮어나가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특히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광장>> 소설로서 흥미진진한 사건 전개보다 주인공 이명준의 이념적 사색에 관한 담론이 더 도드라져 있다. 소설은 철학적 담론의 장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생생한 삶을 구체적으로 엮어나가는 서사의 장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철학도인 주인공이 '밀실'과 '광장'의 대립된 체제를 두고 끊임없이 사색하고 독백하며 철학적 개념을 쏟아내는 데 치우쳐 있다.
그런 까닭에 논리적 사유의 담론이, 사건으로서 전개되어야 할 유기적 서사를 압도하고 있다. 밀실이나 광장의 한계를 주인공의 사색이나 독백으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실제 모습으로서 그럴듯한 생활세계를 실감나게 그려내는 것이 서사문학인 소설의 장점이다. 소설은 사변적 관념의 문학이 아니라 구체적 삶이 생동하는 실상의 문학이다. 실상 없는 관념의 세계는 철학적 담론에나 어울릴 뿐이다.
핍진한 실상은 남녀 관계에서만 나타나고 정작 광장과 밀실을 묘사하는 데에는 관념적 논리만 앞세워져 있다. 서사적 묘사보다 관념적 토로가 넘쳐나서 누구나 쉽게 주제를 포착할 수 있지만 소설을 읽는 ‘이야기의 재미’는 누리기 어렵다. 달리 말하면, 과도한 철학적 주제 의식 탓에 서사문학으로서 형상화는 상대적으로 불철저했다고 할 수 있다.
형상화의 한계는 주로 여성 등장인물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여성과 만나 연애 감정으로 진전되는 과정이 서사적 설득력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남한에서 벌어진, 주인공과 윤애의 관계를 보자. 윤애와 깊은 관계도 아닌데, 주인공은 어느 날 문득 인천 윤애의 집으로 찾아가서 한동안 윤애와 함께 지낸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윤애의 부모나 다른 가족들의 동의도 일체의 접촉도 없다. 윤애의 가족 상황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도 않거니와 명준의 체류에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 외간 남자가 처녀의 집에서 마음껏 머물며 동거한다는 것은 가족은 물론, 이웃들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가족적 동의나 사회적 시선을 일체 무시한 처리는 그럴듯함은 물론 서사적 설득력을 갖추지 못하기 마련이다.
더 문제는 그동안 자기를 전적으로 돌봐준 영미네 가족은 물론, 월북 직전까지 의탁해서 동거하다시피 하며 사랑을 나눈 윤애에게조차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훌쩍 월북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인간적으로 배은망덕한 짓이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귀띔을 해줘야 마땅하다. 남한을 밀실의 자유가 넘치는 방종의 사회로 비판하면서, 오히려 명준 자신은 윤애와 밀실의 도피를 과도하게 누린 당착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윤애의 집을 윤애 개인의 자취방인 양 둘만의 밀실로 다루고 만 까닭이다.
북한에서 만나 연인으로 사귄 여성 ‘은혜’의 경우도 그 과정이 석연치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북한은 주인공이 처음 겪는 낯선 공간인 데다가 감시망이 촘촘한 경직된 체제이다. 그런 사회에서 공적으로 활동하는 국립극장 발레단 소속의 은혜를 월북자가 어떻게 연인으로 사귈 수 있게 되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마치 자유연애가 만연한 사회처럼, 그냥 어느 날 두 사람은 깊이 사귄 연인처럼 자유롭게 만난다. 이러한 급격한 관계는 개연성이 부족한 성급함일 뿐 아니라 서사적 치밀함이 부족한 작가의 게으름이라 할 수 있다.
4. 서사적 개연성을 뛰어넘는 극적 비약은 여러 곳에서 두루 나타난다. 이를테면 월북의 길을 제공하는 밀항선 선주의 접근만 있을 뿐, 실제로 선박을 타고 밀항을 하여 월북을 하는 지난한 과정이나, 북한에 넘어가서 북한 당국자들에게 발견되어 수용되고 관계기관의 심의를 거쳐 월북자로 적응하는 과정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마치 선박과 같은 교통편만 있으면 자유롭게 왕래 가능한 것처럼 처리되었다. 월북 과정은 단순한 국경 이동과 다른 치열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이명준이 어떻게 6.25에 참전해서 어떤 전장에서 누구에 의해 포로가 되었는가 하는 경과가 전혀 없다. 어느 날 문득 포로가 되어 남과 북, 또는 중립국으로 가는 선택을 하는 상황만 극적으로 제시된다. 주인공의 월북 과정이나 포로가 되는 과정은 이 소설의 서사에서 매우 비중 높은 사건인데, 극적 비약의 형태로 생략되고 말았다. 그럴듯하게 서술하기 어려운 대목은 건너뛰기 한 셈이어서 작가로서 역량과 성실성을 의심스럽게 한다.
주인공은 북한에 광장은 있되 밀실이 없다고 불만이지만, 은혜와 연인으로 사귀는 데는 충분한 밀실이 보장되어 있는 당착을 보인다. 열린 광장의 꿈을 꾸고 월북한 북한에 진정한 광장은 없는 반면에 오히려 은혜를 만나 밀실에서 누릴 수 있는 깊은 사랑에 빠져든다. 일방적으로 요구되는 남한의 윤애와는 다른 호혜적 사랑이 북한의 은혜와 맺어진다. 문제는 그 사귐의 과정 또한 비약적이라는 점이다.
주인공과 은혜가 연인으로 만나서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사건의 전개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사회에서 국립 발레단으로 활동하는 은혜가 어떻게 주인공 이명준을 사적으로 만나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게 되었으며, 월북자로서 대중 강연을 하고 신문 기사 탓에 자아비판을 당하는 처지의 주인공이 어떻게 국립 가무단 소속의 은혜를 아무런 걸림돌 없이 연인으로 사귈 수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개인적인 ‘욕망’이 터부로 되어 있는” 북한에서는 남한사회처럼 밀실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의아스럽고 서사적 개연성도 낮다.
여성 인물에 대한 더 심각한 문제는 ‘광장’의 문제에 대하여 주인공과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한의 윤애와 북한의 은혜는 주인공의 감정적 도피 대상이거나 밀실의 안식처일 뿐 역사적 주체로서 주인공의 이념적 지향에 동조하거나 맞서지 않는다. 주인공은 윤애 또는 은혜와 체제나 이념에 관한 대화를 아예 나누지 않는다. 다만 남녀로서 애정 관계를 확인하는 수준의 만남과 대화에 머문다. 따라서 여성들은 주인공의 연인으로 대상화되어 한갓 소비되고 만다. 그러므로 작가는 광장과 밀실의 유기적 조화를 말하면서 남녀 사이의 대등한 상생 관계는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로서 성인지 감수성의 부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명준은 끊임없이 철학적 고뇌를 하며 정신적 성장을 꾀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반면에, 윤애와 은혜는 주로 명준에게 정서적 안정이나 사랑의 만족감을 제공하는 존재로 또는 도피처로 묘사되는 데 그친다. 더군다나 은혜는 주인공의 책상에서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사상가 로자 룩셈부르크 전을 들고 있었지 않았는가. 이처럼 윤애와 은혜가 명준의 고뇌에 들러리 서는 수준에 그쳤기에 <<광장>>은 여성이 소거된 ‘남성의 광장’에 머물렀다고 비평할 수도 있다.
만약 은혜가 명준과 함께 중립국을 외치거나, 혹은 남북의 모순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 주체적인 인물이었다면 이 소설의 전개는 더 입체적으로 풍성했을 것이다. 은혜가 북한에 맞서는 중도주의 혁명가이자 사상가로 거듭날 수 있도록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주인공 혼자서 중립국을 택한 것은 너무 단선적이다. 여럿이 함께 하는 광장을 꿈꾸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밀실에 갇혀 있는 당착에 빠진 셈이다.
5. 게다가 타고르호에 승선한 석방자들은 모두 중립국을 선택한 동지들인데, 긴 항해 동안 왜 중립국을 선택했는지, 거기서 어떻게 살아갈지 하는 문제를 놓고 대화를 하거나 논쟁을 하는 일이 전혀 없다. 주인공은 타고르호의 선장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며 소통의 특권을 누렸을 뿐 스스로 동지들과 만나 대화하며 소통하지 않은 것은 자가당착이다.
위로, 선박의 최고 권력인 선장과 만나 기득권을 누렸을 뿐, 아래로 배 밑바닥에서 고뇌하는 동지들과 만나 앞날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어떤 기회도 갖지 않았던 까닭이다. 결국 광장의 주체가 되어야 할 다수의 동지들을 소외시킨 채 독야청청한 셈이다. 그는 민중을 향해 광장을 열기보다, 자신의 관념 속에 거대한 성벽을 쌓아두고 스스로 대화의 광장을 거부하며 빗장을 걸어 버린 것이다.
다만 기항지에서 금지 규칙을 어기고 육지에 오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서로 다투었을 뿐이다. 동지들은 오랜 항해에 갑갑함을 느끼며 배에서 내려 잠시나마 항구에 오르려고 했는데, 주인공 이명준은 혼자서 금지 규칙을 내세워 그들을 제지하느라 싸움까지 벌인 것이다. 주인공처럼 금지 규정을 따르는 것은 당의 지시를 따르는 북한식 광장이나 다름없다. 금지를 알면서도 선장에게 상륙을 요구하는 동지들은 이러한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로서 진정한 광장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규칙을 순순히 따르는 주인공보다 오히려 함께 항해하는 동지들이 더 변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힘으로 그들의 뜻을 꺾어버린다. 주인공은 중립국으로 함께 가는 그들을 동지적 인물로 대등하게 주목하지 않고 한갓 규칙이나 어기는 반란자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규범의 틀 속에 갇힌 채 인간다운 삶의 자유를 속박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은 남북한의 폐쇄성을 비판하며 중립국을 택했지만, 정작 그가 타고르호에서 보여준 모습은 스스로 혐오했던 ‘소통이 단절된 사회’, ‘민중이 소외된 사회’를 주도하는 모순을 보인다. 그는 스스로 깨어 있는 지식인이라 여기지만, 정작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석방 포로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지극히 냉소적이고 차가울 따름이다. 결국 주인공은 자기와 함께 한 어떤 인물과도 제대로 소통의 광장을 만들지 않은 사실이 문제적 한계이다.
연인으로 사귀던 여성 인물을 한갓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한 것처럼, 함께 승선한 동지들조차 주변적 들러리로 소비하고 만 것이다. 바람직한 광장은 진실한 의사소통 위에서 구성된다. 서로 사귀던 연인이든, 중립국으로 함께 가는 동지이든 모두 열린 소통이 가능한 대상들이다. 그럼에도 터놓고 말을 건네지도 않고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입으로는 ‘광장’을 말하지만 발은 ‘밀실’에 담그고 있는 당대 지식인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셈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꿈꾼 ‘광장’은 기껏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광장’이며, 소수 지식인 엘리트만이 참여하는 ‘귀족적 광장’을 자인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열린 광장을 추구했지만 실제로는 타자와 함께 하는 공동체의 광장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자력적으로 광장을 일구어낼 능력이 없는 인물이라 할 수도 있다. 자기의 이상을 관념적으로 추구할 뿐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의 한계를 표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주인공 스스로 닫힌 광장 속에 자기를 가둠으로써 사실상 이 작품은 비극적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으며 반쪽짜리 광장에 머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6. 그럼에도 광장은 우리 소설사에서 과도한 평가를 받으며 공전의 스테디셀러를 이루고 있다. 소설로서 읽는 재미도 별로 없고 주인공의 가치관도 편벽되며, 서사적 개연성의 한계도 있는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읽히고 있는 독서 현상은 예사롭지 않은 까닭에 새삼스레 그 이유를 따져볼 만한 일이다.
하나는 독자의 높은 독서 수준이다. 독자들이 소설을 한갓 재미로만 읽지 않고 작품의 주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광장>>은 충분히 그럴 만한 작품이다. 독자들은 결코 흥미 위주로 문학작품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흥미보다 작품이 담고 있는 분단체제에 대한 비판의식과 철학적 담론의 수준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까닭이라 하겠다.
둘은 작품의 독창적 주제가 주는 역사적 충격성이다.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는 4.19혁명 직후로서 남북의 이념 갈등이 팽배해 있던 시기이자, 일시적으로 자유의 창이 열리고 해방의 기운으로 가슴이 설레던 시기이다. 광장은 이 시기를 틈타서 광장과 밀실의 대립구조를 통해 남북 체제 또는 좌우 이념의 갈등을 뛰어넘어 제3의 길을 독창적으로 제시한 작품이다. 작품이 남북한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선전도구 노릇을 하지 않고, 문학사상 최초로 양쪽 체제 모두를 타자화여 비판함으로써 역사적 충격을 던져주는 감동이 독서계를 휘어잡았다고 할 수 있다.
셋은 양자 대립을 뛰어넘는 중도의 길이 보편적 과제라는 사실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좌우, 여야, 선악, 상하, 강약, 남녀 등 이분법적 대립구조 안에서 어느 한쪽에 속해 있거나,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기 일쑤이다. 지금도 우리는 상투적인 양자택일의 체제에 속박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립은 사실상 강자의 편을 드는 것이자, 약자의 피해를 방관하는 비겁한 회피로 비판받기 일쑤이다. 따라서 양자 선택의 속박에서 벗어나거나 또는 양자를 함께 아우르는 바람직한 ‘중도’의 길이 새로운 대안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작품은 여전히 매우 신선한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분단 체제는 점점 더 고착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상징하는 ‘광장’과 ‘밀실’의 상생적 조화는 계속해서 풀어나가야 할 인류사회의 보편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장’과 ‘밀실’의 문제는 여전히 구체적 실감으로 끊임없이 재인식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열린 결말이자, 여백의 미학이 주는 여운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므로 <<광장>>은 서사문학으로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사의 가장 상처 깊은 분단의 금기를 ‘밀실’과 ‘광장’이라는 명징한 철학적 언어로 통쾌하게 돌파함으로써 독자들의 지적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 준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