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정충신
정충신은 선조 9년(1576년 ~ 인조 14년(1636년) 61세 나이로 서거한 조선시대의 명장이다.
미천한 집에서 태어나 무장으로 이름을 떨쳐 죽은지 49년이 지난 숙종 11년 (1685년)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다.
1952년 임진왜란 당시 광주목사 권율휘하에서 종군 17세 나이로 귀주로 파천한 임금님께 장계(전황보고서)를 전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어 자청했던 것이다.
1624년 李适(이괄)의 난 평정은 정충신의 가장 큰 공으로 기록이다.
이 공으로 진무공신 금남군에 봉해졌다
그는 청렴한 생활로 이름이 높았고 천문. 지리, 의술, 복서등 다방면에 정통해 민간에 많을 전설을 남겼다.
정충무공의 위패와 유적을 모신곳은 진충사로 1970년에 건립했다.
이괄의 난이란 평안병사겸 부원수인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정복 경북궁에 주둔하고 인조는 황급히 공주로 파천했다.
이때 정충신 이 서울근교 안산에 진출 두갈래로 나누어 진격했다.
바람을 이용하여 고추가루와 재를 날려 반란군을 대파했다
2000의 병력으로 1만의 반군을 격파한 것이다.
정충신(鄭忠信, 1576년 ~ 1636년 5월 4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晚雲), 본관은 금성(錦城)이며,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종군했고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했다.
이괄의 난 때 황주,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겼고 정묘호란 때 부원수가 되고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하여 유배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 봉호는 금남(錦南)이며, 고려의 명장 정지(鄭地)의 후손이다.
1576년 전라도 광주에서 부친 정륜과 모친 영천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에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민첩하고 영리하여 권율의 신임을 받았으며 적지를 정찰하고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권율의 장계를 가지고 의주에 갔다가 이항복의 주선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면서 무관의 길을 걷게되었다.
정충신은 이항복의 집에 머물면서 학업을 익혔고 그해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2년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여진족의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608년 조산보만호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고 1618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스승인 이항복이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자 동행했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이 출병하였으나 후금에 대패하는 일이 일어나자 여진족의 정황에 밝았던 그가 다시 등용되었다.
1621년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를 정비하였고, 후금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고 조선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였다.
이후 안주목사 겸 방어사가 되었을 때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나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듬해 절친했던 이괄 장군이 난이 일으키자, 한때 의심을 받기도 하였지만 전부대장으로 나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다.
황주와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겨서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어 금남군에 봉해지고,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다.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 요양하였다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1633년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하여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하여 당진에 유배되고, 후에 장연에 이배된 뒤 풀려났다.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3월 그가 우려한 것과 같이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주전론이 득세하여 청과 단교하는 사신을 보냈고 후일 병자호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636년 병이 심해지자 왕이 의관에게 명하여 치료에 진력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1636년 5월 사망하였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해박하고,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광주의 경렬사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만운집》, 저서에 스승 이항복의 유배일지를 기록한《백사북천일록》, 《금남집》 등이 있다.
그는 무술에 뛰어났으며 천문·지리·의학·복서에도 밝았다.
광주광역시의 옛 전남도청 앞에서 유동 4거리 가는 길인 금남로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시호는 이순신·김시민처럼 충무(忠武)이다.
진충사가 이곳 서산땅(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676번지)에 건립된 사유는 조선인조 2년(1624)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시 안주병사겸 방어사로 있던 정충신 장군이전부대장 으로서 토벌군을 이끌고 서울 길마재에서 반군을 전멸시킨 공으로 조정에서 진무 공신 1등을내리고 금남군에 봉하였으며, 당시 서산의 마힐산-(지금의 지곡면 대요리의 국사봉) 일대의 몰수된이괄의 토지(당시 약45만평)를 사패지지(賜牌之地)로 하사하였다 합니다.
광주광역시 북구 청옥동에는 부친 금천군 정윤의 묘가 있고, 이곳 지곡면 대요리에는 정충신이 잠들어 있다.
비록 이곳 서산땅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어도 그의 아들들에게 유택을 이곳으로 친히 잡아 장사지내주도록 당부했다고 하니, 그에게 있어 이곳은 태어난 곳보다, 부모가 묻힌 그곳보다 더 귀한 끌림이 있는 곳임에 분명하다.
서슬퍼런 정치에 휘말려 당진군 정미면 신시리에서 귀향살이를 하고, 인근의 망일산에 올라 깊은 시름을 달랬을 그. 평생을 온몸이 부서져라 나라에 바쳐가며 그가 지켜가고자 했던 충심이 넋이되어 이곳 대요리 산기슭에 그대로 묻혀 있는 듯 하다.
정충신의 아버지 정윤은 광주향청의 좌수였는데, 사랑채에서 책을 읽던 어느날 밤 무등산이 갈라지며 청룡이 튀어나와 품으로 달려드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괴이하게 여기며 다시 잠에 들자, 또 산이 갈라지며 백호가 달려나와 품에 안기는 꿈을 꾸게 되었고 놀라 잠에서 깬 그가 안방으로 들어갔더니, 영천이씨 부인 역시 같은 꿈을 꾸고 놀라 깨어 있었던 것.
부부가 같이 꾼 꿈이야말로 비범한 인물이 탄생할 것임을 예고하는 태몽이라 여기며 잠자리를 함께 했고, 이날의 동침 이후로 부인은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부인의 배가 부를 수록 온몸이 붓고 두창이 생겨 징그럽도록 흉하게 되었는데, 그당시 가장 무서운 전염병인지라 가족과 별거하여 무등산 계곡 천변에 움막을 짓고 혼자 기거하도록 하여 선조8년 섣달 스무 아흐레날 자시에 광주 향교동에서 정충신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 아기가 태어난 후 무등산 계곡에 흐르던 물이 사흘이나 마르고, 무등산의 초목이 사흘간 말라 죽어서 세상사람들은 이 아기가 무등산의 정기를 빼앗아 태어났다고 하였다
충신(忠信)이라는 이름은 그의 9대 할아버지인 경렬공 지(地)장군과 같은 훌륭한 충신(忠臣)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이라 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의 남다른 태몽과 태아기를 거쳐 태어난 이후에도 전설속에나 나올법한 배경이야기를 갖고 나온 정충신.
그는 어렸을 적부터 재주가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에 관한 많은 설화가 전해진다.
‘계서야담’에는 출생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청구야담’과 ‘해동야서’에는 이괄의 난 때의 활약상이, ‘동야휘집’에는 모든 설화가연대순으로 편집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중 어린시절 정충신의 용기와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왜적들이 평양까지 점령하자 선조는 중신들을 거느리고 의주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순찰사로 승격한 권율장군이 왜병과 싸워 얻은 많은 전과, 작전계획 등을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의주의 행재소까지 장계를 전달할 사람을 모집하였으나 이에 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이때 고작 17세에 불과했던 어린 정충신이 자원하고 나서 온 몸에 옻칠을 하여 진물이 흐르는 전염병 환자로 변장하고, 장계를 갈갈이 찢어 노끈으로 만든 다음 망태기를 엮어 짊어진 후에 홀로 왜군의 점령지를 뚫고 행재소에 장계를 성공적으로 전달했다는 것.
이러한 정충신의 충성심과 지혜에 감탄한 병조판서 이항복은 직접 그에게 사서를 가르치며 그를 아들처럼 여기며 아끼고 사랑하였다고 전해진다.
정충신은 1592년 12월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관으로 군문에 투신하였으며, 명나라 구원군을 도와서 평양탈환 작전을 펼쳐서울 수복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정충신이 세운 여러 업과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이괄의 난을 평정한 것인데, 1624년의 인조실록을 보면 정충신의 공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상이 아뢰기를, 안현의 전공은 누가 첫째인가?하니 최현이 대답하기를, “정충신, 남이홍이 주모하였고, 유효걸, 이희건이 역전하였으며, 변흡은 뒤에서 베어 물리쳤습니다.”>
당시 많은 공신들이 반군들의 몰수된 전답과 노비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으나, 정충신만이 오직 오불관언하자 이를 본 옥성부원군 장만이 임금에게 “이번 공신가운데 오직 정충신만이 그 공적이 크면서도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사옵니다.”고 상소를 올렸고, 이에 인조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반군의 총수였던 이괄의 소유지 마힐산 국사봉 일대의 토지 약 45만평을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정충신장군은 생존시에 아들 빙과 민을 대동하고 유택을 친히 잡아놓고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반드시 이 자리에 장사지내라’고 당부하였고, 이로 인해 오늘날 지곡면 대요리에 진충사와 그 인근에 정충신 장군의 묘가 세워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