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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01화영호’의 화재와 조난구조
1972년 2월 1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지금 우리가 머무르는 곳은 일본 북해도 북동쪽 Kushiro(釧路)항이다. 지난 1월 26일 화재로 조난(遭難) 당한 301화영호 선원을 여기서 인계하기 위해서 예까지 온 것이다. 여기서 25명의 선원과 고(故) 김x수 301호 선장의 유해를 인계하고 중간 보급을 받아 다시 조업장으로 갈 예정이다. 결국 우리들만 막대한 손해를 보는 셈인가 싶다. 귀중한 생명을 구하긴 했지만―. 그 후엔 양 회사간에 충분한 합의가 있어야 했고 절차가 지시됐어야 했었는데-. 30일 오전에 입항, 31일 301호 선원과 유해를 인계했다. 오늘쯤 다시 출항할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 하루가 아깝고 지루하다. 본사 윤 사장과 이x우 사장도 다녀갔다. 그간의 사정을 적어보자.」
1월 21일 밤늦게 첫 투망을 시작으로 연일 조업에 열중했었다. 위치는 당시 소련 Kamchatka(캄차카) 반도의 동쪽 연안, 수심이 200m 안팎으로 저질(底質)이 골라 저인망 어선으로선 좋은 어장이었고 여기서 어획된 명태가 전국의 식탁을 장식했었다.
그러나 23일 아침까지 4차 양망을 했을 때 다시 저기압 피항을 했었다. 참 재수가 없었다. 이제 피항이라면 질색이었다. 마음부터 짜증이 앞섰지만 자연이 하는 일. 눈앞에, 코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인 것을 -.
24일부터 다시 재개(再開)한 조업 때는 예상외로 성적이 좋았다. 1일 20톤 가까운 어획을 올렸다. 모두들 기대와 환희에 찬 얼굴들과 몸놀림이었다. 전번 항해와 같은 대어(大漁)의 Hit를 또 칠거라고 좋아들했었다. 예정보다 빨리 정월 대보름 전에 입항하리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시간들이었다. 24시간 눈을 붙이지 않아도 거뜬히 이겨 낼 수 있었다. 지치지도 않았다. 냉동시간의 제한으로 어획물의 처리 문제가 오히려 골치를 앓을 지경이였다.
1월 26일 날은 날씨마져 더없이 좋았다. 이 위도(緯度)의 북태평양에도 이런 천기(天氣)가 있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잔잔한 수평선이었다. 일본 작업선 30여 척 속에 한국선박은 101행복호와 301화영호 그리고 우리 51동방호의 단 3척뿐이었지만 모두 좋은 성적들을 얻고 있었다.
17시 50분 여덟 번째의 투망을 끝내고 20분도 되지 않았는데 양망(揚網)명령이 떨어졌다. 저녁 식사시간이라 Chief Engineer(기관장)와 아마 수심이 고르지 못한가보다 하는 통상적인 얘기를 나누면서 얼른 식사를 끝내고 조타실로 올라가니, 어! 사뭇 긴장된 분위기로 부산하다. 301화영호가 화재로 조난 중이라 구조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S.S.B(초단파무선기)를 통해 울려 나오고 있었다. 벌써 바깥은 어둠이 깔리고 멀리 또는 가까이서 작업 중인 일본선들의 불빛이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긴급 양망이 시작되었고, 방향탐지기(Direction Finder)로 조난예상위치를 본선에서 340도 방향임을 예상했다. 당시 본선의 위치는 북위 49도 09.2 동경 155도 34분이었으며 조난예상위치는 북위49도 20분에 동경 155도 25분이었다.
19:10시 조난예상지점 쪽으로 항해 중 계속 조난선을 탐색했으며 Voice로 연락을 취하고 101행복호와 상호 위치를 육안으로 확인했다. 본선의 약 4마일 떨어져 뒤따르고 있었다.
19:20시 드디어 301화영호에 계류하고 구조작업 중이던 일본어선 No.1 료호마루를 발견했다. 불과 0.8마일 앞에 있었다. 감속하여 서서히 접근했다.
19:30시 301화영호의 우현(右舷)으로 접근하면서 계류색 하나를 연결하기 직전 일본선 료오후마루는 떨어져 나갔다. 301호의 선교(Bridge) 아래 선원실 창(窓)에서는 여전히 검은 연기가 품어 나오고 있었다. 선원들이 반가워하는 표정들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선미(船尾)에서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든 사람은 바로 신x우씨였다. 실습선에서 조리장을 한 분이다. 목들이 쉴대로 쉬었고 지쳐 있었다.
갑판 위엔 Life Jacket(구명조끼)와 Ling(구명환), Life Raft(구명정) 그밖에 필요한 모든 퇴선(退船) 준비가 되어 있었다.
20:00시경 양선(兩船)사이에 Air fender(대형 방충구) 3개를 넣고 계류하는데 성공했다. 바다 위에서 두 선박이 계류할 수 있었을 만큼 바람과 파도가 없었던 것이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101행복호가 접근하여 301호의 좌현에서 선회하고 있다가 본선이 구조에 임하자 자신의 임무로 돌아갔다. 301화영호 선장과 통신장이 본선으로 건너와 본격적인 협의가 시작되었다. 미리 준비했던 펌프를 건네주고 소방설비들을 준비해 주었으나 당장 진화작업이 시작되지는 못했다. 301화영호 선원들이 너무 지친 때문이었다. 아침 식사 후 이 시간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뿐 아니라 추위와 진화작업에 지쳤고 심한 유독 Gas에 목들이 쉬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우리 배에서 급히 만든 식사가 제공되었다.
21:20시경 밀폐시킨 선원침실 각 문을 열고 본선에서 보낸 G.S Pump(해수펌프)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심한 유독연기가 내품었지만 필사적인 선원들이 진화작업은 2시간만에 완전히 잡혔다. 일본에서 구입한 화학섬유제의 새 그물(漁網)에 불이 붙었기에 그토록 독한 가스가 발생한 것이었다.
경위를 들으니, 화재는 오전 9시45분경 3차 투망 직전 어떤 원인인지는 모르지만 갑판부 선원침실에서 발생한 것이라 했다. 모두 조업위치에서 선실로 뛰어왔을 때는 이미 짙은 연기로 접근이 어려웠으며, 그 속에서도 겨우 불난 곳을 찾고 소화호수를 연결하자 곧 발전기가 꺼지고 Main Eng.(주기관)이 죽었단다. 이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고 치명적인 타격이었다고 했다. 마침 신x우씨가 선내화재 경험이 있어 그의 의견에 따라 모든 문은 밀폐시키고 밖으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단다.
통신이 두절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로부터 구조요청을 위한 온갖 수단방법이 동원되었던 모양이다. 선미 Gallows(두 개의 대형기둥에 지름대를 얹은 것) 위에서 타이어 팬다(방충구)를 9개나 불살라 발연신호를 내었고, 신호탄도 쏘았단다. 바로 인근에서 조업중이던 일본선박도 그것이 조난신호인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한낮인데다 대부분의 선박들이 중고선(中古船)이라 힘겨운 예망(曳網)으로 연돌에선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낮에 수평선 끝에서 연기를 내뿜는 작업선을 나도 보았던 생각이 든다.
15:40시경 근접하여 조업 중이던 일본선 No.1 료호마루가 화재조난 중임을 인지(認知)하고, 접근하여 계류하고 진화를 시도했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한 채 겨우 그 배로 건너간 통신장이 27메가사이클 초단파 무선기를 이용하여 울먹이는 소리로 101행복호와 본선에 육성으로 구조요청을 한 것이다.
27일 새벽 6시경 서(西)캄자카 해상에 상주하면서 일본 어로작업선들의 구조임무를 띈 해상보안청 소속 PL107 宗谷丸(소오야마루)가 현장에 도착. 본선과 교신을 시작했다. 아마도 일본선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급히 온 모양이었다. 본선 기관장이 일본어에 능통해 대화가 가능했다.
2700톤급의 흰색선박이었다. 선미에는 헬리콥터가 앉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조난선의 예인(曳引)과 구조를 요청했으나 인명(人命) 이외는 구조하지 못한다고 했다. 자기들의 본연의 임무를 버릴 수 없다고 했다. 다른 구조방법을 묻자 일본수산청과 한국대사관에 연락해 주겠다고 답한다. 기상(氣像)이 급변하여 차츰 악화되는 데 피항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도 주선하겠다고 했으나 어디까지나 일본의 예로 봐서는 소련영해 안으로 피항할 수 있지만 한국선박은 수교(修交)관계가 없어 가능여부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피항지마져 선정해 주었지만 결국 외교적으로 국가간의 합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대답이다. 답답할 뿐이다. 누구를 원망하고 나무랄 수도 없다. 차츰 기상이 악화현상을 보인다. 만약 소련 영해로 피항했을 경우에 조난선박과 인명은 물론 예인했던 본선까지도 보장할 수 없을 거라고 덧붙여 알려준다. 빈국소인(貧國小人)임을 이토록 뼈저리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할 수 없다. 더 기상이 악화되기 전에 우리가 직접 예인해 보기로 합의를 했다. 그러면서 301화영호 기관가동여부와 독항(獨航) 여부를 판단하여 그 다음 대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301호 선장이 자선(自船)으로 돌아가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지휘하기로 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예기치 못했던 불상사가 터졌다. 08:50시 본선에서 자선으로 옮겨가려던 301화영호 김 선장이 자선의 난간을 잡으려다 실패, 양선사이 해중(海中)에 추락했던 것이다. 너무나 순식간으로 일어난 의외의 일이었다. 즉시 양선의 계류색을 도끼 등으로끊고 구조에 임했다. 일본 순시선 PL107호에도 구조를 요청했다. 뜰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빠진지 불과 몇 분도 안됐는데 벌써 움직이질 못했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본선의 강(姜) 선장도 울었다. 배를 다시 돌렸으나 이미 찾을 길이 어려웠다. 출렁이는 바다위의 인체(人體) 하나는 마당의 나뭇잎보다 작았다. 이미 바람은 강해져 파도가 커지기 시작했다. 301화영호는 그냥 표류시킨 채-.
전 선원이 김 선장을 찾기에 혈안이 됐다. 09:30시경 겨우 발견, 인양했으나 이미 운명(殞命)한 뒤였다. 일본 순시선에 의사의 승선여부와 구명보트를 문의했으나 의사도 없고 구명보트도 내릴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련 영해 12마일 이내에는 접근을 불허하니 들어가지 말라고까지 알려주었다.
08:00 본선 위치는 북위49도 24.1 동경 155도 14.0으로 확인. 08:40시에는 북위 49도25.0분 동경 155도12.5도로 확인했다. 301화영호는 강한 동풍을 타고 서서히 소련 영해쪽으로 표류하고 있었다. 계속 확성기를 통해 301호 기관가동여부를 문의하면서 선회했다. 정 여의치 못하면 선원들만이라고 구조하자는 의견들이었다. 301화영호에는 이미 선장이 없으니 1등항해사가 대행을 하여 처리하도록 요청했다. 상대선도 자선도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11:30 현재의 기상상태를 넘기면 선원구조조차 어려워질 것 같아 다시 확인했으나 기관가동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어떤 사유로 주기관(主機關)을 살리지 못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301호 선원은 전원 구명조끼를 입고 퇴선준비가 되어 있었다. 본선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면 당장 바다로 뛰어내릴 태세다. 우리측 선교(船橋)에서도 의논이 분분했다. 어떻게 구조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의 문제였다. 단연 김x술 기관장의 주장이 유력했다. 그는 제2차 대전 중 일본의 군수물자를 동남아로 운반하는 화물선에 승선 중 동지나(東支那)해상에서 두 번의 미군(美軍) 기뢰(機雷)공격에도 살아남은 기적의 사나이다. 일본 순시선과의 교신도 그의 일본어 능력이 아니 었으면 불가능했다.
“사람을 바닷물에 띄워 놓고 건져 올린다는 것은 위험천만이여. 더구나 이 차가운 바닷물에서-. 배가 부서지거나 말거나 구조할라면 본선이 화영호를 밀어붙여. 그동안 넘어 올 넘은 오고 그렇지 못하면 희생되는 수 뿐이야, 안그러면 모두 다 죽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11:50시 본선 자체의 위험을 무릎서고 본선 우현 선미를 301호 좌현 중앙에 접근하여 밀착시키고 후진으로 밀어붙이는 동안 전원 25명을 본선으로 이선(離船)시키는데 극적으로 성공했다. 정말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도 기억은 없다. 1분? 5분? 10분? 현장에서 지켜본 내 추측은 불과 1분이 채 안 걸렸을 거라는 생각이다.
위치는 북위 49도 26.8 동경155도 06.8. 이미 소련영해(嶺海) 10마일 가까이 접근되고 있었다. 즉시 영해를 벗어나야 했다.
12:00시 현재 심한 눈바람이 불어 이미 시계(視界)가 흐려지기 시작하였고 전속 전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칠어 있었으나 부근에 있는 일본 순시선 소야마루에게 301호의 선체감시를 부탁했으나 그것도 책임질 수 없으며 자기들은 곧 자신들 본연(本然)의 임무에 돌아가야 한다는 답변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준 순시선에게 우리 선 · 기관장이 고맙다는 인사는 잊지 않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