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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창녕문학 신인상 수필부문 당선작 차수경 며느리밥풀꽃
시댁 가는 길에 꽃이 피었다 오뉴월 삼복더위 먹고 며느리밥풀꽃이 피는 그 길로 나는 며느리가 되어 타박타박 걸어왔다 나 여기까지 와서 보아도 얼마만큼 더 갈 수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꽃은 흰 줄무늬 수놓으며 피었다 며느리 얼굴 주름살은 그렇게 피어 있었다.
오른손이 왼쪽 손목을 주물러 주며, ‘아프지 마!’ 라고 한다. “걸레를 짤 때도 너는 힘주지 말고 잡고만 있어. 내가 힘을 더 줄게” 오른손의 언니 같은 마음이 고맙긴 하지만 그러다가 오른쪽 손목도 언제 탈이 날 지 모르는 세월이, 내게도 와 버렸다. 왼쪽 손목에 파스를 바르다가 손목 보호대를 하고 있어야 하는 횟수가 늘면서 잘 낫지도 않아, 이제야 측은지심이 생겨 돌아보게 된다. 처음 왼쪽 손목이 아팠을 때는 명절이었던 지라, ‘아니, 왜 이 바쁜 때 아픈 거야’하고 아픔을 귀찮아했다. 그리고 다행히 소염제를 문질러 바르고 나니 다음 날 괜찮아져서 아팠던 기억도 쉽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 곳에 다시 통증이 왔을 땐 ‘아 또 왜 아픈 거야!’ 하고 째려 봤으니, 왼쪽 손목은 아프다는 신호 보내는 것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그 때마다 소염제 몇 번 바르는 것으로 잘 나아서 무관심이 오만을 불러 온 모양이다. 설거지할 때 그릇이 왼손에서 빠져나가고 세수할 힘조차 내기 어렵고 물건에 손이 닿기만 해도 바늘로 찌르는 통증에 놀라 눈물이 핑 돌 때도 ‘제발 아프지 마!’ 하고 부탁 반 협박 반으로 치료를 하고 나면, 손목을 좀 아끼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도, 진통의 기억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은 왼쪽 손목이 아프다고 화를 내고 있다. 일상생활조차 힘들어 하면서 왼손이 없는 것 같은 고통까지 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금세 괜찮아질 거라는 그 오만함이 사라지게 되었고, 지금은 미미한 통증이 오기도 전에 더 조심하지 않으면, 내일쯤엔 손목에 통증이 시작되겠구나 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여기까지 오고 보니 가족과 이웃에게 쏟아야 하는 사랑이 중요하다면 자신에게 향하는 온정이 토대를 이루어야 그 사랑이 더 견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하고 맹세했던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어렸을 적 기억에, 엄마는 할머니 말씀을 지나칠 정도로 존중해 주셨다. 살림하는 데 있어서도 평상시 엄마가 하시는 방식대로 하면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할 수 있는데도 가까이 큰댁에 사시던 할머니께서 오셔서 이래라 저래라 하시면 그대로 따라 하실 정도였다. 하루는 소죽솥에 불을 지피려던 차에 할머니께서 오셨다. 엄마가 성냥을 찾아서 옆에 있던 신문지를 불쏘시개로 쓰려고 하시자, 할머니께서 “갈비(마른 솔잎)에 불을 피워야 잘 붙지” 하시니까 “예, 어머니”하며 바로 불쏘시개를 바꿔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셨다. 할머니께서는 일일이 저렇게 간섭을 하셔야 하나, 그리고 엄마는 저토록 할머니 말씀을 다 따라야 하나 하는 의문을 가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지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던 내가, 그건 엄마의 지혜라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그 때 엄마도 그러셨다. 이렇든 저렇든 불을 피우면 되지만 할머니의 오랜 경험에, 비 오는 날은 갈비보다 수분을 더 머금은 종이가 눅눅해서 불이 잘 붙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 날씨에 상관없이 불이 잘 붙는 갈비가 낫다는 걸 가르쳐 주시는 건데, 할머니 말씀을 따라 주면 할머니 기분도 좋은 거라고. 그래도 하나하나 할머니의 방식만 고집하시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시어머니와 부딪치지 않으려는 엄마의 현명함이 존경스럽다. 나도 결혼을 해서 처음엔 모든 것을 배워야 하는 처지라 시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잘 따르다가, 차츰 내 주장이 생겨 말씀을 드리고 싶을 땐 감히 반기를 드는 것 같아 죄송한 때가 있다. 음식을 만들 때 맛을 내기 위해 항상 조미료를 넣으라고 강조하시는 어머니, 몸에도 안 좋다는데 넣지 말자는 나, 그래도 조금 넣어야 쓴 맛도 덜하고 맛이 난다는 어머니 말씀에 “예, 알겠습니다.”하고 결국 대답을 하고 만다. 부엌 한 쪽에서 보고 계실 땐 넣는 척 조미료 통만 툭툭 치고, 식사하시기 전, 조미료 넣었는지 확인 차 물어 오시면 어머니께 죄송하지만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한 젓가락 입에 넣으시고는 “그래, 그래야 맛이 있지.”하시는 말씀이 떨어진 뒤에야 속으로 긴 한숨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조미료를 넣어야 한다는 어머니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는데도 조미료를 넣지 말자는 내 고집을 피웠더라면, 조미료를 넣었으되 어머니껜 모래알 씹는 맛이었을 것이고 조미료를 넣지 않았어도 내겐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를 괴롭혔을 것이다. 나 여기까지 오고 보니 누구든 이해하려 애쓰면 나와 융화될 수 없는 고집일 지라도 큰 마찰 없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고, 그 고집에 대항하지 않는 자신의 그릇이 좀 더 넓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끔 아들이 찡그리며 짜증낼 때 동영상을 찍어 보여주겠다며 휴대폰을 들고 따라다니면 뉴스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연출된다. 얼굴을 돌리며 숨긴다. 그리고 웃어버린다. 자신이 화났을 때 그대로 거울 앞에 가서 보면 정말 미운 얼굴이라는 걸 알게 될 테니 꼭 한번 해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들이 당장 거울 앞에 서서 일부러 그 표정을 지어보고는 ‘헉!’ 하고 다시 웃는다. 그 이후로 표정이 일그러질 때마다 ‘인상 펴고’ 이 한 마디면 미간이 다시 넓어지곤 한다. 내 아이가 밖에서도 사랑받기 원하면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그 미운 표정에 대해 타성적으로만 여긴 것이다. 연인 사이에서도 ‘당신은 웃는 모습이 참 예뻐!’ 하고 말하기는 쉽지만 화내고 있을 때의 험악한 모습은 마음속으로만 느낄 뿐 말해 주는 이 드물 것이다. 하물며 부부 사이에서의 인상 쓴 모습에 대해선 무감각 그 자체일 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나도 몹시 흥분된 상태로 남편과 통화를 하면서 거울 앞으로 다가간 적이 있다. 예상했던 모습보다 더 일그러져서 재빨리 미간을 풀고 일부러 웃는 표정까지 지어 보았지만,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인지 한동안 화난 표정이 남아 있었다. 화를 많이 내면 나이 들면서 탄력을 잃는 얼굴 근육이 이대로 굳어버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두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나 여기까지 오고 보니 살면서 거울을 잘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흰머리, 주름은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얼굴 근육이 굳어져서 만들어진 표정은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좋지 못한 편견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을. 흰머리 염색으로 가리고, 주름 펴기 위해 기능성 화장품 바를 때 거울 앞에 서더라도 인상 쓴 표정이 굳고 있는 데는 없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
친정 가는 길에 꽃이 피었다. 오뉴월 삼복더위에 소나기 한 바탕 맞고 며느리밥풀꽃이 피는 그 길로 나는 며느리가 되어 자박자박 걸어왔다 여기까지 와서 보아도 내가 얼마만큼 더 갈 수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덧없음 속에서 꽃은 주름살 수놓으며 피었다 며느리가 된 나는 그런 얼굴로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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